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0. 활짝 웃는 얼굴
[작품에 등장하는 배경, 인물, 지명, 사회 등은 현실과 무관하며 '로키산맥에서 온 폭군'을 위한 세계관 설정, 창작에 의한 것임을 밝힙니다.]
020. 활짝 웃는 얼굴
지미는 진짜 미친 듯이 뛰었다. 아니, 미친놈처럼 뛰었다.
이러다 대가리에 총알이 박히는 것보다 심장이 먼저 터져 죽는 건 아닐까. 이런 걱정이 들 정도로 진짜 죽기 아니면 살기로 뛰었다.
“커억- 커억- 커어억!”
숨이 턱을 차고 넘어 콧구멍으로 허파가 튀어나올 것 같다. 하지만, 지미는 멈추지 않았다.
그분을···. 목소리님을 만나야 산다.
“크허헉. 크억. 크아아아-.”
발을 헛디뎌 바닥을 굴렀지만, 배운 적도 없는 낙법을 발휘하며 튕기듯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다시 뛰었다.
‘제기랄, 거기서 그쪽으로 가는 게 아니었는데!’
그분의 흔적을 쫓아 열심히 뛴 것까지는 좋았다. 갈림길에서 고민하다 손바닥에 침을 뱉고 때렸는데, 믿고 그 길로 뛰었는데, 사지로 뛰어든 꼴이 됐다.
먹잇감을 노리며 숲을 어슬렁거리던 스캐빈저떼와 딱 마주친 것이다.
“헉헉.... 하악.... 하악....”
등에 메고 있는 짐가방 때문에 어깨살이 벗겨지고 허리가 부러질 것처럼 아팠지만.
투타타! 탕탕!
“커어어어- 컥컥. 씨···발!”
피융-! 퍽퍽-!
예비 방탄복, 야영에 필요한 온갖 잡동사니와 보급품 등으로 꽉 차 있는 등짐이 몸에 걸친 방탄복 이상으로 훌륭한 방패 역할을 해 주고 있었다.
“크크크. 개새끼들아! 내 등짐 방탄이야- 멍청한 새끼들아! 커억. 커억- 하악. 하악!”
죽는 그 순간까지 벗어버릴 수 없는 운명의 등짐이 되었다.
타타타탕!
퍽퍽! 피융!
“개새끼들아! 그만 좀 쏘라고! 하악. 하악.”
대가리 수집으로 백만장자가 된 지미는.
타타타타탕! 탕탕탕!
“크윽! 젠장···!”
총탄 하나가 어깨를 스치며 살갗을 찢어발겼다. 화끈한 통증에 머리칼이 쭈뼛 섰지만, 덕분에 흐트러지던 정신이 바짝 섰다.
“난···. 난! 안 죽어! 아니 절대 못 죽어! 하악. 하악!”
이젠, 백만 불짜리 대가리를 어깨 위에 올린 채 미친 듯이 뛰고 달렸다.
*
갑자기 영상이 흔들리며 불쾌한 소음이 흘러들자, 드론을 조정하고 있던 코튼은 당혹스러운 표정이 됐다.
“어? 뭐야!”
드론을 제어하려 재빨리 조작에 들어갔지만, 화면이 빙글빙글 돌면서 패튼의 얼굴이 훅! 확대됐다.
퍽-! 위이이이... 꽈득! 쿵!
영상 장비가 망가지며 화면이 어둡게 변했다.
“뭐야! 뭔데!”
코튼은 컨트롤러를 조작하며 문제를 해결하려 했지만, 드론은 음성 신호를 보내올 뿐,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패튼의 외침, 질리언의 고함. 뭔가 부서지고 부러지는 소리. 총격음과 비명이 이어폰을 통해 거칠게 흘러들었다.
“대장! 패튼과 질리언이 위험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드론 추락. 불명의 적 등장. 패튼, 질리언 위급 상황으로 판단됩니다.”
코튼이 다급한 목소리로 상황 보고를 하는데, 이어폰에서 패튼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볼륨 상태를 봤을 때, 드론 마이크가 아닌 패튼의 넥 마이크다.
