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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유정란
그림/삽화
박유정란
작품등록일 :
2024.08.16 12:46
최근연재일 :
2024.09.19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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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6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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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8

DUMMY

15화



그녀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리고 그건 나르와 라오 역시 마찬가지였다.


잠시간의 적막이 지나가고, 나르의 머릿속에 경종이 울려 퍼졌다. 문에 가깝게 서 있던 그는 순식간에 팔을 뻗어 예렌을 창고 안으로 끌어당겼고 벽으로 몰아붙이며 입을 막았다.


그녀의 손에 들려있던 상자가 엎어지며 채소 조각이 나뒹굴었다. 입을 막은 손이 울릴 정도로 커다란 비명이 흘러나왔다. 단 몇 초만 늦었더라도 그와 라오는 경비병에 둘러싸였으리라.


나르는 간절한 표정으로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그녀의 눈은 평소보다 두 배는 커져 있었다.


“제발 소리 지르지 마요.”


생각이 걸러지지 않고 그대로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불한당이나 지껄일 대사였다. 반면 예렌은 침착함을 되찾고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르는 긴장을 놓치지 않으며 그녀에게서 조금 떨어졌다. 예렌은 다리가 풀린 듯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당신들 뭐예요?”


“되찾아야 할 물건이 있어서······, 이렇게 됐습니다.”


대답을 생각하던 나르는 우선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남의 집 창고에서 발견된 사람이 무슨 말로 집주인을 설득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게 설마, 경비병 팬티는 아니겠죠?”


예렌은 경멸스러운 표정으로 그의 뒤편을 노려보았다. 어이가 증발했다.


라오는 불에 데기라도 한 것처럼 화들짝 놀라며 그것을 내팽개쳤다. 그러곤 오물이라도 만진 것처럼 연신 손을 털어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예렌은 한낮 도둑에 불과한 자신들을 보고도 생각보다 온화한 자세였다. 어둠 속에서도 선명한 그녀의 눈을 감시하듯 쏘아보던 나르는 머쓱함을 느꼈다.


“혹시, 최근 남작께서 들인 검 한 자루에 대해 아십니까?”


그런 질문을 던진 것은 도리어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다. 무의식에 박혀 있던 목적이 자연스럽게 입 밖으로 흘러나온 것이었다.


예렌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나르를 올려보기만 했다. 그때 라오가 나르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칼, 그녀를 죽이고 싶은 거야?”


꽤 무서운 소리를 하는 것 치곤 얼굴은 온화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나르는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예렌과 마주친 순간 그들은 도둑이 아닌 강도가 되어버린 셈이었다. 만약 그들이 검을 훔치는 데 성공한다면, 권력자인 남작은 아니 그가 하지 않더라도 베로니카의 공무원들은 이 일을 철두철미하게 조사할 것이 뻔했다.


그렇다면 그들이 예렌이 강도들과 마주쳤다는 사실을 유추하는 데만 성공하더라도 그녀는 필경 위험한 상황에 놓일 게 뻔했다.


하물며 그들이 도둑질 하려는 물건에 대한 정보를 말해줬다는 사실까지 밝혀낸다면?


“마법으로 우리의 행적만 밝혀내도 그녀는 즉결처형당할 수 있어.”


“남작님은 그렇게 잔인하신 분이 아니에요.”


조용히 그들을 올려보던 예렌이 대답했다. 그녀는 더할 나위 없이 차분했다.


“단지 저는 의리를 지키고 싶은 거예요. 여러분이 그냥 돌아간다면 우리가 만난 일은 없던 일이 될 수도 있겠죠.”


“의리를 지킨다니요?”


이번에도 반사적인 대답이었다. 그는 신분제 사회에서 고용인과 피고용자의 관계는 결코 의리라는 단어로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메코 지안지스라는 불한당에게 그 검이 선물 되기 전 여러분이 훔친다면 남작님께선 곤란해지실 거니까요. 저는 그분의 은혜를 받고 자란 사람으로 그런 일을 지켜볼 순 없습니다.”


