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의 딸

막간 이야기 : 스토커 下

완전히 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멍해진 나의 모습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린 경감은 내 머리를 서류철로 툭툭 치면서 신경을 건드렸다.

“그러게 평소에 처신 좀 잘하라고 했지! 얼굴은 허옇게 칠해가지고는 변태들의 표적이 되질 않나. 니가 입고 다니는 옷도 살색이 안 보여서 그렇지 그런 놈들에게는 완전히 포르노나 다름없다고. 가죽 부츠에 코르셋이라니. 네가 무슨 지배자라도 되는 거냐?”

그나마 데이브가 내 편인 것처럼 경감을 말리긴 했지만 말리는 태도도 그다지 마음에 드는 게 아니었다. 웃음을 참는 듯한 얼굴이라니. 이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인 건 나밖에 없었던 것같다.

그러더니 그린 경감은 내 머리를 툭툭치던 서류철을 테이블 앞에 던져 놓았다. 의자에 멍청하게 앉아있던 내 눈에 잘 보이게 놓으려는 모양이었고, 나는 그 열려진 파일에 올려져 있는 사진을 똑똑이 보았다.

‘세갈 쉰 네스트라다’ 출소한지 반년이 지난 성범죄자였고, 잡혀들어갔을 당시에는 미수, 게다가 모범수라서 조기 출소된 인생의 딱한번 실수를 해서 감옥에 들어간 케이스였다. 멕시칸이면서도 풍족하게 살았는지 아니면 장학금을 다니고 있는지 고등교육까지 받고 있는 사람이었다. SFAI(샌프란시스코 미술대학)에 재학중이라는 학적도 눈에 띄었다. 하지만 절대로 눈길을 뗄 수 없는 것은 그의 사진이었다.

얼굴이 퉁퉁 부어서 한쪽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고, 입술은 터져서 피를 질질 흘리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심하게 폭행당한 흔적이었다.

그렇다. 성범죄자에게 당했다는 것은 내가 성범죄에 당한 게 아니라 성범죄자에게 고소를 당한 것이었다. 정확히는 그는 날 고소하지 않았지만 원체 중상을 입은 터라 입건이 된 상태였고, 여차하면 FBI 경력에 치명적일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전심에서 범죄로 인정되면 공무원으로써 파면 해임이 가능하다. 이 사람들은 실금실금 웃고 있지만 빚쟁이 인생인 내게는 그야말로 똥줄이 타는 상황이다.

그런 이 쪽의 마음도 모르고 그저 알몸으로 찬물로 샤워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키득키득 거리고 있는 이 사람들의 모습에 지금 당장에라도 달려들고 싶었다.

“빠를 수록 너도 좋겠지? 일단 서류는 다 해놨어. 긴장하진 말라고. 네스트라다 녀석도 널 집어넣고 하는 눈치도 아닌데다가, 녀석의 전과도 참작할 수 있는 거고, 게다가 너 뒤에 검사장이 빽인데 뭐가 걱정이야?”

검사장이 빽이라고? 물론 그렇긴 하지. 하지만 이빨이 다 빠져서 이제 남은 임기는 6 개월에 불과하고 재선에는 관심도 없는 아줌마가 무슨 힘이 있다고 날 도와주겠나? 오히려 반대파에 시달리다가 내가 경찰에서 쫓겨나고 감옥에서 1 년 썩고 나오는 게 가장 합리적인 결론일 것이다.

나는 놀랄만 했지만 데이브는 왜 그렇게 놀란 거였지? 아마도 그에게 전화할 때도 내가 성범죄자에게 당했다라고만 말하고 확 끊은 거였을까? 정말로 우리 집에 왔을때까지 만해도 그는 엄청나게 흥분해 있었고, 날 위로하기 위해서 무슨 말을 하려고 계속 시도하였다. 하지만 그가 이야기 해봐야 내 화만 돋운다는 것을 시도하려 할 때마다 깨닫고는 그저 조용히 움찔움찔 거리면서 운전이나 했을 뿐이었다.

그러더니 그린 경감은 구석의 서랍을 열기 위해 주머니에서 키를 찾기 시작했다. 더 이상 듣고만 있을 순 없다. 뭔가 나도 액션을 취해야한다고 생각되었다. 이대로 앉아서 멍하니 있다가 정말로 실업자가 될지도 모른다. 무엇보다도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일을 내가 저질렀다고 하면 당황스러울 수 밖에 없다.

