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의 순정에 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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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결
작품등록일 :
2016.03.31 08:14
최근연재일 :
2016.04.03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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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3.31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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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장여자 & 묘(妙) 한 선비

DUMMY

양반가의 자식에게 조차 글을 가르치는 일이 드물었던 조선 중기. 명가(名家)라 불리는 양천허 씨(陽川許氏) 허염의 딸 초희는 어깨너머로 배운 글에 흥미를 느끼며 매일을 글 읽기에 여념이 없었다.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몇 시진 내내 꼿꼿한 자세로 서책에서 눈을 떼지 않는 그녀는 다른 양반가의 여식과 대조되는 모습을 보였다. 무릇 여인이라면 자수를 놓게 마련이지만 서책을 보는 일에 더 재미를 붙였다.


이윽고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서책의 마지막 쪽을 덮었다. 한 번 손에 잡히면 끝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미를 지녔다. 속독(速讀)에도 능숙해서 반나절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의걸이장(衣─欌)이 있는 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오동나무로 된 장의 문 앞에는 국화 한 송이가 새겨져 있었다. 이내 문 한 쪽을 열어젖히자 선비들이 입는 두루마기와 바지, 저고리가 그녀가 입는 비단 저고리와 치마 사이에 깊숙이 걸려 있었다.


이윽고 허리를 숙이며 맨 밑에 하단에 문을 여니 선비들이 쓰고 다나는 갓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초희는 주섬주섬 옷가지를 꺼내 들고는 입기 시작했다. 능수능란한 손놀림으로 봐서는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이따금 글방에 들리거나 서사(書肆)에 들릴 때면 남장을 하고 다녔다. 어머니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도 있지만 여인이 서사(書肆)에 출입하는 모습을 좋지 않게 바라보는 시선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옅은 푸른 두루마기를 걸치고 갓을 눌러 쓰니 제법 선비의 모습을 갖추었다. 이내 굳게 닫힌 방문을 열고 고개를 삐죽 내밀어 주위를 살피며 밖으로 나왔다. 그녀의 모습이 완전히 드러나자 어디에선가 익숙한 사내의 중저음 목소리가 귓속에 울려 퍼졌다.


“이리 남장을 한 모습을 보니 서책을 다 읽었나 보구나.”


초희는 소리의 근원지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복사꽃 옆 담벼락을 서성이며 그 아래 가지런히 심어져 있는 꽃을 바라보고 있던 이 강유였다. 어릴 적 일찍 세상을 떠난 친 오라비인 허 욱의 오랜 벗이자 그녀와도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였다.


“오라버니께서 예까지 어인 일로 오신 거예요? 청국(淸國)에 가신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먼 발치에 서 있던 강유는 쭉 뻗은 다리로 성큼성큼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어느새 두 사람의 거리는 길이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좁혀졌다.


가까이서 보니 제법 성숙한 여인의 자태를 갖추고 있었다. 마냥 어린아이 같은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언제 저리 자랐는지. 강유의 얼굴에서 보일 듯 말듯한 미소가 지어졌다가 이내 섭섭함을 내비쳤다.


“청국(淸國)에 간다고 한지가 몇 해인지 아느냐? 어떻게 너는 나에 대해 그리 모르는 것이냐? 난 네 눈빛만 봐도 네가 지금 무슨 생각하는지 다 꿰뚫어 볼 수 있는데 말이다.”

초희는 강유의 말에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건조한 말투로 대꾸했다.


“그런 거짓말은 침이라도 바르고 하셔요.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스승님께 그리들었습니다.”


“이율, 그 녀석에게 널 가르치라고 한 보람이 있구나.”


“그 스승에 그 제자라 하잖아요.”


“네 스승이기 전에 내 벗이기도 하지.”


“더 이상 제게 볼일이 남아 있지 않으시면 먼저 가 보겠습니다.”


“잠깐. 내 너에게 줄 것이 있다.”


강유는 한 쪽 팔 사이에서 주섬주섬 무언가 꺼내 들고는 초희의 앞에 주먹 쥔 손을 펼쳤다.