결이 조금 빗나간 대답이었지만, 그녀의 대답에는 이미 궁금해하던 것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단순히, 주입된 교육으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그녀에겐 나이에 맞지 않는 어떤 현명함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고 행동으로 옮기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들과 마주친 두 번의 순간 모두 겁을 먹었지만. 자신들과 맞서야 하는 순간이 오자 그것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라오의 행동에서 느낀 것과 비슷한 성질이었다.


“하지만, 저는 그 검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원래 제 것입니다.”


그것이 나르의 무언가를 자극했다. 그는 지금까지 무궁무진에 대한 태도와 다르게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한편으론 정말로, 진심으로, 그 검을 되찾아야 한다는 확신은 갖지 못한 상태였다. 그것은 자신이 가지지 못한 용기를, 자신이 가지지 못한 태도를 지닌 사람에 대한 질투에 불과했다.


나르의 단호한 목소리를 들은 예렌이 낮게 한숨 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금도 주눅 들지 않은 자세였다. 이상하게 나르는 그녀에게 분함을 느꼈다.


“예렌 설마 아직도 창고에 있니?”


그때 문밖에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나르는 저도 모르게 허리춤으로 손을 옮겼다. 물론 누군가를 헤치려는 행동은 아니었다. 놀랐을 뿐이었다.


라오가 다시금 어깨를 잡았다. 그는 고개를 저어보이곤 문 쪽으로 다가섰다. 우선 문이라도 열리지 않게 하려는 모양이었다.


타이밍 좋게 손잡이가 돌아가며 문이 열렸다. 그러나 라오의 육중한 몸에 막혀 간신히 빛이 들어올 틈만을 허용했다.


나르는 황급히 라오의 뒤편으로 몸을 옮겼다. 그리고 예렌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그와 라오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예렌, 이 문 열지 못해!”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이대로라면 다른 사람이 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예렌은 창고 한쪽에 있던 천으로 다가가더니 그것을 찢어 자신의 입안에 말아 넣었다. 그러곤 천을 다시 길게 찢어 입 위로 묶었다.


그러곤 그대로 주저앉아 한쪽 구석을 가리켰다. 그곳엔 밧줄 더미가 놓여 있었다.


나르와 라오가 눈을 마주쳤다.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예렌은 그들이 잡히지 않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었다. 동시에 그녀 스스로 안전할 수 있는 방식으로.


나르는 예렌이 손가락질 한 방향으로 달려가 밧줄을 챙기고 그녀의 양팔과 다리를 묶었다. 버려진 물건이었던 만큼 결이 워낙 거칠었기에 그녀의 피부가 금방 빨개지며 생채기가 났다.


밧줄이 느슨하게 묶이자 예렌이 발길질했다. 나르는 죄책감을 느꼈다. 자신이 얼마나 옹졸한 사람인지 다시 한번 깨달은 순간이었다.


그는 허리춤에 묶인 칼로 목이라도 찌르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웠다. 하지만 그런 극단적인 행동을 하기엔 언제나 용기가 부족했다.


그는 예렌에게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녀는 괜찮다는 듯 다시 한번 끄덕였다. 나르는 자신을 꺼려 하지 않는 그녀에게 위안을 얻으며 밧줄을 좀 더 단단하게 묶었다.


“예렌!”


밖의 하녀는 이제 문에 부딪히고 있었다. 그녀가 다시 부딪치려는 찰나 라오가 그에 맞춰 몸을 뺐다. 갑작스럽게 문이 열리며 그녀는 창고 안쪽으로 굴러 넘어졌다.


그리고 라오가 그녀의 옆에 주저앉아 손으로 입을 막았다.


“읍!”


그를 본 하녀는 넘어지며 다친 고통도 잊은 것처럼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라오의 커다란 손 틈으로 악다구니가 새어 나왔다.


그녀의 가녀린 팔다리가 라오의 팔뚝이며 배를 걷어차고 꼬집었지만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단지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반복할 뿐이었다.


예렌의 손과 팔을 모두 묶은 나르는 황급히 달려가 문을 닫았다.


“읍! 읍!”


