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6

무료웹소설 > 자유연재 > 전쟁·밀리터리

D디귿
작품등록일 :
2018.01.08 19:24
최근연재일 :
2018.04.02 14:34
연재수 :
17 회
조회수 :
1,633
추천수 :
1
글자수 :
121,782

작성
18.01.14 18:01
조회
74
추천
0
글자
9쪽

"예"

DUMMY

각자의 목적을 위해 바쁜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 사이로 유독 눈에 띄는 사내가 있었다. 전혀 급할 것 없는 사내의 걸음은 그리 특이할 게 없었지만 그의 훤칠한 키는 주변의 시선이 한 번 쯤 머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은 한 번에 그치지 못했다. 특히 여자들의 시선은 사내에게 꽤 오래 머물렀다. 백인과 황인의 혼혈로 보이는 이국적인 외모와 뒤로 질끈 동여맨 밤갈색의 긴 머리, 화려하지 않은 반팔 윗옷과 청바지 차림에도 맵시가 출중했다. 훤칠한 키와 옷맵시, 혼혈이라는 특이함에 끌린 여자들의 시선은 그의 얼굴에 더 깊이 빠져들었다. 모성애를 자극하는 우수에 잠긴 듯한 눈빛과 칼로 깎은 듯 날카로운 콧날, 얇고 긴 입술은 순정만화에나 나올 것 같은 조화였다.


사내는 사람들의 시선에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지하철 개찰구를 통과해 인파 속을 걸으며 귀에서 잔잔히 들려오는 음악에만 집중했다. 사내의 귀에 꽂힌 이어폰에선 ‘딥퍼플(Deep Purple)’의 ‘Soldier of fortune’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수백, 수천 번은 들었을 노래를 흥얼거리며 걷던 사내는 지하철 출구 모퉁이에 서 있는 익숙한 얼굴을 찾았다.


그 역시도 지나는 뭇 여자들의 시선을 받고 있었는데 다른 점은 그 시선을 즐기고 있다는 점이었다. 눈을 마주친 모든 여자를 원래부터 알고 있었던 듯이 눈인사를 잊지 않으며 간간히 미소까지 건네는 그 모습은 누가 봐도 추파를 던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사내는 그 모습을 보고 한심하다는 듯 비식 웃어 보이고 그에게 다가갔다.


“일찍 왔네?”


백인에 가까운 외모와 달리 그의 한국말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 그는 귀에서 이어폰을 빼며 말을 이었다.


“여자가 그렇게 좋냐?”


“왔어?”


모퉁이에 서 있던 사내는 그제야 알아보고 시선을 마주쳤다. 짙은 눈썹과 분명한 이목구비, 코까지 내려오는 검은색 머리카락과 그 속에 얼핏 보이는 날카로운 듯 하면서도 서글서글한 눈빛.


제강이었다.


제강은 사내에게 다가가 반갑게 얼싸안았다.


“오랜만에 지하철 타 본 소감이 어때?”


“왜 하필 퇴근 시간에 이 사람 많은 곳에서 보자고 한 거야? 집에서 보면 되잖아.”


사내는 인상을 찌푸리며 지나는 사람들을 둘러봤다.


“우리도 가끔은 이렇게 사람 많은 곳도 다니고 그래야 되는 거야. 여자 구경도 하고 말이야. 넌 어떻게 된 놈이 생긴 건 멀쩡해서 여자한테 관심이 없냐?”


“너야말로 이해가 안 된다. 우리 같은 놈들이 멀쩡하게 거리를 활보 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야. 박쥐면 박쥐답게 동굴 속에 있다가 밤에 나와야지.”


“됐다. 됐어.”


제강은 사내의 단호함에 질려 손을 내저었다.


“누가 아버지 아들 아니랄까봐 어떻게 하는 말 하나하나 똑같냐?”


