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파이어무림에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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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수
작품등록일 :
2012.11.19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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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10 0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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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4.10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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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파이어 무림에 가다 - 제1장.

DUMMY

뱀파이어 무림에 가다


제1장










휘황찬란한 샹들리에가 천장 가득히 달린 화려한 파티장.

딴~♩ 따라~♪ 딴딴~♬

경쾌한 왈츠 소리가 커다란 홀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홀의 중앙. 호화롭게 치장을 한 많은 사람들이 붉은 음료가 담긴 와인 잔을 들고 저마다 흥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하하하하!”

“호호호!”

특이한 점은, 파티에 참석해 즐기는 이들 모두가 눈동자가 같은 색이었다. 피부색이 다르고, 머리카락색이 다르고, 얼굴 생김이 달라도 그들의 눈동자는 하나같이 영롱한 홍옥처럼 붉었다. 색의 농도에 약간씩 차이가 있을 뿐, 신기하게도 그들 전부 붉은색을 띠었다.

그 파티홀에서 가장 높은 곳.

왕좌(王座, 황제의 의자)에 앉은 장년의 사내가 손을 슬쩍 들어 올렸다. 그러자 음악이 멈추고, 파티장에 모인 이들이 경외감이 가득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나의 아이들아, 짐의 성절(聖節, 생일)을 이리도 축하해주니 고맙구나.”

스스로 짐이라 부른 장년의 사내.

그가 바로 블러드 문이란 이름을 가진, 어둠을 지배하는 뱀파이어 제국의 황제였다.

“모든 뱀파이어의 아버지이자, 위대한 폐하! 성절을 경하드리옵니다.”

누군가의 선창에,

“모든 뱀파이어의 아버지이자, 위대한 폐하! 성절을 경하드리옵니다.”

“모든 뱀파이어의 아버지이자, 위대한 폐하! 성절을 경하드리옵니다.”

모두가 입을 모아 그를 우러러보았다.

“오늘 하루 즐겁게 보내도록 하라.”

블러드 문 황제의 말에 멈추었던 음악이 다시 흐르고 흥겨운 파티가 재차 시작되었다.



파티장 한구석.

흑발의 사내가 연회 음식이 차려진 긴 탁자 위에 발을 올린 채 따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드르륵!

사내가 의자를 뒤로 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딴따♬ ……!

단순한 움직임이었지만 그 동작에 음악이 뚝 끊겼다.

춤을 추던 이들도 우두커니 섰다.

시끌벅적하던 대화도, 웃음도 사라졌다.

모두가 숨을 죽인 채 흑발의 사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눈에는 불안과 공포가 담겨있었다.

저벅 저벅 저벅.

두꺼운 천으로 뒤덮인 창가로 사내가 걸어갔다. 그리고 한 줌 망설임 없이 커튼을 활짝 열어젖혔다.

촤르르륵-

시꺼먼 장막에 가려졌던 밝은 햇살이 파티장을 쏟아졌다.

“좋군.”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꺄아아악!”

“크으윽!”

흑발의 사내가 느긋하게 햇빛을 쐬는 것과 달리, 햇볕에 직접 살갗이 닿은 뱀파이어들이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며 어두운 구석으로 도망쳤다. 하얗고 윤기가 흐르던 그들의 피부는 어느새 흉하게 벗겨지고 진물이 흘러내렸다.

한순간에 파티장이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흑발의 사내를 향해 블러드 문 황제가 노기를 드러냈다.

“야누스 대공! 이게 무슨 짓인가?”

황제의 일갈에 야누스 대공이라 불린 사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가 햇살 아래에서 천천히 몸을 돌려 황제를 올려보았다.

“…….”

사내는 말이 없었다. 잠시 침묵이 흐르는가 싶더니, 돌연 그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황제를 향해 움직였다.

두근두근.

모든 뱀파이어들의 시선이 사내의 걸음에 맞춰졌다. 그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주변에 있던 뱀파이어들이 뒷걸음질치며 허리를 숙였다. 그의 행로에 조금이라도 방해가 될까 봐 다들 무서움에 벌벌 떨었다.