“이것은......”


은은한 푸르스름한 색이 곱게 칠해진 나비 모양을 한 머리에 꽂는 장신구였다. 그러나 힘들게 찾은 것치고는 반응은 다소 냉랭했다. 기대한 자신이 어리석었다. 뭐가 그리 좋다고 청국(淸國)에 가자마자 구하는 데만 꼬박 하루를 보낸 것인지.


“딱히, 너를 위해서 구해 온 것은 아니니 별 의미 같은 거 두지 않아도 된다.”


“오라버니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지 않아도 잘 알고 있으니 안심하셔요.”


강유는 마주 앞에 선 초희를 향해 가볍게 웃어 보이며 머리에 쓴 갓 위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이윽고 두 사람은 함께 나란히 걸으며 집 밖을 나섰다. 어느덧 계절은 한 층 여름을 맞이하는 듯 봄은 끝자락에 닿아있었다. 연신 거리를 걷는 내내 초희는 살짝 아래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놓칠 리 없는 강유는 장난기가 발동했는지 한 마디를 내뱉었다.


“뭐 그리 죄지은 사람처럼 걷고 있는 것이냐? 혹, 사람들이 너를 알아볼까 봐서 그러는 것이냐?”


“아, 아닙니다. 그저 눈에 띄지 않게 걷고 싶을 뿐입니다.”


“오히려 더 궁금증을 유발하는 꼴이 된 거 모르느냐?”


“그게......무슨.”


“보아라. 지나가는 사람들이 너를 바라보는 눈 빛을.”


초희는 놀란 듯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나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은커녕 주위엔 손에 꼽힐 정도의 사람들만 거리에 즐비해 있었다.


“지금 장난하세요?”


강유는 익살스러운 표정을 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라버니. 이럴 거면 다음엔, 아니 평생 따로 다녔으면 좋겠습니다.”


“싫다면. 어쩔 것이냐”


“싫어도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쯤 해서 각자 따로 다녔으면 합니다. 옆에 자꾸 낯익은 얼굴 때문에 불편하던 차였습니다.”


“꼭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질 않느냐. 그러지 말고 같이 다니면 안 되겠느냐? 내 너에게 청국에 다녀온 일들을 얘기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단 말이다.”


“그런 얘기 오라버니께 귀가 따갑도록 하도 많이 들어서 진저리가 납니다. 이제 더는 오라비와 말장난하고 싶지 않으니 그만 가셨으면 합니다."


“난 죽어도 너와 함께 길을 걸어야겠다.”


“네. 그럼 저 먼저 갈 터이니 일각(一角)까지 기다렸다가 그때 움직이십시오.”


강유의 손끝이 닿기도 전에 초희는 재빨리 몸을 돌려 발걸음을 재촉하듯 종종걸음을 걸었다. 무안해진 그의 팔은 맥없이 쓰러지듯 제자리로 돌아왔다. 어느새 그의 시야에서 초희의 모습이 서서히 멀어져 갔다. 강유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애절한 눈빛으로 등을 보인 채 걷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언젠가는 너에게 나의 손이 닿기를...... 너의 마음이 나의 마음과 하나 될 수 있기를......’

*

한참을 뒤도 돌아 보지 않고 연신 걸음을 걷다 보니 어느덧 목적지 앞에 발이 닿았다. 반쯤 열린 문틈으로 발을 들여놓는 그때, 문득 초희는 저잣거리 한복판에 오라비를 홀로 두고 온 일이 마음에 걸렸는지 걱정 어린 눈빛을 드러내며 고개를 젖혔다. 그러나 도성 한복판 어디에도 유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깟 장난이 뭐라고 그런 맘에도 없는 말을 내뱉은 것인지. '한 번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고 말한 스승 이율의 가르침이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비록, 혈육의 정을 나눈 사이는 아니지만 오랜 세월 제 친 오라비를 대신해서 허물없이 지내 온 사이였다. 초희에게 있어서 유영은 제 친 오라비만큼이나 자상하며 화 한 번 내지 않는 따뜻한 존재였다.


