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의 순정에 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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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결
작품등록일 :
2016.03.31 08:14
최근연재일 :
2016.04.03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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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4.01 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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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수수께끼의 선비.

DUMMY

서사 안으로 들어가려는 초희를 이끌고 경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한 포목점 (布木店) 앞이었다.


“......이곳은? 왜 이리로 저를 데리고 오시는 것입니까? ”


“개인적인 일로 온 것이니 개의치 마시오. 일전에 옷 한 벌을 봐둔 게 있는데. 아는 여인에게 선물하려고 하오. 한데, 체격이 선비와 비슷해서 그 여인이 입기 전에 한 번 전체적인 분위기가 어떤지 궁금하여 데리고 온 것 이오”


돌려서 말을 하고 있지만 그가 하는 말뜻을 초희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결국은 저 보고 입어보라는 말씀이시지 않습니까?”


경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부탁일랑 저는 들어 줄 수 없습니다.”


초희는 곧바로 밖으로 발길을 두었다. 그러나 순순히 보내줄리 없는 경은 그녀의 팔을 잡으며 붙잡았다.


“눈 딱 감고 한 번만 입어 주시오.”


경은 제 눈을 감으며 애원하며 부탁했다. 그러나 초희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런 눈으로 바라보시며 부탁하셔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겁니다.”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 준다는데 산 사람 소원 정도는 들어 주면 안 되시오?”


“네. 제 자신이 용납 못 합니다. 그리고 선비님께서는 죽은 사람이 아닌 산 사람이 아닙니까? 그러니 더더욱 들어 줄 수 없는 게 제 이유입니다.”


그때, 그들의 앞에 포목점 여주인이 다가섰다. 그녀는 옆에 서있는 선비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고 넋이 나간 채로 바라보았다.


“워매, 워매. 아니 무슨 선비 얼굴이 이리 곱단 말이 감? 진짜 얼굴만 봐서는 딱 여인이네. 여인이야. 그나저나 이 옷들은 어찌 할 까요?”


“이, 자가 한 번 입어 보겠다고 하니 어서 방 안으로 들여보내게.”


“네에?”


초희는 제 의지와 상관없이 막무가내로 말을 내뱉는 경의 행동에 어이가 없었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나 경은 눈길 하나 주지 않고 밖으로 향했다.


포목점 여주인은 초희의 모습을 발끝에서부터 머리 위까지 천천히 올려다보며 따라오라는 눈빛을 보냈다. 여주인의 뒤를 따라가는 초희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그녀는 허탈한 심정을 뒤로 한 채 방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경은 바깥에서 여러 비단 천을 살피고 있었다. 고운 색감의 비단천은 햇빛을 받아 밝은 색을 띠고 있었다. 그는 여러 종류의 값비싼 비단 천을 훑어보다가 이내 시선을 딴 곳으로 두었다. 그의 눈에 여인들이 신는 꽃신이 들어왔다. 이내 형형색색 고운 색을 띠는 꽃신들을 살폈다. 나란히 짝을 이루며 높여진 꽃신들 중에 유독 그의 눈에 들어오는 신 하나를 발견했다.


그는 한 짝을 집어 올리며 그 외향을 살폈다. 붉은색 계열의 비단 천위에 매화와 나비가 수놓아 있었다. 경은 초희가 자신이 봐둔 한복을 입고 자신이 직접 고른 이 꽃신까지 신는 모습을 잠시나마 상상했다. 어서, 빨리 한 폭의 그림 같은 그 모습을 두 눈에 담아 두고 싶었다. 그는 예전에 어림짐작 눈대중으로 그녀의 발 치수를 봐둔 것을 떠올리며 값을 지불했다. 다시, 포목점 안으로 들어선 경은 그대로 발걸음을 멈춰세웠다.


“워메, 무슨 사내가 여인보다 이리 곱단 말입니까? 아이고, 선비님께서도 넋이 나간 사람처럼 눈을 떼지 못 하신 걸 보니 반하신 모양입니다. 내 살다 살다 이리 여인보다 아름다운 사내는 처음 봅니다. 그래, 직접 입혀 놓고 보시니 어떠신 것 같습니까? 이 옷으로 하시겠습니까?”