그루브에게 상황 보고 명령이 계속 날아들자, 아예 그쪽 신호를 차단해 버렸다.
코튼은 패튼의 목소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 양쪽 귀를 손바닥으로 덮었다.
-너···. 뭐냐···. 도대체···.
패튼의 목소리에 죽음의 그림자가 느껴졌다.
최후를 직감한 패튼이 마지막 순간 적의 정체를 자신에게 알려주려는 듯 보였다.
한 마디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눈을 질끈 감고, 청력에 모든 걸 집중했다. 하지만 상대는 어떤 대답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두 발의 총성 이후 저벅거리는 발걸음 소리만 흘려들 뿐, 유의미한 정보는 들려오지 않았다.
“.....젠장!”
코튼은 신경질적으로 트럭 보닛을 내리쳤다.
대장의 채널을 연결한 코튼은 침통한 음성으로 상황을 보고했다.
“패튼, 질리언 다운. 침묵 확인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루브의 고함이 고막을 파고들었다.
“죄송합니다.”
코튼이 미안할 일은 아니지만, 당장 자신이 할 수 있는 말은 그 말이 전부였다.
-젠장! 내가 현장으로 가겠다···.
-들리나?
그루브와 코튼의 대화 사이로 누군가의 음성이 파고들었다.
코튼과 그루브는 잠시 침묵을 흘렸다.
-.....
-네가 내 목숨을 노리는데, 감정을 섞지 않듯이. 나 역시 나를 죽이려는 자를 죽이는데 감정을 섞지 않는다.
그루브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리더인가?
-그렇다.
-우리 사이에 은원은 없다. 너는 그저 일을 했을 뿐이고, 나 역시 그런 것뿐이니까. 그러니 선택해라.
-.....
-의뢰를 취소하고 남은 동료를 챙기던지.
-끝까지 가겠다면?
-남은 동료들까지 제물로 바치겠다면 리더라는 이름을 쓰지 말아야겠지. 상황 파악도 못 하는 머저리라는 뜻이니.
-.....
-어떤 선택을 하든, 그대들의 뜻. 존중하겠다.
-‘제···. 제임스!’
-내가 보일 수 있는 호의는 여기까지다. 삐익-치칙!
상대는 그 말을 끝으로 통신기를 부숴버렸는지 잡음만 흘러들었다.
*
그루브는 통신 마지막에 끼어든 여자 목소리를 통해 상대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제임스···.”
-대장! 이대로 물러설 수 없습니다. 패튼과 질리언의 복수를 해야 합니다!
코튼이 분한 목소리가 이어폰을 통해 흘러들었다.
-대장!
“흥분하지 말고 기다려.”
-.....
그루브는 단말기를 꺼내 오리 사냥터의 의뢰 내용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의뢰 내용 어디에도 제임스 한에 대한 추가 정보는 확인할 수가 없다.
여기 적힌 내용대로라면 제인스 한은 캐나다 촌구석에서 소일거리나 하는 평범한 자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드러난 결과만 놓고 본다면 이건 단순히 뒤통수 맞은 걸 넘어 대가리에 총알이 박힌 상황이다.
“개미지옥이라고 했던가?”
옆에서 멀뚱하게 서 있던 혼이 그루브를 바라봤다.
“그 지미인가 하는 녀석. 레딧에 올린 글.”
혼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짓을 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놈을 쫓아가 패튼과 질리언의 복수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놈의 말대로 단순 복수심에 팀을 움직이기엔 걸리는 게 너무 많았다.
오리 사냥터의 불분명한 정보도 그렇고, 청부 의뢰가 실행되고 얼마 되지 않아 역청부가 발동한 것도 그랬다.
아무래도 자신들이 모르는 복잡한 일에 끼어든 모양새다.
과거 군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생기면 의미 없는 죽음, 억울한 징계, 허망함과 원망만 남았다.
“선택에 대한 존중, 호의라고 했던가···.”
제임스가 남긴 마지막 말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루브는 마음을 굳혔다.
애초에 에일리를 발견하면 즉시 죽이려 한 것도 돌아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빠르게 치고 빠지려던 이유다.
