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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유정란
그림/삽화
박유정란
작품등록일 :
2024.08.16 12:46
최근연재일 :
2024.09.19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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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8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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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14

DUMMY

21화



온 천지가 요동친다.


메코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선 막대한 마력이 요동치고 있었다.


그는 ‘빙설풍’을 익힌 후 차가움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마력 흐름은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기 충분한 것이었다.


베로니카 벌판 저 멀리 지어르단 산맥이 흔들리며 온갖 새들이 시끄럽게 날아올랐다.


*


한편 라오는 세상의 멸망을 지켜보는 기분이었다. 시간이 빠르게 감기기라도 한 것처럼 사방에 흩어진 구름이 한곳으로 몰려들었다.


그것은 그가 ‘세계수 군도’를 떠난 후 보았던 광경 중 손에 꼽힐 만한 장관이었다.


*


메코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샘은 온 사방이 번쩍이는 것을 보았다. 비정상적으로 응축된 구름이 부대끼며 지상으로 우악스러운 벼락을 쏟아냈다.


그들의 전투로 충분히 상처 입은 벌판에 더욱 깊은 상흔이 새겨졌다.


*


메코는 그가 얼려두었던 남자를 보았다. 몰려든 구름이 하늘에서 와선을 그리며 소용돌이쳤다.


얼음은 요란한 소리와 함께 깨졌다. 그리고 무언가에 감싸 안긴 것처럼 남자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강렬한 빛이 남자의 어깨너머에서 터진다. 그것은 봉인된 백색이 해방되는 광경 같았다.


백색은 날개 같기도, 흰 띠 같기도 한 형상이었다. 눈부시게 일렁이는 그것엔 처음 보는 문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메코는 ‘빙룡궁’을 떨리는 손으로 움켜쥐었다.


여름엘프 추적자에게 쫓기며 사선을 넘나들던 시절 이후 이런 공포를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죽을지도 모른다. 육감이 그에게 경고했다.


눈을 뜬 남자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푸른 불꽃과도 같았다.


새벽 지척에 다다라 시퍼렇게 연해져 가던 어둠이 한밤의 깜깜함으로 돌아가 있었다.


순간 빛이 번뜩인다. 천둥이 친 것이었다. 지상에선 불길이 일어났다. 태울 건초 하나 없는 벌판임에도 불길은 소용돌이치는 마력을 잡아먹으며 사방으로 번졌다.



*



나르는 왼팔을 들어 올렸다. 그의 팔 전체에 퍼져 있던 기묘한 문신이 손목으로 몰려들어 화려한 팔찌처럼 변한 채 회전했다.


오른손이 팔목을 붙잡았다. 그러자 팔찌는 혈관을 타고 흐르는 것처럼 원래의 자리로 퍼져나갔다.


빙결된 의식이 회복된다. 그런데 그의 것이 아닌 기억이, 그의 것이 아닌 감정이 끝없이 흘러들어왔다.


팔을 들어 올린 것도 그가 아니었다. 정신은 온전히 깨어 있었지만, 몸은 그의 의지를 따라 움직이지 않았다.


몽유병 환자가 꿈속에서 현실을 본다면 이런 기분일까?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이는 육체를 보며 나르는 신기함을 느꼈다.


이 세계에 떨어진 후 느꼈던 기묘한 감각들이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정밀하고 거대하게 확장되고 있었다.


그는 구름을 불러 모으는 흐름을 보았다. 또 존재한다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미세한 존재들의 움직임을 보았다. 그리고 그를 지켜보고 있는 메코의 몸속에서 요동치는 기운까지도 보였다.


그 모든 것이 마력이란 것이라는 걸, 그는 문득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을 지각한 순간 그는 어떤 감정을 느꼈다. 더할 나위 없는 분노가 솟아났다.


활화산 같은 그 감정은 자신의 과거를 향한 것도 아니었고 메코에게 느낀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이 마력이 흘러가고 있는 어떤 현상에 관한 것이었다.


나르는 온 사방의 마력에 남아있는 어떤 존재들의 흔적을 느꼈다. 곧 이 세상 모든 것에 대한 분노가 폭발했다.


“으아아-!”


별안간 그의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상처 입은 짐승처럼 구슬프고 야성적이었다. 그리고 그 괴성을 따라 수백 줄기의 벼락이 지상으로 내리꽂혔다.


온 세계가 비명을 따라 울부짖는다. 그 순간 육체가 가속되었다.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 손아귀엔 메코의 턱이 쥐여 있었다. 그는 메코를 땅에 박아 넣은 채 지상에 기다란 상처를 만들며 비행했다.


메코의 턱은 악력으로 박살 나 기괴한 각도로 벌려져 있었다. 두 눈은 시뻘겋게 충혈되어 눈물이 흘렀고 돼지 비명 같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는 간절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다. 그러나 단단히 붙잡힌 턱은 어떤 단어도 만들어내지 못한 채 그것을 단순한 울음소리로 수렴시켰다.


