인간의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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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멸기록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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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11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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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4 0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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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계위원회 (6)

DUMMY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지금은 바쁘니까, 나중에 차근차근 알아들을 수 있게 얘기하는 게 어때?”

“아아, 그러셔?”


여자의 검정 티셔츠 반소매 아래로는 금속 팔이 드러나 있다. 연결 부위가 전부 금속인 걸로 보아, 검정 장갑을 낀 손도 마찬가지로 금속일 것이다. 킴은 카페에서 부딪힌 때의 단단함을 떠올리며, 어깨 혹은 그보다 너른 면적이 금속 임플란트일 거라고 유추한다.


“내 일은, 급한 게 아니다?”


기스가 많아 광택을 잃은 금속 팔. 킴의 관찰하는 시선이 팔뚝에서 멈춘다. 팔꿈치 바로 아래쪽에 모델명인 것 같은 음각 글자가 있다. 거리가 좀 더 가까워야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지금 당장 내 일부터 해결하고 싶게 만들어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난.”

“이거 놓고 그만 비켜.”


멱살이 잡힌 진은 귀찮다는 기색으로 상대의 손을 거머쥔다. 떼어내고 싶은 모양이지만, 기계손의 거센 악력은 밀리지 않는다. 두 사람이 서로 으르렁대느라 방치된 킴은 이대로 슬쩍 혼자 인사부로 갈까 싶다.


“이런다고 바뀌는 건 없어.”

“······있을걸?”


거리와 각도가 잘 맞으면, 지나치면서 여자의 임플란트 모델명을 확인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으로 나아가려던 킴의 시야가 흔들린다.


“저는 먼저 가 있겠습···어라?”


킴의 동체 시력으로는 따라잡을 수 없는 움직임. 1초는 걸렸을까. 어느새 킴 뒤쪽으로 이동한 여자는 그 단단한 금속 팔뚝으로 킴의 목을 감싸고 있다. 여자의 뒷걸음질에 진과의 거리가 벌어진다. 킴은 뒤로 끌려가며 균형 잃은 발을 허우적대다가, 겨우 바닥을 디딘다.


“바쁘신 일이 내 손아귀에 있으면, 일의 우선순위가 바뀌지 않겠어?”


킴은 진회색 제복 차림도, 올블랙 수트 차림도 아니다. 이 건물에서 녹색 정장에 한껏 멋을 낸 남자는 어느 모로 보나 민간인이다. 연약하다느니 떠드는 내추럴 휴먼을 경찰청장이 직접 인솔하면서 바쁘다고 언급했으니, 꽤 중요한 인물. 인질로 고르기 딱 좋은 조건이다.


“이거 보십쇼, 청장님. 나 벌써 위험하네.”


순식간에 인질이 되고도 긴장감이 없는 킴의 목소리가 진을 향한다. 킴은 그러면서 힐끔, 곁눈질로 자신의 목을 감싼 팔뚝을 본다. 레이저로 새긴 듯한 모델명은 [D-ARC-61]이다.


‘다르크 소년병대 출신.’


킴은 이 구형 임플란트의 정체를 알아채고 한숨을 내쉰다. 군인이 왜 사복 차림으로 공무 시설 49층에서 난동을 부리는지 모를 일이다.


“의미 없는 짓 그만둬, 한 모건.”


진은 허리춤에서 총을 꺼내 양손으로 쥐고 겨눈다. 그 자세로 팔찌형 디바이스를 몇 번 터치한다. 그 행동에 목을 짓누르는 힘이 가해진다. 킴은 모건의 팔에 매달리며 콜록거린다.


“내추럴이 목 졸려 죽는 데 얼마나 걸리는지 알아?”


킴은 모건의 임플란트가 가진 특징을 떠올리려 애쓴다. 약점을 노려 빠져나올 틈을 만들 요량이지만, 도통 위협적인 특징밖엔 떠오르지 않는다.


‘아까 그 속도는, 발이랑 다리도 임플란트인가? 아니면, 근육 강화 쪽으로 유전자 변형?’


킴은 버둥대는 척 뒤쪽으로 발을 뻗는다. 불시에 균형을 깨트릴 수 있을까 하는 시도는 허무한 실패다. 모건의 균형엔 흔들림이 없다. 다리를 걸었던 촉각이 알려준다. 모건은 다리도 금속 임플란트다.


“얼마 안 걸려. 한 4분? 아니다. 8분이던가?”

“후회할 짓 말고, 그냥 놔줘.”


킴의 탈출 시도를 나무랄 가치도 없다는 양, 모건의 말은 진에게만 향한다. 진은 킴 스스로 빠져나오려나 기대를 품기라도 했는지, 하찮은 실패에 어이없는 눈치다.


