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의 순정에 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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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결
작품등록일 :
2016.03.31 08:14
최근연재일 :
2016.04.03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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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4.03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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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닿을 수 없는 그대.

DUMMY

동이 트이기 전 새벽 잠을 청하다 말고 감겼던 두 눈이 떠졌다. 웬일로 새벽잠이 사라졌는지. 잠깐이지만 속옷을 입은 채로 밖으로 나갔다. 새벽의 풍광(風光)은 자욱한 안개로 인해 다소 흐릿하게 보였다. 그러나 맑고 깨끗한 차가운 공기를 맡으니 산뜻한 기분이 뼛속까지 스며 드는 것 같았다.


하루를 끝으로 다시 새로운 태양이 떠오르면 덩달아 제 기분까지 들떠있었다. 오늘은 또, 어떤 하루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지 잔뜩 기대에 부풀었다. 잠들 기 전, 오늘은 어제보다 더 멋진 내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과연, 그녀의 바람대로 이루어질지. 그녀의 얼굴에서 살며시 미소가 드리워졌다.


이내 발길을 다시 방안으로 두며 걸음을 옮기는 그때. 어디에선가 옅은 늑대의 울음소리가 그녀의 귓전으로 파고들어 앉았다. 그녀는 문지방에 닿아있는 발 한 짝을 떼며 비스듬히 몸을 돌렸다. 이곳 고을에서 늑대의 울음소리를 전에 한 번 들었던 적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가물가물했다. 그러나 그녀는 속으로 그럴 리 없다고 부정하며 제 방안으로 발길을 옮겼다. 이내 책상 앞에 앉으며 그 위에 높여진 양초에 불을 붙였다.


순식간에 방 안은 활기를 찾은 듯 사방은 환한 빛으로 변했다. 그녀는 몸을 일으키며 자연스레 책꽂이에 향했다. 몇 발 짝 채 되지도 않는 거리에서 단 번에 서책 한 권을 빼내어 들고는 책상 앞에 다가서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그 위에 펼쳐들며 눈으로 읽어갔다. 요즘은 바쁘게 생활을 해야 했기에 이렇듯 시간을 쪼개서 서책을 들여다봐야 했다. 나름 이런 생활에 만족을 하고 있는 그녀였지만.


그녀의 부모는 딸의 재능을 이해해주었지만 그렇다고 혼기가 꽉 찰 때까지 혼례도 치르지 않고 여인의 몸으로 남장을 하고 글을 쓰는 일엔 전적으로 탐탁지 않는 눈길을 보냈다. 몇 번을 타이르듯이 얘기를 하곤 했다. 혼례를 하고 나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니 그만 중단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하지만 그건 부모의 생각이지 그녀가 선택해야 하는 몫이니 확고한 신념을 꺾지 못 했다. 한 번 결심한 일은 끝을 맺어야 직성이 풀리는 성미를 가진 딸이라는 걸 부모는 애써 부정하지 않았다.


일단, 지켜보기로 입을 맞추며 그 후부터는 별다른 말을 삼갔다. 그도 그럴 것이 강유까지 초희의 편을 들어주는 바람에 전적으로 반 이상은 포기한 상태였다. 그녀의 서 책 읽기는 암탉이 아침을 알려오는 그 순간에도 계속되었다가 서사로 들리기 전까지 한 시도 쉴 틈 없이 이어졌다. 단, 조식(早食)을 먹을 때만은 서책을 멀리했다. 이유인즉. 그녀의 아버지는 ‘밥상머리 교육’ 을 중요시하는 문신이었다. 그런 가르침이 자연스레 몸에 밴 탓에 아침밥을 먹을 동안은 생각하는 것조차 없었다.


그렇게 또 얼마쯤 시간이 경과하고 있었다. 그녀는 뻣뻣한 목과 뭉친 어깨 그리고 뻐근한 어깨를 연신 왔다 갔다 하며 몸을 풀었다. 한 번 손에 들면 끝장을 봐야 하는 성미는 그녀의 장점이자 최대 단점 중 하나였다. 제 몸을 불사 지르면서까지 보는 건 아마도 일종의 병이라고 할 수 있었다. 왜 남들처럼 쉬운 길을 가려 하지 않는 것인지. 문득, 한 사람이 그녀의 머릿속에 들어왔다.


