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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유정란
그림/삽화
박유정란
작품등록일 :
2024.08.16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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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9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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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3

DUMMY

10화



“오디세이아는 여전히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세르쇼 선장이 거짓을 고한 것 같진 않습니다. 다른 선원의 증언도 모두 일치했습니다.”


밤이 완연히 익어가고 있었지만 마르단 성 집무실은 환했다. 축제가 다가오며 관광객이 늘고 번화가의 불빛은 늦은 밤까지 꺼질 줄 몰랐다.


연례행사처럼 돌아온 민원 폭주에 남작은 상점 운영시간을 자정까지로 제한하였고 노상을 즐기는 취객은 병사를 투입해 해산시켰다.


‘귀르작 핀 마르단’은 급속도로 몰려오는 피곤을 느꼈다. 시력이 좋지 않은 그를 위해 특별히 수도에서 공수된 안경이 짐으로 느껴질 지경이었다.


출항제는 매년 돌아오는 행사였지만 올해는 유독 그를 괴롭게 만드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는 한쪽 벽에 걸린 선대 남작 ‘주사 핀 마르단’의 초상화를 보았다. 황도 말단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는 탁월한 행정 능력으로 이례적인 승진을 거듭했다.


말년에 이르러 그는 ‘귀족회의’의 추천을 받아 남작 위에 올랐고 베로니카 영주로 봉해졌다.


평민으로 태어나 귀족이 된 신화를 쓴 아버지를 귀르작은 원망했다. 그는 얼마나 ‘귀족적’인지 스스로 던져야 할 평생의 고민을 물려받았다.


아버지가 남작 위에 올랐을 때 그는 이미 성년을 훌쩍 넘긴 나이였다. 평생을 한 도시에 묶여 살아야 했던 아버지와 달리 그는 다양한 도시를 방랑하는 여행자가 되고 싶었다.


그런 그에게 귀족이 갖춰야 할 예절이라던가 관습 등은 거추장스럽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하물며 ‘영주’라는 자리는 짐에 불과했다. 안 맞는 옷인 것이다.


“답답하군.”


“창문을 열까요?”


“아닐세, 그런 문제가 아니야.”


한숨조차 함부로 쉴 수 없는 처지가 처량했던 귀르작은 안경을 벗었다.


집무용 책상엔 은색 검 한 자루가 올려져 있었다. 묘한 곡선을 그리는 날과 ‘물푸레나무’가 음각된 손잡이까지 하나의 작품이라 불러도 무방할 검이었다.


날 끝부터 무게추까지 하나의 재질로 이루어진 그것은 ‘실반미스랄’로 만들어진 물건이었다. 집사장 게담이 확인하였으니 틀림없을 것이다.


같은 무게의 보석과도 바꾸기 힘들다는 금속으로 만들어진 검이라면 분명 만족스러운 뇌물일 것이라고 남작은 생각했다.


“세르쇼 선장에게 징발한 것이라 했던가?”


“그렇습니다.”


“보상은 해주었나?”


“지난 입항을 비롯해 앞으로 일 년간 발생할 세금을 면해주었습니다. 보상금도 일정액 챙겨주었습니다. 다만······.”


“다만?”


“어선을 호위하던 용병이 그 검을 습득한 건 자신이니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했다 합니다.”


“인간 탄환 말인가?”


“예.”


“가급적 잡음이 나오지 않도록 하게. 요즘같이 하수상할 때 이런 물건이 수중에 들어온 건 하늘이 도운 일일세. 이런 기회를 함부로 날려선 안 돼.”


“예. 이미 몇 가지 조치를 해 두었습니다.”


“잘 했을 거라 믿네.”


귀르작은 일 년 전 베로니카에 나타나, 반년이 채 지나기도 전 가장 유명한 인물이 된 거구를 떠올렸다.


갑판에서 빈둥대던 그가 해적선 발견하자 마치 탄환처럼 날아가 단신으로 적선의 해적 수십을 박살 냈다는 소문은 무시할 수 없었다.


이치를 초월한 초인은 언제나 가장 경계해야 하는 존재였다. 그리고 그런 초인 중 제국 신민이라면 누구나 존경과 두려움을 동시에 품은 존재가 영지로 오고 있다는 사실을 곱씹었다.


남작은 한쪽으로 고이 밀어놓았던 액자를 보았다. 참을 수 없는 비애가 몰려왔다.


그것은 그와 단 하나뿐인 자식이 함께 찍힌 사진이었다. ‘황립 팔렌치아 아카데미’ 정문을 배경으로 활짝 웃고 있는 딸이 보였다.