“언제까지 내가 약속한 대가도 안 받고 개처럼 일해줄 줄 알았어?”

“뭘 약속했단 거지?”


킴은 모건의 키에 맞춰 뒤로 당겨진 자세다. 구부러진 허리와 다리가 불편하고, 목이 짓눌려 숨쉬기도 불편하지만, 내추럴 휴먼이 팔다리 금속인 메카닉 트랜스휴먼의 힘을 풀고 빠져나오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모른 척 말고, 당장 퍼미션(Permission) 넘겨.”

“아, 그거. 약속은 한 적 없잖아.”


진에게 지원요청을 받은 경찰들이 곳곳에서 나타난다. 총을 꺼내 겨눈 이들이 조심스럽게 다가온다. 모건은 킴의 목을 죄고 있던 팔에 있는 버튼을 누른다. 전완근 부분의 커버가 열리고, 나이프를 꺼내 든다.


“다들 내추럴이 얼마나 연약한지 본 적이 없어서 긴장감이 없나 봐? 좀 시각적인 걸로 보여줘?”

“뭐?”

“인질이 내추럴이라고?”

“내추럴?”


디바이스 터치 몇 번으로 이뤄진 지원요청 신호엔 자세한 상황 설명이 담기지 못했기에, 인질이 내추럴 휴먼이라는 사실은 경찰들을 당황케 한다.


“얼른 총 버려!”


모건의 외침과 함께, 킴의 목에는 목 졸림 대신 날카로운 칼날이 닿는다. 숨통이 트이는 해방감을 느낄 틈도 없이, 따끔한 감각이 출혈을 알려준다.


“콜록···. 아야. 거기, 총들 내립시다. 어? 오지 마십쇼. 멈춰요. 나 진짜 죽는다니까, 이 무식한 트랜스들아!”


칼날이 깊게 파고들세라, 양 손바닥을 펼쳐 보이며 말하는 킴의 목소리는 끝으로 갈수록 음량이 커진다. 킴의 경고에 주춤거리던 경찰들이 눈을 크게 뜨며 걸음을 멈춘다.


“야, 이거 실화냐.”

“나이프에 피부가 뚫려?”


인간 개조가 만연한 이 시대, 인류 대부분이 방탄 피부로 개조한 시대에, 나이프에 살갗이 베인 내추럴 휴먼의 목덜미에 피가 흐른다. 처음 보는 장면에 경찰들은 수런거린다.


진이 모건과 킴을 주시하며 천천히 몸을 낮춘다. 총을 바닥에 내려놓는 청장의 행동에, 다른 경찰들도 따라서 조심스럽게 총을 내려놓는다.


“지금이라도 인질을 풀어줘. 그럼 이 소동은 없던 걸로 쳐주겠다.”

“지금이라도 퍼미션을 넘겨. 그럼 나도 다 없던 일로 쳐줄 테니까.”


두 사람의 입장은 단호하다. 너무 단호해서 킴의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다. 대충 둘이서 티격태격하다가 끝낼 말싸움 같았는데, 왜 무고한 인질이며 경찰들을 잔뜩 모아놓은 인질극이 된 건가.


“도대체 무슨 퍼미션을 요구···”

“시간 낭비 그만하고, 현명하게 행동해.”

“그래? 시간 낭비 그만하고 그냥 바로 죽일까?”


차분하게 질문하던 킴의 목소리는 가볍게 무시당한다.


“그, 선생님? 시체는 인질로서 가치가 없습니다. 그리고, 청장님? 그냥 이분 요구사항 들어주고 상황 종료하는 게 어떻습니까.”

“이미 진창에 떨어진 인생이라고, 아예 제대로 끝장내고 싶은 건가?”

“왜 이러실까. 내추럴 목숨값이 정말, 2레벨 열람 퍼미션만도 못해?”


킴은 슬슬 이 대치가 지겹다. 대화의 맥락으로 보아, 모건이 요구하는 건 셀 네트워크 보안등급 2레벨 자료의 열람 허가다. 진은 요구사항을 들어주려는 척 상대를 방심시킬 최소한의 노력조차 없다. 킴이 느끼기에 이 상황은 진과 모건의 기싸움에 불과하다.


“뭘 열람하려는 겁니까? 혹시 제가 아는 내용이면 살짝 알려드릴 테니까, 이만 상황 종료하시죠.”


킴은 경찰들 귀에 들리지 않게 작은 목소리로 묻는다. 최대한 입 모양도 작게 해서 읽히지 않게 한다.


