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숨

무료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퓨전

새글

박유정란
그림/삽화
박유정란
작품등록일 :
2024.08.16 12:46
최근연재일 :
2024.09.19 15:39
연재수 :
24 회
조회수 :
212
추천수 :
0
글자수 :
128,355

작성
24.09.13 13:04
조회
6
추천
0
글자
12쪽

19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12

DUMMY

19화



게담을 따라 들어선 연회장은 난장판이었다.


서로 춤솜씨를 뽐냈을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친 지 오래였고 몇 사람만이 남아 있었다.


남작은 샘을 끌어안은 채 연신 사과하고 있었다.


나르는 게담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의 손이 떨렸다. 하지만 연회장 어디에도 ‘메코 지안지스’라는 기사와 라오는 보이지 않았다.


단지 라오가 만들었을 것이라 추정되는 부서진 바닥과 무너진 벽면이 있을 뿐이었다. 게담은 남작에게 다가갔다. 무엇이 그리 슬픈지 울고 있는 그의 어깨에 게담이 손을 올렸다.


나르는 문득 바닥에 떨어진 검을 보았다.


“이건······.”


지나치게 화려해 일견 천박하게까지 느껴지는 황금빛 검집 안에 들어있는 물건은 낯이 익었다.


나르는 저도 모르게 검을 빼 들었다. 검에도 이름이 있겠지만, 나르는 그 검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그의 기억 속에서 그것은 그저 카즈의 검일 뿐이었다. 그의 옆구리를 찔렀던.


“그것 때문인 게지?”


감정을 추스른 남작이 다가왔다. 나르는 기사단장을 찾아 이 층으로 달려왔던 게담에게 자신들이 그곳에 있던 이유를 이실직고한 뒤였다.


나르는 검을 바닥에 내려두었다. 날붙이를 쥔 채 일어난다면 또 위협하는 모양새가 될까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네.”


남작이 긴 한숨을 뱉었다. 여러 감정이 동시에 스쳐 가는 그의 얼굴빛을 가장 많이 채색한 것은 슬픔이었다.


“그대들의 행동은 중죄라고 할 수 있지만, 자네들에게 구원받은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네.”


그의 얼굴에는 미안함과 부끄러움이 떠올라 있었다. 차마 말을 잇지 못하던 그가 고개를 떨구며 한숨을 내뱉듯 담아두었던 말을 다시 뱉어냈다.


“그런데 나는 자네들에게 다시 낯부끄러운 부탁을 해야만 하네. 주변을 둘러보게 겁 먹은 나의 기사들이 보이는가? 저들은 자신의 주군을 지켜야 할 도리마저 잊어버렸지.”


나르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기사들은 여전히 라오와 메코의 충돌로 벌어진 광경에 놀라 있었다. 그중 몇은 뒤늦게 자신들의 의무가 떠오른 듯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주군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들의 주인된 자로서, 부끄럽기 그지없지만 우리는 지금 당장 메코 지안지스와 싸워 그를 사로잡아야만 하는 상황에 놓였네. 그자는. 한 명의 인간으로서, 한 딸의 아버지로서 용서할 수 없는 자일세. 그러니 자네와 이미 싸우고 있는 라오군에게 내 부탁함세. 그를 사로잡아주게. 그 검은 그대들에게 돌려줄 테니. 나도 금방 저 겁먹은 기사단을 추슬러 자네들을 도우러 가겠네.”


남작은 차분하게 말했지만 라오가 일으킨 파괴의 현장을 돌아본 나르는 당황스러웠다. 도무지 인간이 일으킨 것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흔적.


그는 두려웠다. 그가 두려움에 떨어야 했던 기사 같은 자들마저 겁에 질리게 만든 자와, 맨손으로 건물과 대지를 부수는 자. 그런 자들의 싸움에 끼라는 말인가?


하지만 나르의 머뭇거림과 달리, 남작의 부탁을 듣고 있던 다른 지구인이 그에게 다가왔다. 샘은 몸을 숙여 바닥에 떨어진 카즈의 검을 쥐었다.