“아무래도, 우리가 지뢰밭에 들어온 모양이다.”
-대장!
“코튼. 남은 드론이 몇 기지?”
-.....예비용까지 두기 남았습니다.
“띄워.”
-놈을 잡습니까?
“아니, 탈출로를 확보한다. 이 의뢰는 여기에서 접는다.”
-네? 대장 그게 무슨···.
“코튼.”
-....
“임무를 완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그게 뭐지?”
-후···. 불확실한 정보, 미지의 적과 조우 시 팀의 안전을 우선으로 한다.
그루브가 부하들을 데리고 용병팀을 만들었을 때 만든 규칙이다. 돈을 벌고자 이 바닥에 들어왔지만, 돈을 좇다 개죽음당하는 건 원치 않았다.
“알면 됐다.”
그루브는 짧게 한숨을 흘리더니, 오리 사냥터 의뢰 취소 버튼을 꾹 눌렀다. 그리고 단말기를 집어넣다가 문득 떠오르는 게 있어 그 화면을 캡처했다.
* 확인 완료. 200만 달러 입금 완료.
* 팀 그루브. Thank You for Your Service
헤드 컬렉터에 내용을 보낸 지 1분도 되지 않아 입금 확인이 떴다.
“미치겠군.”
한두 푼도 아니고 취소를 선택한 것만으로 200만 달러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여긴 자신들이 낄 판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때 오리 사냥터에서 추가 메시지가 떴다.
삐빅-!
* 팀 그루브(배신자) - 척결 시 100만 달러.
* 의뢰 – 오리 사냥터
그루브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단말기를 바라봤다.
척결 청부가 뜨자, 마치 이것만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수락 버튼을 누르는 놈들이 나타났다.
먹잇감만 나타나면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스캐빈저 놈들이 본격적으로 판에 끼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지미 대가리 백만 불짜리 대가리라더니, 이젠 내 대가리도 백만 불짜리가 된 건가? 오리 사냥터 이 새끼들···. 어이가 없네.”
의뢰 수락과 취소는 용병의 권리다.
물론 그에 대한 페널티는 어느 정도 감수를 해야 하지만, 취소했다는 이유만으로 머리에 현상금을 걸진 않는다.
청부를 넣은 원청이 뭐 하는 놈들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바닥에 통용되는 암묵적인 룰을 흔들려 하면 오리 사냥터는 오히려 이걸 막아야 하는 게 정상이다.
청부 중개인은 원청의 의사도 존중해야 하지만, 최종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용병들의 기본 권리도 어느 정도는 챙겨야 하기 때문이다.
그루브는 오리 사냥터의 태도가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압박을 통해 당장은 우위를 차지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런 식으로 용병들의 반감을 사면 경쟁 업체들에 기회만 늘려 줄 뿐이다.
“혹시, 오리 사냥터 이것들···.”
건드리면 안 될 뭔가를 건드려 버려서 아예 물러설 곳이 없어져 버린 건가? 그도 아니면 공개된 청부 액수 따위는 우습게 보일 정도로 큰돈이 걸려 있다던가.
그루브는 그럴싸한 가설을 떠올렸다가, 설마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B급 이상의 용병 풀을 50% 이상 손에 쥐고 있는 청부 업계 원탑이 뭐가 아쉬워서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그냥, 자존심이 상해서라는 게 더 현실성 있어 보였다.
“혼. 가자.”
혼은 총을 어깨에 짊어지더니 그루브의 뒤를 묵묵히 쫓았다.
*
바람에 밀려 발을 헛딛고 절벽 아래로 떨어진 에일리는 온몸의 피가 싹 식어 버린다는 말이 그냥 하는 말이 아님을 경험했다.
“......”
발을 헛디뎠을 땐 ‘악!’ 하는 비명이 나왔는데, 허공을 허우적거릴 때는 목구멍이 콱 막힌 것처럼 어떤 소리도 나오질 않았다.
정말 간발의 차로 에일리의 발목을 잡아챈 제임스는 중심을 잃지 않기 위해 급히 자세를 낮췄다.