“어디보자. 인지보고서에는 이렇게 써있네. 샌프란시스코 파크 근역 술집에서 신나게 회식을 하던 FBI 직원들이 새벽 2 시경에 파장이나고 2 차 갈 사람들은 2 차를 가고, 집에 가는 사람들은 집에 가기로 했는데. 넌 집으로 가는 쪽이었대. 일단 혼자서 나가긴 했지만 혹여나 걱정이 된 동료 직원 멜리사 브론스틴이 뒤 쫓아왔는데. 그녀가 목격한 장면이 신나게 이 친구를 두들겨 패고 있었다는 거지. 즉 전후사정은 알 수 없고, 목격 당시에서부터 이미 폭행이 진행되고 있었어. 그런데 네가 아무 것도 기억 못한다니 정당방위를 입증해줄만한 것은 오직 피해자의 증언 뿐이겠군. 그 친구가 마조히스트라서 너한테 두들겨 맞고 흥분했기를 바라는 수 밖에 없겠군.”

머리가 다시 쿡쿡 쑤시기 시작한다. 술기운 때문만이 아니라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폭행 사건 때문이었다. 나처럼 온순한 사람이 도대체 무슨 이유로다가 사람을 이 모양으로까지 만들었지?

“그런데 아무리 소피아가 강하다고 해도 남자를 그렇게 묵사발을 내 놓을 정도까지 돼요? 게다가 이 사람은 분명히 아침에 집에 있었다고요. 목격자가 있는데도 현장을 도망간다는 건 말이 안돼요.”

데이브가 날 위해 변호를 해주는 건가? 하지만 그 변호에는 치명적인 오류가 있다. 난 태권도 검은띠를 가지고 있고, 체포술 시범단에 들어가려고 열심히 노력하던 때도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못 들어갔다.

“그래서 목격자이 증언을 더 들어봤더니 피해자와 이 녀석을 떼어 놓은 건 다름아닌 목격자였고, 소피아를 보낸 것도 그녀였다고 하더군. 그리고나서 상황을 보니까 남자가 움직이질 않아서 앰뷸런스를 불렀댔나? 그랬더니 피해자가 FBI 여자 요원한테 맞았다고 횡설수설하는 바람에 괜히 뒤집어 쓸까봐 소피의 이름을 댔다는 거야.”

<A name="#772f70f4"></A>내게 보여주라는 거라면 이 봉인을 풀어도 된다는 거겠지. 경감님에게 받은 스케치북을 테이블 위에 올려 놓고 연필꽂이에 들어있는 커터칼을 꺼내서 스케치북에 붙은 테이프를 떼어내었다. 그리고 그 것을 열자 세상에나 도대체 이게 뭐지?

내 뒤에서 스케치북을 보고 있던 데이브는 비꼬고 싶었는지 통신어체를 쓰면서 내게 물었다. 하지만 그 것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구석에 소피 마리아 2007 년 12 월 31일이라고 써있지 않았다면 나도 이게 나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린 경감은 나와 스케치북을 번갈아 보더니 입모양으로 ‘미친거 아니야?’하고 말했다. 미안하지만 다 알아봤다.

게다가 지금은 씻고 바로 나온터라 화장을 전혀하지 않아서 이 모습과는 많이 다른 모양이었다. 뭔지 몰라도 나를 보면서 자위라도 할 것같은 변태적 성향이 잘 드러나있는 그림이었다. 젠장 생각만해도 소름이 좍좍 돋는다.

“입술과 가슴을 강조했다는 것은 변태적 성향을 나타낸다고 들었어요. 게다가 얼굴 채색에 신경을 쓴 것으로 봐서는 이 친구… 어린시절 학대 받았을 가능성이 적지 않죠. 그렇기에 소피아 같은 그로테스크를 동경…”

내 오른쪽 뒤에 서 있던 데이브는 불시에 들어간 팔꿈치 공격에 숨이 탁 막혔는지 옆구리를 잡고 뒤의 소파에 앉았고, 그린 경감은 계속 다음페이지로 넘기라고 하였다. 일단 말을 들어서 다음 페이지를 넘기려니 조금 무섭긴 했다. 확실히 이 걸 그린 녀석은 제정신이 아니다.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하는 말도 안되는 너드에 오타쿠에 긱스에 크리피다.