“저도 가겠습니다.”


“무슨 소리십니까!”


그녀는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말했지만 게담이 화들짝 놀랐다. 남작은 침착하게 그녀를 보았다.


“공간 마법을 쓸 수 있겠소?”


방금까지 그녀를 끌어안은 채 사과하던 남작이라곤 믿을 수 없을 만큼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냉담하다기보단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샘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검을 들어 걸리적거리는 치맛자락을 과감하게 잘라내었다.


“그렇다면 그대도 도움이 되겠지, 부디 다치지 마시오.”


목이 한 차례 메인 남작이 헛기침을 뱉어내곤 말을 맺었다. 샘은 나르에게 고갯짓했다.


곧 그녀가 빠른 속도로 뛰어나갔다. 그녀의 발이 닿은 지면이 접히듯 그녀를 밀어냈다. 나르는 어쩔 수 없이 샘의 뒤를 따라 달렸다.


베로니카의 밤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이전과는 다른 옷을 입은 채였다. 거대한 힘에 짓이겨진 것처럼 북쪽으로 하나의 길이 뚫려 있었다.


건물은 무너졌고 포석은 박살 났다. 그리고 그 파괴의 현장을 따라 눈꽃이 피어 있었다. 나르는 부지런히 발을 놀리며 얼음을 살펴보았다.


봄의 한복판에 다시 겨울이 찾아온 풍경이었다. 다행히 축제를 쫓아 사람들이 모두 부두로 간 덕에 파괴에 휘말린 자는 없어 보였다. 경비병이 요란하게 뛰어다니고 있을 뿐이었다.


샘과 나르는 그들을 빠르게 지나쳤다. 말도 안 되는 속도로 앞서 나가는 샘을 따라잡기 위해 나르는 이를 악물어야 했다.


그녀가 쥐고 있던 검의 원주인보다도 훨씬 빠른 달음박질이었다. 이윽고 북쪽 성벽이 눈에 들어왔다. 성벽 역시 한쪽이 허물어져 있었다.


부서진 성벽 바깥으로 향하자 거대한 들판이 펼쳐졌다. 그리고 그 너머 지평선이 있어야 할 자리엔 병풍 같은 산등성이가 보였다.


들판 여기저기 패이고 얼어붙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이윽고 그들은 이 모든 파괴의 창조자를 목도했다. 멀지 않은 곳에서 강력한 충격파가 터지며 굉음을 만들어 냈다.


두 사람이 용과 호랑이의 장중한 결투를 재현하고 있었다.


라오가 벌판에 상흔을 남기며 뛰어오른다. 상의가 완전히 찢어져 선명하게 드러난 그의 대흉근과 이두박근이 용솟음치듯 꿈틀거렸다.


그는 한 마리 독수리가 되어 먹잇감을 노리듯 주먹을 내리찍었다.


파공음이 터지며 천지를 뒤흔들었다. 그러나 주먹이 메코에 닿은 것은 아니었다.


라오가 하강하는 순간 뻗어진 그의 오른팔에서 꽃잎과도 같은 얼음 여덟 장이 피어나며 뒤집혔다.


주먹은 회전하는 꽃잎이 만들어낸 반투명 막을 두들겼을 뿐이었다. 흉측한 주먹질에 얼음 꽃잎이 만든 보호막이 문자 그대로 박살 나며 굉음을 낸 것이었다.


메코의 두 발이 땅을 뚫고 박히며 일대 바닥이 무너져 내렸다.


그러나 메코가 마냥 당하는 모양새는 아니었다. 그가 뒤로 뻗어두었던 왼팔을 할퀴듯 휘두르자 늑대 발톱을 닮은 얼음 세 줄기가 허공에서 일어나 라오를 직격 했다.


얼음발톱을 맞은 라오가 바닥에 내팽개쳐지며 수 미터를 구른다.


흙먼지가 피어나며 시야를 가렸다. 하지만 메코에게서 뿜어나온 희뿌연 얼음 구름이 눈보라가 되어 흙먼지를 몰아냈고 광선 형태로 합쳐지며 라오에게 쏘아졌다.


