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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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디귿
작품등록일 :
2018.01.08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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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02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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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1.08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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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온(Leon)

DUMMY

낮부터 산발적으로 내리던 소나기는 해가 저물고부터 보슬비로 변해 도시 전체를 은은하게 적셨다. 스페인 북부 도시 레온의 늦은 밤거리는 한산함 속에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만이 거침없는 자유로움을 뽐내며 휘돌았다. 겨울 끝에 찾아온 봄의 기운이 세상을 푸른빛으로 물들이고 있었지만 해를 삼킨 어둠은 아직 겨울 기운을 담고 있었고, 거기에 낮부터 내리던 비는 그나마 남아있던 온기마저 앗아갔다.


쓸쓸한 냉기에 덮인 레온의 밤거리를 거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초저녁부터 들리던 동네 아이들의 시끄러운 폭죽놀이 소리는 어느새 사라지고 이따금 들려오는 술 취한 관광객의 들뜬 목소리가 빗속을 뚫고 작은 창을 넘어 세 평 남짓한 화장실 안으로 스며들었다.


세면대에서 손을 씻던 제강은 고개를 들어 어두운 창밖에 시선을 던졌다. 창밖엔 처마 아래로 떨어지는 화장실 불빛을 머금은 물방울 외엔 그저 짙은 어둠만이 있었다.


제강은 고개를 조금 숙여 세면대 앞 거울로 시선을 돌렸다. 눈까지 내려오는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잔뜩 찌푸리고 있는 미간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깊게 들여 마신 담배 연기를 거울에 비친 얼굴에 신경질적으로 내뿜었다.

거울을 덮은 연기가 걷히고 다시 드러난 그의 미간은 여전히 좁혀져 여러 개의 골을 만들고 있었다.

제강은 물고 있던 담배를 오른손에 쥐고 왼손 중지 손가락으로 미간을 위로 밀었다. 미간이 위로 올라가자 눈썹이 八자처럼 모양을 바꿔 표정이 우스꽝스럽게 변했다. 하지만 손가락을 미간에서 떼자마자 조금 전처럼 눈썹 사이가 좁아지며 다시 주름 골을 만들었다.


“쳇!”


언제부터 생긴 습관이었을까? 어림잡아도 벌써 십오 년은 된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습관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불과 오 년밖에 되지 않았다.


오 년 전 그 날도 오늘처럼 늦은 밤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작업 준비를 하고 있었다. 도시 외곽의 작은 호텔 방 화장실 세면대 위에 도구를 올려놓고 익숙한 손길을 놀리던 제강은 낯선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든 제강의 눈앞에는 이틀 전 호텔에 처음 투숙했을 때와 같은 자리에 거울이 있었다. 하지만 그 거울 속에 비친 사내의 표정과 눈빛은 이제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모습이었다.

무엇을 그리 걱정하고, 무엇을 그리 불편해 하는지 갖은 불쾌한 감정들을 가득 담은 얼굴은 하루에도 몇 번씩 마주치던 평소의 자신이 아니었다.

일시적일 거라 생각했던 찌푸린 인상은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작업 전 습관처럼 찾아왔다. 그 덕에 작업 전 거울을 보는 습관이 생기고, 표정을 고쳐보려 여러 가지로 노력했지만 별다른 효과를 볼 수 가 없었다.


“성형이라도 해야 되나······.”


제강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담배를 벽에 튕겨 끄고 세면대 안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두 정의 권총을 집어 들었다.


* * *


촛불만도 못한 옅은 조명들이 뿜어내는 빛은 식당 안을 비추기엔 한 없이 부족했다. 어두운 조명이나 헝겊으로 유리잔을 닦고 있는 바텐더와 그 뒤로 가득 진열된 다양한 술병, 한쪽에 자리 잡은 담배 자판기, 벽에 걸린 특색 있는 액자 등은 여느 식당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열댓 평 가까이 되는 실내 중앙에 덩그러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흰 천이 덮인 원형식탁은 식당의 실내 꾸밈과 이질적인 대조를 이뤘다.

있어선 안 될 곳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의 식탁엔 두 명의 백인이 서로 마주 앉아있었고, 그 사이에 빈 의자 하나가 쓸쓸히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식탁에 둘러앉은 두 명의 백인 뒤에는 각각 세 명의 건장한 사내들이 서 있었고, 외부로 통하는 출입구에 두 명, 실내 비상구에 두 명, 그리고 창가에 네 명의 사내들이 마치 성벽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예네프, 지금 몇 시야?”