썰물이 지듯 양쪽으로 갈라진 뱀파이어들 사이로 다가오는 흑발의 사내.

저벅 저벅 저벅.

그 걸음이 가까워질수록 블러드 문 황제의 눈동자가 두려움으로 물들며 파르르 떨렸다. 황제는 이를 악무는 동시에 왕좌를 붙들며 간신히 버텼다.

이윽고 단상에 오른 사내가 황제를 내려다보며 상냥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황제 폐하.”

핏물이 뚝뚝 흘러내릴 것 같은 붉은 동공과 미소 사이로 뾰족 튀어나온 송곳니가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빛났다. 황제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며 대답했다.

“……그, 그래. 마, 말하거라.”

“본인의 이름은 야누스가 아니라 야현이라고 몇 번이나 말씀을 드린 걸로 기억합니다. 아닌가요?”

황제는 아차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억울했다. 사내를 야누스라 부르는 것은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들 요상하고 발음하기 힘든 ‘야현’이라는 이름 대신 그를 야누스 대공이라 불렀다.

“미, 미안하네.”

야현이 허리를 숙여 황제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가져갔다. 그의 손이 황제의 어깨를 강하게 강하게 움켜잡았다.

“큭!”

황제의 눈가가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기억해주시옵소서.”

그것은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었다. 온화한 말투 뒤에 숨겨진 분노를 황제는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체통도 잊은 채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야누스라 불리며 야현이란 이름을 가진 흑발의 사내, 뱀파이어.

그는 수천 년 뱀파이어 역사상 유일무이한 존재였다.

뱀파이어는 피를 통해 혈족을 이어간다.

창조자(Master)의 손에 태어난 뱀파이어는 피의 수직적 사슬을 거스르지 못한다. 그 어떤 뱀파이어라도 그것을 절대 깨뜨릴 수 없었다.

그런데 눈앞에 서 있는 야누스 대공, 야현은 그 원칙을 무너뜨렸다.

그는 창조자의 존재도 알 수 없는 천하기 이를 데 없는 사생아였다. 그랬던 그가 피의 사슬을 끊는 것도 모자라 닥치는 대로 뱀파이어를 죽이고, 피를 흡수해가며 뱀파이어 세계의 최상위 귀족인 진혈족이 되었다.

뿐인가. 진혈족 전체의 무릎을 꿇리고 대공의 자리에 앉았다.

그는 황제를 죽일 수 있는 유일한 자이기도 했다.

“아, 앞으로는 이, 잊지 않겠네.”

두고 보겠다는 듯 야현이 황제의 어깨를 툭 치고는 굽혔던 허리를 폈다. 그의 눈이 다시 파티장으로 향하자 뱀파이어들이 화들짝 놀라며 다들 시선을 피했다.

‘훗.’

야현이 피식 웃으며 악단을 쳐다보았다.

“뭐하나요? 연주를 계속하지 않고요?”

부드러우면서도 사근사근한 어조에 악사들이 서둘러 악기를 들고 새롭게 연주를 시작했다.

딴~♩ 따라~♪ 딴딴~♬

경쾌한 왈츠곡의 선율이 다시금 악사들의 손을 타고 홀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전처럼 즐거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흠~♩ 흐음~♪ 흠흠~♬”

단 홀로 야현만이 눈을 감고 허밍으로 멜로디를 흥겹게 따라 부를 뿐이었다.

“아무도 춤을 추지 않는군요.”

하지만 낮은 목소리로 야현이 입을 열자 다들 서둘러 아무나 짝을 찾아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공포가 지배하는 파티였다.


***


어둠 속에서만 살아가야 하는 피의 종족, 뱀파이어.

야현은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햇살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썩 유쾌하지는 않지만, 햇살을 받으며 산책이 하고 싶어진 까닭이었다.

