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숨

무료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퓨전

새글

박유정란
그림/삽화
박유정란
작품등록일 :
2024.08.16 12:46
최근연재일 :
2024.09.19 15:39
연재수 :
24 회
조회수 :
220
추천수 :
0
글자수 :
128,355

작성
24.09.03 13:39
조회
10
추천
0
글자
10쪽

12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5

DUMMY

12화



“어서오세요.”


흔한 인사였지만 그들은 얼어붙었다. 라오는 아침부터 ‘카페 샘’으로 뛰어와 그 문을 열어젖힌 참이었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는 건 흑발의 미녀가 아닌 주홍빛 머리칼을 가진 여자였다.


귀여운 앞치마와 주근깨 가득한 얼굴로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 인상적이었지만 라오가 기대하던 그 사람은 아니었다.


“누구세요?”


라오가 멍청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직 출근 안 한 거 아니야?”


라오는 고개를 저었다. ‘카페 샘’의 점원은 ‘샘’ 한 명뿐이라던 말이 얼핏 기억났다.


“아, 오늘부터는 이곳을 제가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한결 시무룩해진 여자였다. 그들의 머릿속엔 무서운 생각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처음 샘을 보았을 때 그녀는 깡패들에게 협박받고 있었다. 그땐 녀석들이 물러나긴 했지만, 그 순간뿐이었을 것이다.


“라오.”


라오는 이미 커다란 발걸음을 옮기는 중이었다. 그를 멈춰 세워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한 걸음씩 다가갈 때마다 여자의 표정이 질려갔다. 그도 그럴 것이 누구라도 자신의 네 배는 되어 보이는 덩치가 다가온다면 공포스러울 것이다.


“당신 누구야?”


그건 안드리키를 추궁할 때보다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여자의 몸이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떨렸다.


“라오 일단 물러서 봐.”


라오는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건지 깨닫곤 한 걸음 물러섰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알고 있던 카페 주인과 달라서 그래요.”


나르가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다. 그러나 여자는 나르를 쳐다보긴커녕 불안한 표정으로 뒤편의 커튼을 쳐다볼 뿐이었다.


그 태도가 수상했다. 혹시 주방에 누군가 있는 건 아닐까? 혹시 아직 주방에······.


“물러나도 좋네. 예렌.”


“감사합니다. 집사장님!!”


주방에서 들린 건 단정하고 세련된 어투의 목소리였다. 예렌은 정중히 고개를 숙이더니 부리나케 커튼 안으로 달아났다.


그들은 침착하게 주방을 노려보았다. 예렌이 사라진 후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가 그곳에서 걸어 나왔다.


새치 가득한 백발과 단정하게 손질된 콧수염이 사뭇 잘 어울리는 중년이었다. 왜소한 체구임에도 주눅 들지 않는 당당함 마저 가지고 있었다.


“마르단 성 집사장 볼로드 게담일세.”


“키세나르입니다. 이 친구는 라우라오입니다.”


“저명한 인간 탄환을 여기서 보는군. 그래 징발된 물건을 두고 세르쇼 선장과 의견 다툼이 있었다지? 잘 해결되었나?”


연장자의 인사에도 불구하고 라오가 퉁명스럽게 게담을 노려보고 있었기에 나르는 대신 인사했다.


게담의 자연스러운 하대는 사람을 초조하게 만드는 묘한 힘이 있었다. 잘못을 저지른 후 끌려온 학생의 심정이었다.


라오의 굳은 표정 때문인지 상황은 더욱 일촉즉발처럼 느껴졌다.


“카페 주인은 어떻게 했습니까? 당신이 있다는 건, 그녀가 남작님께 ‘징발’되기라도 한 겁니까? 혹시 며칠 전에 왔던 새끼들이······.”


“말을, 가려서 할 필요가 있네. 거친 언행에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도 있는 법이라네.”


라오가 말을 쏟아내던 찰나 게담이 그것을 끊었다. 라오는 금방이라도 게담을 곤죽으로 만들어 버릴 기세를 뿜어냈다. 그러나 집사장 역시 기세가 보통은 아니었다.


“샘이라니? 아, 그분을 말하는 건가? 설마, 가게 이름이 샘이라서 그렇게 부르는 건가? 단신으로 해적 무리를 도살했다는 사람치곤 귀여운 작명 방식이군.”


게담이 천천히 바를 돌아 나와 둘의 앞에 선 순간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가게 문이 열렸다. 중무장한 기사 둘이 달려 들어온 것이었다.