인상을 쓰며 고개를 가로 젓는 제강을 내려다보던 사내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그러는 너는 아버지 아들 아니냐? 나도 너 보면 어쩜 그렇게 하나도 안 닮을 수 있는지 궁금하다.”


“됐고. 자리나 옮기자. 여자 구경도 좋지만 사람이 너무 많다.”


제강은 사내의 어깨를 치며 앞장섰다.


“제강아, 스페인 일 말이야.”


자동계단에 발을 올린 사내는 두 계단 위에 서 있는 제강의 뒷모습에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아버지가 아셨어.”


“뭐?”


어지간한 일로 감정을 드러내는 법이 없는 제강은 진심으로 놀라 소리치며 뒤를 돌아봤다. 사내는 크게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그럼 그렇게 일을 크게 저지르고 모르실 거라고 생각한 거야?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거야? 네 멋대로 의뢰를 받은 건 처음도 아니니 그렇다고 치는데 왜 일을 그렇게 처리한 거야?”


제강은 대답대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한숨에도 사내는 계속 말을 이었다.


“아버지 말씀 때문에 나도 조금 알아봤는데 너한테 의뢰한 사람들 정체를 파악할 수 없었어. 거기에 보수는 터무니없이 높고.”


“내 계좌까지 확인한 거야?”


사내의 천천히 끄덕이는 머리를 보며 제강은 강한 편두통을 느꼈다. 언제까지 아버지 모르게 숨길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은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들통 난 상태였다. 생각하기도 싫은 최악의 상황이었다.


“당연한 거 아니야? 요즘 아버지가 뜸 하시다고 너무 안일했던 거 아니야? 그렇게 출처가 확실하지 일은 고사 했어야지. 네가 그런 걸 모르는 것도 아니잖아.”


“예, 너 아버지가 보냈지? 나 피 말려 죽이라고.”


제강이 뚫을 듯한 눈빛으로 예를 노려보는 사이 어느새 자동계단의 끝에 다다랐다. 대답을 바로 듣고 싶었지만 하는 수 없이 몸을 돌려 계단을 벗어났다. 거리엔 역사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바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 사이를 제강과 예가 나란히 걸어 나갔다.


“얼른 말 해 봐. 아버지가 보냈지? 응?”


제강은 자신보다 오 센티미터 정도 더 큰 예를 올려 보며 비꼬듯 말했다. 예는 한심하다는 듯 눈을 감으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뭔 소리야. 네가 불러서 온 거잖아. 중요한 일이라고 한국에서 보자고 네가 연락한 거잖아.”


“아, 맞다. 그러네. 그럼 아버지는? 아버지는 뭐라셔?”


“뭐라고 하시긴, 같이 돌아오라고 하시지. 아무래도 이번 일에 대해서 많이 걱정하시고 계신 것 같아. 석연찮은 구석이 한두 개가 아니니까.”


제강은 기억 속 낯선 목소리를 다시 떠올렸다. 레온에서 처리한 일은 구 개월 전에 의뢰를 받았다. 접선 방법을 정확하게 알고 나타난 사내는 전화번호 하나를 주고 사라졌다. 곤륜을 통하지 않고 의뢰를 받은 적이 몇 번 있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친분에 의해서였다. 혹은 어차피 곤륜을 통해서 받을 의뢰를 당겨 받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먼저 다가온 그들은 어느 쪽도 아니었다. 제강은 무시할까 생각도 했지만 새로운 상황에 흥미를 갖고 전화를 걸었다. 상대는 낯선 중년 남성이었다. 그는 신분을 밝힐 수 없는 고위층 인물이라 했다. 현재 자신의 국가에 해가 되는 마약과 무기를 밀매하는 조직의 우두머리들을 제거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의뢰 내용은 그럴 듯 했다. 암살할 대상의 정보도 확실했고, 무엇보다 보수가 마음에 들었다. 비슷한 일을 처리할 때의 몇 배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일의 내용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다른 범죄조직에 본을 보이기 위해 최대한 화려한 방식으로 처리해 달라는 내용도 특이하지 않았다.


