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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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유정란
그림/삽화
박유정란
작품등록일 :
2024.08.16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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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9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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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6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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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 오디세이아, 운명을 받아들이는 두 가지 방법 1

DUMMY

1화



‘너는 죽었어.’


울려 퍼지는 소리였다.


‘나를 받아들여.’


타종 후 퍼져나가는 진동처럼 잔상으로 남은 목소리를 뒤로 한 채 남자는 눈을 떴다.


그는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였다. 그가 마지막으로 봤던 광경은 하늘이었고 하늘에선 불꽃이 쏟아지고 있었다. 비처럼.


그것은 마치 새해 소원을 빌기 위해 터뜨리곤 했던 불꽃놀이를 하늘에서 반려하는 풍경 같았다.


남자는 팔을 움직이려 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아직 팔이 있음을 깨달았다. 좁은 곳에 갇혀있는 것처럼 답답했고 짓누를 듯 떨어지는 어둠을 밀쳐내기 위해 남자는 두 팔을 올렸다.


아주 가까운 곳에 손이 닿았다. 남자는 힘을 주어 그것을 밀어내었다.


그러나 여전히 어둠이 들어차 있었다. 그가 누워있던 곳은 관이라고 불러도 무방한 물건이었다. 다만 다른 점이라면 스스로 빛난다는 사실과 알 수 없는 문자가 잔뜩 새겨져 있다는 것이었다.


몸을 일으키려던 그는 관과 함께 쏟아져 내렸다. 얼마나 오래 이곳에 갇혀있던 것일까. 지끈거리는 머리와 미지근한 숨결, 울렁이는 속, 누워있었음에도 턱 끝까지 차오르는 숨.


남자는 한참을 주저앉아 헐떡였다.


곧 그는 이곳이 동굴 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불빛 하나 없는 곳이었지만 녹색의 기이한 글자가 살아있기라도 한 양 주위를 밝히며 날아다녔다.


그 신비스러운 광경에 남자는 자신이 먼 미래에 깨어난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녹색 빛은 폐광 속 양초처럼 미약했다. 주변은 여전히 어두웠고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가늠하지 못하던 그는 혼란스러웠다.


이내 남자는 결심했다. 신선한 공기가 마시고 싶었다. 이 갑갑함을 참을 수 없었다.


남자는 주변을 좀 더 잘 살피기 위해 두 눈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불빛을 향해 한 발 내디딘 그는 그대로 굴러떨어졌다.


“아이고!”


깨어난 후 첫 마디치곤 굉장히 경박한 소리였지만 굴러떨어진 사람이 낸 소리로는 꽤 합리적인 단말마였다. 그가 내디딘 곳은 단단한 바닥이 아닌 허공이었다.


그는 자신이 굴러떨어진 자리를 올려 보았다. 그것은 재단처럼 보였고 예의 알 수 없는 문자가 음각된 벽돌이 틈새 하나 없이 정교하게 쌓아 올려져 있었다.


꽤 높은 위치에서 굴러떨어졌음에도 남자가 제정신일 수 있는 건 떨어진 곳이 단단한 바닥이 아닌 샘물인 덕이었다.


신비로웠다. 처음엔 바동거리던 남자는 양발이 바닥에 닿았을 때 수위가 허리 높이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았다. 이내 주위를 둘러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녹색의 글자들은 번데기를 찢는 나비처럼 수면에서 태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탑에 음각된 문자를 어슬렁거리기도 했고 공동의 높이를 가늠해볼 모양인지 빠르게 솟아오르다 천장에 부딪히곤 한 대 쥐어박힌 꼬마처럼 부리나케 달아나곤 했다.


남자는 고개를 젓곤 물살을 헤쳤다. 수위는 발걸음을 방해하기엔 충분했다. 꽤 긴 시간을 헤엄치듯 걸어간 끝에 빛이 새어 나오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는 숨조차 차지 않는 신체가 의아했다. 마침내 마른 바닥이었다. 공동의 높이가 낮아졌고 희미한 빛의 원산지가 코앞이었다.


그것은 입구라기보단 부서진 틈 같았다. 빛을 향해 발 디딘 그는 작은 탄성을 뱉었다.


동굴의 바깥은 더 넓은 공동이었다. 가장 높은 곳과 가장 낮은 곳을 잇는 열주가 원을 그리며 중앙을 둘러싸고 있었고 중앙엔 불룩한 배를 가진 독특한 열주가 서 있었다.


열주의 불룩한 곳은 불꽃이라도 잉태한 양 주홍빛이 일렁였다. 동굴을 날아다니고 있던 글자와 같은 모양의 문자가 천장에 양각되어 있었다.