그는 초희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말문이 막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힘겹게 발을 떼며 그녀의 앞에 다가섰다. 그대로 바닥에 무릎 한 쪽을 꿇고 자신이 들고 있던 꽃신을 초희의 발 앞에 내려놓았다. 그는 옅은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이내 막혔던 말문을 열었다.


“한 번 신어 봐 주시오. 명색이 구색은 갖춰야 하기에 사온 것 이오.”


하는 수 없이 초희는 양손으로 한복 치마를 살짝 들어 올리며 제 신발을 벗고 앞에 놓인 꽃신을 신기 시작했다. 아담하고 작은 하얀 버선발은 가지런히 놓인 꽃신 안으로 ‘쏙’ 들어갔다. 한데, 어째서 정확히 발 치수를 알고 있었던 것인지. 초희는 딱 맞아떨어지는 꽃신을 신으며 앞에 서 있는 경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초희가 어떤 기분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지도 까맣게 잊은 듯 그는 한층 더 깊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의 눈은 한 여인의 아리따운 모습에 매료되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은 마치 혜원 신윤복의 오묘하고 아리따운 미인도에 버금갈 정도였다. 그녀의 고운 자태를 바라보는 경의 마음은 또다시 불꽃이 사방팔방 튀어 올랐다.


“이제, 다 보셨으면 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오겠습니다.”


“잠깐.”


“......네에? 또 무슨 볼일이 남아 있습니까?”


“나와 함께 가야 할 곳이 있소.”


“...... 그곳이...... 어디입니까? 한데, 꼭 이런 모습으로 가야 합니까?”


“그렇소. 가면서 내 천천히 알려드리다.”


지금 당장 말해도 시원찮을 판에. 저리 느긋하게 나오다니.


“아니, 그래도 그렇지. 앗.”


경은 그대로 초희의 손목을 잡고 끌고 가다시피 했다. 초희는 고을 안이 좁다는 걸 새삼 다시 한 번 느꼈다. 만나기만 하면 자꾸 강제로 끌고 가는 것인지.

목적지에 다다른 곳은 그의 집 앞이었다. 초희는 경이 또 어떤 꿍꿍이속을 품고 있는지 도저히 분간이 안 갔다.


“집에서 하도 혼례를 치루라고 성화라. 올해 안에 정인이 나타나지 않으면 아버님께서 기어이 본인 고집대로 밀고 나가 실 것 같아서 내 하는 수 없이 선비에게 부탁하는 것이오. 해서 지금 우리 집으로 온 것이오.”


“그렇다면 속이시는 게 아닙니까? 그보다 더한 불효가 어디 있습니까? 옛말에 부모 말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나온다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오늘 전 못 온 걸로 하고 제 갈 길을 가겠습니다.”


초희는 대문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그러나 몇 발짝 아니, 대문 밖을 넘지 못 하고 그대로 뒷걸음질을 하며 그녀가 서있던 곳으로 되돌아와야 했다. 이유인즉, 그의 아버지인 박중섭이 때마침 대문 앞까지 당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당 안으로 박중섭이 모습을 보이며 아들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가 이내 초희에게로 따가운 눈초리를 보냈다.


그는 다소 쌀쌀맞은 말투로 제 아들을 방 안으로 불러들였다. 함께 방안으로 들어선 아버지와 아들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박중섭은 혹, 밖에서 자신의 목소리가 들릴 것을 염려하며 다소 조용한 말투로 물어 왔다.


“밖에 있는 저 여인은 누구냐?”


“제, 정인입니다.”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대답하는 아들의 말에 박중섭의 미간이 저절로 찌그려졌다.


“정녕, 너의 정인이 확실한 것이냐?”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다시 되물었다.


“그렇습니다.”


이번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대답하는 아들의 표정을 읽은 박중섭은 언성은 높이지 않았지만 싫은 내색을 팍팍 퍼부었다. 그리고는 한 쪽 손으로 굳게 닫힌 방문을 가리켰다.


“감히 뉘 앞에서 거짓을 말하느냐? 귀신 눈은 속여도 내 눈은 절대 못 속인다. 저 여인은...... 여인이 아니라 사내가 아니더냐?”


박중섭은 ‘사내’라는 단어에 다소 작은 소리를 내며 물었다. 아버지의 말에 경은 놀란 얼굴을 내보였다.