“아니 왜 이번에는 뭐 궁금한 거 없어요? 얼굴에 화장도 안 되어있고, 눈매도 이렇게 날카롭고 뾰족뾰족하게 그렸는데 왜 아무말도 안하는 거예요?”

하긴 지금 화장도 별로 안하긴 했지만… 그림 쪽이 훨씬 날씬하긴 하지만… 팔 두꺼운 건 비슷하고… 어쩌면 난 진실을 마주하기 힘든 것이었을까?

왜인지 넘기기 두려워졌다. 이번 페이지를 다음으로 넘겨서 정말로 내가 봐선 안되는 그림이라도 나오는 건 아닐까? 혹여나 내 누드라도 그려져 있으면 난 어떻게 생각해야하는 거지? 모른긴 몰라도 여기 그려진 그림들… 언젠가 내가 포즈를 취한적이 있는 그림들 같다. 그 것도 거울 앞에서 나 혼자! 특히나 두 번째 그림의 포즈는 남들에게 보여주기 남사시러운 포즈였고, 지금 남들 앞에 보여졌다. 대충 보아하니 이제 한장이 남았고, 무지 쎈게 남아 있을 것만 같았다.

“도대체 이건 누구세연? 하나도 안 닮았어. 이렇게 귀여운 걸 그려놓고 옆에 소피라고 우기면 도대체 이거 개그 아니에요?”

하지만 난 하나도 웃기지 않았다. 그리고 그린 경감도 전혀 웃지 않았다. 그는 이 그림에 나타난 이 모습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내가 화장을 하기 전의 모습이었고, 이렇게 몸이 불어나기 전의 모습이었다.

“이 그림이, 소피의 한때 모습이었기 때문이지. 정확히는 거의 사람들이 모르는 소피 마리아의 모습이랄까? 이 녀석... 정말로 소피의 스토커였나보군.”

어디 창피한 과거의 이야기를… 하지만 이 걸로 확실해졌다. 내가 두들겨 팬 녀석은 내가 어린시절부터 나를 보아온 스토커다. 그리고 내 쪽에서는 받아들여주지 않았지만… 그는 정말로 진심으로 날 사랑해주었나보다. 한 귀퉁이에 포스트 잇으로 붙어있는 메모지를 읽어보았다.

‘당신이 저로 인해서 고통받는 것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이 원하지 않는 것을 알면서도 저는 당신을 멀리서 계속 보아왔고, 당신을 그려왔습니다. 이번에 크게 용기를 내어서 당신께 그림을 보여드리고 싶었지만 결국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되고 말았군요. 하지만 저의 잘못된 표현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누구라도 자신을 십년동안 스토킹했다고 생각하면 기분 나쁠테니까요. 하지만 전 가난한 고학생입니다. 병원비만 부담해주신다면 이번 사건에 대해서 당신에게 불이익이 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기억이 돌아왔다 아니 왜 때렸는지 기억이 난다. 어쩌다가 그렇게 심하게 두들겨 팼는지는 기억이 안나지만 왜 때렸는지는 기억이 난다. 스케치북을 막 뒤지다 보니 딱 그림 한 장이 스케치북에서 떨어진채로 사이에 끼워져 있었다. 이거 내가 뗀 거다.

그러자 경감님과 데이브는 한순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둘이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하더니 그린 경감이 턱짓으로 뭔가를 허락하자 데이브가 말했다.

그 말이 날 놀리려는 건지 아니면 진실인지는 모르겠다만… 그 다음 나는 아우~ 하고 소리를 질렀고, 경감과 데이브는 한참을 웃었던 것같다.

결국… 험난하게 돌아오긴 했지만 겨우 일상을 되찾았고, 2008 년의 시작은 떨어져버린 간을 줍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얻은 것은 없었지만 잃은 것을 되찾은 것만으로도 왜인지 정말로 다행스러운 시작이라고 생각되는 새해 첫날이었다.

2 재밌어요!

Comment ' 4

작성자

Lv.1 트왈라

작성일

08.11.30 21:39

No. 1

지금까지 선물 받은 그림들 입니다.
위에서부터
스와르드륀 님(메멘토)
네이시 님(기프트, 영혼의 시 등등)
스칼드 님(마녀/ 위치 크래프트)
세츠다 님(나는 당신의 기사입니다)
그리고 다시 네이시 님 이네요

그 동안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하고
다음에 새로운 글로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찬성: 0 | 반대: 0
작성자

적안왕

작성일

08.11.30 21:51

No. 2

끄끄... 개인적으로 소피의 이미지와는 매치가 안되서... orz...
소피의 이미지하면 마녀 복장만이...