그가 걸어 나온 틈은 역시 깨어진 벽이었다. 커다란 돌덩이 몇 개가 공동 중앙으로 미끄러져 있었다.


이쯤 되자 그는 의심스러웠다. 여긴 대체 어딘 걸까?


한참 꿈에 부정당하던 시절 즐겨 읽었던 소설의 주인공이 생각났다. 다른 세계로 전이 되거나, 혹은 모종의 이유로 냉동되고 오랜 세월이 지나 후 깨어나 구원자가 되는 이야기들.


그는 혹시 자신이 그런 상황에 놓인 것은 아닐지 조금 설렜다.


또는 사고를 책임져야 할 기업 총수가 이상한 미신을 믿어서, 자신을 괴상한 재단에 가둬놓고 종교적인 의식으로 되살린 것은 아닌지 그런 공상도 떠올랐다.


뭐가 어찌됐건 이상한 풍경이었다.


배불뚝이 열주 반대편에는 아무래도 바깥으로 향하는 복도가 있는 모양이었다. 잔뜩 바스라졌어도 인공적인 주홍빛 정도는 간단하게 이겨내는 백색이 은은하게 뿜어지고 있었다.


공동의 구조는 구체에 가까웠다. 그는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하며 반대편으로 나아갔다. 시야를 가리고 있던 배불뚝이 열주 혹은 주홍 화로를 지나치자 복도가 보였다.


입구엔 다양한 형태의 구름으로 이어진 아치가 있었다. 단단한 모양새로 보아 재질은 석조 같았으나 석양을 품은 구름부터 가을 하늘의 지고한 구름까지 다양한 색채가 자연스럽게 표현되어 있었다.


남자는 아치에 눈길을 빼앗긴 채 걸음을 내디뎠다. 복도로 들어선 순간 강한 빛이 그의 시야를 빼앗았다. 남자는 고개를 돌린 채 한 걸음씩 빛을 향해 나아갔다.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강한 빛이었다.


남자는 빛을 등진 채 공동 쪽을 바라보았다. 등 뒤에서 뻗어 나온 빛이 환하게 비추고 있는 공동의 내부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는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이곳을 떠나지 말라는 것처럼, 너에게 가장 안전한 곳은 이곳이라는 것처럼, 공동의 아우성이 들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단지 바깥 공기에 대한 간절함, 그것 하나만으로도 그는 공동의 만류를 뿌리치고 한 걸음 다시 나아갈 수 있었다.


복도에는 화려한 색감의 그림이 가득했다. 그러나 강렬한 빛 때문에 오로지 실루엣만이 어슴푸레하게 보였다. 한 걸음씩 내디딜수록 코와 입으로 스며드는 공기가 조금씩 더 차가워졌다.


“아······.”


마침내 도달한 복도의 끝에서 그는 다시금 언어를 잃고 말았다. 단지 바라보는 것만으로 감정의 동요를 참을 수 없게 만드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커다란 세상이었다. 여기저기 흩뿌려진 호수, 호수와 호수를 잇는 강, 날아오르는 새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감싸 안은 산맥과 산맥 바깥으로 펼쳐진 구름.


구름? 그러고 보니 저 아래는 지상이라기엔 구름의 높이가 너무 낮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자 천장과 벽이 사라졌다. 커다란 새가 내려앉기 위한 착륙장처럼 아니 떠나기 위한 이륙장인 것처럼.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아찔함마저 잊은 채 그는 이륙장 끄트머리에 서서 압도적인 풍경에 경도되고 말았다.


동시에 그는 살면서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일을 경험하고 있었다. 저 멀리 산맥 너머 분명 눈으로 보지 못해야 할 곳의 광경이 머릿속에 그려지고 있었다.


산맥을 둘러싸듯 바깥을 가린 구름 밑으로는 다시 허공이 펼쳐져 있고 그 아래엔 다시 거대한 대륙이 있음을 그는 느꼈다.


발아래 놓인 드넓은 땅은 대륙에서 솟아오른 봉우리도 아니었고, 산맥으로 둘러싸인 분지도 아니었다. 단지 하늘에 떠 있는 것이었다.


남자는 이곳을 ‘하늘섬’이라고 불러야 하나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감각이 곧 그 생각을 정정해주었다. 하늘섬이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말하자면 이곳은 드넓은 창공에서 흐르는 구름을 벗 삼아 유유히 흘러가는 한 척의 조각배였던 것이다.


그는 주저앉고 말았다. 그리고 곧 복도를 밝히던 빛과 두 눈을 맞추었다. 이 거대한 함선의 뱃머리라 할 수 있는 저 멀리 반대편, 산맥 끄트머리 너머로 해가 지고 있었다.