급속도의 온도변화를 겪은 대지가 얼어붙으며 갈라졌다. 균형을 잡고 일어서던 라오의 오른팔이 가까스로 냉동 광선을 막아냈다.


얼음 입자가 라오의 오른손과 부딪히며 사방으로 비산 했다. 라오는 천천히 얼어붙고 있었다.


“흡!”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가 기합을 내지르며 온몸에 힘을 주었다. 그의 근육이 솟구치며 피부에 들러붙은 새하얀 얼음이 물방울처럼 튕겨난다.


그는 동시에 몸을 회전시키며 광선을 빗겨 냈다. 갈길 잃은 냉동 광선이 애꿎은 바닥을 새하얗게 도배할 때 라오는 이미 대지를 쿵쿵 울리며 메코에게 뛰어가고 있었다.


“하압-!”


그리고 달려가던 속도를 모두 발에 실어 그대로 메코를 밀어 찼다. 발차기에 직격당한 메코가 땅바닥을 물수제비 마냥 수십 차례 튕겼다.


그 와중에 중심을 잡은 그가 바닥에 다리를 박아 넣었으나, 관성을 이기지 못한 채 대지에 긴 상흔을 남기며 수십 미터를 미끄러졌다.


“아-악! 이런 씨발년이-!!”


가까스로 멈춰선 메코가 피를 토했다. 화를 주체하지 못한 그가 몸부림쳤다. 그의 몸부림을 따라 얼음 조각들이 생겨나 폭격하며 주변을 초토화했다.


나르는 샘을 돌아보았다. 분명 라오의 유효타가 적중하긴 했지만 상황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라오는 온몸에 상처 입은 채였고 더군다나 냉동 광선을 막아냈던 오른손이 새파랗게 질려가고 있었다.


“도와야 해”


샘이 읊조렸다. 무슨 수로? 나르가 되물으려 하는 순간 대기의 모든 공기가 울부짖는 것처럼 흔들렸다.


황급히 메코를 돌아보자 그의 왼손으로 무형의 기운들이, 어떤 입자들이 모여드는 것이 느껴졌다. 불길하기 그지없는 광경이었다.


그 흉측하고 난폭한 기운의 흐름을 느낀 라오 역시 우두커니 선 채 메코를 노려보고 있었다.


메코가 주먹을 쥔 왼손을 들어 보였다. 라오는 반사적으로 두 손을 들어 머리를 가렸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그의 손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의 왼손엔 손잡이가 쥐여 있었는데 그 위아래로 거친 표면의 얼음들이 곡선을 그리며 자라났다. 잠시 후 그것이 완성되었다.


“활?”


나르가 읊조렸다. 정말로 활의 모양새였다. 윗부분과 아랫부분이 완벽하게 대칭을 이루는 형태의 활. 아가리를 벌린 용의 형상을 한 뿔앞과 가시 같은 얼음이 전체에 돋아난 활.


“죽여주마.”


메코가 간사하게 웃었다. 동시에 활의 양쪽 끝에서부터 얇은 줄 형태의 얼음이 돋아났다. 은은히 빛나는, 얼음으로 만들어진 시위였다.


얼음이 줄의 역할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 선행되기도 전 메코가 시위를 잡아당겼다. 그러자 그것은 훌륭한 탄성을 보여주며 늘어졌다.


늘어진 활시위로 보기만 해도 눈이 시린 마력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피해!”


샘이 갑작스럽게 소리쳤다. 놀란 나르의 고개가 채 돌아가기도 전에 메코가 시위를 놓았다.


그것은 화살이라기보단 하나의 광선에 가까웠다. 용과 용의 대가리 사이 줌통에서 하늘색 빛살이 쏘아졌다.


그것은 메코가 겨냥한 방향 끝, 라오를 그대로 직격 했다. 그는 이미 두 팔을 들어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냉기 화살 앞에선 무용지물이었다.


광선에 직격당한 그가 통째로 얼어붙어 버렸다. 하지만 빛살은 그것만으론 모자라다는 듯 그의 반경 수 미터를 빙판으로 바꾸어 놓았다.