찬성: 0 | 반대: 0
작성자

Lv.1 Number

작성일

08.11.30 21:56

No. 3

빨리 돌아오세요 ㅜㅜ

찬성: 0 | 반대: 0
작성자

Lv.1 가을귓

작성일

08.12.05 00:06

No. 4

악 ㅋㅋㅋㅋ 어렸을때 ㅎㅎㅎ

찬성: 0 | 반대: 0

제목		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	막간 이야기 : 스토커 下 +4	08.11.30	525	2	107쪽
47	막간 이야기 : 스토커 上 +1	08.11.30	436	2	12쪽
46	에필로그 +2	08.11.30	547	3	13쪽
45	네번째 이야기 : 컬트 클럽 完 +7	08.11.30	451	2	5쪽
44	네번째 이야기 : 컬트 클럽 9 +2	08.11.30	460	3	16쪽
43	네번째 이야기 : 컬트 클럽 8 +7	08.11.28	445	2	17쪽
42	네번째 이야기 : 컬트 클럽 7 +3	08.11.27	420	2	16쪽
41	네번째 이야기 : 컬트클럽 6 +7	08.11.26	421	2	15쪽
40	네번째 이야기 : 컬트클럽 5 +6	08.11.26	409	2	15쪽
39	네번째 이야기 : 컬트클럽 4 +7	08.11.25	539	3	15쪽
38	네번째 이야기 : 컬트 클럽 3 +9	08.11.24	572	2	22쪽
37	네번째 이야기 : 컬트 클럽 2 +7	08.11.23	397	2	15쪽
36	네번째 이야기 : 컬트 클럽 1 +5	08.11.23	441	2	10쪽
35	당신은 날 돌게 만들어 +6	08.11.22	436	2	16쪽
34	세번째 이야기 : 블랙스톰 허쉭스 뉴트론 블레이드 오브 디아볼릭 完 +6	08.11.22	540	2	24쪽
33	세번째 이야기 : 블랙스톰 허쉭스 뉴트론 블레이드 오브 디아볼릭 9 +3	08.11.21	481	2	14쪽
32	세번째 이야기 : 블랙스톰 허쉭스 뉴트론 블레이드 오브 디아볼릭 8 +6	08.11.21	478	2	17쪽
31	세번째 이야기 : 블랙스톰 허쉭스 뉴트론 블레이드 오브 디아볼릭 7 +6	08.11.20	476	2	13쪽
30	세번째 이야기 : 블랙스톰 허쉭스 뉴트론 블레이드 오브 디아볼릭 6 +7	08.11.20	453	2	11쪽
29	세번째 이야기 : 블랙스톰 허쉭스 뉴트론 블레이드 오브 디아볼릭 5 +8	08.11.19	470	2	27쪽
28	세번째 이야기 : 블랙스톰 허쉭스 뉴트론 블레이드 오브 디아볼릭 4 +6	08.11.18	435	2	14쪽
27	세번째 이야기 : 블랙스톰 허쉭스 뉴트론 블레이드 오브 디아볼릭 3 +5	08.11.17	417	2	17쪽
26	세번째 이야기 : 블랙스톰 허쉭스 뉴트론 블레이드 오브 디아볼릭 2 +8	08.11.16	415	2	12쪽
25	세번째 이야기 : 블랙스톰 허쉭스 뉴트론 블레이드 오브 디아볼릭 1 +8	08.11.16	495	2	13쪽
24	마녀의 데이트 +3	08.11.15	366	3	20쪽
23	두번째 이야기 : 문라잇 섀도 完 +4	08.11.15	494	2	21쪽
22	두번째 이야기 : 문라잇 섀도 9 +2	08.11.14	347	2	11쪽
21	두번째 이야기 : 문라잇 섀도 8 +2	08.11.14	506	2	14쪽
20	두번째 이야기 : 문라잇 섀도 7 +4	08.11.13	427	2	16쪽
19	두번째 이야기 : 문라잇 섀도 6 +3	08.11.12	521	2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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