알게 모르게 어딘가 엉뚱하면서도 오히려 매력적으로 보이는 한 사람. 그 사람을 생각하는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소리 내어 웃어 보였다. 이렇듯 저절로 웃게 만드는 단 한 사내를 몹시 그리워하고 있는 건. 아마도. 그건...... 무엇 때문인지.

초희는 한 쪽 팔로 턱을 괴며 살며시 방바닥에 몸을 누이며 태평하게 잠을 청하고 있는 고양이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제 고양이 묘랑에게 한 마디를 툭 던졌다.


“...... 이런 내 마음이 왜 이토록 갈팡질팡하는 것인지 너는 알고 있느냐?”


역시나, 저 조그마한 녀석이 뭘 안다고 물어 본 것인지. 대답할리 없는 게 당연한데. 그녀는 몸을 일으키며 조용히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반쯤 열린 방문을 천천히 조심스레 닫았다. 그녀는 살며시 툇마루 바닥에 앉았다. 따갑게 내리쬐는 햇빛을 보니 선뜻 바깥으로 몸을 내놓기가 두려웠다. 열이 많은 탓에 여름만 되면 땀을 뻘뻘 흘렸다. 보통 여름만 되면 바깥출입은 자제했던 그녀였다. 하지만 이번엔 그리할 수 없기에 그 정도는 감내해야 했다.


“아씨, 주인어른께서 잠시 사랑채로 건너오라고 하셨습니다.”


살짝 고개를 돌려 먼 산을 향해 바라보는 초희의 귓가에 곱단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초희는 무슨 일로 부른 것인지 궁금해하며 몸을 일으켰다. 초희가 아버지의 부름에 사랑채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였다. 안채로 들어서는 강유가 서희를 알아보았다. 이내 이름을 부르며 다가가지만 멀리서 들리는 소리를 잘 듣지 못 한 것인지 연신 앞만 보고 걸었다. 강유는 머쓱해하며 살짝 눈을 아래로 늘어뜨리다가 다시 치켜세우며 천천히 발길을 옮겼다. 어느새 사랑채 안까지 다다른 초희는 문지방 앞에 서며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소녀, 안으로 들어가겠습니다.”


“그래, 들어 오거라.”


문지방 너머로 들려오는 아버지의 말이 끝나자 초희는 문을 열고 방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녀는 살며시 고개를 숙이며 다소곳이 방바닥에 앉았다. 허염의 무게감 있는 목소리가 넓은 방안에 울려 퍼졌다.


“내 너를 예까지 오라고 한 것은 이제 너의 나이 방년 열여덟이 아니더냐. 제법 혼기도 꽉 찼고 하니 혼례를 치를 성싶어 부른 것이다. 오래전부터 일찌감치 너의 짝으로 강유를 점찍어두었다. 너도 알다시피 강유는 너와 돈독한 사이가 아니더냐. 또 집안끼리도 잘 아는 사이니 조만간 기별을 올려 자리를 마련해서 상견례를 할 성싶구나. 해서, 이 아비는 너의 생각은 어떠한지 듣고 싶구나.”


“그런 문제로 저의 대답을 듣기 원하신다면 애석하게도 저는 싫습니다. 제게 오라버니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여태껏 한 번도 오라버니를 사내로 바라본 적도 없거니와 사내로 느껴 본 적도 없습니다. 그러니 아버지의 말씀에 부응할 수 없습니다.”


“이미 기정사실화되어 있질 않느냐? 그쪽 집안에서도 너를 줄곧 며느리 삼고 있는데. 그리고 서로 살갗을 붙이고 살다 보면 없던 정도 생기기 마련이다. 무슨 연유로 강유를 마다하는 것이냐?”


“소녀,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번만은 아버지의 뜻에 따를 수 없습니다.”


“어찌 그러느냐. 이 고을에 강유만 한 사내는 눈 씻고 찾아 봐도 없는데. 되 려 우리한테 감지덕지가 아니냐. 난 말이다. 내 딸이 좋은 성품에 배필을 맞아 가정을 꾸리고 살기를 바라느니. 이 아비의 마지막 소원이라 생각하고 들어주면 안 되겠느냐?”


“설령, 소녀의 목에 칼이 들어온다 할지라도 제 뜻을 굽히지 않을 것입니다.”