일반적인 뱀파이어와는 다르게 진혈족은 특권이자 또 하나의 힘인 권능으로 태양 아래서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타죽지 않을 뿐, 햇빛이 주는 원초적 공포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진혈족 뱀파이어의 피를 흡수하기 전, 그저 하위 뱀파이어로 어둠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야현은 태양을 그리워했었다. 그리고 마침내 진혈족이 되었을 때 야현은 미친 듯이 태양 아래로 달려나갔다. 하지만 채 몇 분도 있지 못하고 그늘을 찾아 숨어 온몸을 부둥켜안고 벌벌 떨어야 했다.

야현의 기억 속 햇볕은 따스함이었지만 어느새 따스함은 사라졌고, 질식할 듯 무거운 두려움으로 변해있었던 것이다.

뱀파이어는 어둠 속에서 태어나 자라는 일족이다.

그렇다 보니 아무리 진혈족 뱀파이어라고 해도 태양 아래서는 일반인과 그다지 큰 힘의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야현은 다르다.

그는 다른 뱀파이어들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정순한 내력(內力이었다.

그 내력을 바탕으로 야현은 뱀파이어의 피의 수직적 사슬 관계를 끊을 수 있었고, 어둠에서보다는 못하지만, 태양 아래에서도 일반 기사 하나쯤은 손쉽게 죽일 수 있는 무력(武力)을 지니고 있었다.

한낮의 산책.

이는 야현의 오만한 취미이자 그만이 가능한 특권이었다.

끼익.

야현이 문을 열고 침실 밖으로 나왔다.

“주군.”

“베라칸.”

은발의 사내가 야현에게 다가왔다. 그는 야현이 믿는 충직한 수하 중 하나로, 진골의 늑대인간이었다.

“산책하러 가시는 길이십니까?”

“그래.”

“제가 모시겠습니다.”

베라칸은 야현이 가는 곳이라면 언제 어디든 동행한다. 낮이라면 더더욱 곁에서 떨어지지 않고 그를 보필했다.

“가자.”

야현은 베라칸을 대동하고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회랑을 따라 걸었다.

“여기가 우리의 아버지이신 블러드 문 황제 폐하께서 사시는 곳이란 말이죠?”

“그렇단다.”

야현이 회랑의 중간쯤 지날 때였다. 맞은편 끝에서 일남일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들뜬 목소리로 묻는 이십 대 외모의 청년은 갓 태어난 신생 뱀파이어였고, 물음에 답하는 삼십 대 외모의 중년 여인은 딱 봐도 그의 창조자였다.

“명심하거라. 너는 진혈족이다. 여…….”

“에이, 알았어요. 알았어. 진혈족이라는 거 내가 모르나. 크크크.”

여인의 말을 자르며 청년이 교만하게 웃었다.

뱀파이어 세계에서 진혈족은 곧 왕족이다.

왕족이 좀 거만하면 어떤가?

어차피 군림하는 혈족이다.

그렇기에 여인은 지금까지 청년의 그런 언행과 행동을 굳이 말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은 다르다.

“여기는 황제 폐하께서 계시는 곳이다. 그러니 절대로 경거망동…….”

“에이, 알았다니깐……, 흠흠? 뭐지, 이거?”

귀찮다는 듯 건성으로 대꾸하던 청년이 갑자기 코를 킁킁거렸다.

“어디서 이런 미개한 잡냄새가 나는 거야?”

늑대인간 특유의 체향을 맡자 청년이 인상을 쓰며 투덜거렸다. 워낙 조용한 회랑이었기에 그 음성은 야현과 베라칸에게까지 선명하게 들렸다.

“크르르!”

베라칸이 나직이 울음을 삼켰다.

“크하앗!”

그 소리가 자극이 된 듯, 청년 뱀파이어가 뾰족한 송곳니와 손톱을 드러내며 야현에게로 달려왔다.

“네놈의 애완동물이더냐?”

청년의 얼굴에 탐욕의 빛이 떠올랐다.

“내 태어나 아직 개잡종을 맛보지 못했는데 나한테 넘겨라.”

“크르릉!”