“괜찮나?”
“어···. 어···. 네.”
허공에 매달려 시계추처럼 흔들리고 있지만, 발목에서 느껴지는 굳건한 힘에 두려움보단 안정감이 들었다.
피가 머리로 쏠리고 작게 어지러움이 느껴졌지만, 식었던 피가 조금씩 따듯해지고 덜컥 멈춰버렸던 심장도 안정적으로 뛰기 시작했다.
에일리는 목에 힘을 줘 제임스 쪽을 올려봤다.
한 손은 자신을 잡고 다른 한 손을 절벽 틈새에 손가락을 끼워 무게를 지탱하고 있다.
상황만 보면 위태로웠지만, 제임스의 얼굴엔 힘이 든다던가 위급하다든가 하는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무뚝뚝하고 불친절하고 거리낌 없이 자신을 폭탄 미끼로 사용해 버리는 무식한 태도에 내심 질린 부분도 있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상황이 되면 그 때문에 더 믿음직스럽다.
“끌어 올리겠다. 몸을 움직이지 말고 그대로 자세를 유지해라.”
“네···.”
제임스가 힘을 주자, 도르래에 물린 밧줄처럼 몸 전체가 스르륵 이동했다.
제임스가 몸을 일으키며 손 높이를 올리자, 등과 허리가 절벽에 맞닿아 쓸리면서 스커트가 위로 말렸다.
제임스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렸다.
“왜...왜요? 위험한가요?”
제임스의 표정을 살피던 에일리는 제임스의 낯빛이 달라지자 덜컥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아니다.”
“그...그런데 왜. 표정이....”
“......”
제임스는 에일리의 질문에 어떤 답도 하지 않았다.
제임스가 완전히 몸을 일으키자, 에일리는 제임스 손에 거꾸로 매달린 모습이 됐다. 제임스는 쓱 고개를 돌려 먼 산을 바라보면서 벽을 툭툭 쳤다.
“아. 네.”
에일리가 조심스럽게 벽을 잡자, 제임스는 에일리의 허리를 잡고 몸을 돌려세웠다.
에일리는 벽에 바짝 달라붙더니,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허공에 뜬 채 잡혀 있을 땐 발목에서 느껴지는 강력한 힘에 안정감이 들었는데, 스스로 땅을 짚고 서자 오히려 중심을 잡기가 힘들었다.
뒤늦게 반동이 밀려오는지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기 시작했다.
“어···. 어떡하죠. 다리가 움직이질···. 않아요.”
제임스는 아무 말 없이 에일리를 허리에 안아 들었다.
두툼한 팔뚝에 몸이 묶이자, 발끝이 허공에서 살짝 뜬 상태가 됐다.
제임스는 그 상태로 산양길을 툭툭 치고 올랐다.
“미안해요. 잘하고 싶은데, 자꾸만 짐이 되네요.”
에일리는 자책감을 보이며 몸을 잘게 떨었다.
“처음엔 누구나 같다. 같은 실수를 두 번 하지 않으면 된다.”
“.....”
에일리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끝없이 아슬하게 이어질지 알았던 산양길은 절벽을 돌아 안쪽으로 들어서자 언제 그런 길이 있었냐는 듯 폭이 부쩍 넓어졌다.
암벽과 암벽 사이 말 한 마리가 지날 정도의 틈을 통과하자 10m 정도 떨어진 곳에 속이 깊게 팬 동굴 하나가 나타났다.
동굴 입구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진과 블랙이 반가운 표정으로 달려오더니 제임스의 발과 어깨에 연신 얼굴을 문질러댔다.
왈!
히이이이잉!
“그래. 다들 수고했다.”
제임스는 에일리에겐 한 번도 보여 준 적 없는 활짝 웃는 얼굴로 진과 블랙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에일리는 뻘쭘하게 혼자 떨어져 있기 뭐해서 슬쩍 다가섰는데, 블랙이 몸을 돌리면서 에일리를 툭 밀어냈다.
'블랙...이 망아지 새끼는 아까부터 왜 나한테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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