“감히, 이 아비에게 협박이라도 일삼고 싶은 것이냐? 왜 이리 고집을 못 꺾어서 안달이 난 것이냐?”


허염의 언성이 높아졌다. 단 한 번도 제 딸에게 아니 자식에게만큼은 큰 소리로 나무라는 일이 없었다. 한데, 오늘 혼사문제로 저리 언성을 높이시다니. 아버지의 뜻밖의 모습에 조금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이대로 굽힐 초희가 아니었다. 그녀의 입에서 다시 한 번 아버지의 심기를 건드리는 말이 나왔다.


“죽어도 저는 그리 못 합니다. 마음에도 내키지 않는 혼례는 치르고 싶지 않습니다.”


도랑도랑제 할 말을 다하는 딸의 모습을 본 허염은 저리 강하게 부정하는 모습을 보며 자신이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다고 느꼈다.


“네가 이토록 고집을 꺾지 않는 걸 보니. 혹, 마음에 두고 있는 정인이라도 있는 것이냐?”


초희가 방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 강유는 그곳으로 당도했다. 그리고 본의 아니게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고 말았다. 허염의 말이 끝나고 나서 그곳을 지나가던 몸종이 강유를 발견했다. 강유는 혹, 들킬 새라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제 입술 위로 갖다 댔다.


“쉿.”


몸종은 고개를 아래로 숙이며 오던 길을 다시 되돌아갔다. 몸종의 모습이 사라지자 초희의 청아한 목소리가 문지방을 타고 너머와 강유의 귓전에 앉았다.


“아직 정확히 뭐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 분명한 건 그분의 마음도 저의 마음도 같은 곳을 향해 있습니다. 그러니 더는 제게 혼례에 관한 얘기는 삼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일순간 강유의 낯빛이 어둡게 드리운 동시에 가슴골이 먹먹해 왔다. 어쩌면 이곳에 발길을 둔 그의 잘 못이 더 큰지 몰랐다. 그냥, 초희의 방 안에 들어서 기다리는 편이 훨씬 나을 뻔했다. 이윽고 초희가 문고리를 잡아당기는 소리가 들리자 재빨리 자리를 피하며 몸을 숨겼다. 서둘러 사랑채를 벗어나 아무렇지 않는 듯 별채에 발을 들여놓으며 어수선한 상태로 서성이고 있었다. 뒤숭숭한 마음은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 했다. 그때 몇 발작 떨어진 곳에서 강유를 알아 본 초희가 반가운 듯 밝은 표정을 드러내며 곁으로 다가섰다.


“오라버니.”


강유는 얼른 표정을 바꿨다. 그의 얼굴에 가느다란 미소가 그려졌다.


“그래. 사랑채에서 나오는 걸 보니 아버님께 다녀오던 길인가 보구나.”


“네에.”


대답을 하는 동시에 초희는 할 발 앞으로 다가서며 걱정이 가득한 눈빛을 내비쳤다.


“헌데 오라버니. 안색이 별로 좋지 않아 보이는 것이 어디 몸이 안 좋으신 거예요?”


제아무리 웃는 얼굴로 표정을 숨긴다 한들 섭섭한 마음은 쉽게 떨쳐 버리지 못하는 듯했다. 그의 힘없는 중저음 목소리가 그녀의 귓속에 살포시 닿았다.


“나는 괜찮으니. 괜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강유는 살짝 두 눈을 감았다가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한 쪽 팔을 들어 올리며 걱정 어린 눈빛을 내보이는 초희의 어깨를 다독였다.


“혹, 모르는 일이니 당장 의원을 뵈러 다녀오세요. 그러다 더 큰 병을 얻을까 심히 걱정이 됩니다.”


여전히 자신을 걱정해주는 초희에게서 그는 씁쓸한 마음을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이리, 날 걱정해주니 참으로 고맙구나...... 내 누이야.”


강유는 우수에 찬 눈빛을 보내며 초희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어느새 그의 눈가에 촉촉한 눈물샘이 맺혔다. 가까이 있지만 멀게만 느껴지는 그녀였다. 이처럼 아무런 말없이 바라만 보고 있어도 좋은 초희였다. 제 앞에 서 있는 초희를 대신할 사람은 이번 생애는 없을 만큼 자신에게 특별한 존재였다. 조심스레 말문을 열어보려고 하지만 끝내 그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먼 훗날 함께 하기를 원했던 날이 한두 해가 아니었다. 문득, 그날이 그의 머릿속을 흐릿하게 스쳤다. 마지막 순간 숨이 붙어 있을 즈음. 자신에게 남겼던 벗 허욱의 유언은 잊히지 않고 고스란히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었다. 그때 그 장면 역시 생생하게 기억되고 있었다.


