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의 순정에 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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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결
작품등록일 :
2016.03.31 08:14
최근연재일 :
2016.04.03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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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3.31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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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님과 함께...... 달 밤을 거닐며.

DUMMY

한 약재상 앞에서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때 열두 살쯤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의 목소리가 초희의 귓속에 닿았다. 그녀는 사람들이 서 있는 틈으로 몸을 비집고 안으로 들어갔다.


“저는 아닙니다. 제가 오기 훨씬 전부터 없었습니다.”


“어디서 시침이를 떼는 게냐? 내가 직접 확인까지 했거늘.”


“무슨 일인데 이리 소란을 피우는 것인가?”


“다름이 아니오라. 소인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여기에 놓아둔 약제 하나가 사라졌지 뭡니까. 근데, 세상에 저 녀석 손에 떡 하니 들려있지 뭡니까?”


아이는 손에 꽉 쥔 채 들고 있던 약재를 제 품 안으로 끌어안으며 두 팔로 감쌌다.


“이 약재는......”


“그래. 있는 사실 그대로 말해 보거라. 내 너를 믿는다. 너의 눈빛을 보면 거짓을 말하는지 아닌지 알 수 있다. 너는 거짓을 말할 아이가 아니다. 그렇지 않느냐?”


초희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는 제 앞에 있는 선비가 자신을 믿는다는 말을 해주자 감격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여태껏 단 한 번도 자신을 위해 나서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제 앞에 있는 선비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다정다감하게 대해주고 있었다. 아이는 선비에게 있는 사실을 전부 털어놓았다.


“이 약제는 의원에게 받아 온 것입니다. 제 아버지께서 몸이 편찮으셔서 어머니께서 직접 종이에 약재 이름을 적으시면서 의원님께 보여드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보여 주면 된다. 그리 알려주시고는 제 손에 엽전 몇 닢을 쥐여주고는 얼른 다녀오라 하였습니다.”


“한데, 어째서 이곳에 서 있었던 것이냐?”


“돌아가는 길에 어떤 분과 부딪히는 바람에 엽전 하나가 바닥에 나뒹굴며 사라져서 찾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돌아가는 길에 어떤 사람과 부딪혔다고?”


“네. 손에 약봉지 하나를 들고 가는 걸 보았습니다.”


“어쩌면 그 사람이 범인일 줄 모르겠구나. 이보게, 자네의 귀에도 들렸을 테니. 애먼 사람 잡지 말고 어서 돌려보내 주게. 방금, 이 아이 말을 들었지 않는가?”


“허나, 엽전이 나오질 않으니 증거가 나올 때까지 그렇게는 못 합니다.”


“뭣이?”


초희는 약방 주인의 행동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때, 구세주라도 나타난 듯 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 이 엽전이 맞느냐?”


아이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선비가 들고 있던 엽전을 바라보았다. 침울했던 아이의 얼굴이 금세 밝은 미소로 바뀌었다.


“네. 제 것이 맞습니다.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선비님.”


아이는 기쁜 나머지 제 머리를 조아렸다. 선비는 몇 발작 발걸음을 내디디며 들고 있던 엽전을 아이에게 건넸다. 잃어버린 엽전을 건네받은 아이는 한 쪽 손에 꽉 쥔 채 서있었다. 경은 환한 미소로 일관했다. 초희는 엽전을 찾아준 사람이 다름 아닌 자신이 잘 알고 있는 경이라는 사실에 덩달아 얼굴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제 진실을 알았으니 그만 이 아이를 보내주게.”


약방 주인은 두 사람의 눈치를 보며 한 손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아무런 대꾸도 없이 자리를 옮겼다. 아이는 고사리 같은 손에 엽전을 꽉 쥔 채 발걸음을 떼며 앞으로 향했다. 이내 주위에 몰려 있던 사람들도 그곳을 하나, 둘 빠져나가며 제 갈 길을 가며 손 놓고 있던 일을 하기 시작했다. 이제 그곳엔 경과 초희 오직 두 사람뿐이었다.


“아무래도 선비와 나는 운명인가 보오.”


나지막한 경의 목소리가 초희의 귓속으로 들어갔다. 운명...?... 운명... 운명! 그녀의 큰 눈이 더 크게 떠졌다.