머리가 반쯤 벗겨진 중년 사내가 뒤에 서있는 건장한 남자에게 빠른 러시아어로 물었다. 그의 목소리엔 신경질이 잔뜩 묻어있었다.


“이곳 시간으로 열한 시 이십오 분입니다.”


손목시계를 확인한 예네프는 무표정한 얼굴로 빠르게 대답했다. 시간을 물었던 중년 사내는 맞은편에 앉아 여유롭게 시가 연기를 내뿜고 있는 잿빛 머리카락의 사내에게 러시아 억양이 강한 영어로 말을 건넸다.


“길리언, 네 소개로 스페인까지 왔는데 이건 너무한 거 아닌가?”


길리언이라 불린 사내는 여유로운 몸짓으로 입에 문 시가를 손에 들고 말을 받았다.


“조금만 더 기다려 보세. 스스로 한 약속을 그리 쉽게 저버릴 사람이 아니네.”


“듣도 보도 못한 이런 도시에 올 생각을 한 내가 바보였어.”


사내는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신경질적으로 러시아어를 쏟아냈다. 길리언은 상대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 것이 짜증 섞인 신경질 이라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삼십 분만 더 기다려 보세. 그 뒤에도 아무런 소식이 없으면 내가 직접 자네 물건을 처리해 주고, 앞으로 일 년 동안 직접 거래해 주겠네.”


여유롭게 상대를 달래고 있지만 길리언의 속은 눈앞의 사내보다 훨씬 새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상대의 거절할 수 없는 조건 때문에 삼십년 지기 동업자인 보스야를 이곳 스페인 북부까지 오게 했는데, 정작 먼저 말을 꺼낸 그는 약속 시간이 한 시간이나 넘도록 아무런 연락도 되지 않고 있었다. 보스야의 물건을 직접 처리할 경우 생기는 경제적 손해도 손해지만, 불같은 성격의 보스야가 이 일을 계기로 어떤 행동을 보일지 알 수 없는 것 또한 큰 걱정거리였다.


“자네의 오랜 친구로서 조심스럽게 조언 한 마디 하겠네. 책임감 없는 약속을 하는 사람하곤 상종하지 말게.”


길리언의 조건에 화가 조금 누그러진 보스야는 오랜 친구에게 충고하듯 일렀다. 아무리 오랜 친구라도 그 말이 곱게 들리진 않았지만 길리언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누군가? 내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조건을 제시했던 사람이.”


길리언이 소개한 남자가 나타나지 않아도 같은 조건으로 물건을 처분할 수 있게 되자 기분이 좋아진 보스야는 최대한 영어 발음에 신경을 쓰며 물었다.


“나도 그 분을 정확히 어떻게 정의 내려야할지 모르겠네. 그저 우리하고는 사는 세계가 다르다는 정도······.”


끼이익!


길리언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낡은 경첩의 거친 비명소리가 식당 안을 울렸다. 마주 앉은 두 사내의 시선이 빠르게 열리는 문에 꽂혔다. 두 사람의 시선이 머문 바텐더의 왼쪽 실내 비상구의 열린 문 안쪽엔 관광객으로 보이는 동양인 남자가 서 있었다. 허름한 검은색 외투에 검은 바지, 그리고 광대뼈까지 내려오는 검은 머리카락과 그 사이로 보이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사내였다.


제강이었다.


“저 잔가?”


보스야는 노골적으로 비꼬며 말했다. 기대감에 고개를 돌린 길리언의 표정은 더 이상 조금의 전의 그 여유로운 표정이 아니었다.


“쫓아내 버려!”


열린 문의 양쪽에 서 있던 건장한 체구의 백인과 흑인은 안으로 들어오려는 제강을 막아섰다.


“Hey guys, what are you doing?”


“done.”


비상구 왼쪽에 서 있던 흑인이 울림 좋은 목소리로 짧게 대답했다.


“Why? Look at there. What’s they?”


제강은 흑인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보스야와 길리언을 가리키며 따지듯 물었다. 금방이라도 밀치고 들어올 것처럼 기세 좋게 떠드는 제강이 심히 못마땅했던지 흑인의 무표정했던 얼굴이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그리고 그 울림 좋은 목소리로 아주 천천히 또박또박 한 마디씩 제강의 얼굴에 박았다.


“Get. Out. Here.”


키는 비슷했지만 제강의 두 배가 넘는 체격의 흑인은 금방이라도 폭력을 휘두를 것처럼 위협적으로 거리를 좁혔다.


