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머리 러시아군 대원수

무료웹소설 > 작가연재 > 대체역사, 판타지

새글

핏콩
작품등록일 :
2024.08.25 21:27
최근연재일 :
2024.09.18 20:00
연재수 :
25 회
조회수 :
142,624
추천수 :
7,927
글자수 :
134,052

작성
24.09.16 20:02
조회
4,316
추천
314
글자
11쪽

치욕의 날

DUMMY

요안 콘스탄티노비치 공작. 황족이자 독실한 정교회 신자.


원 역사였다면 제1생도군단과 니콜라예프 기병학교를 졸업하고 혁명 전까지 평범히 살아갔을 황족이었지만, 그의 운명은 ‘성전’에서 돌아온 후배 하나를 만나게 되면서 비틀렸다.


약탈과 학살에 열중하던 다른 열강의 군대와 달리 제국의 군대는 신실한 그리스도의 사도답게 기독교인을 구하고 무지한 중국인들을 보호하는데 집중했다지 않은가.


그 성전의 중심에 있었던 자가 바로 후배, 루슬란 킴이었다.


과연 그의 입으로 들은 무용담은 몇날며칠을 곱씹을 정도로 감동적인 것이었다.


끝도 없이 꾸역꾸역 몰려드는 이교도의 군세와 그들이 부리는 사탄의 주술(의화권).


그리고 거기에 맞선 러시아군의 치열한 투쟁.


과연 이것을 동경하지 않을 신자가 어디에 있겠는가.


원래부터가 진지하게 종교에 귀의하는 것을 꿈꿨을 정도로 신실한 요안이었으니, 그 신앙심이 성전에 대한 동경과 갈망으로 바뀌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몇 년 후.


동방의 이교도 국가인 일본의 기습공격으로 전쟁이 터지고, 정교회가 성전을 선포하자 그는 확신했다.


이것은 운명이었다.


그가 아버지의 명에 의해 제1생도군단에 편입한 것도, 그의 기도회 후배 중에 성전 참전 경력자가 있었던 것도 모두 주님의 계획이었던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를 이 싸움에 이끌기 위하여 자신을 학교에 들여보내고, 오늘의 인연을 만들어주신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 그가 루슬란의 행동을 의심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역시 후배로군! 망설임없이 자신의 손을 저렇게······!’


‘동양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결의를 표할 때 쓰는 예법’이라는 혈서 역시 이교도의 주술 같은 것이 아니라 그만큼 독실한 루슬란의 결심으로만 비쳤을 뿐.


그렇다면 자신도 질 수는 없었다.


자기보다 세 살이나 어린 후배의 결의에 뒤질 수는 없지 않은가.


요안은 망설임없이 자신의 손가락을 잡고 깨물었다.


그리고 비명이 튀어나왔다.


“끄아아아악!”



* * *



“야, 베틀리츠. 요안 선배님은 어디 갔냐?”


“몰라. 아까까지 여기 계시지 않았나?”


대충 ‘경애하는 차르 니콜라이 2세 폐하······’까지 썼을 때 쯤, 내가 고개를 쳐들고 묻자 마침 닭 한 마리를 들고 오던 베틀리츠가 대답했다.


화장실이라도 간건가.


“정말 나는 안 깨물어도 되는거지?”


베틀리츠가 내 손가락을 보더니 표정을 찡그리면서 물었다.


“그래, 인마. 애초에 이 긴 글을 어떻게 다 적냐.”


솔직히 혈서 같은거 쓰는 입장에서 할말은 아니지만 상당히 그로테스크한 방법이다.


이건 일종의 퍼포먼스니까, 그냥 손 깨물었다는 행위 자체가 중요한거지.


그러나 시각적 효과는 충분해야했기에, 나는 베틀리츠를 시켜서 닭이나 한 마리 쌔벼오게 했다.


형 네 명이 전부 이 학교 다녀서 호그와트 비밀지도라도 만들어준건지 구석구석 모르는데가 없던 베틀리츠는 당연하다는 듯이 닭을 가져왔다.


그 대가로 까짓거 청원서에 같이 이름 올려주기로 한거고.


요안 선배도 닭의 소중한 희생으로 쓰여진 청원서에 마찬가지로 마지막으로 이름만 쓰면 되는데.


“후배! 어떤가! 이정도면 되겠나!”


열 손가락이 모두 퉁퉁 부은 채 나타난 요안을 보고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아프겠다.’


- 눈 봐라. 살짝 돌아버린 것 같은데.


아니, 이건 요식행위라고 방금 설명했던 것 같은데. 안듣고 있었나?


나도 귀하신 황족 몸에 생채기 낼 생각은 없었는데 자기가 나서서 저런 짓을 하다니.


나는 슬쩍 눈을 돌린 채로 청원서를 내밀며 말했다. 출진할 때까지는 다 낫겠지.