“......?”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이렇듯 우리가 뜻하지 않는 곳에서 만날 수 있단 말이오. 참으로 우리는 보통 인연이 아닌가 보오.”


“그렇다고 해서 운명이라고 단정 짓는 것은 억지라고 생각합니다. 이곳 바닥이 한양도 아니고 지방에 불과합니다. 엎어지면 코 닿는 곳이라는 속담도 있듯이 저와 선비께서 이렇게 자주 만나는 것은 운명이 아니라 그저 이 고을 바닥이 좁은 것뿐입니다.”

어떻게든 엮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사람처럼 비치는 것 같았지만 그저 말 나오는 대로 중얼거릴 뿐이었다.


“하하하. 역시 선비에겐 못 따라가겠소. 어떻게 하면 선비처럼 똑 부러지게 말을 잘 할 수 있는 것이오?”


경은 호탕하게 웃으며 그녀를 칭찬했다.


“그저, 저는 있는 그대로 얘기 한 것뿐이니 너무 치켜세우지 마십시오.”


“제법 겸손하기까지 하고 부럽소. 선비의 올곧은 성품이.”


“제 앞에 서 있는 선비님이야말로 제가 찾지 못 한 걸 해결해 주셨으니 더 대단하지요. 저는 그저 무슨 일인지 들어 주기만 했을 뿐 증거를 찾아주지 못하였습니다.”


“나 역시 그저 우연에 불과하오. 곁으로 다가가보니 하필 그것이 내 발 밑에 떨어져 있었지 뭐요. 그러니 너무 치켜세우지 마시오. 되러 그 아이는 겉으로는 표현을 안 해서 그렇지 선비에게 더 고마워하고 있을 것이오. 아무도 나서지 않을 때 선뜻 선비는 그 아이의 말을 들어주고 나서지 않았소? 분명, 표현은 안 해도 고마워하고 있을 것이오.”


“전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제가 나선 건 그저 그 아이가 이 세상엔 나쁜 사람 보다 좋은 사람이 더 많다는 걸 알았으면 해서 도와준 것입니다. 아이들이 행복한 세상. 저는 그것을 바라며 그리 나선 것입니다.”


맞은편에 서있던 경은 초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허 선비는 내 벗이 될 자격이 충분하오. 그런 의미로. 약주나 한 잔 하러 가는 게 어떻소?”


“대낮부터 약주를 하는 건...... 선비의 도리에 어긋...... 앗.”


경은 어느 틈에 초희의 소맷자락을 끌며 걸음을 재촉했다. 틈만 나면 소맷자락을 아무렇지 않게 잡아끄는 게 버릇인가? 몇 번을 끌려가다시피 하는 그녀였다. 오늘도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초희였다.


“그 놈의 도리는 한 번쯤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잘 못 되지 않으니 따라오시오. 그리고 너무 일직선으로만 가지 말고 가끔은 살짝 곡선으로 돌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걸 내 선비에게 몸소 보여주리다. 오늘 밤은 걱정 마시오. 무사히 집에 데려다줄 터이니.”


그것이 걱정입니다. 딴 게 걱정이 아니라. 대체 사내 것들이란 이리 제멋대로 하는 동물인지.


경이 끌고 간 곳은 어느 양반집이었다. 그는 대문을 열며 초희와 함께 나란히 안으로 들어갔다. 경이 인기척을 하니 방 안에서 사대부의 자태를 뽐내는 중년의 부인이 밖을 나와 그들의 모습을 확인 한 후, 방 안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은 평상에 마주 보며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이윽고 술상이 멋들어지게 한상 차려진 채 마루 위에 높여져 있었다. 경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술상을 가져다가 평상 위에 올려놓았다. 한눈에 봐도 양반가의 음식들이었다. 경이 그녀를 끌고 간 곳은 ‘내외주점’ 이라는 곳이었다.


잠깐, 설명을 덧붙이자면. 이 주점은 몰락한 양반집의 아낙네나 과수댁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그런데 남녀가 유별한 유교사회에서 양반집 아낙네나 과수댁이 어찌 남자를 상대하면서 술을 팔 수 있었을까?