“OK. OK.”


제강은 점점 거리를 좁혀오는 흑인을 두 손으로 막으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제야 비상구를 지키고 있던 흑인도 인상을 펴고 다가가던 걸음을 멈췄다. 하지만 시선은 여전히 날카롭게 제강의 손짓 하나까지 살피고 있었다. 제강은 두 사내의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완전히 몸을 돌려 문을 밀었다. 열린 문 밖으로 걸음을 옮기며 혼잣말로 뭐라 중얼거렸지만 식당 안의 누구도 그 말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인 이유도 있었지만 기분 상한 동양인의 한심한 넋두리 정도로 생각한 탓이었다.

열린 문 밖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제강에게서 눈을 뗀 보스야가 시선을 길리언에게 돌리며 비웃듯 말했다.


“이곳도 완전히 시골은 아니군. 동양인 관광객이 찾아올 정도면 말이야.”


“저것들이 관광을 왔겠어? 물건 팔러 온 일본인 이거나, 이곳에 잡화점이나 차리고 있는 중국인이겠지. 열등한 것들이 주제도 모르······.”


탕!


갑작스런 총성이 식당 안을 묵직하게 울렸다.


실내인 탓에 정확히 어디서 총성이 울렸는지 파악할 겨를도 없이 길리언과 보스야, 십여 명의 경호원, 바텐더의 시선까지 무의식적으로 비상구로 향했다.

그들의 시선이 머문 곳엔 무의식의 예상대로 양 손에 권총을 하나씩 들고 서 있는 제강과 조금 전까지 듬직하게 비상구를 지키고 있던 두 경호원이 이마에서 피를 뿌리며 앞으로 고꾸라지고 있었다. 여전히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길리언과 보스야를 노려보고 있는 제강의 두 눈에 식당 안의 움직임이 느린 화면처럼 펼쳐졌다.


양손 검지로 걸고 있는 방아쇠를 당기는 짧은 순간. 아니, 첫 번째 총성이 울리고 모두의 시선이 비상구로 향함과 동시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원형 식탁은 이미 예네프의 발길질에 의해 제강을 향해 넘어졌다. 그와 동시에 뒤에 서 있던 다른 경호원들에 의해 길리언과 보스야는 넘어지는 식탁 뒤로 던져졌고, 역시 같은 순간에 세 명의 경호원이 온 몸을 펼치며 그 앞을 막아섰다. 이 모든 것이 동시에 일어났다. 제강의 두 권총이 다시 불을 뿜었을 때 길리언과 보스야는 이미 경호원과 식탁이라는 방패에 가려진 상태였다.


식탁 앞으로 나서며 온몸을 펼친 세 명의 경호원은 피를 뿌리며 쓰러졌고 그 뒤에서 이미 총을 뽑아든 나머지 경호원들이 제강을 향해 총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제강은 그 곳에 있지 않았다. 양손에 든 권총으로 세 번씩 방아쇠를 당긴 직후 몸을 던져 다시 문 밖으로 몸을 피했던 것이다. 이미 제강의 모습이 사라진 후에도 한동안 총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미친 듯이 쏟아지는 총알은 문과 벽을 뚫고 복도 벽과 천장에 박혔다. 식당 벽이 뚫리고, 총알이 복도 벽과 천장에 박힐 때마다 먼지와 부서진 건축자재가루 등이 떨어져 복도는 자욱한 먼지에 휩싸였다.


“그만! 멈춰! 멈춰!”


예네프가 몇 번이나 소리친 뒤에야 총소리가 멈췄다. 예네프는 귀를 기울여 제강의 흔적을 쫓았다. 하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무수히 쏟아진 총탄 속에 무사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쉽게 안심할 수는 없었다.


“밖에 연락해서 식당 앞에 차를 대게 해. 그리고 넌 복도로 나가서 한 번 확인해 봐.”


예네프의 지시로 한 명이 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들고, 다른 한 명은 권총으로 비상구를 조준하며 조심스럽게 발을 뗐다. 공격자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한 경호원의 조심스러운 발걸음은 온몸을 던져 방패가 되었던 동료의 사체를 조심스럽게 피해 비상구 앞에 쓰러진 최초의 피해자들(?) 앞까지 다다랐다.


“전화를 안 받습니다.”