“그게, 무슨......? 말씀...... 이십니까?”


“내 일전에 네가 데리고 온 벗을 알고 있다. 그때, 그 벗이 아니더냐?”


경의 눈빛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런 예상이 일어날 거라는 변수를 생각하지 못 했다. 그는 살짝 얼굴을 구겼다. 갑자기 관자놀이가 ‘지끈’ 거렸다.


“당장, 돌려보내 거라. 당치도 않지. 어디 여인이 없어서 사내를...... 흠. 새 간에 남색을 즐긴다는 소문이 나돌면 어찌하려고 이리 그릇된 행동을 하는 것이냐? 내 너를 얼마나 애지중지하며 키웠는지 알지 않느냐? 일찍이 어미 없는 자식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너를 가슴으로 따뜻하게 품고 키웠거늘. 흠.”


아버지의 입에서 ‘사내’ ‘남색’ 이라는 단어에 그는 놀란 표정을 내비쳤다. 그리고 그간 자신을 위해 살신성인 키워주신 아버지의 노고를 모를 리 없었다. 다시 박중섭의 냉소적인 목소리가 그의 귓속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이 아비가 정해 놓은 짝으로 혼례를 치루 게 할 것이니. 그리 알고 있거라. 조만간 그 아이를 이곳으로 불러들일 것이니. 괜한 생각하지 말고 또 괜한 수작 부리지 말거라. 다 너를 위한 것이니. 다음부터는 사람을 가려서 사귀거라. 어디 벗이 없어서 저런 사내하고 놀아난단 말이냐?”


박중섭은 옆으로 고개를 돌리며 그만 나가보라는 손짓을 보냈다. 경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밖으로 나갔다. 대체 아버지께서는 자신의 대해 모르는 게 무엇인지. 다 큰 성인이 되어서도 역시 아버지의 손바닥 안에 있었다. 어깨가 축 처진 채로 밖으로 모습을 내보이며 경은 곧장 장돌 위에 올려진 신을 신고 초희의 곁으로 다가섰다.


초희는 경의 상태로 보아 방 안에서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대충 짐작했다. 아마도 자신에 대한 불통이 튄 게 분명해 보였다. 그 정도 눈치쯤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경은 초희의 손목을 잡고 그곳을 빠져나갔다. 더는 이곳에 한시도 더 있고 싶지 않았다. 경은 제 곁에 있는 이 여인과 함께라면 설령, 그곳이 불구덩이라 해도 기꺼이 뛰어들 자신이 생겼다. 만에 하나 큰 불행이 닥친다면 감내할 수 있었다.


한편, 박중섭은 아들이 나간 즉시, 버릇처럼 손을 뻗어 벼루를 짚었다. 벼루 안에 물을 부은 다음 먹을 갈았다. 잠시 후, 먹물은 검게 변했다. 이윽고 화선지를 책상 위로 빈듯하게 편 다음 서진(書鎭)으로 고정시켰다. 그는 조그마한 붓을 잡고는 끝에 살짝 먹물을 묻힌 다음 ‘매란국죽(梅蘭菊竹)’ 매화(梅花) ㆍ 난초(蘭草) ㆍ 국화(菊花) ㆍ 대나무, 즉 사군자(四君子) 중 대나무를 그려 넣기 시작했다.


그림 하나하나에 정성을 가하며 신중히 그려나갔다. 바른 몸가짐은 곧바른 마음으로 순화되어 그림의 완성도를 높였다. 매화는 이른 봄추위를 무릅쓰고 제일 먼저 싹을 피워 꽃으로 탈바꿈한다. 난초는 깊은 산중에서 은은한 향을 멀리까지 퍼져나가게 한다. 국화는 늦가을에 첫 추위를 이겨내며 피어난다. 대나무는 모든 식물의 잎이 떨어진 추운 겨울에도 푸른 잎을 쭉 유지하는 식물이다. 이렇듯 각 식물 특유의 장점을 일컬어 군자(君子) 즉, 덕(德)과 학식을 고루 갖춘 사람의 인품을 비유해 사군자라고 불렀다.