“하필······.”


목구멍까지 슬픔이 치밀어 오른다. 그녀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 얼마나 커다란 자랑이었는지는 말로 다 할 수 없다.


이제는 딸이 태어난 순간부터 함께 숨 쉬어 온 모든 기쁨의 시간이 그만큼 자신을 짓누르는 무게가 되어 돌아왔다.


그는 몇 개월 전 차마 그녀의 얼굴을 다시 볼 자신이 없어 마르단 성 바깥으로 쫓아 버린 일을 떠올렸다.


“마음을 독하게 먹으셔야 합니다 영주님. ‘제리네리’가 모래면 도착할 것입니다.”


“알고 있네.”


그는 입술을 꽉 물었다. 꽤 오랜 시간 이어진 보고에도 불구하고 게담은 흐트러짐이 없었다.


귀르작은 자신보단 게담이 남작에, 나아가 ‘베로니카 영주’란 자리에 더 어울릴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나딘에게 사람은 보냈나?”


“소남작껜 기사 몇을 항시 붙여두었습니다. 새벽이 지나면 모셔올 예정입니다.”


“고맙네. 게담.”


인사는 무의식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귀르작은 그것을 바로 잡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고인이 된 아버지나, 영주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기라면 게담 조차 남작은 함부로 감사를 표해선 안 된다고 조언했을 것이다.


하지만 게담은 이런 감정적인 일을 지적할 정도로 눈치 없는 사람도 아니었다.


남작은 그의 유일한 자랑이자, 자부심, 그리고 삶의 이유였던 외동딸에 대해 생각했다. 몰락한 가문의 여식이었던 부인과 그 사이에서 태어난 딸은 이제 없다고 해도 무방한 존재였다.


그는 그리움과 슬픔, 또 그녀와 함께했던 모든 행복이 떠오름과 동시에 형용할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귀족으로 온갖 특권을 누리는 그가 하기엔 역설적이기 그지없는 말이 입안을 맴돌았다. ‘세상은 어찌 이리 불합리한가?’


“이제 물러가게. 좀 쉬어야겠네.”


“받들겠습니다.”


집사장은 고개를 숙인 후 천천히 물러났다.


새치로 가득한 그의 머리를 보고 있던 귀르작은 의자로 늘어졌다. 두 눈을 지그시 누르던 남작은 다시 한번 액자를 보았다. 딸의 환한 미소를.



*



“그 검, 반드시 찾아야 하는 이유가 있는 거야?”


나르는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무궁무진을 찾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그것을 되찾고 싶다는 생각은 어쩌면 아름다운 것을 소유하고 싶다는 욕망에 불과할지 몰랐다.


하지만 그것을 솔직하게 말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라오는 무궁무진을 되찾을 수 있게 도와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고 또 이 세계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움을 내민 유일한 존재이기도 했다.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구해주고, 재워주고, 먹여주는 그의 선행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자신은? 있는 그대로 말하자면, 반반한 얼굴로 그가 연정을 품고 있는 여자와 놀아날 생각이나 하지 않았던가?


“모르겠어. 다만 그 검을 준 사람이 그것을 소중히 여겼기에 되찾고 싶긴 해.”


간신히 생각해낸 변명이었다. 죽지 않기 위해 쥐었던 검. 사실 그는 카즈에게 검을 건네받은 것이라고 하기도 어려웠다.


그녀는 모든 걸 포기하고 자신을 죽일 생각이었고 자신은 죽지 않기 위해 검을 쥐었을 뿐이었다.


원하는 대로 해주지 않은 그녀를 화나게 만들려고 검을 쥐지 않겠다고 했던 것도 자신 아니었던가?


나르는 붕대가 감긴 옆구리를 보았다. 라오의 이야기에 의하면 그 일 이후 일주일 정도 지난 것 같았다.


그녀의 검이 박혔던 옆구리엔 생채기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는 회복력이었다.


“상처는 어때?”


주방에서 라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괜히 놀라 재빨리 상의를 걸쳤다.


“피가 나거나 하진 않네.”


다시 거짓말이었다. 나르는 쓴웃음을 지으며 주방으로 향했다. 라오가 어울리지 않는 앞치마를 입고 스튜를 끓이는 중이었다.


도마에는 잘 손질된 생선이 보였다. 몸을 회복하기 위해선 잘 먹어야 한다나 뭐라나. 불과 삼 일도 되지 않은 사이였지만 원래부터 알고 지낸 친구처럼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앗 뜨거워!”