외부와 통화를 시도하던 경호원이 당혹스런 표정으로 예네프를 쳐다봤다. 눈이 마주친 예네프는 뭔가 심각하게 잘못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당황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 상황을 빠져나갈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지금부터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 그저 내가 하는 행동을 그대로 따라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적-혹은 적들을 의식해 러시아어로 말했지만 만에 하나라도 상대가 말을 알아들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내린 지시였다. 예네프는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빈 탄창을 빼고 새로운 탄창으로 갈아 끼웠다. 러시아어를 할 수 없는 길리언의 부하들도 예네프의 행동이 어떤 의미인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간간히 부서진 벽에서 떨어지는 먼지 소리 속으로 탄창이 다시 총과 결합하는 소리는 감춰지지 않았다. 알 수 없는 적에게 탄창 가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한 행동이었지만 노골적으로 소리가 울리는 마당에 모두 헛수고였다. 그리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악마의 소리가 메아리쳤다.


조심스럽게 탄창을 갈던 경호원들은 적의 생사를 확인을 위해 비상구로 다가갔던 동료가 총성과 함께 쓰러지는 모습에 놀라 다급하게 방아쇠를 당겼다. 벽을 뚫으며 신랄하게 쏟아지는 총성 속에서 총알이 닿지 않는 사각에 몸을 숨기고 있던 제강은 다시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다. 오로지 단 한 곳,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몸을 잔뜩 움츠린 바텐더의 오른쪽으로 보이는 굳게 닫힌 주방문을 뚫을 듯 노려볼 뿐이었다. 머리와 어깨 위로 떨어져 내리는 먼지 속에서 정확한 사격을 위해 왼손에 들고 있던 총은 바닥에 두고 오른손에 든 총을 왼손으로 받쳐 들어 시선이 머물러 있는 주방문 하단으로 총구를 향했다.


첫 번째 총알이 문을 뚫고 안으로 들어갔다. 식당 안에 있던 예네프와 경호원들은 자신들이 쏘는 총소리에 제강의 총소리를 듣지 못했다.


제강은 연이어 두 발의 총알을 주방문의 뚫린 구멍 주변에 박았다. 구멍은 조금 전 보다 더 넓어졌다. 제강의 시선은 주방문의 뚫린 구멍 사이를 조금 전 보다 더 바쁘게 움직였다. 무언가를 찾는 듯한 제강의 바쁜 눈빛이 어느 한 지점에서 멈췄다. 제강은 망설이지 않고 빠르게 방아쇠를 당겼다.


콰쾅!


공기를 울릴 정도의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식당의 한쪽 벽이 무너지며 총을 쏘고 있던 경호원들을 덮쳤다. 제강이 노린 것은 다름 아니라 식당 안에 있던 LPG통이었다. 비록 저용량의 작은 가스통인 탓에 폭발에 의한 피해는 크지 않았지만 짧은 시간이나마 식당 내부를 공황상태로 만들기엔 충분했다.

갑작스런 폭발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엄청난 소리와 먼지로 식당 안의 누구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자욱한 먼지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제강은 폭발음의 충격으로 제대로 서지도 못하고 비틀거리는 경호원들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두 번의 총성이 울릴 때마다 한 명의 경호원이 쓰러졌다. 전광석화처럼 탄창을 갈며 경호원들을 하나둘 쓰러뜨린 제강의 총구는 어느새 예네프 마저 쓰러뜨리고 바닥을 뒹굴고 있는 길리언과 보스야를 향하고 있었다.


“누구냐? 누구 지시야?”


가스통 폭발로 생긴 먼지와 부하들의 피로 지저분하게 얼룩진 얼굴과 달리 보스야의 눈빛은 금방이라도 불길을 쏟아낼 것처럼 이글거렸다. 반면에 길리언의 눈빛은 모든 것을 포기한 듯 초점이 없었다.


“네놈이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우리 동료들이, 가족들이 절대 널 살려두지 않을 것이야!”


닥쳐올 죽음에 대한 공포는 끝없이 불타오르는 분노에 잠식당해 그 흔적을 찾아볼 수도 없었다. 보스야는 상대방이 알아듣는지 알아듣지 못하는지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그저 분노를 토해낼 뿐이었다.


“죽여 버리겠어. 너 뿐만 아니라 네 가족, 친구, 네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네 눈앞에서 갈가리 찢어 가장 고통스럽게 죽이고 네놈 또한······.”


러시아어를 미친 듯이 쏟아내던 보스야는 갑작스런 총소리에 눈을 질끈 감았다. 따뜻하고 끈적끈적한, 익숙한 액체가 얼굴을 덮쳤다.


