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애 나 천재 아역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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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비플
작품등록일 :
2024.08.27 14:44
최근연재일 :
2024.09.16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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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30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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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낙원에는 글자가 굴러다닌다

DUMMY

유락원柳樂園.

즐거울 락에 동산 원.


내 이름에 담긴 뜻을 온전히 이해하게 된 때부터, 나는 줄곧 사후세계에 대한 의문을 품어왔다. 

사후세계란 정말 존재하는 걸까, 와 같은 형이상학적 질문에서 시작한 상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연옥과 지옥으로 배분되기 전 거치는 나들목. 윤회의 고리. 대머리 전사들이 죽는 순간까지 부르짖었던 발할라. 혹은··· 아무것도 없는 무無의 공간.


하지만 모두 틀렸다.


낙원에는, 글자가 굴러다닌다.


“이게 뭔.”


그것도 무수히 많은 글자가.



*



“허미, 씨···”


일단은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철퍼덕 주저앉은 것에 가깝긴 하지만. 


어쨌든 확실히 죽긴 죽은 모양이었다. 가슴이 타들어가는 통증, 깜찍한 신입 PD가 ‘이게 요즘 애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꿀주’라며 폭탄주를 퍼 먹였을 때나 겪어본 두통과 메스꺼움이 씻은 듯 사라진 걸 보면.


난 상하좌우를 구분할 수 없는 어두컴컴한 공간에서 눈 떴다. 그럼에도 지금 앉은 곳을 바닥이라고 확신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데구르르—


유리 조각처럼 비산한 글자들이 까만 도화지 위를 내키는 대로 굴러다녔다. 

그것들은 때때로 저들끼리 뭉쳐 의미를 만들어보다가, 마음에 안 드는지 기껏 만든 문장을 다 망가트렸다. 나는 그 모습을 꽤 즐겁게 구경했다.


그로부터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부산스럽던 글자들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는 듯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완전한 형태를 띤 채 공중으로 떠올랐다. 


부웅—


그리고 내 주위를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나는 숫제 폭풍의 눈에 갇힌 사람처럼 아연해졌다. 단순히 그 방대한 양에 압도되어서가 아니다.


저건······ 대본이었다.


식음을 전폐하고 탐독했던 대본부터 미숙하지만 재기 발랄함이 엿보였던 대본, 첫 페이지만 읽고 구석으로 밀었던 대본, 그리고··· 주인공 자리에 슬쩍 내 이름을 낙서했다가 황급히 지웠던 대본들까지. 


그래.


저것은 대본인 동시에 삶이었다. 무수히 많은 등장인물의 삶이었고, 마음 둘 곳 없던 내가 자아를 의탁한 피난처였다.


뒤로 물러날 곳이 없다. 물러나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구축한 낙원이 점점 날 조여오고 있었다.


“······.”


고민은 길지 않았다. 난 허공을 응시한 채 조용히 팔을 벌렸다.


화악—


그러자 눈이 멀어버릴 것만 같은 강렬한 빛이 날 덮쳤다.



*



아들을 유괴한 범인이 노린 건 몸값이라고 했다.


날 때부터 미숙아였던 딸의 병구완이 길어지자 더 이상 돈 나올 구멍이 없었다고. 실의에 빠져 떠돌던 범인의 눈에 질 좋은 옷을 입은 말쑥한 아이가 띄었다고 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아이를 자신이 살던 반지하 방에 묶어두기만 한 채 도망쳤고 얼마 안 가 덜미를 잡혔다고.

딸이 입원한 병원 관계자들과 주변 탐문은 형식상 이뤄졌고 남성은 유력 용의자로 체포됐다고.


-하여튼, 그래서 이제 안심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전화를 건 경찰이 담담하게 설명했다.


“······예, 그렇군요.”


설명은 장황했지만 대답은 간결했다. 그래서 그 범인은, 아픈 딸은 이제 어떻게 되는 거냐고 묻기엔 그녀의 삶만으로도 버거웠다.


전화를 끊은 유락원의 어머니, 박정혜가 천천히 손을 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가슴을 내리쳤다.


퍽.


안심?