끝없는 증오. 끓어오르거나 타오르거나. 금방 사라져야 할 감정이 꺼질 줄 모르고 끝없이 번져간다. 그것은 곧 길을 잃고 희생양을 찾아 헤맸다.


그리고 그의 눈앞엔 너무도 적절한 대상이 존재했다.


평생 상상조차 한 적 없는 온갖 잔인무도한 고문법이 떠올랐다. 나르의 눈이 그를 무가치하게 내려보았다.


메코가 신기하게 느껴졌다. 이미 존재를 알고 있던 대상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처음 보는 생명체처럼 느껴졌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고 곧 입가에 짙은 미소를 띄웠다. 찰나의 순간 그의 왼팔이 메코의 옆구리로 파고들었다.


“뀌에에엑!!”


메코는 다시 돼지처럼 소리 질렀다. 동시에 새하얀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라오를 쓰러뜨렸던 바람이었지만 그것은 마치 여름 햇살에 닿은 것처럼 삽시간에 녹아 사라졌다.


메코는 온 힘을 다해 몸부림쳤다. 사방에서 얼음이 폭발하듯 생겨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나르를 공격하기 위해, 혹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메코가 만들어낸 얼음은 목적을 시도조차 하지 못한 채 주조되는 족족 해체되었다.


나르는 복잡하게 뒤엉킨 마력의 흐름을 보았다. 실타래처럼, 하지만 일정한 유형에 따라 휘감긴 마력의 미로는 단순히 그가 쳐다보는 것만으로 탈출구가 탄로 나버렸다.


그것은 메코의 ‘마력 알고리즘’이었다. 평생을 전투에 종사하며 살아야 했던 전사로서 절대 들키지 말아야 할 비밀이 너무도 손쉽게 밝혀진 것이었다.


메코는 처절하게 절망했다.


이 모든 것을 간접 체험하고 있던 나르조차 전율이 일어났다. 그때 메코의 옆구리를 헤집던 왼손이 그의 갈비뼈를 움켜쥐었다.


다시 미소가 번졌다. 그의 마력이 왼손으로 흘렀다.


메코는 소리조차 지르지 못했다. 그의 오감이 새하얗게 불타는 것이 ‘보였다’.


마력은 신경과, 근육, 지방, 뼈, 육체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에 들러붙어 그것을 가장 자극하는 형태로 해체하고 조립하기를 반복했다.


처음 과학 실험을 하고 흥분한 아이처럼 그의 마력은 장난치듯 메코의 신체 곳곳을 들쑤셔 놓고 있었다.


고통을 견디려 온몸에 힘을 주던 메코의 두 눈이 압력으로 인해 터져 버렸다.


그 순간 갈비뼈를 쥔 왼손이 그의 몸 안에서 뽑혀 나왔다. 마력으로 액체가 되어버린 메코의 근육과 지방, 장기 일부가 함께 흘러나왔다.


나르는 자리에서 일어나 갈비뼈를 무가치하게 감상한 후 내팽개쳤다. 손아귀에서 풀려난 메코는 끔찍한 비명을 질렀다.


이제 그의 왼손은 등 뒤에 일렁이는 날개로 향해 있었다. 곧 열 쌍의 날개 중 하나가 움켜쥐어졌다. 그것을 내려보던 그가 말했다.


“봉안익?”


그것 역시 나르가 하려던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르는 봉안익이 무엇인지 또 그 말을 내뱉은 또 다른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어처구니없음과 분노. 그리고 다시 하나의 심상이 떠올랐다. 땅에 뿌리박힌 메코의 모습이었다.


울긋불긋한 혈관이 모두 몸 바깥으로 꺼내져 땅에 뿌리박히고, 헤집어진 살갗으로 신경이 드러난 자리마다 온갖 벌레가 들끓었다.


그는 혈관으로 대지의 기운을 흡수하고 마력을 통해 회전시켜 벌레가 뜯어 먹은 육체를 회복하는, 평생에 걸쳐 고문당할 모습이었다.


“안돼!”


메스꺼운 심상에 놀란 나르가 소리쳤다.


자신의 입에서 터진 비명을 들은 육체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하지만 그 관심은 다시 분풀이 대상에게 돌아갔다.


“으어······.”


메코는 터진 옆구리로 삐져나온 창자를 움켜쥔 채 바닥을 기고 있었다. 경로를 따라 시뻘건 길이 생겨났다.


공중에 뜬 그의 몸이 메코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메코의 귓가에 바람을 불어넣었다.


순간 떠오른 것은 메코가 자신을 탐하려 했다는 사실이었다. 육체가 그 비이성적인 성욕을 조롱하는 것이었다.