날렵한 손놀림으로 대나무를 그리고는 이내 푸른 잎사귀를 그려 넣었다. 화선지 위로 또 하나의 걸작이 탄생되는 순간이었다, 마치 정교하게 짜 맞추어진 것 같이 대나무 특유의 빳빳한 잎사귀를 생생하게 표현했다. 그림 하나에도 생명을 불어 넣는 그는 사람들에게 일명 '금 손'으로 불리고 있었다. 그의 얼굴엔 그 어느 때 보다 흡족해하는 표정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그는 좀 더 작은 붓을 잡고는 월하산수죽(月下山水竹) 이라고 써 내려갔다. 그 당시 조선. 즉, 과거에 사람들은 대나무 그림을 벽에다 걸어두면 모든 액운(厄運)이 물러간다고 믿었다. 집안의 모든 액운이 깃들어 아들이 안 하던 행동을 일삼고 있다고 느끼며 대나무 그림을 그렸다. 이로써, 아들에 방 안에다 붙이기만 하면 되었다. 박중섭의 얼굴에 가느다란 미소가 지어지는 동시에 흡족해하는 표정이 드리워졌다.


한편, 길 한복판 연신 발걸음을 내딛고 있을 즘. 경은 잡고 있던 초희의 손목을 풀며 걸음을 멈췄다. 그는 제 소맷자락 안에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며 그녀의 앞에 건넸다. 하얀 종이가 길게 접혀져 있었다. 초희는 그가 건네는 종이를 받아들이며 조심스레 펼쳤다. 이내 전부 펼쳐진 종이를 보던 그녀는 실성한 사람처럼 웃어댔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쳐다볼 정도로 고을 안이 떠나갈 정도로 웃었다.


“발로 그려도 이것보다는 더 잘 그리겠습니다. 풋.”


초희는 시선을 종이에 두며 놀려대며 웃어댔다.


“지금 뭐라고 하였소? 발? 발이라고 하였소?”


경은 초희의 말에 살짝 자존심에 금이 간 듯한 얼굴을 내비치며 되물었다.


“네. 발이요. 발이라고 했습니다. 어린아이도 이것보다는 잘 그리겠습니다.”


말하는 내내 웃음을 참느라 말이 끝나는 즉시 전부 쏟아내며 호쾌하게 웃었다.


“그나마 젤 나은 거 가져온 것인데......”


곁에 서 있던 경의 표정엔 섭섭함이 묻어났다. 다른 사람도 아닌 연모하는 여인에게서 그런 놀려대는 말을 들으니 서운한 마음이 없지 않아 있었다.


“네?”


“아, 아니요 음, 음.”


경은 그대로 초희가 들고 있던 제 그림을 빼앗아 들었다.


“아니, 왜 그러십니까? 제게 주신 거 아니었습니까? 선물을 줬다가 도로 뺏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별로, 마음에 들지 않은 것 같아 그랬소.”


경은 살짝 곁눈질로 초희를 바라보았다.


“설마, 제 행동에 삐치신 건 아니시지요? 혹, 그런 것입니까?”


초희는 미간을 찌푸리며 경의 얼굴을 살폈다.


“내가 무슨. 이런 사소한 일로 삐지겠소? 이래배도 대인요. 대인.”


아, 그러세요. 제가 보기엔 소인 같은데...... 풋. 초희는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다. 경은 초희의 모습을 사랑스럽다는 듯 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녀의 웃는 모습을 보니 살아가는 동안 늘 행복한 일상을 선물하고 싶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했던 가? 지금 초희의 모습이 그 속담과 딱 들어맞았다.


아, 사랑에 눈이 멀면 상대방의 모든 게 용서가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제 자신이 어딘가 모르게 예전과 분명 달라져 있었음을 느꼈다. 한데, 어째서 금세 표정이 바뀐 것 인지. 방금 전만 해도 어린아이처럼 마냥 웃고 있던 그녀였다. 겉으로 드러나는 표정은 그를 향해 무언가 알고 있음을 내비쳤다. 그리고 그가 먼저 말문을 꺼내기도 전에 그녀는 예상 밖의 질문을 던졌다.


“혹, 선비님께서는 제가 여인임을 눈치채신 겁니까?”


초희는 이곳으로 오기 전. 자신을 포목점으로 끌고 간 경의 행동에 의심을 품으며 묻고 싶었던 질문을 던졌다.


“그렇소만.”