퍽.


지금 안심하라고 한 건가?


퍽.


아들이 집으로 돌아온 날부터 지금까지. 그 어떤 것도 제 자리를 찾지 못했다. TV에 나오는 배우가 될 거라며 재잘대던 아들의 입은 굳게 닫혔고,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던 집엔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런데 어떻게 마음을 놓을 수 있겠는가. 적어도 박정혜의 가정 내에선, 사건은 현재진행형이었다.


“아흐···”


거실에 앉아있던 락원이 소리 나는 곳을 멍하니 쳐다봤다. 그러자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흐른 눈물을 소매로 닦았다. 그리고 화장실로 가 세수한 뒤 아들의 앞에 앉았다.


“락원아.”


오늘은, 어쩌면 내일은 아들의 입이 열릴 수도 있다. 아직 좌절하긴 이르다.


“아빠가 락원이 선물 사 오셨는데 같이 열어볼까?” 


까만 비닐봉지에서 나온 건 DVD였다. 강아지와 오리, 그리고 한 남자가 가족이 되어 살아가는 내용으로, 최근 극장에서 개봉한 가족용 외화였다. 


“아.”


다 함께 보러 가자고 약속했던 영화다. 하지만 사건 이후 아들은 극장에 갈 수 없게 됐고 그 사이 영화는 내려갔다. 그 DVD를 남편이 구해온 것이다. 


나만 힘든 게 아니다. 나만 노력하는 것이 아니다. 복잡한 마음으로 DVD를 쳐다보던 그녀는 아들의 눈에 맺히는 눈물을 보지 못했다.


“어···”


버틸 수 있다. 버틸 것이다. 나는 이 아이의 엄마니까.


“어······”


그래. 나는 엄마다.


“엄마···?”


굳게 먹은 마음은 아들의 말 한마디에 와르르 무너졌다. 꼿꼿이 앉아있던 박정혜가 아들의 위로 쓰러졌다.


“······그래, 락원아. 엄마야. 고마워. 너무 고마워. 엄마가 진짜··· 고마워.”


비닐을 벗기지 않은 DVD 위로 모자의 눈물이 방울방울 번졌다.



*



영화인들이 그렇다. 어지간한 일에도 충격받는 일이 잘 없다.


제작자가 투자금 들고 야반도주를 하질 않나, 타 제작사의 계약 직전 작품을 쏙 빼돌려 원래부터 제것이었던 양 그대로 메이드하질 않나.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이판사판영화판에 몸담고 있다 보면 어지간한 사건에는 면역이 생긴다. 


그런 곳에서 꽤 구른 나도, 성인이 되자마자 생이별했던 부모님과의 조우는 상당히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것도 시간을 과거로 돌려서 말이다.


“흐음.”


난 짧은 다리로 침대 위에 가부좌를 틀고 생각에 잠겼다.


무수히 많은 글자가 날 덮쳤고 눈을 뜨니 이 모양이다. 그 후로 며칠이 지났지만 솔직히 아직도 뭐가 뭔지 어리둥절했다.


아직 녹슬지 않은 상상력을 발휘해 보자면, 첫째. 여긴 다른 차원의 ‘평행세계’다. 

그래. 작품 곳곳에 흩뿌려놓은 떡밥을 어떻게 조립해야 할지 모르는 초짜 작가, 감독들이 영약처럼 슬쩍 들이미는 그거. 


하지만 어째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그보다는 웬 양의사가 시퍼런 공중전화 부스를 타고 벌이는 ‘시간 여행’··· 아, 이건 올드하댔지. 


그래, 요즘 말로는 ‘회귀’에 가까워 보였다. 난 여기서 생각을 멈췄다. 


“몰라, 시발.”


찰싹—


내 기억보다 훨씬 작은 손으로 입을 내리쳤다. 아직 중학교도 안 들어간 어린이는 이런 말 쓰는 거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회귀가 뭐냐고, 회귀가···”


말은 이렇게 하지만 반쯤 받아들인 상태다. 나머지 반은 아직도 의심쩍다. 하지만 일단 잠정적인 결론을 내려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으니 덮어두는 거고. 