움찔거리는 메코의 어깨로 오른손 검지가 파고들었다.


인간의 외견을 구성하는 마력장이 해체되고 육체를 구성한 입자의 상호작용을 와해시키며 손가락은 두부 쑤시듯 손쉽게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다시 메코가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른 순간 돌멩이가 날아들었다.


“그만둬.”


샘이었다. 그녀는 그들을 찾아 급하게 뛰어온 듯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날아든 돌멩이에 뒤통수를 맞은 육체는 메코를 고문하던 것을 멈추고 샘을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왜 날개가 없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곧 그의 발이 땅에 디뎌졌다. 얼굴엔 빙글빙글 웃음이 솟아났다.


땅을 기고 있는 메코를 낀 채 천천히 돌아 걸어 샘을 마주 보는 위치에 섰다.


계속해서 끔찍한 심상이 떠올랐다. 이젠 피투성이가 된 샘의 모습이 보인다. 오른발이 천천히 들어 올려지고 있었다.


메코의 머리를 밟아 터뜨리려는 것이었다. 오로지 다음 화풀이 대상으로 낙점된 샘의 반응을 즐기기 위한 것이었다.


나르는 어떻게든 몸을 통제하려 했다. 그러나 시시각각 밀려드는 막대한 정보와 거스를 수 없는 감정들, 잔혹하기 그지없는 환상이 그를 번번이 막아섰다.


“멈추라잖아!!”


노성이 터지며 거대한 그림자가 그를 덮쳤다. 라오였다. 라오와 그는 함께 수차례 바닥을 뒹굴었다.


이윽고 위로 올라선 라오가 근육을 불끈거리며 그의 어깨를 붙들어 매었다.


“정신 차려 칼!”


라오의 갈색 눈동자가 그를 내려보고 있었다. 나르는 필사적으로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 애썼다.


지금 이 육체를 움직이고 있는 것이 ‘키세나르’의 영혼이건 혹은 다른 무엇이건 간에 어떻게든 멈춰야 했다.


잔혹한 복수심은 샘과 라오에게 이미 번져 있었다. 그 순간, 나르는 등에서 일렁이던 날개가 더욱 크게 빛나는 것을 느꼈다.


날개는 다시 찾아온 어둠을 모조리 쫓아낼 정도로 밝게 빛났다. 그리고 그가 오디세이아에서 처음 눈 뜬 날, 구름을 마셨던 때처럼 심장을 쥐여 짜는 고통이 몰려왔다.


“제······길······.”


입술 사이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라오는 몸부림치지 못하도록 더 강한 힘으로 찍어눌러 주었다.


온 세계를 분석하고 멋대로 주무르던 힘이 육신 바깥으로 흘러나갔다. 날개에서 뿜어져 나오던 백광이 스러진다.


열 쌍의 날개가 몸 안으로 빨려 들어오고 있었다. 동시에 물줄기처럼 흘러들던 기억과 감정의 흐름도 멈췄다.


나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작가의말

남은 연휴 즐겁게 보내세요~~!




2024년 9월 18일 오후 2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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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14 24.09.18 6 0 11쪽
22 20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13 24.09.17 6 0 13쪽
21 19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12 24.09.13 7 0 12쪽
20 18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11 24.09.12 9 0 16쪽
19 17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10 24.09.11 6 0 9쪽
18 16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9 24.09.09 9 0 11쪽
17 15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8 24.09.06 9 0 10쪽
16 14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7 24.09.05 9 0 12쪽
15 13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6 24.09.04 9 0 10쪽
14 12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5 24.09.03 10 0 10쪽
13 11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4 24.08.30 8 0 15쪽
12 10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3 24.08.29 9 0 10쪽
11 9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2 24.08.28 8 0 18쪽
10 8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1 24.08.27 6 0 11쪽
9 사게제리를 여행하는 지구인을 위한 안내서 24.08.23 8 0 5쪽
8 7화 - 오디세이아, 운명을 받아들이는 두 가지 방법 7 24.08.23 6 0 15쪽
7 6화 - 오디세이아, 운명을 받아들이는 두 가지 방법 6 24.08.22 7 0 15쪽
6 5화 - 오디세이아, 운명을 받아들이는 두 가지 방법 5 24.08.21 7 0 12쪽
5 4화 - 오디세이아, 운명을 받아들이는 두 가지 방법 4 24.08.20 9 0 15쪽
4 3화 - 오디세이아, 운명을 받아들이는 두 가지 방법 3 24.08.18 9 0 14쪽
3 2화 - 오디세이아, 운명을 받아들이는 두 가지 방법 2 24.08.17 12 0 14쪽
2 1화 - 오디세이아, 운명을 받아들이는 두 가지 방법 1 24.08.16 20 0 11쪽
1 서막 24.08.16 26 0 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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