그들의 은색 갑주는 핏자국으로 더럽혀져 있었다. 나르의 불길함은 더욱 커져만 갔다.


나르는 라오가 주먹을 말아쥐는 것을 보았다. 카즈의 살기를 느꼈을 때처럼 그의 피부가 따가웠다.


문제는 라오의 주먹을 본 것이 나르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기사 한 명이 검으로 손을 뻗으며 한 걸음 내디뎠다. 다행히 게담이 그를 저지하였다.


긴장감이 감도는 와중, 남은 기사 한 명이 게담에게 다가가 무언가를 속삭였다. 날카롭게 일어선 감각이 그 귓속말을 정확하게 옮겨 주었다.


‘마무리했습니다.’


무엇을? 그러나 생각해볼 틈도 없이 게담이 입을 뗐다.


“그분께선 자네들이 어울릴만한 인물이 아닐세.”


그는 절도있는 동작으로 기사를 물리고 라오 앞에 섰다. 올곧게 펴진 허리, 흐트러짐 없는 눈매, 당당한 목소리였다.


“대체 그분이 누구신지 알려주시겠습니까?”


죽일 듯이 노려보는 라오를 대신해 나르가 물었다. 게담은 나르에게 몸을 틀었다.


“그분은, 베로니카의 주인 ‘귀르작 핀 마르단’ 남작님의 적장자시네. 영지의 경제 상황을 체험해보고자 이런 가게를 운영하셨을 뿐.”


라오의 이글거리는 분노 위로 균열이 일어났다. 나르는 라오가 샘을 ‘불신자’, 정확히는 지구에서 온 사람이라 했던 것을 떠올렸다. 라오의 착각이었던 것일까?


“그렇게 알고, 어디서 함부로 입을 놀리지 않았으면 좋겠군. 가자 예렌.”


게담은 예렌과 기사를 이끌고 카페 밖으로 사라졌다.


그가 사라지고 나서도 둘은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나르는 샘을 처음 만났을 때 자신이 품었던 의문에 대해 생각했다.


이 세계가 신분의 격차가 ‘공인’된 세계라면, 부 역시 신분을 따라 흘러갈 것이다. 그녀가 도심지에 이런 카페를 홀로 운영할 수 있던 게 납득 됐다.


한편 라오는 다른 이유로 충격받은 것 같았다. 그는 얼빠진 사람처럼 혼잣말을 반복했다.


“이름을 말하지 못한 게, 그럼······.”


“아니 아가씨 빨리 나와봐!”


문 경첩이 다시 경박하게 부딪혔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한 중년 여인이었다. 곧 그녀는 멀뚱하게 서 있는 라오를 보았고 다리가 풀린 듯 주저앉고 말았다.


“라다카 사장님? 무슨 일이세요?”


“라······, 라오 총각이었구만. 아니 이럴 때가 아니지, 카페 아가씨는? 카페 아가씨는 어디 갔어?”


곧 그 덩치가 라오라는 사실을 깨달은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 하지만 주저앉은 채 한참이나 숨을 돌린 후에야 대답할 수 있었다.


“그 상인협회라고, 요 몇 달 우리를 괴롭히던 깡패놈들 있잖아. 그놈들이 글쎄, 싸그리 기사들한테 잡혀 죽었어! 그, 그놈들 중 한 놈이 지금 입구에 널브러져 있단 말이네!”



*



뉘엿뉘엿 해가 진다. 출항제가 일주일도 남지 않은 베로니카는 오후에 있던 사건 때문인지 한산했다.


나르와 라오는 넋 나간 표정으로 걸었다.


라다카 아줌마의 말대로 가게 앞 계단에는 샘, 그러니까 소남작을 협박했던 양아치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한쪽 팔이 잘리고 복부에 깊은 자상을 입은 시체엔 팻말이 걸려있었다.


‘해당 인물은, 불법 조직 구성 및 도시 치안을 위협한 죄로 즉결처형됐음을 공표함. - 베로니카 기사단장 야르민 베드발 백’


기사단장의 팻말이 붙은 시체는 누구도 치우지 못했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카페 샘으로 다가갈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일종의 경시줄이 된 것이었다.


나르는 시체를 보고 토악질을 했다. 다행히 그의 정신은 생각보다 단단한 모양이었다. 반나절 정도 지나자 그의 머리에서 시체는 지워지고 샘에 대한 생각만이 남았다.


그녀가 마르단 남작의 후계자라는 것. 사실 나르는 오늘 그녀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그녀가 자신과 같은 ‘불신자’라면 말이다.


