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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유정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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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유정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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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16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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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4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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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6

DUMMY

13화



밤과 속죄의 여신 닉시아에 대한 신앙은 베로니카에 가장 널리 퍼져 있는 ‘승천 신앙’이다.


한낱 범죄자의 낙원에 불과했던 지역이 제국령으로 인정된 중요한 계기가, 바로 닉시아 신전의 건설이었고 후손들이 가장 간절하게 바랐던 것이 ‘속죄’였기 때문이다.


처음 베로니카에 정착한 범죄자들은 먹고살기 위한 수단을 찾아야 했다.


어획량이 풍부한 서해를 낀 베로니카에서 그들이 어부가 되기를 선택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주민들은 점차 거친 바다 일을 통해 자신과 조상의 죄를 속죄하는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출항제’였다. 대목을 앞둔 봄, 속죄의 여신 닉시아를 봉헌하는 축제를 열게 된 것이다.


출항제는 매해 여름, 베로니카 지방을 찾아오는 신비한 구름 오디세이아와 더불어 날이 따뜻해질수록 수온이 낮아지는 서해와 맞물리며 이 고장에서 가장 유명한 명물이 되었다.


귀르작 남작은 ‘베로니카 수도원’이 되어버린 신전을 거닐었다. 수도원장이 잡다한 상식을 늘어놓고 있었지만 대부분 아는 것이나 쓸데없는 것이었다.


그가 가장 신경 쓰고 있는 것은 원장의 입이 아닌,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는 귀였다.


‘메코 지안지스’


그는 ‘제리네리’였다. 오로지 황제만을 섬기는 충실한 손이자 밝은 눈, 동시에 가장 두려운 귀이기도 한.


그러나 ‘메코 지안지스’라는 이름이 알려진 것은 비단 그가 ‘제리네리’의 일원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제리네리의 마스터가 되기 전에도 충분히 유명한 인간이었다.


귀르작은 그의 악명을 슬그머니 훔쳐보았다. 한 명의 엘프를.


스플라이트 지역 바다가 생각나는 눈동자, 순도 높은 금발, 새하얀 피부까지 누구나 한 번쯤 상상해봤을 전형적인 ‘여름엘프’였지만 그녀는 이상형보단 광기를 상징하는 인물에 가까웠다.


그녀는 원래 남자였다.


엘프는 인간과 달리 자신의 정체성에 따라 성별을 바꿀 수 있다고 한다.


저 멀리 펜드래곤 ‘고래꼬리 반도’의 ‘여름 숲’을 떠나 여행 중이었던 그는, 어느 날 아스타나 지방에서 악명을 떨치던 ‘메코 지안지스’에게 붙잡혔다.


몸담고 있던 클랜의 사제를 순전히 쾌락을 위해 죽이고 아스타나 지방으로 도망쳤던 메코는 그를 다음 ‘놀잇감’으로 점찍었다.


이후 그는 스스로 ‘여성’으로 생각하게 될 때까지 끊임없는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폭력 앞에 굴복한 그가 여성으로 변하기 시작했을 때 메코가 붙여준 이름은 ‘오브예’. 사라진 고어로 ‘물건’을 뜻하는 단어였다.


입마개를 씌우고 목줄을 채운 오브예를 아스타나 지역 이곳저곳 끌고 다니던 그가, 여름엘프 추적자에게 쫓기기 시작했을 때, 그를 받아준 것이 다름 아닌 ‘탐미제’였다.


그의 황제에 대해 생각하던 귀르작은 놀랐다. 메코가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수도원장의 설명이 끝난 예배당엔 고요가 내려앉아 있었다.


그는 최대한 천연덕스러운 태도로 입을 열었다.


“메코 경 ‘황도 아레이나르’에서 오느라 피곤하진 않으셨는지요.”


“아이, 귀르작 남작님. 뭘 그렇게 딱딱하게 구십니까. 난 귀족도 아닙니다. 그냥 메코라고 부르세요.”


메코가 실실 웃었다. 그러나 귀르작은 그의 웃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런 귀족들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 못이 박히도록 들은 탓이었다.


남작은 어떻게 저런 망나니가 아라그의 자랑인 ‘제리네리 마스터’가 됐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펜드래곤 왕국’을 극도로 혐오하는 ‘탐미제’의 마음에 그저 여름엘프를 겁간한 그의 행동이 들었겠거니 추측할 뿐이었다.