“어쨌거나 차르께 확실히 전해주십시오.”


“맡겨만 주게!”


얌전해보이던 요안 선배가 이런 똘기가 있을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뭐······ 그래도 별일이야 있겠냐.


아무리 그래도 황족인데. 후방 부대나 참모부로 뺄테니. 사고가 일어나진 않을거다. 아마도.



* * *



요안의 인맥을 통해서 차르의 궁전에 던져넣은 혈서는 즉각적인 효과를 발휘했다.


이미 다른 생도들의 청원도 수도 없이 전쟁성을 두들기고 있었지만, 우리만큼 임팩트 있는 청원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리석은 생도들은 자원입대에도 퍼포먼스가 필요하다는걸 인지하지 못했지만, 동양 수천년의 정수가 담긴 혈서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차르께서는 떨떠름해 하셨다지만, 그래도 효과가 좋았으니 다행인 것 같네.”


요안의 말로는 차르보다는 오히려 전쟁성의 군인과 관료들 사이에서 더 큰 파장이 일어났다고 한다.


“킴 생도가 이번에는 같은 동양인의 행패에 분노해서 직접 피로 청원서를 썼답니다!”


“일본은 이것을 아시아인의 해방을 위한 전쟁이라고 선전하고 있습니다. 킴 생도가, 그것도 동양 전통의 방식으로 청원서를 올린 것은 그들의 주장이 전부 거짓이라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그 어린 생도들이 이만한 글자를 피로 쓰기 위해선 얼마나 많은 각오가 필요했겠습니까! 반드시 참전시켜 주어야 합니다!!”


‘아,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미개한 풍습인 것 같아요······’ 같은 소수의 목소리는 금세 묻혀 버렸다.


그런 이들 또한 황족과 ‘창공의 정복자’가 절절히 쓴 청원서가 선전에 도움이 될거라는 데에는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이유로 전쟁성은 차르의 허락을 얻어(우리 허락은 안 구했다) 이를 언론에 공개했고.


[요안 콘스탄티노비치 전하, 뼈를 깎는 정신으로 적어낸 자필 청원서!]


[애국생도 루슬란 니콜라예비치 킴, 이번에는 일본을 때려잡기 위해 나선다?]


[전쟁성 “일본의 거짓된 기만 우리 생도들의 손에 폭로당해”]


두 장의 청원서 사진은 며칠 안에 온 신문지상을 도배해버렸다.


혈서처럼 자극적인 물건이 아니었으면 적당히 단신으로 보도하다 그쳤을텐데, 여러 의미로 적잖이 충격적이었던 모양이다.


당연히 나에게 생도들의 진정을 부탁했던 포코틸로 소장은 불편한 감정을 은근히 내비쳤다.


콘스탄틴 대공이 또 쪼아대기라도 한 모양이지.


“교장 선생님께서도 요안 선배가 피로 쓴 청원서 사진을 보셨잖습니까? 그런 각오를 제가 어떻게 꺾을 수 있었겠습니까?”


“저는 최대한 선배를 말리려고 했지만 그 의지가 보시다시피 너무 굳었습니다. 더 만류한다면 같은 사나이로서 실례를 범하는 꼴이었겠죠.”


“그런데 굳이 자네가 같이 청원서를 작성한 이유가 뭔가?”


“그야 당연히 요안 선배를 홀로 위험한 전장에 내보낼 수는 없으니까요! 저는 이미 참전 경력이 있으니, 요안 선배를 무사히 데리고 오려면 이 방법 밖에는 없을거라 판단했습니다.”


“어······ 음······ 그렇게까지 하라고 한 적은 없었지만 알겠네.”


나한테 해놓은 말이 있던 포코틸로는 그 정도 선에서 대화를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와서 참전 취소 따위를 선언하며 엎지른 물을 주워담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어쨌든 이렇게 동네방네 광고까지 때려놓은 보람은 있었다.


“이렇게까지 화제가 되었는데 저 생도들, 그냥 병사로 보낼겁니까?”


“황족을 고작 병사로 삼아서 전장에 내보낼 수는 없습니다! 이건 선임들부터가 난감할거에요!”


우리에게는 황족까지 있었던 탓에 더더욱 이야기는 손쉬웠다.


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 대공은 자기 아들이 일개 병사로 전장에 나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황족이니 참모부로 빼기야 하겠지만, 그래도 사병보다는 장교로 가야 참모부에 붙어있을 명분이 선다고 생각했던걸까.


마침 우리의 청원이 언론까지 신나게 탄 마당이니 명분은 충분했다.


“황족을 일개 병사로 소속시켜 전장에 내보낼 수는 없습니다!”


그리하여 요안 콘스탄티노비치, 소위로 임관.


이러면 같이 청원서에 이름이 올라간 우리 역시 빠질 수가 없다.