난 눈앞에 있는 DVD를 복잡한 심경으로 쳐다봤다. 


<가족이 뭐 이래>


“제목이 뭐 이래.”


번역만 더 잘 됐어도 관객이 몇 만은 더 들었을··· 아차차. 나도 모르게 직업병이.

패키징과 관객 수에 연연하는 건 제작자의 영역이고 배우는 주어진 역할에만 몰입하면 된다.


···그래. 드디어 연기를 할 수 있다. 입에 풀칠하기 바빠 포기했던 꿈을 이룰 수 있게 된 거다.


난 <가족이 뭐 이래>를 보며 내 무궁무진한 가능성에 감사해 찔끔 울었고, 부모님은 그런 날 보며 크헝컹 코를 들이마셨다. 그리곤 영화가 너무 감동적이라며 손부채질하셨지. 

그때 무슨 말이라도 할걸. 나는 이리저리 눈을 굴리다 목이 메어 고개만 주억거렸다. 


이건, 단순한 DVD가 아니다.

IPTV와 OTT 플랫폼이 없던 시절, 사람 많은 곳을 가지 못하는 내게 DVD와 TV는 세상을 보는 창구였다. 


부모님은 대인 기피증과 선택적 함구증을 앓는 아들을 정성으로 기르셨다. 내가 어디 가서 사람 구실을 할 수 있던 건 전적으로 부모님 덕분이었다. 

···당신의 몸에 암세포가 자라는 것도 모를 만큼 온통 내 생각뿐이셨으니. 


풀썩—


베개에 얼굴을 묻고 엎드렸다. 그리웠던 라벤더 섬유 유연제 향이 솔솔 퍼졌고 감촉은 축축했다.


책장을 꽉 채운 DVD는 내 보물 1호였다. 하지만 지금 내가 가진 DVD는 단 한 장뿐이다.


그 말은, 날 이곳으로 부른 존재가 꽤나 적절한 시점에 소환했다는 뜻이다.

아직은 모든 것을 바로잡을 수 있는 때였다. 



*



갓 지은 밥과 뜨끈한 국, 그리고 반찬 몇 개. 소박하지만 정갈한 차림이다. 내가 평생 그리워했던 밥상. 


그런데 그 앞에서, 난 왜 고사를 지내고 있는가.


“또 콩나물 장조림이야?”

“락원이가 좋아하니까 많이 했지. 싫으면 당신은 먹지 마. 여기 다른 반찬도 있잖아.”

“내가 언제 싫다고 했어?”


사실 어머니가 그리 요리를 잘하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콩나물 장조림만큼은 기가 막히게 만들 줄 아셨다. 

그래서 뭐가 제일 먹고 싶냐는 질문에 가장 먼저 떠오른 걸 답한 것뿐인데··· 난 콩나물 장조림에 환장한 아이가 되어 있었다. 


뭐, 그건 그렇다 치고.


“락원아 우리 치킨 먹을까? 단지 앞에 락원이가 좋아하는 치킨집 있잖아. 아빠가 전화할까?” 


유락원, 인생 2회차(추정).

이 질문이 단순히 ‘콩나물 장조림VS치킨’이 아닌 ‘엄마VS아빠’라는 것 정도는 알고도 남았다.


이럴 때는 가만히 있는 게 상책이다. 괜히 새우등 터질라.


“···그냥 쫌 먹으면 안되겠나.”


헤헤 웃고만 있었더니 박여사 입에서 부산 사투리가 튀어나왔다. 진돗개 1호 발령. 


두 남자는 일제히 콩나물 장조림을 듬뿍 집어 입에 넣었다.

사실 아버지도 콩나물 장조림 좋아하신다. 두 분이 절찬리 부부 싸움 중이라 트집 잡으신 거지. 


아작아작.


난 고슬고슬한 밥과 짭조름한 콩나물 장조림을 김에 싸 먹으며 고심했다. 


Q. 다음 중 부모님이 부부 싸움 중일 때 어린이의 대처로 옳은 것은? 


1. 화해해 짝! 화해해 짝!