“후후.”

베라칸이 울었고, 야현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렸다. 뒤늦게 달려온 여인은 야현을 보자 석상처럼 몸이 굳어졌다.

“그대의 후계자인가요?”

야현의 보드라운 물음에 여인의 전신이 바르르 떨렸다.

“이 새끼가 지금 진혈족에게 뭐라고 씨부렁거리는 거야? 앙? 죽여줄까?”

야현의 존대 때문인지 청년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다시 뾰족한 송곳니를 내보였다.

야현은 대답 대신 짙은 미소로 여인을 응시했다.

“하, 한 번만 사, 살려주십시오!”

여인이 그대로 바닥에 바싹 엎드려 빌었다.

“뭐, 뭐야?”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꼈는지, 그제야 청년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본인이 조금 전 그대의 후계자인가 물었습니다.”

고저 없는 낮은 음색이었다. 야현의 말에 잠시 망설이던 여인이 일어나 청년의 어깨와 머리를 움켜잡았다. 그리고 단숨에 목을 찢어버렸다.

콰득!

“으아아악!”

청년의 시신이 화르르 불에 타오르더니 이내 재가 되어 바닥에 흩어졌다.

“요, 용서를…….”

여인은 다시 바닥에 납작 엎드려 부들부들 떨었다.

“제 질문에는 아직 답하지 않았습니다.”

“소, 소녀의 ……후, 후계자가 맞습니다.”

“그렇군요.”

“과, 관대한 ……요, 용서를…….”

뒷말은 필요 없었다. 대답을 들었으니 더 이상의 용무는 없다. 야현에게 실례를 범한 것은 후계자이지 여인이 아니었다.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야현이 여인을 지나쳐 다시 회랑을 걸었다.

긴 회랑의 끝에는 외부로 나가는 두꺼운 문이 있었다.

그 문에는 묵빛 갑옷을 입은 기사 둘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그들은 뱀파이어가 아닌 인간이었다. 특이한 점은 그들의 손등에 뱀파이어를 추종하는 집단의 상징인 검은 역십자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그들이 야현을 보자 군례를 취했다.

“문을 열어라.”

야현의 산책은 기사들에게도 익숙했다. 그들이 신속하게 닫힌 문을 열었다.

‘흠…….’

환한 햇살이 몸을 감싸자 야현의 미간이 슬쩍 좁아졌다.

전신에서 끓어오르던 힘이 신기루처럼 흩어지며 육체가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야현의 단전(丹田)에서 자연스레 내력이 흘러나왔다.

내력이 가득 차자 무기력함은 이내 사라졌다.

성에서 나온 야현은 여느 때처럼 정처 없이 발길 닿는 대로 걸었다. 베라칸은 그런 야현의 뒤에서 묵묵히 그를 수행할 뿐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어느덧 둘은 노예 시장에 들어섰다.

“가, 가까이 오지 마! 다가오지 말란 말이야!”

한 소녀의 애처로우면서도 날 선 고함이 야현의 귀를 파고들었다. 산책 내내 공허한 빛을 띠던 야현의 눈에 이채가 발한 것은 그때였다. 그의 고개가 빠르게 소리의 진원지를 향해 돌아갔다.

“제발 오지 마! 오지 말라고!”

분명한 중원의 언어였다. 황색 피부에 검은 머리칼의 소녀가 쇠사슬에 두 발이 묶인 채 칼을 들고 서 있었다. 문제는 그 칼이 남이 아닌 자신의 목을 향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야현이 급히 소녀를 향해 다가서려는 찰나였다.

“으아아악!”

거리를 좁혀오는 사내들의 기세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소녀가 목을 그었다. 자결을 한 것이다. 반가웠던 마음이 허탈감으로 바뀌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야현의 눈에 다시 공허함이 들어찼다.

“베라칸.”

“예, 주군.”

“저 소녀의 시신을 사서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어라.”

“알겠습니다.”

베라칸이 즉시 야현의 명에 따라 움직였다.


***


타닥- 타닥- 타다닥!