그래서 손님이 집안 마당에 들어서면 방에서 술상을 준비해서 마루에 살짝 내다 놓고는 방문을 닫았다. 그러면 손님들은 술상을 가져다가 마당의 평상 위에서 술을 마셨다.

넓은 마당이 드리워진 곳에서 벗과 함께 나란히 술잔을 기울이며 고상한 척 마실 수 있는 곳이었다. 여느 술집과는 확연히 달랐다.


경은 술병을 잡고 먼저 초희의 잔에 반 정도 따랐다. 투명한 액체가 잔에 담긴 모습을 보자 호기심이 일었다. 초희 역시 술병을 받아들이며 경의 잔에 가득 따랐다. 두 사람은 잔을 든 손으로 앞에 가까이 대보이며 이내 들이켰다.


경은 단 번에 입안으로 쭉 들이켰다. 그러나 초희는 입만 축일 정도로 살짝 간 보듯 마시고는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쓴맛과 떨떠름한 맛, 혀끝에 단 맛이 감돌았지만 전체적인 느낌은 썼다.


이런 게 뭐가 좋다고 사내 것들은 하나같이 술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것인지.

괜히 입만 버린 것 같아서 술상 위에 높여진 젓가락을 잡으며 꽃전을 입안에 넣었다. 초희의 얼굴은 금세 만족스럽다는 듯이 다소 밝아졌다.


경은 자꾸만 웃음이 나올 것 같아 연신 한 쪽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관경을 지켜봤다. 그 모습마저 사랑스럽다는 듯이 그의 얼굴엔 선명하게 드러났다.


두 사람은 조곤조곤 담소를 나누며 드넓은 마당의 풍광을 배경 삼아 술잔을 기울였다. 뭐, 거의 경이 반 이상을 마시긴 했지만. 초희가 마신 건 전부 합쳐도 한 잔 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샌가 그녀의 두 볼은 발 그래졌다. 초희의 혀가 꼬인 목소리가 경의 귓가에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제 나이 낭랑(浪浪) 18세가 아닙니까? 하, 아니 세상에 아직 스무 해도 되지 않았는데. 술이라니...... 하하하. 선비님을 만나고 술이라는 것도 배우고...... 꺽, 저 이러다 술꾼 되면 어찌합니까? 만약에...... 말입니다. 그때 저 꼭 책임 지셔야합니다. 꺽.”


“아니, 겨우 한 잔 밖에 안 마셨는데 그새 취한 거요? 쯧쯧. 어찌, 사내라 할 수 있소?”

경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불쑥, 초희는 제 얼굴을 앞으로 내밀었다.


“......선비님의......눈엔 제가 정말로...... 사내로 보이십니까? 꺽.”


순간, 경의 가슴이 뜨끔거렸다. 더 이상 지체하다가는 어떤 행동을 범할지 몰라 들고 있던 술잔을 곧바로 내려놓았다.


“허 선비 많이 취했구려. 제법 마셨으니. 이쯤에서 그만 일어납시다.”


경은 서둘러 초희의 곁으로 다가가며 그녀를 부축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녀는 두 볼이 발 그래진 채로 방긋이 웃어 보이며 바닥을 보이는 술잔을 입안으로 가져다 대며 탈탈 털었다. 이내 술병을 부여잡으며 흔들어 보였다.


“어라, 술이 없네? 뭣 하세요. 한 병 콜! 하지 않고. 하하하.”

경은 살짝 미간을 구긴 채 두 팔로 그녀의 몸을 번쩍 들어 올렸다. 다시 초희의 혀 꼬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술 가져오시라니까요? 아이참, 왜 남의 몸을 함부로 잡으시는 겁니까? 꺽.”

“겨우 한 잔 마시고 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취할 수 있단 말인가? 하,”


경은 한 쪽 손으로 제 이마를 짚었다가 이내 등을 내보이며 초희를 가뿐히 업었다. 그리고 서둘러 주점을 유유히 빠져나갔다. 날은 붉은 저녁노을과 어둠이 깔리는 경계선에 닿아 있었다. 아직, 입하(立夏)에 들지 않았지만 날씨는 저녁이 될 무렵에도 선선하지 않았다. 습한 공기 때문인지 다소 불쾌감이 들었다. 아마도 등에 초희가 업혀 있으니 더운 열기가 올라오는 듯했다. 한편, 등에 업힌 채 누워 있는 초희는 아무 말없이 조용히 잠을 청하고 있었다. 무슨 꿈을 꾸고 있는지 초희의 감긴 두 눈은 초승달 모양을 띠고 있었다.