스튜를 맛보려던 라오가 날뛰었다. 그의 거대한 몸이 뛸 때마다 실내가 쿵, 쿵 울렸다.


시트콤 같은 광경이었지만 나르는 심란했다. 생각해보면 그가 망상했던 삶이 적나라하게 다가와 있었다. 성격 좋은 친구와 이성이 호기심을 보일 정도로 잘난 외모.


그건 성인이 되고 나선 망상조차 하지 않을 정도로 부끄러운 상상이었는데, 베로니카를 거닐 때마다 사람들의 눈길이 꽂히는 건 착각이 아니었다. 그는 꽃병에 꽂힌 파란 꽃을 보았다.


이름 모를 소녀가 품에 안겨준 그 꽃은, 그가 오디세이아에서 짓밟았던 것과 같은 종이었다.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외모엔 관심 없는 척 살았지만, 그건 가질 수 없기에 마모될 자존심을 지키려는 태도에 불과했던 것이었다.


사실 자신은 이만큼이나 얄팍한 사람인 것이다. 지금 그가 가진 건, 꽃밭을 짓밟았던 일에 대한 후회보다 그 꽃을 선물 받은 일에 대한 만족뿐이었다.


애써 좋은 사람이 되려고 카즈와 겪은 일을 후회하려 해봤지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자기 자신을 속일 수는 없었다.


하지만 타인이라면? 그는 생각했다. 언제까지 그리고 어디까지 거짓말해야 하는 걸까. 문득 모든 것을 털어놓고 싶었다.


‘나는 네가 말하는 그 불신자다.’, ‘오디세이아라는 하늘섬에서 눈을 떴고, 우기엘프와 싸운 끝에 바다로 추락했다.’, ‘그 사람이 아름다운 검을 완성하는 게 내 운명이라고 했다.’


“칼?”


스튜를 옮긴 라오가 의아하게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다소 늦은 아침을 먹고 안드리키에게 찾아갈 작정이었다.


본래대로라면 베로니카 공관에 있어야 할 그였지만, 오늘은 모든 사람이 노동에서 벗어 나는 ‘태양의 날’이기에 집으로 가야 만날 수 있다고 했다.


“전투를 치르기 전엔 늘 배가 든든해야 하는 법이지.”


라오가 스튜를 접시 가득 부어주었다. 그리고 그는 숟가락을 그대로 냄비에 꽂았다.


“뭐? 이 덩치 유지하려면 많이 먹어야 하는 거 몰라?”


별생각 없이 테이블을 올려본 나르였다. 라오가 신경 쓰였는지 투덜거렸다. 그 모습이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고, 소름이 돋았다.


아직 라오의 첫인사가 뇌리에 박혀 있었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최초업로드 - 2024년 8월 29일 오전 11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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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21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14 24.09.18 5 0 11쪽
22 20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13 24.09.17 6 0 13쪽
21 19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12 24.09.13 7 0 12쪽
20 18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11 24.09.12 9 0 16쪽
19 17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10 24.09.11 6 0 9쪽
18 16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9 24.09.09 9 0 11쪽
17 15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8 24.09.06 9 0 10쪽
16 14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7 24.09.05 9 0 12쪽
15 13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6 24.09.04 9 0 10쪽
14 12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5 24.09.03 10 0 10쪽
13 11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4 24.08.30 8 0 15쪽
» 10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3 24.08.29 9 0 10쪽
11 9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2 24.08.28 7 0 18쪽
10 8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1 24.08.27 6 0 11쪽
9 사게제리를 여행하는 지구인을 위한 안내서 24.08.23 8 0 5쪽
8 7화 - 오디세이아, 운명을 받아들이는 두 가지 방법 7 24.08.23 6 0 15쪽
7 6화 - 오디세이아, 운명을 받아들이는 두 가지 방법 6 24.08.22 7 0 15쪽
6 5화 - 오디세이아, 운명을 받아들이는 두 가지 방법 5 24.08.21 7 0 12쪽
5 4화 - 오디세이아, 운명을 받아들이는 두 가지 방법 4 24.08.20 9 0 15쪽
4 3화 - 오디세이아, 운명을 받아들이는 두 가지 방법 3 24.08.18 9 0 14쪽
3 2화 - 오디세이아, 운명을 받아들이는 두 가지 방법 2 24.08.17 12 0 14쪽
2 1화 - 오디세이아, 운명을 받아들이는 두 가지 방법 1 24.08.16 20 0 11쪽
1 서막 24.08.16 26 0 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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