“민간인이 알긴 뭘 알아. 같잖은 수작 부리지 마. 그러다 죽는 수가 있어.”

“죽일 생각도 없으면서.”

“죽일 생각이 있는지 없는지, 네가 어떻게 알아.”

“총 버리게 시켰잖아요.”


경찰들이 겨눴다 내려놓은 총은 비살상용 테이저건(Taser Gun)이다. 모건의 속도라면 충분히 피할 수 있고, 여차하면 킴을 고기 방패로 쓰는 방법도 있다. 그런데도 모건은 경찰들을 무장해제 시켰다.


“테이저로 다르크를 어떻게 무력화합니까. 잘못 맞은 내추럴은 죽을 수 있겠지만.”


트랜스휴먼들 기준에 맞춰진 테이저건의 고압 전류는 내추럴 휴먼을 즉사시킬 수 있다. 결국 모건의 행동은 킴이 테이저건을 맞고 죽는 걸 방지한 의미밖에 없다.


“너 뭐야?”


모건이 킴과의 대화에 정신 팔린 사이, 슬금슬금 경찰이 움직인다. 움직임을 포착한 킴은 칼 쥔 모건의 손을 제 쪽으로 잡아당긴다. 방심하고 있던 모건의 손이 당겨지며, 목에 닿은 칼날이 더 깊게 파고든다.


“으아악! 오지 마세요!”


킴의 고함에 접근을 시도하던 경찰들이 움직임을 멈춘다. 그들에게 킴의 행동은 칼이 더 깊게 파고드는 걸 떼어내려는 반항으로 보인다. 킴의 갑작스러운 자해와 공갈에 놀란 모건이 반사적으로 나이프 쥔 손에 힘을 준다. 칼날은 즉시 킴의 피부와 약간 떨어진 자리에 고정된다.


“그만해, 한 모건!”


이번에 무시당하는 건 진이다. 킴과 모건의 시선은 경찰들을 주시하고 있지만, 대화는 서로를 향한다.


“이 상황에도 요구사항 들어준다고 달랠 생각이 없네, 청장님은. 둘이 잘 아는 사이 같던데, 청장님도 그쪽이 나 안 죽일 줄 아는 거 아닙니까?”

“너 뭐냐니까?”

“그냥, 뭐. 2레벨에도 접속해 본 사람이라고 해두죠.”

“퍼미션 있어?”

“그건 없습니다만, 어쨌든 그쪽이 원하는 정보를 갖고 있을지도?”


대화가 진행될수록 모건은 이 민간인 인질이, 민간인도 인질도 아니라는 인상을 받는다.


“데이터를 카피해 놨단 뜻인가?”

“아뇨. 카피본은 없는데요. 제 머릿속에 있는 자료가 적잖이 있는 것 같네요? 그러니까 이 소동은 그만 끝내는 게 어떻습니까? 보시다시피 제가 오늘 하얀색 셔츠를 입어서요. 피 얼룩은 시간 지날수록 잘 안 지워지···”

“장난해?”


킴은 아까까지 자신의 생사가 걸려있던 문제를, 빨래 때문에 서둘러 끝내야 할 협상쯤으로 갈아치운다. 모건은 뭐 이런 미친 새끼가 다 있나 싶다.


“뭐가 문제죠? 그쪽이 원하는 정보가 없을까 봐? 그땐, 흠······. 자발적으로 인질 잡혀 드리겠습니다. 참고로, 제가 이번에 맡은 일이 있어서 어디 도망도 못 갑니다. 어쩌면 뭐 하나 할 때마다 뉴스에 나올지도 모르고요. 놓칠 걱정은 안 해도 된다는 거죠. 그쪽 무력으로 못 뚫을 경호도 없을 거고.”

“뭐 이런 미친······.”


모건의 생각은 육성으로 다 뱉기도 전에 킴의 제멋대로인 결정에 가로막힌다.


“아, 정보 교환할 시간이 없을까 봐 그래요? 하긴, 날 놔주는 대로 경찰들한테 쫓기려나? 그러면, 이렇게 하시죠.”


거기까지 속닥거린 킴이 모두의 귀에 똑똑히 들리게 외친다.


“청장님! 이분을 제 파트너로 배정해 주십쇼! 그러면 상황 종료입니다!”


WIS 요원도 SLPD 경찰도 아니면서, 내추럴 휴먼이 얼마나 쉽게 죽을 수 있는지 알고 있고, 그런 내추럴 휴먼에게 위험이 닥쳤을 때 보호해 줄 강한 무력을 지닌 사람. 이런 식으로 찾게 될진 몰랐지만, 킴의 생각에 모건 만한 적임자는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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