다시 생각을 고쳐먹고 갈까 말까 망설이기를 하는 그때, 낯선 사내의 음성이 귓가를 후벼파듯 쩌렁쩌렁 울렸다.


“언제까지 그 자세로 있을 작정이오. 내 비록 바쁜 몸은 아니지만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소? 혹, 오던 길에 무언가 떨어트리고 온 것이오?”


초희는 여자임이 들킬세라 그 어떤 변명도 대꾸도 하지 않고 애꿎은 갓을 메 만지며 고개를 숙여 얼른 나머지 발을 안으로 들였다. 그렇게 서사 안으로 들어서니 오래된 서책들의 냄새가 그녀의 코끝을 자극했다. 이윽고 그녀의 모습을 확인 한 주인이 반가운 듯 헐레벌떡 곁으로 다가왔다.


“아이고 우리 단골 꽃도령께서 오신 걸 보니 그저께 가져가신 책들을 다 읽으셨나 봅니다.”


“어흠.”


초희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최대한 걸걸한 사내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물었다.


“그래, 요즘 새로 들어온 책이라도 있는가?”


“역시 눈치 한 번 빠르시다니까. 청국(淸國)에서 요즘 뜨거운 열기가 넘쳐나는 서책입니다. 보보 정심(步步啨心).”


“보보...... 정심?”


“이 책으로 말씀드리자면. 드넓은 대륙(大陸)에 많은 사람들에게 입방아에 오르며 화자가 되고 있는 서책이라고 할 수 있습죠. 한 번 보면 헤어 나올 수 없고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그런 가슴 시린 아픔을 절절하게 묘사한 기가 막힌 서책이라고 할 수 있습죠. 그리고 중간중간에 안구정화(妟璆眐芲)까지 되는 삽화도 들어 있으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푹~ 빠지신다에 제 손모가지를 걸습죠.”


“한데. 안구정화가 무슨 뜻이오?


“안구정화(妟璆眐芲)란. 편안할 안, 아름다운 옥구, 바라볼 정, 꽃 화. 즉, 아름다운 꽃을 바라보면 편안하다. 그 뜻 입지요. 말 그대로 사내의 경우 어여쁜 여인을 보고 눈이 호화(糊化)롭다고 표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죠. 반면, 여인의 경우... 사내의 벗...”

초희는 주인의 다음 말이 뭔가 입에 담지 못 할 말임을 즉각, 알아차리고 그 입을 막았다.


“아, 아무튼 무슨 뜻인지 내 알아 들었으니. 자네의 말마따나 한 번 읽어 보겠네.”


“캬, 역시 우리 꽃도령님은 보기와 다르게 호탕하시다니까.”


이내 주인은 주위 시선들을 살피며 구석진 바닥에 놓인 서책들 사이에서 먼지를 잔뜩 묻은 서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대충 손으로 먼지를 쓸어내리며 초희의 앞에 건넸다. 이윽고 맞은편에 서 있는 주인은 얼른 소맷자락 안으로 넣으라는 눈빛을 보내며 초희를 재촉했다. 하지만 그녀는 선뜻 받아할지 말아야 할지 머뭇 거리 기만했다. 아니, 받을 수 없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외설(猥褻)이 난무하는 패관 잡기(稗官雜記)였다.


“아니, 왜 안 받으시는 겁니까? 다들 이 서책 못 구해서 안달이 났는데.”


“......이건...... 민간에 떠도는 잡스러운 이야기를 적은 패관 잡기(稗官雜記)가 아닌가? 나를 어찌 보고. 도로 가져가시게."


“소인은 그저 단골이시기에 제 성의를 표한 것뿐이니 가볍게 받아 주시면 됩니다.”


“어허, 글쎄. 이런 성의는 내 받지 않을 터. 그냥 받았다고 퉁 치고 어서 거둬들이게.”


“나중에라도 다시 보여달라 하시......”


초희는 주인의 말을 잘랐다. 얼른 소맷자락을 들어 올리며 엽전 한 냥을 지불했다.


“그런 일 추호도 없으니 내 이만 가 보겠네. 음.”