야현은 푹신한 소파에 앉아 벽난로를 바라보았다.

생나무가 타면서 간간이 자그만 불꽃이 튀었다.

야현은 장작불이 주는 이 따뜻함이 좋았다.

사실 뱀파이어는 더위나 추위를 타지 않는다. 그저 더위와 추위를 느낄 뿐, 그에 대한 영향은 거의 없는 편이다. 마치 한서불침(寒暑不侵)의 경지에 오른 무림의 고수처럼 말이다.

야현은 무의식적으로 왼팔을 쓰다듬었다.

사람이라면 당연히 따뜻해야 할 피부가 뱀의 것처럼 차가웠다. 서늘한 방 공기 때문은 아니었다. 숙명처럼 따라다니는 천형이었다.

야현이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오므렸다 폈다. 백오십 년이 다되어가지만, 여전히 이질적인 것이 바로 이 차가운 피부였다. 지금의 이 냉랭함이 늘 그가 인간이 아닌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인지시켰다. 야현은 낯을 찡그리며 옆에 놓아둔 위스키가 담긴 술병을 집어 들었다.

벌컥 벌컥 벌컥!

독한 위스키를 단숨에 반병이나 들이켰다. 식도를 타고 내려간 화끈한 열기가 서서히 몸 구석구석으로 퍼져 나갔다.

위스키를 비우는 동안 야현은 습관적으로 팔뚝을 쓰다듬었다. 술을 거의 다 마셔 갈 때쯤 되자 차갑던 피부에 드디어 온기가 깃들었다. 기쁜 건 잠시였다. 술의 힘을 빌려야지만 온기를 가질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에 이내 씁쓸한 미소가 감돌았다.

“훗.”

그리고 그 미소는 이내 조소로 바뀌었다. 백 년도 전에 이미 받아들인 현실이었다. 그럼에도 다시 감상에 빠진 것은 아마도 오늘 오후에 본 중원의 소녀 때문일 것이다.

문득 한 인물이 떠올랐다.

뱀파이어가 되기 전 항상 영감쟁이라 부르며 스승으로 모시지 못한 이, 바로 전진교 교하 진인이었다.

“인터디멘션 오픈(Interdimension open)!”

아티팩트 시동어에 왼손 약지에 끼워진 금반지의 푸른색 보석이 빛나며 손바닥에 검은 점이 피어났다. 마치 종이에 잉크가 번지듯 검은 점은 서서히 커져 구체가 되었다.

야현은 그 구체, 아공간에서 낡은 서적 두 권을 꺼냈다.

이곳의 책과는 모습부터가 확연히 달랐다.

서책의 표지에는 역시나 이곳에서는 볼 수 없는 언어, 한자가 적혀있었다.


현문정종(玄門正宗) 선천공(先天功)

전진(全眞) 진무(眞武)


전진교의 상승무공서였다.

야현은 아득한 눈빛으로 두 서책을 어루만졌다. 그가 유일하게 가진 고향의 물건이기도 했다.

야현이 서책을 손가락으로 집어 주르르 훑었다.

겉은 몹시 낡았지만 속은 의외로 매우 깨끗했다. 그간 서책을 꺼내 표지만 살폈지, 안은 읽어보지 않아서였다.


“현아, 만약 전진교로 갈 일이 있다면 이것을 교에 전해다오.”


그의 마지막 유언이 떠올랐다.

‘150년이나 흘렀군.’

야현은 남은 위스키를 들어 다시 한 모금 마셨다.

‘화주가 마시고 싶군.’

과거 허름한 뒷골목 객잔에서 마셨던 싸구려 화주가 갑자기 마시고 싶었다.

피식.

어떤 결심이 야현의 눈에 떠올랐다. 더 이상의 공허함은 볼 수 없었다.

탁!

야현이 무공서를 다시 아공간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사라진 탁자 위.


고향에서 술 한잔하고 오겠다.


급하게 휘갈겨 쓴 쪽지 한 장만이 위스키병 옆에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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