그는 처음으로 등에 여인을 업고 거리를 걸으니 전에 없던 설렘과 알 수 없는 떨림을 동시에 느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정신이 혼미한 상태로 자신의 등에 엎드린 채 잠이 들어버린 초희를 그녀의 집으로 데리고 가야 할지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만에 하나 외간 사내의 등에 그녀를 업고 온 것을 그녀의 가족 중 누군가 알게 된다면 어떤 불미스러운 사건이 일어날지 지레짐작했다. 더욱이 그런 일은 일어나게 해서도, 일어나서는 안되었다. 우선, 자신의 집으로 가는 것이 나을 듯싶었다. 아직, 초저녁밖에 되지 않았으니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가서 편안하게 눕혔다가 깨어나는 대로 그녀의 집으로 바래다주는 편이 나을지 몰랐다. 경은 서둘러 발길을 재촉했다.


어느덧 세상이 서서히 어둠으로 변해 가고 있을 무렵 경은 제 집 대문 앞에 도착했다. 그는 대문 앞으로 바짝 다가가며 조용히 몸종을 불렀다. 이윽고 근처를 기웃거리고 있던 몸종이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는 몸종의 마중에 눈 길 하나 주지 않고 그대로 사랑채로 달아났다. 이내 자신의 방 안으로 냅다 도망치듯 몸을 숨겼다. 방 안으로 들어서며 가파른 숨을 고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이윽고 바닥에 요가 깔려진 곳에 초희를 조심스레 눕혔다. 다소 애가 타는 경과 달리 초희는 깊은 잠에 빠진 듯 여전히 의식을 잃은 채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는 서둘러 그녀가 쓰고 있던 갓을 풀고는 바닥에 내려놓은 다음 이번엔 입고 있던 거추장스러운 두루마기를 조심스레 천천히 벗겼다. 이내 갓 옆에 반 정도 개며 놓았다. 가짜 상투를 튼 채 잠들어 있는 얼굴을 보자 영락없는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흰 살결에 긴 속눈썹 하며 작고 오뚝한 콧날 그리고 앵두 같은 입술을 보자 본능이 앞선 사람처럼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얼굴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살짝 자신의 입술 끝이 닿으려고 하는 그때. 그는 얼른 고개를 들어 올렸다.


“대체, 내가 뭘 하는 거지? 아무리 취했으려니 경망스러운 행동을 일삼다니. 하,”


그는 혼자서 안절부절 하지 못 하며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몸종에게 따뜻한 꿀물 한 잔 가지고 오라고 일러두었다. 그녀가 깨어나는 즉시 마시게 하기 위함이었다. 소소한 것부터 세세함까지 두루 신경 쓰는 사내였다.


한편, 화선지 위에 매화꽃을 그리고 있던 그의 아버지 박중섭은 몸종에게서 뜻밖의 말을 전해 들었다. 그의 손에 붓이 공중에 들려지자 먹물이 매화꽃이 그려진 화선지 위로 뚝뚝 떨어졌다.


“뭐? 어떤 선비를 업고 왔다고?”


“예에. 나리.”


“어허, 아니. 배필을 데려올 생각은 하지 않고. 어찌, 사내를 데리고 온단 말인가? 흠......”


“그리고 꿀물까지 준비하라고 시켰습니다.”


“뭐? 뭣이? 방금 꿀물이라고 하였느냐? 허,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군. 제아무리 벗을 데리고 온다 한 들 꿀물을...... 타라고 한 건 내 듣도 보도 못 하였는데. 대체, 어떤 선비이길래 저리 신경을 쓰는 것인지. 참으로 궁금하지 않을 수 없군.”


박중섭은 이내 붓을 벼루 위에 내려놓으며 완성을 코앞에 두고 있던 매화꽃에 시선을 고정 한 채 잔뜩 미간을 찌푸렸다. 먹물 자국으로 인해 매화꽃 그림은 형체를 알 아 볼 수 없게 검게 번졌다. 그는 화선지를 들어 올리며 마구 구겼다. 그리고는 다시 화선지 위에 국화꽃을 그리기 시작했다. 한데, 어째서인지 그림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아마도 아들 녀석 걱정에 손과 붓이 따로 놀고 있었다. 손은 손 대로 붓은 붓대로 한 몸이 되지 못 하고 제멋대로 움직였다.