거대한 고목 나무처럼 얼어붙은 라오의 육체를 따라 작은 얼음 알갱이들이 뭉치고 뭉쳐 눈꽃을 피워낸다.


빙판이 된 대지 곳곳엔 한정된 공간에 지나치게 많은 마력이 모여든 탓인지 얼음 기둥이 석순처럼 솟아나고 있었다.


빛살은 또 어찌나 빨랐는지 겨울이 완연해진 뒤에야 그것의 소리가 날아들었다. 설원 위로 눈송이를 휘모는 바람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나르는 직접 빛살을 맞은 것처럼 굳어 버렸다. 눈앞에 일어난 광경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본능은, 그가 입은 육체는 그것이 무엇인지 그의 머리를 대신해 분석해 알려주고 있었다.


막대한 마력의 흐름이 느껴졌다.


메코는 불길처럼 곳곳으로 번져나가는 빙판을 밟으며 라오에게 걸어갔다.


뇌리엔 심각한 경종이 울리고 있었다. 카즈가 옆구리를 찔렀을 때만큼이나 강력했다.


“그림자를 부르는 땅으로부터 전언한다.”


그때 샘의 목소리가 들렸다. 샘은 입술에 왼손의 중지와 검지를 모은 채 검을 대고 주문을 외고 있었다.


나르가 뭐라 묻기도 전 주문을 완성한 그녀가 주저앉으며 바닥에 검을 찔러 넣었다. 그리고 꽤 먼 거리에 떨어져 있던 메코의 그림자에서 그녀가 찔러넣은 검이 솟아올랐다.


아니 그것은 검이 아니었다. 메코의 그림자가 그 자체로 검이 되어 메코의 복부를 관통했다.


“끄아아악!”


그가 끔찍한 비명을 질렀다. 비명이 퍼지는 것을 따라 얼어붙지 않은 대지에 얼음이 피어나며 폭발했다.


“죽고 싶지 않으면 싸워.”


샘이 말했다. 그녀는 단단하게 검을 움켜쥔 채 앞으로 뛰어나갔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당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두 번째 숨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삽화를 넣어볼까 합니다. 24.09.12 4 0 -
24 22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15 NEW 16시간 전 2 0 15쪽
23 21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14 24.09.18 5 0 11쪽
22 20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13 24.09.17 6 0 13쪽
» 19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12 24.09.13 7 0 12쪽
20 18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11 24.09.12 9 0 16쪽
19 17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10 24.09.11 6 0 9쪽
18 16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9 24.09.09 9 0 11쪽
17 15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8 24.09.06 9 0 10쪽
16 14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7 24.09.05 9 0 12쪽
15 13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6 24.09.04 8 0 10쪽
14 12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5 24.09.03 10 0 10쪽
13 11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4 24.08.30 8 0 15쪽
12 10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3 24.08.29 8 0 10쪽
11 9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2 24.08.28 7 0 18쪽
10 8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1 24.08.27 6 0 11쪽
9 사게제리를 여행하는 지구인을 위한 안내서 24.08.23 8 0 5쪽
8 7화 - 오디세이아, 운명을 받아들이는 두 가지 방법 7 24.08.23 6 0 15쪽
7 6화 - 오디세이아, 운명을 받아들이는 두 가지 방법 6 24.08.22 7 0 15쪽
6 5화 - 오디세이아, 운명을 받아들이는 두 가지 방법 5 24.08.21 7 0 12쪽
5 4화 - 오디세이아, 운명을 받아들이는 두 가지 방법 4 24.08.20 8 0 15쪽
4 3화 - 오디세이아, 운명을 받아들이는 두 가지 방법 3 24.08.18 9 0 14쪽
3 2화 - 오디세이아, 운명을 받아들이는 두 가지 방법 2 24.08.17 12 0 14쪽
2 1화 - 오디세이아, 운명을 받아들이는 두 가지 방법 1 24.08.16 19 0 11쪽
1 서막 24.08.16 25 0 3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