그러자 예렌이 몸부림치며 소리 질렀다. 그 소리를 들은 하녀가 몸부림을 멈추고 예렌에게 눈을 굴렸다. 양팔과 다리가 묶이긴 했지만 멀쩡한 모습의 그녀를 확인했기 때문인지 하녀의 몸부림이 잦아들었다.


어쩌면, 아니 확실하게 그것은 예렌이 의도한 일 같았다. 나르는 예렌이 찢었던 천을 비슷한 크기로 찢어 들고 하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최대한 부드러운 억양으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저희는 남작님께서 징발해간 물건을 되찾기 위해 침입했습니다. 당신을 해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니 너무 놀라지 마세요.”


하녀의 눈에 금방 눈물이 맺혔다. 나르는 지금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여실히 깨달았다. 일견 명랑하게 느껴지던 그들의 ‘도둑질 대작전’은 엄연한 범죄라는 사실을, 잊고 있던 죄의식이 날카롭게 마음을 후볐다.


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물러날 수도 없었다. 나르는 천을 감싸 쥔 손을 라오의 손바닥 아래로 밀어 넣어 그녀의 입을 막았다. 저항이 심하지 않았기에 손쉽게 그녀의 입을 막았다.


나르는 그녀를 조심히 일으켜 세워 앉혔고 라오는 길게 찢은 천을 그녀의 입 주위에 묶었다. 라오 역시 전에 없이 어두운 표정이었다.


둘은 하녀의 손과 발을 묶고, 예렌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자신을 등진 하녀를 안쓰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다 시선을 느끼고 턱짓했다.


올라가라는 뜻. 그리고 동시에 하녀를 자신의 곁에 놓아달라는 의사를 표현했다. 라오와 나르는 하녀를 부축해 그녀의 옆에 데려 주었다.


“미안합니다. 우리로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요. 혹여 저희가 일을 성공하고 도망치더라도 혹은 실패하고 붙잡히더라도 창고로 사람을 꼭 보내겠습니다. 불편하겠지만 조금만 참아주세요.”


잔뜩 침울해진 목소리로 라오가 말했다. 나르는 차마 둘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그들은 죄를 뒤로 한 채 계단에 발 디뎠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최초업로드 : 2024년 9월 6월 2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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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22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15 NEW 16시간 전 2 0 15쪽
23 21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14 24.09.18 5 0 11쪽
22 20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13 24.09.17 6 0 13쪽
21 19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12 24.09.13 6 0 12쪽
20 18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11 24.09.12 9 0 16쪽
19 17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10 24.09.11 6 0 9쪽
18 16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9 24.09.09 9 0 11쪽
» 15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8 24.09.06 9 0 10쪽
16 14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7 24.09.05 9 0 12쪽
15 13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6 24.09.04 8 0 10쪽
14 12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5 24.09.03 10 0 10쪽
13 11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4 24.08.30 8 0 15쪽
12 10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3 24.08.29 8 0 10쪽
11 9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2 24.08.28 7 0 18쪽
10 8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1 24.08.27 6 0 11쪽
9 사게제리를 여행하는 지구인을 위한 안내서 24.08.23 8 0 5쪽
8 7화 - 오디세이아, 운명을 받아들이는 두 가지 방법 7 24.08.23 6 0 15쪽
7 6화 - 오디세이아, 운명을 받아들이는 두 가지 방법 6 24.08.22 7 0 15쪽
6 5화 - 오디세이아, 운명을 받아들이는 두 가지 방법 5 24.08.21 7 0 12쪽
5 4화 - 오디세이아, 운명을 받아들이는 두 가지 방법 4 24.08.20 8 0 15쪽
4 3화 - 오디세이아, 운명을 받아들이는 두 가지 방법 3 24.08.18 9 0 14쪽
3 2화 - 오디세이아, 운명을 받아들이는 두 가지 방법 2 24.08.17 12 0 14쪽
2 1화 - 오디세이아, 운명을 받아들이는 두 가지 방법 1 24.08.16 19 0 11쪽
1 서막 24.08.16 25 0 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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