군대에서도 사단장 아들이 입대하면 혼자만 뽑혀가는게 아니라 앞뒤에 선 놈들까지 같이 편한 곳으로 뽑아간다지 않나.


- 그랬던가······?


그런걸로 치자고.

우리가 가는 곳은 전쟁터긴 하지만, 그 이치는 같았다.


그리하여 차르가 베푼 특례로써 우리는 생도군단에 계속 학적을 유지하는 상태에서 소위로 임관이라는, 기기묘묘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콘스탄틴 대공이 학교는 제대로 마치길 바라서라나 뭐라나.


아무튼 그래서.


전쟁성에 불려가 즉각적으로 소위로 임관된 우리는, 극동으로 가 배치받기 전 마지막으로 페테르부르크에서 합동 인터뷰를 갖게 되었다.


우리를 선전에 써먹으려는 전쟁성의 전략이기도 했지만, 나로서도 나쁠건 없었다.


이제 페테르부르크를 떠나면 직접적인 언론 마사지는 좀 힘들어질테니.


지금 사카린을 팍팍 들이붓고 가야지.



* * *



전쟁성에 모인 기자들은 잡담을 주고 받고 있었다.


전쟁 분위기와 애국심을 한껏 고취시키기 위한 작업에 동원된 기자들은 손으로는 제국의 위대함을 찬양하면서도 머리로는 심드렁하기 그지없었다.


“지금 연설하는 저 생도는 누구지?”


“요안 콘스탄티노비치 공작.”


“내용도 진부하네. 황제에게 충성하고 반드시 승리하자······. 자기가 쓴 내용은 아니겠지?”


“당연하지. 안 그러면 저렇게 틀에 박힌 듯이 읊을 수가 있겠어? 군종 사제 기도문 보는줄 알겠네.”


정말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냉소적인 기자의 눈에는 저들은 국가의 영광이니 뭐니 나라와 학교가 떠들어대던 소리에 눈과 귀가 가려진 어린애들에 불과했다.


하늘의 개척자랍시고 언론에서 마구 떠받들어주던 아시아계 생도도 마찬가지였다.


‘정말 똑똑하다면 계속 비행기 같은거나 만지고 있을텐데.’


이런 시국에 학업까지 중지하고 전쟁에 자원하다니, 무슨 생각일까?

진짜 전쟁성이 떠들어대던 것처럼 애국심에 머리가 돌아버리기라도 한걸까?


기자는 턱을 괴면서 저 똘똘하다는 생도를 쳐다보았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도 별로 기대가 되지는 않았다.


어차피 요안과 마찬가지로 전쟁성의 뻔한 선전이나 그대로 읊어대리라.


황제를 제외한 다른 모두를 전쟁터로 내몰기 위해서.


그러나 검은머리 생도는 주위를 한번 둘러보더니.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천천히 입을 열었다.


“1904년 1월 27일(2월 9일), 치욕의 날로써 기억될 이 날에, 우리의 위대한 제국은 일본 제국 해군의 비열하고 기만적인 기습 공격을 받았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28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검은머리 러시아군 대원수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연재시간 재변경 안내(오전 8시 10분->오후 8시) +1 24.09.16 188 0 -
공지 이전 제목 "조선인이 러시아 다먹음"입니다. +9 24.09.12 1,246 0 -
25 자대 NEW +15 18시간 전 2,590 239 11쪽
24 들통 +16 24.09.17 3,779 270 11쪽
» 치욕의 날 +28 24.09.16 4,317 314 11쪽
22 혈서 +22 24.09.15 4,612 309 12쪽
21 전야 +13 24.09.14 4,729 308 12쪽
20 반응 +13 24.09.13 4,563 303 11쪽
19 이륙 +37 24.09.12 5,045 348 14쪽
18 이륙 준비 +17 24.09.11 4,889 271 12쪽
17 발전 +14 24.09.10 5,047 297 12쪽
16 착수 +15 24.09.09 5,218 313 12쪽
15 내기 +18 24.09.08 5,219 284 12쪽
14 파티 +12 24.09.08 5,653 291 14쪽
13 황족 +21 24.09.07 5,806 313 13쪽
12 귀환 +19 24.09.06 5,736 347 12쪽
11 제안 +27 24.09.05 5,876 328 10쪽
10 호의 +22 24.09.04 5,965 310 14쪽
9 경매 +25 24.09.03 6,004 326 13쪽
8 수확 +27 24.09.02 6,053 328 12쪽
7 시작 +13 24.09.01 6,152 307 11쪽
6 참전 +10 24.08.31 6,652 314 14쪽
5 귀신 +21 24.08.30 6,806 315 12쪽
4 입학 +30 24.08.29 7,026 356 12쪽
3 연줄 +20 24.08.28 7,259 358 11쪽
2 스타팅이 왜 이래 +24 24.08.27 8,216 394 12쪽
1 프롤로그 +41 24.08.26 9,355 384 7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