당대 최고의 화원으로도 손색이 없을 만큼 출중한 그림 실력을 자랑하는 박중섭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아들 녀석 때문에 이렇듯 그림에 열중을 하지 못 하다니. 그는 잠시 명상에 접어든 사람처럼 정신을 한 대로 모았다. 그 시간 동안 아무런 생각을 일체 하지 않았다. 모든 생각을 떨쳐버리며 바른 자세로 일관하며 편안하게 명상에 잠겼다.

심란한 마음이 들 때면 그가 하는 행동 중 하나였다.


한편, 얼마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녀는 의식을 되찾은 듯 눈꺼풀을 움직였다. 이내 머리가 지끈 거린지 한 쪽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녀는 자신이 줄곧 누워있던 곳이 어디인지 연신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때, 닫혀 있던 문이 열리고 방 안에 들어선 경과 눈이 마주쳤다. 초희의 동공이 여느 때 보다 더 크게 떠졌다. 반면, 아무렇지 않은 듯 표정을 내비치는 경은 그녀의 맞은편에 앉으며 꿀물이 든 그릇을 건넸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초희는 여전히 놀란 사람처럼 몸이 굳어있었다.


“왜 그리 놀라시오?”


“제, 제가...... 왜......? 이곳에 있는 겁니까?”


“기억 안 나시오? 선비께서 술 한 잔에 낚아 떨어지는 바람에 내 예까지 업고 온 것이오. 또 손 대로 집에 바래다 주기 뭐 해서 우리 집으로 데리고 온 것이니 이상한 생각하지 마시오. 일단, 이것부터 쭉 들이키시오. 처음 술 마시면 속이 쓰라린 법이니.”


경의 말에 초희는 일단 그의 말을 믿어 보기로 했다. 그리고는 그가 내민 그릇을 잡고 ‘쭉’ 들이켰다. 달짝지근한 꿀물을 마시니 한결 나은 듯했다. 초희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옆에 높여진 갓과 두루마기를 주섬주섬 집으며 입기 시작했다.


“벌써, 가시려는 게요?”


“제법, 속도 가라앉고 정신도 돌아왔으니 좀 더 날이 어둡기 전에 얼른 가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지 말고. 좀 더 몸을 추스르고 난 다음에 가도 늦지 않으니. 잠깐, 내 옆에 있어 주면 안 되시오?”


애절하게 바라보는 촉촉한 눈빛에 그만. 초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바닥에 앉았다. 곧, 경의 얼굴에서 미소가 그려졌다.


제 앞에 있는 이가 언젠가 또다시 자신의 방 안으로 들어오는 날이 있다면 그때는 여인의 모습으로 들어왔으면 싶었다.


하루빨리 아버지께 이 여인을 소개하고 싶었다. 아마도, 단 번에 마음에 들어 하실 게 분명했다. 외면도 외면이지만 내면이 따뜻하고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사대부의 며느리가 되기 위해서는 외면보다는 내면을 더 중요시했다. 그렇다고 제 앞에 있는 그녀의 외모가 출중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청초함이 묻어나는 백합의 모습을 띤 얼굴을 하고 있는 여인이었다.


그런 경과 달리 맞은편 초희는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시선이 왜 이리도 익숙하지 않는지. 다소 발갛게 달아 오른 제 얼굴을 혹여, 알아차릴까 걱정스러운 표정이 역력했다. 다른 사내라면 몰라도 제 앞에 있는 사내는 아마, 금세 알아차렸을지도 몰랐다. 들키고 싶지 않았으면 하는 여인의 마음이 것만 자꾸만 앞서는 감정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렇게 또 시간이 흘러갔다. 정적이 흐르는 방 안에서 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부탁 들어 줘서 고맙소. 내 집까지 바래다 주리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냥, 저 혼자 가겠습니다.”


“달밤에 산책 삼아 걷고 싶은 것뿐이니. 사양 마시오.”