그의 나이 열다섯 살 되던 해. 병색이 완연한 몰골을 한 채 누워 있던 허욱은 강유의 손을 양손으로 부여잡고 힘겹게 말문을 열었다. 그리고 바로 뒤에서 그의 가족들은 쉴 새 없는 눈물을 흐느끼며 대성통곡하듯 울고 있었다. 바로 그 옆. 겨우 10살 남짓 된 초희는 제 오라비의 모습에 그 누구보다도 더 많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제 오라비의 마지막 일지도 모르는 얼굴을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그날의 집안 분위기는 눈물바다를 연상케 했다.


자식 먼저 세상을 떠나보내야 하는 부모의 심정은 그 누구도 그 아픔의 깊이를 알지 못 한다. 겪어보지 않는 사람들은 겪어 본 사람들의 슬픔의 무게를 가늠하지 못 한다. 그들은 그렇게 아들의 마지막을 지켜보고 눈물을 훔치며 심히 말할 수 없는 슬픔 속에서 지켜봐야 했다.


“나...... 없는 세상에 홀로... 남겨질 우리... 초희가 가엾고... 불쌍해서 자꾸... 눈을...... 감을... 수가 없어. 좀... 더 초희가 자란 다음...... 떠나도 늦지... 않을 텐데...... 그리... 할 수... 없으니... 애통할... 따름이야. 내 ...... 너에게... 부탁... 하나만... 할게...... 나를... 대신해서...... 초희를... 친... 동생만큼...... 돌봐... 줄... 수... 있어? 무슨...... 일이... 있어도... 나대신...... 내... 누이를...... 지...켜줘......’


강유는 죽마고우인 벗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준다는 약조를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잡은 손 위로 수많은 눈물이 흘러내리자 흠뻑 적셨다. 그리고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마지막 남은 삶의 생명을 내려놓으며 숨을 거뒀다.


그때부터였을까? 그 후, 발길은 초희가 있는 이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자신의 벗이 남겨둔 유언을 전적으로 따랐지만 그 안엔 또 다른 내막이 있었다. 그가 줄곧 이곳에 발길을 두었던 본질적 의미는 초희 때문이었다. 오랜 세월 그의 벗인 허욱이 자신의 집을 찾는 일은 부지기수였다. 대부분 강유가 먼저 허욱의 집을 찾았다. 이유는 단 하나. 그의 여동생 초희를 보기 위함이었다. 없던 핑계까지 대며 찾았던 이곳. 수많은 추억이 깃든 곳이기도 하고 연정이 싹튼 곳이기도 했다. 이곳은 그에게 익숙한 곳인 동시에 특별한 장소였다. 강유는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과거를 회상하면 무엇하리. 이젠, 연기처럼 사라질지도 모를 텐데.


‘초희야,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 정녕, 너의 마음엔 딴 사람을 품고 있는 것이냐? 어째서...... 나는 너의 마음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냐?’


차마 입으로는 말할 용기가 서지 않았다. 그래서 더 애통할 따름이었다. 별이 아스라이 멀리 있듯이 그녀도 멀리 있었다. 서로의 몸은 가까이하고 있지만 서로의 마음은 저 멀리 떨어져 있었다. 늘 자신의 품에서 떠나보내려 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지켜 온 누이였다.


그때, 초희의 청아한 목소리가 강유의 귓속에 맴돌며 닿았다.


“정녕, 혼자 가기 힘드시면 제가 함께 가드릴게요.”


강유는 제 손을 뻗으며 초희의 볼을 어루만졌다. 보드라운 볼이 손에 닿으니 더 이상 그 어릴 적 꼬맹이가 아니었다. 그 쪼끄맣던 키도 제법, 자신의 어깨 위에 닿았다. 언제 저리 컸는지. 빠르게 지나가는 세월만큼 그녀의 모습 역시 여인의 모습으로 변모하고 있다는 걸 오늘 또다시 새로이 느끼는 강유였다.