천 년 전 대분쟁이 일어나며 갈가리 찢어지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 ‘가나드’의 유산 ‘기사’는 가나드를 구성하던 세 개의 축 중 하나였다.


공무원이라면 누구든 한 번쯤 읽어봤을 ‘통일 국가 멸망에 관한 고찰’. 소위 ‘국가론’이라 불리는 책의 저자 ‘케르건 마틴’은 국가란 크게 세 가지로 이루어진다고 규정했다.


‘정치, 군사, 노동’


가나드의 ‘군사’를 담당하던 ‘기사’는 가나드 시민들이 선출한 일종의 보안관이었다. 그들은 지역 치안을 책임졌고, 유사시엔 대가문들의 대표인 ‘황제’에 의해 소집돼 국방을 책임졌다.


가나드가 멸망한 지도 천 년이 넘게 흘렀지만 ‘기사’라는 이름은 형태가 다양하게 변해 버렸을지언정 아직까지도 살아 숨 쉬었다.


하지만 귀르작은 개중 가장 천박한 형태가 바로 제국의 ‘기사제’라고 생각했다.


아라그에선 영주라면 누구나 서훈할 수 있다. 한낱 공무원 아들에 불과했던 그조차, 베로니카 영지를 물려받은 후 기사단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실력이 정말 ‘기사’ 만큼 갖춰졌는지는 직접 서훈한 본인조차 부정적이었다.


‘아스타나에서 마스터 한 명만 쳐들어와도 전멸하겠지······.’


명예와 무력을 모두 갖춘 자를 선출하던 가나드 시대까지 갈 필요 없이 대륙 반대편, ‘가나드’의 적통을 주장하는 ‘펜드래곤’만 하더라도 국왕과 귀족들에 의해 철저히 검증된 자만이 서훈을 받는다.


반면 제국은, 모든 귀족에게 하나씩 돌아갈 만큼 땅덩어리가 넓은 이 제국은, 그 넓이만큼이나 저질스러운 기사가 판쳤다.


그러나 ‘제리네리’만은 달랐다. 에스피나조 강 하류 ‘이륙자’들의 국가에 불과했던 아라그가 중서부를 제패하고 제국이 될 수 있었던 근원이 바로 ‘제리네리’였다.


그들은 뿌리부터 ‘리버레이크’의 아홉 봉우리로 꼽혔던 클랜이었다.


‘막말로 귀족 맘에만 들면 깡패도 기사가 될 수 있지. 메코는 그게 탐미제 폐하였을 뿐. 작금의 제리네리가 과연 제리네리라 할 수 있나.’ 귀르작은 메코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쌈박질 잘하는 범죄자에 불과한 그가, ‘제리네리’의 일원이 됐다는 사실은 황도에서 나고 자랐던 그로써 용납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아, 오브예 걱정 마. 네가 날 딱딱하게 만들어 주는 건 언제든 환영이니까.”


쭉 찢어진 눈으로 예배실을 둘러보던 메코가, 대뜸 저질스러운 농담을 던지며 오브예의 목줄을 당겼다.


그녀는 힘없이 품에 안겼고, 메코는 둔부를 쓰다듬었다. 귀르작은 조용히 수도원장을 보았다.


‘속죄하는 밤’을 받들고, 고행을 거듭하는 수도자의 모범이 되어야 할 그는, ‘수도원’에서 벌어진 메코의 천박한 행동을 보지 못한 척하고 있었다.


귀르작은 수도원장 뒤편 어렴풋이 보이는 여신상을 보았다. 여신의 두 눈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



*



방은 죽은 듯이 조용했다. 그럴 만도 하지, 주인이 죽었으니까. 샘이라 불리는 여자는 생각했다.


모든 것이 여전했다. 정갈한 침대, 정돈된 책상, 그리고 미처 풀어헤치지 못한 짐이 가득 담긴 배낭들.


방을 둘러보던 그녀는 침대에 주저앉았다. 아가씨가 떠나기 전과 똑같을 겁니다. 게담이 말했다.


성에서 쫓겨난 지난겨울, 자신이 살 집과, 일할 카페를 만들어 준 사람이었다. 그녀는 차라리 그가 마련해준 그곳이 자신의 방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나는 나딘이 아니다. 여전히 사람들의 추억과 슬픔이 죽고 살아나는 방에서 그녀는 챙겨온 담배 한 대를 빼 물었다.