“정녕, 그것...... 뿐이십니까?”


초희는 눈초리를 가늘게 뜨며 물어 왔다.


“난, 말이오. 여태 단 한 번도 거짓말을 한 역사가 없는 사람이오.”


“아, 네네. 그렇다고 치죠 뭐.”


“그 말 무슨 뜻이오? 그렇게 치다니. 직접 확인 못 했다고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되지 않소?”


뭐, 이런 고지식한 선비를 봤는지. 그냥 대충 넘기는 법이 없었다.


“제 말은 그 뜻이 아니라......”


“하, 허 선비. 진짜 그렇게 안 봤는데.”


순간, 초희는 자신이 또 무슨 잘 못을 한 건지 분간이 안 섰다. 그때, 경은 초희의 앞으로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왜, 왜 그러십니까?”


“...... 귀엽소.”


경의 말에 이상하게 초희가 민망한 듯 표정을 지었다. 대체, 이 사내의 머릿속은 뭐로 가득 차 있을지......?


경 역시 자신이 무슨 말을 내뱉은 건지 곧바로 뒤를 돌아 황급히 방 안을 빠져나갔다. 이내 초희는 살며시 제 머리를 흔들며 뒤따라 나갔다.


달 밝은 밤. 선명한 노란빛을 띠고 있는 보름달 저녁. 두 사람은 나란히 대문을 향해 걷고 있었다.


한동안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 명상을 하고 있던 박중섭은 눈을 떴다. 그는 뻐근한 허리를 부여잡고 차가운 공기에 정신을 가다듬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메마른 마당을 배회하며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그때, 그의 시야에 제 아들과 곁에 선 채로 나란히 걷고 있는 선비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무슨 사내가 저리 곱게 생겼단 말인가? 여인이라고 해도 믿겠군. 한데, 내가 모르던 벗도 있었던가?”


아들의 벗 또한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아들의 옆에 서 있는 선비는 생전 처음 보는 낯선 얼굴이었다. 다시, 고개를 돌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새로 사귄 벗인가 보군, 그건 그렇다 치고. 어쩌자고 집 안으로 사내들만 데리고 오는 것인지. 쯧. 이제, 스무 살이 되었으면 어서 혼례를 치를 성 안 하고 저리 곱상한 선비와 어울리며 풍류를 즐기다니. 괘씸한 놈. 잠깐, 저 녀석 설마......? 에이, 내 아들이 그럴 리가 있나? 아닐 테지. 암. 누구 아들인데.”


하지만 박중섭의 마음은 썩어 문드러져 갔다. 세간에 남색을 밝히는 사내들이 있다는 소문은 극히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그게, 자신의 하나뿐인 금지옥엽 키운 아들일 줄은 몰랐다는 듯. 아들을 향한 실망감에 혀끝을 차며 고개를 저었다.


혹, 호사가들의 눈 밖에 난다거나 하는 날엔 뒷감당을 어찌해야 할지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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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13. 돌연변이의 탄생(2) +1 16.04.03 32 0 15쪽
14 12화 돌연변이의 탄생(1) +1 16.04.02 76 0 29쪽
13 #11. 수수께끼의 선비(2) +1 16.04.02 45 0 21쪽
12 #10. 수수께끼의 선비. +1 16.04.01 57 0 21쪽
11 #9. 비와 당신...... 그리고 +1 16.04.01 39 1 21쪽
10 #8. 천명(天命) +1 16.03.31 64 0 16쪽
9 #7. 달 밝은 밤. 두 사내의 은밀한 조우. +1 16.03.31 30 0 19쪽
» #6. 님과 함께...... 달 밤을 거닐며. +1 16.03.31 65 0 21쪽
7 #5. 화려함 속에서 살아가는 외로운 부용화 꽃 한 송이. +1 16.03.31 103 0 11쪽
6 #4. 흩날리는 벚꽃 잎이 떨어지는 어느 멋진 봄날. +1 16.03.31 28 0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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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 남장여자 & 묘(妙) 한 선비 +1 16.03.31 85 0 13쪽
2 [프롤로그] #1-2 늑대 선비. +3 16.03.31 86 0 12쪽
1 [프롤로그#1. 만월(滿月)의 밤] +3 16.03.31 198 1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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