강유는 다정다감한 눈빛을 보내며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말이라도 고맙구나. 내 어여쁜 누이 초희야.”


“오라버니.”


다소 나직한 목소리를 내며 말을 꺼내는 초희가 자신에게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강유의 얼굴에 또 다른 낯빛이 드리웠다. 다시 초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는 저희 집으로 오지 않으셨으면 해요. 일전에, 영유가 저희 집에 다녀간 적이 있었어요. 저보다는 그 아이를 먼저 생각해주고 먼저 챙겨주세요. 오라비의 사랑이 많이 고픈 아이니. 그리고 저보다는 영유가 친 여동생 이이고 또 이젠, 저도 제법 자랐으니 그 아이에게 더 많은 애정을 쏟아주셨으면 해요. 제 부탁 들어주세요.”


“그 아이는 그 아이 대로 내가 신경 쓰고 있으니 괜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초희는 살짝 고개를 아래로 떨어뜨렸다가 이내 들어 올리며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맑고 큰 눈이 유난히도 반짝거렸다. 마치, 투명한 이슬이 맺힌 것처럼 하염없이 빛나고 있었다. 그건, 아마도 눈물에 가까웠다.


“제가 굳이 이런 부탁하지 않아도 어련히 오라버니께서 알아서 하시겠지요. 하나, 꼭 제 말뜻을 헤아려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저는 그만 놓아주세요.’


이 말을 꺼내기가 힘에 겨웠다. 차마,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하려니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한때는, 누구보다도 잘 따르던 오라비였다. 친 오라비만큼이나 의지했지만. 영유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니 그간 영유가 누려야 했던 오라비에게서 받는 혜택을 고스란히 자신이 받았다는걸. 그때는 미처 알지 못 했다. 그 기간 동안 영유의 힘들었을 마음을 어찌 보상할 수 있을지.


그때, 그녀도 어린 나이었음으로. 그렇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회복할 시간은 얼마든지 있었다. 살아온 날 만큼 앞으로 살아가야 할 날이 우리에겐 더 많이 남아 있을지 모른다. 설령, 반대되는 경우의 수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지만 보통은 전자 쪽에 해당한다. 이젠 제 앞에 있는 강유가 자신의 오라비가 아닌 친 여동생의 오라비로 살아가기를 그녀는 바라고 또 바랐다.


아니, 사실이 그렇다. 자신의 오라비는 일찌감치 세상을 떠났다. 그러니 이제는 그만 자신을 놓아주었으면 했다. 이쯤에서 친 여동생이 아닌 그저 오랜 벗의 여동생으로 봐주기를 바라왔다. 초희는 이내 환하게 웃어 보이며 먼저 그곳을 빠져나갔다. 강유는 몸을 돌려 중문을 넘어서며 걷고 있는 초희의 발걸음을 조용히 소리 내어 세어 나갔다. 별채 안에서 그녀의 방이 있는 안채까지 정확히 열 걸음 정도 걸렸다. 그의 입에서 마지막 ‘열’ 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초희는 제 방문 앞까지 당도했다. 그녀는 살며시 뒤를 돌아보았다가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안채에 모습을 드러낸 강유의 입에서 한 단어가 흘러나왔다.


“열.”

그는 갓을 쓴 머리를 들어 올리며 말문을 열었다.


“이런, 나도 나 자신이 이렇듯 한심한데. 너의 눈엔 얼마나 내가 한심하다고 느꼈을지. 하나, 너의 마음이 딴 곳을 향해 있다고 해서 너를 그리 쉽게 포기했을 만큼 내 사랑이 가볍지 않다는 걸 보여주고 싶구나. 난 말이다. 너를 잃으면 잃었지 빼앗기고 싶지는 않다.”

‘언젠가는 너의 마음속으로 나도 들어갈 수 있기를...... 바라느니. 이런 가엾은 내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려 주려무나......초희야.’


여전히 혼자 속앓이를 하며 강유는 쓸쓸한 뒷모습을 내비치며 안채를 벗어나 대문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가 사라지고 지붕 위로 몸을 누이고 있던 천명이 제 집 마당에 있는 이 괴를 향해 한 마디를 툭 던졌다.