가려야 할 것은 그림자로 덮고 드러내야 할 것은 잔열로 달궈놓으며 낮의 태양이 그렸던 풍경보다 짙은 색으로 채색되어가는 자연을 내려 보며 그는 잠시 생각을 뿌리쳤다.


해가 진다. 해는 지고 있었다. 그는 우두커니 지는 해를 보았다. 지는 해가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면서, 아름답다는 말은 어디에서 온 것인지를 물어보면서.


그는 저물어가는 주홍빛보다 이미 해가 지고 식은 온기의 보랏빛을 더 사랑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해가 반쯤 저문 황혼의 그리움은 언제나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지만, 그 그리움마저 식은 후 피어오르는 잔향이야말로 더욱 마음을 뒤흔드는 것이었다.


거대한 암석을 그대로 깎아 만든 이 노대에는 황량함이 있었다. 낮과 밤의 색깔이 뒤섞여 만들어지는 보라색 잔광이 무척 어울리는 곳이었다.


그러나 그는 더할 나위 없는 공포를 느꼈다.


지금까지 애써 부정하고 있던 것들이 떠올랐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신은 죽은 게 분명한 것이다. 들끓는 용암만큼이나 뜨거울 액체에 직격당한 사람이 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이곳은 사후세계일까?


그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 보았다. 그곳엔 기이한 것이 있었다. 방금 모두 사라졌던 노을이 고리로 그 형태를 바꾸어 떠 있던 것이다.


그는 죽은 사람을 표현할 때 머리 위에 고리를 그리곤 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런데 고리를 인식한 순간, 구름으로 만들어진 것 같은 그것이 나선을 그리며 그에게 떨어져 내렸다.


그것은 남자의 눈으로, 코로, 귀로 모든 구멍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볼 수 없음에도 남자는 이 하늘섬부터 산맥 바깥을 떠돌던 구름까지, 세상의 모든 구름이 자신에게 몰려오고 있다고 느꼈다.


그는 소리 지르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몰려드는 구름은 더욱 짙어졌고 숨쉬기도 힘들었다.


그 순간 육체 구석구석을 쥐어짜듯 비트는 감각이 저 심장 깊숙한 곳에서부터 일어나 비명마저 잡아먹던 구름을 쫓아내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는 마음껏 소리 지를 수 있었다. 그에게 몰려들던 구름은 비명에 놀라 달아나 버렸다. 그러나 영원할 것 같은 고통이 계속해서 그를 괴롭혔다.


칼날을 삼킨 기분이었다. 남자는 몸을 웅크렸다. 잠시 뒤 시야가 천천히 회복되었다.


여전한 고통 속에서 그는 웅크린 채 하늘을 보았다. 그러나 어깻죽지에서 솟아오른 무언가가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그것은 일견 날개처럼 보였다. 공동에서 본 것과 닮은 문자가 반투명 백색 띠에 촘촘히 적혀 있었고 그러한 띠 여러 장이 그의 등에서 솟아 있었다.


신기루처럼 일렁이는 그 날개는 도무지 현실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남자는 더이상 생각을 이어갈 수 없었다.


고통은 끝이 났지만, 심장까지 뱉어낼 것 같은 강력한 구토감이 몰려왔다.


그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화 업로드는 8월 17일 토요일 오후 2시 예정입니다.



최초 업로드 : 2024년 8월 16일 오후 1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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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15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8 24.09.06 9 0 10쪽
16 14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7 24.09.05 9 0 12쪽
15 13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6 24.09.04 8 0 10쪽
14 12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5 24.09.03 10 0 10쪽
13 11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4 24.08.30 8 0 15쪽
12 10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3 24.08.29 8 0 10쪽
11 9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2 24.08.28 7 0 18쪽
10 8화 - 베로니카, 도망친 낙원 1 24.08.27 6 0 11쪽
9 사게제리를 여행하는 지구인을 위한 안내서 24.08.23 8 0 5쪽
8 7화 - 오디세이아, 운명을 받아들이는 두 가지 방법 7 24.08.23 6 0 15쪽
7 6화 - 오디세이아, 운명을 받아들이는 두 가지 방법 6 24.08.22 7 0 15쪽
6 5화 - 오디세이아, 운명을 받아들이는 두 가지 방법 5 24.08.21 7 0 12쪽
5 4화 - 오디세이아, 운명을 받아들이는 두 가지 방법 4 24.08.20 8 0 15쪽
4 3화 - 오디세이아, 운명을 받아들이는 두 가지 방법 3 24.08.18 9 0 14쪽
3 2화 - 오디세이아, 운명을 받아들이는 두 가지 방법 2 24.08.17 12 0 14쪽
» 1화 - 오디세이아, 운명을 받아들이는 두 가지 방법 1 24.08.16 20 0 11쪽
1 서막 24.08.16 26 0 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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