나르는 라오를 보았다. 아무래도 그는 샘이 불신자가 아닌 마르단 남작의 딸이라는 사실에 더 크게 충격받은 것 같았다. 라오는 왜 샘을 지구에서 왔다고 생각한 걸까?


“라오, 나딘 소남작을 불신자라 생각한 이유가 뭐야?”


“그건······.”


우뚝 멈춰선 그가 나르의 눈을 한참 동안 바라보더니 고개를 떨구었다.


“그래, 처음 샘을 만난 날 분명 그녀는 이름을 기억 못 한다고 했어. 그게 술에 취해서 꺼낸 진담인지 신분을 속이려고 한 거짓말인진 모르겠지만. 또 샘은 무언가 설명할 때 이상한 단어를 쓰곤 했거든. 그걸 내가 지적한 후 이야기 자체를 잘 하지 않게 되었지만 말이야.”


나르는 침을 삼켰다. 그녀가 남작의 딸인지 불신자인지, 그에게 별로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그러나 반나절을 괴롭혔던 질문의 실마리가 잡힌 것 같았다.


“그래서, 불신자라고 생각한 거야. 베드라 성좌에선 불경한 자들이 자신의 이름을 죽을 때까지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거든. 또 불신자는 대부분 자신이 지구라는 대륙에서 살았다고 말했으니까, 나는 당연히 그녀도 그럴 거라 생각 한 거고.”


나르는 라오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의 거짓말을 정당화했다.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말한 건 정말 다행이라고 말이다.


한편 그는 자신만이 이해할 수 있었을지 모를 샘의 말을, 정확히는 그녀가 입 밖으로 뱉었던 하나의 단어를 떠올렸다.


‘알바 했던 이야기뿐이라······. 해줄 이야기가 없는데.’


그건 그의 세계에서 짧은 기간 돈을 벌기 위해 하는 일을 뜻하는 단어였다. 이 세계에 그런 단어가 존재할 수 있는 걸까?


그것은 고민할 필요도 없이 바로 정답을 확인할 수 있는 문제였다.


“라오 혹시 ‘알바’라는 단어를 알아?”


라오는 대답 없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나르는 확신 했다. 그녀가 불신자라는 것을. 동시에 그녀가 남작의 딸이라는 것도.


그가 키세나르를 입었듯, 그녀는 소남작을 입은 지구인임이 틀림없었다.


작가의말

조금이라도 더 많은 분들이 읽어주셨으면 하는 바람에서 

내일부터는 업로드 시간을 한 시간 정도 더 늦춰볼까 합니다. 흑흑...

읽어주시는 분들 늘 감사합니다.



최초 업로드 : 2024년 9월 3일 1시 39분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두 번째 숨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삽화를 넣어볼까 합니다. 24.09.12 4 0 -
24 22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15 NEW 16시간 전 2 0 15쪽
23 21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14 24.09.18 6 0 11쪽
22 20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13 24.09.17 6 0 13쪽
21 19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12 24.09.13 7 0 12쪽
20 18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11 24.09.12 9 0 16쪽
19 17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10 24.09.11 6 0 9쪽
18 16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9 24.09.09 9 0 11쪽
17 15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8 24.09.06 9 0 10쪽
16 14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7 24.09.05 9 0 12쪽
15 13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6 24.09.04 9 0 10쪽
» 12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5 24.09.03 11 0 10쪽
13 11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4 24.08.30 8 0 15쪽
12 10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3 24.08.29 9 0 10쪽
11 9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2 24.08.28 8 0 18쪽
10 8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1 24.08.27 6 0 11쪽
9 사게제리를 여행하는 지구인을 위한 안내서 24.08.23 8 0 5쪽
8 7화 - 오디세이아, 운명을 받아들이는 두 가지 방법 7 24.08.23 6 0 15쪽
7 6화 - 오디세이아, 운명을 받아들이는 두 가지 방법 6 24.08.22 7 0 15쪽
6 5화 - 오디세이아, 운명을 받아들이는 두 가지 방법 5 24.08.21 7 0 12쪽
5 4화 - 오디세이아, 운명을 받아들이는 두 가지 방법 4 24.08.20 9 0 15쪽
4 3화 - 오디세이아, 운명을 받아들이는 두 가지 방법 3 24.08.18 9 0 14쪽
3 2화 - 오디세이아, 운명을 받아들이는 두 가지 방법 2 24.08.17 12 0 14쪽
2 1화 - 오디세이아, 운명을 받아들이는 두 가지 방법 1 24.08.16 20 0 11쪽
1 서막 24.08.16 26 0 3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