피였다.


하지만 그 피는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감았던 눈을 황급히 뜨고 시선을 돌렸다. 그곳엔 이마에 구멍이 뚫려 피가 철철 흐르고 있는 오랜 친구의 얼굴이 있었다.


“이··· 이놈!”


온 힘을 다해 분노를 쏟아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허망하고 부질없는 악일뿐이었다. 등장과 마찬가지로 잔뜩 찌푸린 인상으로 손쉽게 십여 명의 경호원을 몰살시킨 동양인은 감정이라곤 전혀 담기지 않은 건조한 눈빛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봐, 늙은이.”


자연스러운 억양의 러시아어였다.


“임종 치고는 너무 고전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제강은 말을 마침과 동시에 조금의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이제 식당 안에 숨을 쉬는 건 제강 한 명뿐이었다. 제강은 총을 외투 속에 집어넣고 양팔을 위로 뻗어 크게 기지개를 켰다.


“화려하게라······.”


제강의 입에서 다짐하듯 되뇌며 흘러나온 말은 한국어였다. 그는 바닥에 널브러진 십여 구의 시체 사이를 조심스럽게 지나며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마치 뭔가를 찾는 듯한 걸음으로 걷던 그의 시선이 거리 쪽 창에 머물렀다. 가로등 불빛마저 희미한 어둠이 짙게 내린 거리 속에 방금 살인을 마친 제강의 모습이 비쳤다. 제강은 유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불과 십여 분 전 화장실에 봤던 잔뜩 찌푸린 인상의 사내가 아니었다. 지극히 평안한, 마치 하루 일과를 마치고 퇴근 준비를 하는 평범한 회사원 같은 표정이었다.


살인.


정당화 될 수 없는, 정당화 되어서도 안 되는 악마의 이름 같은 두 음절. 그것을 행한 사람의 표정이라곤 생각되지 않는 편안한 표정에 소름이 돋았다. 지금까지 수백 명을 죽이면서 단 한 번도 품어보지 않았던 낯선 감정이 제강을 휘감고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그를 마비시키기 시작했다. 하지만 창 너머 세상에서 빗소리를 뚫고 옅은 소리를 울리며 다가오는 사이렌 소리에 놀란 감정은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시선을 돌려 빠르게 시체 사이사이를 뒤지던 제강의 눈이 밝게 빛났다. 그리곤 빠르게 다가가 기민한 동작으로 허리를 숙이고 손을 뻗어 원하던 물건을 집어 들었다.

수류탄이었다.

제강은 망설임 없이 수류탄의 안전핀을 뽑아 버리고 몸을 돌려 몇 걸음 만에 출입문 앞에 섰다. 짧은 시간 출입문 앞에 멀뚱히 서 있던 제강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오른쪽 천장 구석으로 시선을 옮겼다. 마치 서로 대가리를 맞대고 으르렁 거리는 사자처럼 살기등등한 눈빛이 향한 곳엔 흔한 모양의 스프링클러가 있었다. 천장에 규칙적으로 자리 잡은 스프링클러 중 유독 한 곳을 뚫어져라 보던 제강의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비웃는 듯, 감탄한 듯 의미를 가늠할 수 없는 미소를 지은 제강은 입을 크게 벌리며 벙긋거렸다. 소리를 내지 않고 말을 전달하려는 것 같은 그의 행동은 그리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마치 정신 나간 사람 같던 그의 행동의 마지막은 처음과 같이 총성으로 마무리 됐다. 천장 구석의 스프링클러를 날려 버린 제강은 출입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며 문이 닫히기 직전 식당 안에 수류탄을 던져 넣었다. 제강의 손을 떠난 수류탄은 완만한 포물선을 그리며 클립이 떨어져 나가고 보스야의 왼쪽 바닥에 떨어졌다.


보슬비와 짙은 어둠에 덮인 스페인 북부 도시 레온 외곽의 골목에 짧은 시간을 두고 울린 또 한 번의 폭발음과 함께 붉은 화염이 보슬비를 뚫고 하늘을 향해 솟아올랐다.


작가의말

항상 장르에서 고민합니다.

‘액션’이 있었으면 과감히 선택했을 텐데...
영화에는 액션이 흔한데 왜 소설엔 없을까요.

달리 생각해 보면 굳이 장르를 구분짓지 않아도 되는 내용인 것도 같습니다.

그저 재밌게만 읽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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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제작 발표회 18.01.09 95 0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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