경은 팔짱을 낀 채 초희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초희는 경의 입에서 변명거리가 아닌 확고한 대답이 흘러나오자 살짝 당혹감을 느꼈다. 그러나 거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되받아 쳤다.


“알고 있으셨으면서 왜 저를 여태 사내로 대하셨던 겁니까? 저를 속이셨습니다.”


“난 낭자가 내게 사실을 말할 때까지 기다려 준 것 이오. 그리고 오히려 속인 건 낭자가 아니오?”


“그건 변명거리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전 선비님을 속인 적 결코 없습니다. 한데, 언제부터 아셨던 겁니까?”


“언제부터였을 것 같소?”


“...... 혹, 처음 만났을 때부터는......?”


설마, 아니겠지요?라는 말이 채 나오기도 전에 경은 초희의 말을 ‘싹둑’ 잘랐다.


“맞소. 그때부터 선비가 아닌 여인이라는 것도 또 선비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도 모두 처음 우리가 대면했을 때였소. 하나, 부득이한 사정이 있는 것 같아. 배려 차원에 모른 척하고 있었을 뿐이오.”


“배려가 아니라. 저를 이리 놀리려고 하셨던 게 아니 구요?”


“뭐, 그 점도 딱히 없다고 부정할 수 없지만.”


경은 멋쩍은 듯 표정을 지으며 엄지손가락으로 이마를 긁었다.


“너무 하십니다. 그 간 저를 놀리시느라 좋았을 텐데. 이젠 그리하지 못 하시니 안타깝겠습니다.”


“전혀.”


경은 양손을 펼쳐들며 익살스러운 표정을 내비쳤다.


“네에?”


“왜 그렇게 생각하시오. 난 오히려 낭자가 내 곁에 사내가 아닌 여인으로 서 있기만을 그간 얼마나 바랐는지 아시오? 언젠가는 내게 사실을 얘기해줄 날을 손꼽아 기다렸소. 한데, 오늘 뜻밖에 내게 진실을 알려주다니. 맞소. 낭자가 입고 있는 옷, 그리고 꽃신까지. 전부 낭자 것이었소. 낭자께서 내게 여인임을 밝히는 날에 선물로 주고 싶었소.”


경의 말에 기가 차서 말을 잊지 못 하는 초희였다. 그리고 경의 말뜻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녀는 대략적으로 알 수 있었다. 다시, 경의 나직한 음성이 초희의 귀에 살며시 닿았다.


“이제, 선비가 아닌 낭자의 대해서 더 많이 알아가고 싶소. 그러니 낭자의 정확한 이름이 무엇인지 내게 가르쳐 주시지 않겠소?”


“...... 제가 왜 그리해야 합니까? 저를 놀리는 재미로 사시는 분께 더 이상은 알려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경은 초희의 행동에 눈을 게슴츠레 떴다. 그러자 초희는 문득, 자신이 기르는 고양이 묘랑이 생각난 듯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가 이내 숨겼다.


“오호라. 제법 튕기기까지 하고.”


“튕기다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그럼, 무엇 때문에 내게 이름을 가르쳐 주지 않는 거요?”


“좋습니다. 하나, 수수께끼 답을 푸시면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흠. 꼭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소?”


“자신 없으시면 그만두셔도 됩니다.”


“내가? 이래 봬도 수수께끼의 선비요.”


“말이야 방귀야? 아, 아무튼 한 번 내 보일 테니. 맞춰 보십시오. 별로 어려운 문제는 아니니까. 바로 답하시면 됩니다. 가까이 있지만 서로 못 보는 것은 무엇입니까?”


“가까이...... 있지만... 서로 못 보는 것이라......”


경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들어 올리며 먼 산을 주시했다.


“쉬운 것이니 바로 답이 나와야 하지 않습니까?”


“잠깐, 뜸 좀 들이는 것뿐이니 재촉하지 마시오. 음, 음.”


경은 여전히 시선을 먼 산에 두고 있었다. 좀처럼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인지 전에 없던 주름이 그의 얼굴을 뒤덮었다.


“정말...... 이십니까?”


초희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내보였다. 한편, 경의 입은 바싹 타들어갔다. 그녀의 앞에서 이런 쉬운 문제 하나도 바로 풀지 못 한다면 체면이 안 섰다.