2. 아이 참, 왜들 그래. 좋은 게 좋은 거다~ 하고 빨리 풀어. 

3. 잉잉대며 불안한 마음을 드러낸다.

4. 모른 척 가만히 동태를 살핀다.


···4번.

곧 죽어도 4번이다.


“잘 먹었습니다~”


싱크대에 빈 그릇을 올려 두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방문에 귀를 대고 정신을 집중했다. 소곤대는 소리가 문턱을 넘어왔다.


-여보, 정혜야. 일이 이렇게 끝나면 안 된다니까. 락원이를 생각해서라도 바로잡을 건 바로잡아야지.

-누가 보면 난 아들 생각도 안 하는 엄만 줄 알겠어.

-말꼬리 잡지 마, 그런 뜻 아닌 거 당신도 알잖아.


상황을 조합해 보면 이랬다. 


지금은 이제 막 CCTV가 전국에 보급되기 시작하던 때다. 그리 많지 않은 대수에 당연히 화질도 썩 좋지 않았다.


거기에 미흡한 경찰의 초동 대처가 일을 키웠다.

유아가 아닌 초등생 남아가 사라졌다는 신고에 어디서 친구들과 놀고 있을 테니 조금만 기다려보라는 말로 부모님을 돌려보냈던 것. 


그 결과. 우리 아버지, 부산 여자한테 꽉 잡혀 사는 것 같지만 한 번 해병은 죽을 때까지 해병이라고 말하는 유태훈씨께서, 소위··· 빡 도셨다.

이대로면 언론사 다니는 지인들을 찾아가 읍소할 기세다.


“뭐지?”


기억 속에 이런 일은 없었다. 나는 (정신이야 어쨌든) 몸 건강히 돌아왔고 범인도 빠르게 잡혔으니까.


그때와 지금. 뭐가 달라진 걸까. 흐음, 음··· 음? 


“내가 달라졌구나.”


잠시 생각해 보니 가닥이 잡혔다. 

당시 아버지는 아들부터 살리고 보잔 생각에 단죄를 미뤄 뒀을 거다. 하지만 이번엔 내가 빠르게 회복했고, 아버지는 미온적이었던 경찰에 더 늦기 전 책임을 물을 작정이신 거다. 


“이야···”


···나 좆될 뻔 했잖아?


심장이 쿵쿵거렸다.

이제부터는 스텝을 잘 밟아야 한다. 


이 소동에 ‘유락원 유괴 사건’ 같은 이름이 붙으면 끝이다. 이름이야 나중에 개명한다 쳐도, 그때쯤엔 온 동네에 소문이 다 퍼지고도 남을 테니. 

그 상태로 연기하면 사람들은 내가 어떤 역할을 소화해도 안쓰럽게 볼 거다.


그나마 다행인 건 사건이 여름 방학 중 일어났다는 거다. 최대한 이 일을 축소시켜야 한다.


벌컥—


눈시울을 붉히고 있던 엄마, 벽을 노려보며 한숨 쉬던 아빠의 눈이 동시에 내게 꽂혔다.


나는, 처음으로 회귀자로서의 이점을 누리기로 했다.


“있잖아.”

“응, 락원아 왜?”

“나 방학 끝나면··· 다시 학교 갈 수 있지?”


아버지의 눈에 찰나에 많은 감정이 지나갔다. 이대로 넘어가도 정말 괜찮은 걸까. 우리 아들은 다행히 잘 돌아왔지만 어쩌면 제2의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지 않나, 그리고 또···


하지만 이내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럼, 당연하지.”

“···응,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어.”


울컥하는 눈물을 참고 방문을 닫았다. 하고 싶은 말은 차고 넘쳤지만, 일단은 그 대답이면 충분했다.


작가의말

안녕하세요, 독자님들.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오늘 중으로 한 편 더 올라갑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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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스파크 +3 24.09.03 251 13 13쪽
6 오늘도 죽는 남자 24.09.02 261 13 11쪽
5 월척이다 +1 24.09.01 288 14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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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참으면 복이 와요 24.08.30 345 16 12쪽
» 낙원에는 글자가 굴러다닌다 +2 24.08.30 409 19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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