이렇듯 급히 서두르는 이유는 단 하나. 한 시라도 더는 이곳에 있다가 혹 다른 선비들에게 외설스러운 서책을 즐겨 보는 선비로 비칠까 노심초사(勞心焦思) 하였기 때문이다. 이내 흐트러진 마음을 바로잡으며 걸음을 걷고 있는 그때. 초희의 가녀린 어깨를 두드리는 제 법 크고 넓은 사내의 손길이 느껴졌다. 혹, 오라비인 유영이 한 짓인 줄 알고 반가운 마음에 미소를 잔뜩 머금은 채 고개를 돌렸다.


“아까 일은 잊어...... 누구...... 시오?”


환하게 웃던 그녀의 얼굴은 급정색 해졌다.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낯선 사내를 자세히 바라보니 서사 문 앞에서 마주한 선비였다. 훤칠한 외모를 뽐내며 선비는 한 손에 들고 있는 서책을 높이 들어 보였다


“앗,”

초희는 허둥지둥 소맷자락을 살폈다. 그러나 아무리 뒤져봐도 있을 리 만무했다. 이유인즉, 맞은편 선비가 들고 있는 서책이 바로 그녀의 것이었으니.

초희는 얼른 사내가 들고 있는 서책을 잡기 위해 까치발을 한 채 팔을 높이 들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잡힐 듯하다가 놓치고 말았다.


“저기, 지금 장난하십니까?”


맞은편, 선비는 가벼운 웃음을 내 보였다.


“하하하.”


초희는 생판 처음 본 선비의 웃음에 어이가 없었다.


“제 것이니 어서, 돌려주십시오.”


“이 서책이 선비의 서책이라고 어떻게 확신하는 거요?”


“당연지사 제가 엽전만 지불하고 물건은 놔두고 왔으니. 제 것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그리고 선비께서 이리 가지고 오셨으니. 제 것이 맞지요.”


“정녕, 이 서책이 선비의 것이 맞소?”


“몇 번 말해야 알아 들으실 겁니까? 장난 그만하시고 얼른 주십시오. 곧장 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사람을 가지고 놀리는 게 딱 오라비인 유영과 닮아 있는 선비였다. 무슨 꿍꿍이 인지 알 길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어딘가 모르게 묘(妙) 한 기운을 뿜어냈다.


작가의말

드디어 만났네요^^ 박선비와 허난설현의 당호를 가진 허초희가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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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의 순정에 반하다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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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14. 닿을 수 없는 그대. +1 16.04.03 91 0 21쪽
15 #13. 돌연변이의 탄생(2) +1 16.04.03 32 0 15쪽
14 12화 돌연변이의 탄생(1) +1 16.04.02 77 0 29쪽
13 #11. 수수께끼의 선비(2) +1 16.04.02 46 0 21쪽
12 #10. 수수께끼의 선비. +1 16.04.01 57 0 21쪽
11 #9. 비와 당신...... 그리고 +1 16.04.01 39 1 21쪽
10 #8. 천명(天命) +1 16.03.31 64 0 16쪽
9 #7. 달 밝은 밤. 두 사내의 은밀한 조우. +1 16.03.31 30 0 19쪽
8 #6. 님과 함께...... 달 밤을 거닐며. +1 16.03.31 65 0 21쪽
7 #5. 화려함 속에서 살아가는 외로운 부용화 꽃 한 송이. +1 16.03.31 103 0 11쪽
6 #4. 흩날리는 벚꽃 잎이 떨어지는 어느 멋진 봄날. +1 16.03.31 28 0 17쪽
5 #3. 앙칼진 새끼 고양이 +1 16.03.31 22 0 10쪽
4 #2. 한 여인과 두 사내 +1 16.03.31 92 0 21쪽
» #1. 남장여자 & 묘(妙) 한 선비 +1 16.03.31 86 0 13쪽
2 [프롤로그] #1-2 늑대 선비. +3 16.03.31 86 0 12쪽
1 [프롤로그#1. 만월(滿月)의 밤] +3 16.03.31 198 1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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