“한데, 어째서 아직 답을 못 하시는 겁니까? 이리 쉬운 문제를 놓고 여태 답을 말하지 않는 분은 처음입니다.”


“흠. 문제를 떠나서 낭자가 자꾸만 입을 놀려대는 바람에 더 집중이 안 되니까 그런 것이 아니오. 그리고 누가 모른다고 했소?”


“제 눈엔 그리 보이는데요. 좀 더 답에 근접할 수 있도록 귀띔 하나 알려드릴 수는 있습니다만.”


“그게...... 무엇이오.”


“아니, 다 아신다더니 왜 이리 궁금해 하십니까?”


“그냥 좀 알려주시면 안 되시오? 꼭 그렇게 의심을 품어야 하겠소?”


“선비님과 저와 매우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딱, 여기까지 더는 안 됩니다. 이런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문제는 대여섯 어린아이들도 금방 풀 겁니다.”


가까이 있다라...... 그녀와 가까이 있다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당최, 머릿속은 텅 빈 것처럼 생각이 나지 않았다. 곁에 있는 초희는 여전히 그를 주시했다. 경은 여기저기 눈을 굴리며 어색하게 웃어 보이고는 이내 딴 곳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그때, 두 사람의 곁으로 한 사내와 여인이 지나갔다. 그들이 하는 대화가 경의 귓속으로 파고들어왔다. 그 순간, 경은 확신에 찬 눈빛을 내보이며 초희의 얼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굳게 닫혀있던 말문을 열었다. 그는 한 단 어를 답했다.


“눈.”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눈이라고 했소.”


“어찌 그리 생각하신 겁니까?”


“낭자의 눈은 낭자도 보지 못 하고 나 또한 내 눈을 보지 못 하니 눈이 아니고 뭐겠소.”


“네. 맞습니다.”


초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답을 맞혔으니 낭자의 이름을 알려주시오.”


“모두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인지. 까지도 맞추신다면 그때 알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이름이 아닌 또 다른 수수께끼 문제가 흘러나왔다. 초희는 그대로 몸을 이끌고 발길을 옮겼다. 초희의 행동에 어안이 벙벙한 경은 굳은 몸으로 멀어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씁쓸하게 바라보며 반 영혼이 나간 사람처럼 굳은 표정을 한 채 웃어 보였다.


“하, 하하하. 나, 또 낚인 건가? 하하하.”


역시, 양파 같은 여인이었다. 까면 깔수록 속을 알 수 없을 뿐더러 신비감을 주는 것이 또 다른 매력을 풍겼다.


“설마, 또 맞혀도 계속 문제를 풀라고 하지는 않겠지? 흠. 그나저나 이 문제를 어찌 푼담. 아, 그래. 거기로 가면 되겠군.”


경은 곧장 발길을 재촉하며 이번에도 벗인 백헌의 집이 아닌 이율 선생에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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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13. 돌연변이의 탄생(2) +1 16.04.03 33 0 15쪽
14 12화 돌연변이의 탄생(1) +1 16.04.02 77 0 29쪽
13 #11. 수수께끼의 선비(2) +1 16.04.02 46 0 21쪽
» #10. 수수께끼의 선비. +1 16.04.01 58 0 21쪽
11 #9. 비와 당신...... 그리고 +1 16.04.01 39 1 21쪽
10 #8. 천명(天命) +1 16.03.31 64 0 16쪽
9 #7. 달 밝은 밤. 두 사내의 은밀한 조우. +1 16.03.31 30 0 19쪽
8 #6. 님과 함께...... 달 밤을 거닐며. +1 16.03.31 65 0 21쪽
7 #5. 화려함 속에서 살아가는 외로운 부용화 꽃 한 송이. +1 16.03.31 103 0 11쪽
6 #4. 흩날리는 벚꽃 잎이 떨어지는 어느 멋진 봄날. +1 16.03.31 28 0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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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2. 한 여인과 두 사내 +1 16.03.31 93 0 21쪽
3 #1. 남장여자 & 묘(妙) 한 선비 +1 16.03.31 86 0 13쪽
2 [프롤로그] #1-2 늑대 선비. +3 16.03.31 86 0 12쪽
1 [프롤로그#1. 만월(滿月)의 밤] +3 16.03.31 198 1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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