“참 재미있지 않느냐? 인간들의 모습 말이다. 사랑에 살고, 사랑에 죽고, 사랑 때문에 아파하는 저 모습 말이다. 왜 이리 어리석은 것인지.”


천명의 말을 들은 이 괴의 얼굴에서 엉뚱함이 묻어나 있었다.


“형님도 어찌 보면 인간이시지 않습니까?”


“아니지. 난 저들과는 일차원적으로 다르지.”


천명은 날렵한 몸동작을 선보이며 이 괴의 옆으로 바짝 다가선 채 완벽한 착지를 했다.


“나는 사랑 따위엔 관심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다. 그러니 저들과 나를 같은 부류로 엮지 말거라.”


천명은 이 괴를 향해 살짝 홀 겼다. 이 괴는 게슴츠레 눈을 뜨며 한 쪽 눈썹을 추켜 올렸다.


“한데, 전부터 궁금하던 것이 있었습니다.”


“그래? 그게, 무엇이냐? 어떤 질문을 하려는 것인지 기대가 되는 구나.”


“이런, 훤한 대낮에 돌아다녀도 멀쩡한 게 왜 그런 것입니까?”


천명은 대답 대신 '고작? 그 이유가 다냐?'라는 식으로 눈빛을 내비쳤다. 곁에 서 있던 이 괴는 내심 기대에 찬 눈빛을 접으며 앞으로 한 걸음 내디떴다.


“무슨 사내가 그리 포기를 쉽게 하느냐? 알려 줄 터이니."


천명은 고개를 까딱하며 제 옆으로 다시 서라고 신호를 보냈다. 이 괴는 한 발작 뒤로 물러나며 천명의 곁으로 다가섰다. 천명은 도포 자락에 걸려있는 향낭을 보여주었다.


“내가 밝은 대낮에도 아무렇지 않게 다닐 수 있는 건. 이 옥가루 덕분이지."


"하면, 향낭 안에 옥가루가 들어 있었던 겁니까?."


천명은 매우 흥미롭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문을 열었다.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천명의 대답에 기대했던 것과 달리 거리가 먼 것인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뭐, 다소 특별한 걸 기대한 모양인데. 애석하게도 옥을 갈 아서 넣고 다니는 것뿐이다."


이 괴는 걸음을 옮기며 옷에 달린 모자를 쓰고 방 안으로 모습을 숨겼다. 그때, 천명은 음흉한 눈빛을 내보이며 한 쪽 입꼬리를 들어 올린 채 부채를 펼쳐들었다.


"옥 가루만으로는 효능을 볼 수 없지. 여인의 뼈를 갈아서 만든 뼛가루와 섞어야 대낮에도 마음 껏 돌아 다닐 수 있는 것이지."


천명은 들고 있던 부채를 부치며 안으로 모습을 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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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닿을 수 없는 그대. +1 16.04.03 92 0 21쪽
15 #13. 돌연변이의 탄생(2) +1 16.04.03 33 0 15쪽
14 12화 돌연변이의 탄생(1) +1 16.04.02 77 0 29쪽
13 #11. 수수께끼의 선비(2) +1 16.04.02 46 0 21쪽
12 #10. 수수께끼의 선비. +1 16.04.01 58 0 21쪽
11 #9. 비와 당신...... 그리고 +1 16.04.01 39 1 21쪽
10 #8. 천명(天命) +1 16.03.31 64 0 16쪽
9 #7. 달 밝은 밤. 두 사내의 은밀한 조우. +1 16.03.31 30 0 19쪽
8 #6. 님과 함께...... 달 밤을 거닐며. +1 16.03.31 65 0 21쪽
7 #5. 화려함 속에서 살아가는 외로운 부용화 꽃 한 송이. +1 16.03.31 103 0 11쪽
6 #4. 흩날리는 벚꽃 잎이 떨어지는 어느 멋진 봄날. +1 16.03.31 28 0 17쪽
5 #3. 앙칼진 새끼 고양이 +1 16.03.31 22 0 10쪽
4 #2. 한 여인과 두 사내 +1 16.03.31 93 0 21쪽
3 #1. 남장여자 & 묘(妙) 한 선비 +1 16.03.31 86 0 13쪽
2 [프롤로그] #1-2 늑대 선비. +3 16.03.31 86 0 12쪽
1 [프롤로그#1. 만월(滿月)의 밤] +3 16.03.31 198 1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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