그게 문제였다.


조금씩 이상하지만 크게 이상하지 않았다. 조금씩 불안하지만 전체를 휘두를 정도는 아니었다. 모두 의심 할만 하지만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왜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을까? 이상하고 불안한 것 중 단 하나라도 의심해 봤다면 맡지 않았을 의뢰였다.


하지만 제강은 예에게 어떤 이야기도 꺼내지 않았다.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 어쩌겠어? 뭔 일 생기면 그때 가서 처리하면 되는 거고, 아버지께 혼나는 것도 그때 가서 혼나면 되는 거니까 오늘은 그만 얘기 하자. 오늘은 그냥 마음 편히 좀 놀자.”


예는 머릿속으로 그리던 복잡한 생각을 지우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래, 그 일은 잠시 접자. 근데 뭐 하려고 이곳까지 부른 거야?”


“예, 너 내 친구지?”


“뭐야? 갑자기.”


뜬금 맞은 질문에 예는 작은 불안을 느꼈다. 뭔가 또 잘못한 일이 있거나 거절할 수 없도록 찜찜한 일을 미리 부탁하기 위함인 것 같았다.


“아니, 그냥······.”


알 수 없는 미소를 남기며 제강은 말을 삼켰다. 그럴수록 예의 불안은 더욱 커져만 갔다.


“너 또 뭐 잘못한 거 있지? 이번엔 또 얼마나 큰일이기에 그런 오글거리는 소리까지 하는 거야?”


“아니야 그런 거. 그냥 확인하고 싶었어.”


예는 지금 당장이라도 돌아가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느꼈다. 분명 알지 말아야 할 것을 알게 될 것이고, 이미 알게 된 이상 제강과 공범이 될 거라는 건 자명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직감 한다고 해도 이젠 빠져나갈 수 없었다.


제강이 ‘친구’ 운운한 순간부터 모든 게 시작된 셈이었다.


“난 가끔 말이야. 아버지 보다 네가 더 무서울 때가 있다.”


“무슨 그런 말 같지도 않은 소릴 하고 그래. 네가 걱정할 만한 그런 일은 아니니까 너무 긴장 하지 마.”


예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제강이 가는 길을 따라 걸을 따름이었다.


작가의말

지난 일요일은 최고 44도까지 올라가더니,

오늘은 최저가 15도입니다.

생각 없이 창문 활짝 열어놓고 자다가 새벽에 너무 추워서 깼네요.

한 여름에 추워서 잠을 깨다니.. 

참 신비한 나라입니다=ㅅ=ㅋ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에피소드6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7 귀신 종규 - 히로(#사토미) 18.04.02 47 0 17쪽
16 귀신 종규 - 사토미 18.03.19 78 0 9쪽
15 울지 못하는 광대 - 2 (평범할 수 없는 이의 평범한 일상) 18.03.10 82 0 20쪽
14 울지 못하는 광대 - 1 18.02.22 79 0 17쪽
13 외계인 납치설 18.02.18 82 0 18쪽
12 불가능한 현실 18.02.11 114 0 12쪽
11 프롤로그 18.02.04 71 0 9쪽
10 감시자 - 경고 18.02.01 84 0 19쪽
9 뺨 맞은 남자의 어줍잖은 꼼수 18.01.30 255 0 17쪽
8 의도 속 재회 18.01.26 109 0 15쪽
7 잘 생긴 남자가 살아가는 법 18.01.24 101 0 11쪽
6 감시자 - 뒷골목 삼겹살 집 18.01.23 69 0 19쪽
5 "아현" 18.01.21 112 0 10쪽
» "예" 18.01.14 75 0 9쪽
3 Santiago de Compostela 18.01.12 69 0 29쪽
2 제작 발표회 18.01.09 95 0 17쪽
1 레온(Leon) 18.01.08 112 1 19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