이곳에 성냥은 없지만, 그녀는 성냥 없이도 불을 지필 수 있었다. 죽은 사람의 기억이 속삭였다.


검지와 엄지를 문지르는 것만으로 불꽃이 피어났다. 여자는 순간 불이 이 성을 태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녀는 담배를 마저 태운 후 자리에서 일어나 배낭으로 다가갔다. 그 중 뚜껑이 어설프게 닫힌 가방 하나를 열어젖혀 쫓겨나기 전 던져 놓았던 일기장을 꺼냈다.


표지를 열자 고운 글씨로 적힌 이름이 드러난다. ‘나딘 핀 마르단.’ 생전 처음 보는 글자였지만 그것을 읽고 쓰는 데 아무런 무리가 없었다.


그녀는 이 세계에서 눈뜨기 전 자신이 갖고 있던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이름만은 생각나지 않았다.


일기장을 편 순간부터 나딘의 기억이 그녀의 기억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녀는 그게 싫었다. 이도 저도 아닌 인간이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나딘도, 이름 잃은 여자도 아닌.


방은 무척이나 깨끗했다. 누군가 계속 관리한 것이 분명했다. 어항 속 금붕어가 여전히 아름답게 살아 있었다.


그녀는 피아노 앞에 앉아 먼지 하나 없는 덮개를 들어 올렸다. 하얗고 까만 건반이 얼굴을 불쑥 내밀어도 그것을 연주할 수 있는 기억이 없었다.


아주 공주마마로 자라셨네. 계속해서 기억을 속삭이는 죽은 사람에게 그녀는 조롱이 담긴 박수갈채를 보냈다.


조금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자신을 내쫓은 그 여자의 아버지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미워하지 말아줘. 그런 말이 들린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어떻게 미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자신을 죽도록 미워할 그 사람을. 나라면 죽이고 싶을 거야.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어항을 보았다. 빨갛고 하얀 물고기가 헤엄치는 어항을.


그녀는 가녀린 두 손으로 금붕어를 쥐었다. 그것은 차갑고 미끄러웠다.


버둥거리는 그것을 그녀는 조용히 건반에 풀어주었다. 금붕어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듯 건반 위를 날뛰었다.


그것은 어느 예술가가 만들어낸 소름 돋도록 아름다운 진혼곡 같았다.


펄떡이던 금붕어가 금방 자기 풀에 지쳐 죽어간다. 건반 위로 민물이라기엔 너무 짠 물방울이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져 내렸다.


작가의말

내일 뵙겠습니다.





최초 업로드 - 2024년 9월 4일 오후 2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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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22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15 NEW 16시간 전 2 0 15쪽
23 21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14 24.09.18 5 0 11쪽
22 20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13 24.09.17 6 0 13쪽
21 19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12 24.09.13 7 0 12쪽
20 18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11 24.09.12 9 0 16쪽
19 17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10 24.09.11 6 0 9쪽
18 16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9 24.09.09 9 0 11쪽
17 15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8 24.09.06 9 0 10쪽
16 14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7 24.09.05 9 0 12쪽
» 13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6 24.09.04 9 0 10쪽
14 12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5 24.09.03 10 0 10쪽
13 11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4 24.08.30 8 0 15쪽
12 10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3 24.08.29 8 0 10쪽
11 9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2 24.08.28 7 0 18쪽
10 8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1 24.08.27 6 0 11쪽
9 사게제리를 여행하는 지구인을 위한 안내서 24.08.23 8 0 5쪽
8 7화 - 오디세이아, 운명을 받아들이는 두 가지 방법 7 24.08.23 6 0 15쪽
7 6화 - 오디세이아, 운명을 받아들이는 두 가지 방법 6 24.08.22 7 0 15쪽
6 5화 - 오디세이아, 운명을 받아들이는 두 가지 방법 5 24.08.21 7 0 12쪽
5 4화 - 오디세이아, 운명을 받아들이는 두 가지 방법 4 24.08.20 8 0 15쪽
4 3화 - 오디세이아, 운명을 받아들이는 두 가지 방법 3 24.08.18 9 0 14쪽
3 2화 - 오디세이아, 운명을 받아들이는 두 가지 방법 2 24.08.17 12 0 14쪽
2 1화 - 오디세이아, 운명을 받아들이는 두 가지 방법 1 24.08.16 20 0 11쪽
1 서막 24.08.16 26 0 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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