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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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디귿
작품등록일 :
2018.01.08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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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02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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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2.11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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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한 현실

DUMMY

한겨울에 내리는 비는 어느 때보다 쓸쓸하다. 추적추적 도심에 내려오는 비는 나뭇잎 하나 없이 앙상하게 남은 가로수 가지 사이에 제대로 머물지도 못하고 떨어져 바닥을 적셨다.


어떤 빗방울들은 빌딩에 부딪혀 유리벽을 타고 흘러내리고, 어떤 비들은 붉게 이어지는 자동차 전조등 사이로, 달리는 자동차 지붕 위로, 도심의 빛을 머금은 아스팔트 위 물웅덩이로 떨어졌다. 그리고 또 어떤 빗방울들은 인도 위를 걷는 다양한 색상의 우산 위로 떨어졌다.


투둑. 투두둑.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하나하나의 소리가 섞여 정체를 알 수 없는 소음이 되어 빌딩 숲 사이를 메아리 쳤지만 한 남자의 귀에는 그 소리가 정확히 들렸다.


왼쪽으로 지나치는 연인이 쓴 무지개 빛깔의 우산에 떨어지는 빗소리, 맞은편에서 걸어와 왼쪽으로 피해 가는 젊은 여자의 연분홍색 우산에 떨어지는 빗소리, 오른쪽으로 스쳐가는 검은 우산을 하나씩 들고 있는 사내들에게서 나는 빗소리. 그리고 그들의 목소리, 말투, 억양에 이르기까지 모든 소리를 하나씩 나눠 듣고 있었다.


시선도 정신없이 옮기고 있었다. 남자, 여자,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지나가는 모든 사람을 확인했다. 상대방과 눈이 마주칠 새도 없이 사람들의 틈바구니를 지나쳐 눈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을 확인했다.


반대로 그의 시선을 받은 사람들 역시 그를 쳐다봤다.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백팔십 센티미터는 훌쩍 넘을 큰 키에 외투에 붙은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기운 없이 걷는 모습 때문이 아니었다.


영하로 떨어진 한겨울의 비오는 날 우산을 쓰지 않은 유일한 사람인 탓이었다. 비에 흠뻑 젖은 그는 추위를 느끼는 감각이 없는지 조금도 추워하는 기색 없이 멍한 눈으로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비척비척 사람들 틈바구니를 힘들게 걸어갔다.


사내는 좁은 계단을 힘겹게 올랐다. 비에 홀딱 젖은 탓에 발을 딛을 때마다 계단에 작은 물웅덩이가 생겼다. 나간도 잡지 않고 느린 걸음으로 오층까지 오른 사내는 복도를 따라 다시 느린 걸음을 옮겼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비틀 거리던 그의 걸음이 멈춘 곳은 504호 앞이었다.


삑. 삑. 삑. 삑.

삐리릭.


전자 열쇠의 비밀 번호 누르는 소리와 문이 열리는 신호음이 복도에 메아리쳤다.


사내는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가 신발도 벗지 않고 거실 바닥에 쓰러지듯 엎어졌다. 마치 그대로 죽음을 맞이하려는 사람 같았다. 하지만 사내는 눈을 감지 않았다. 그의 지친 몸과 달리 그의 눈은 살아있었다. 그리고 정확히 한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머문 곳엔 시들어 죽은 화초가 놓여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걸까. 화초는 처음에 어떤 이름을 갖고 있었는지 분간할 수 없을 만큼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띠리리리.


익숙한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하지만 사내의 시선은 여전히 시들어 죽은 화초에 머물러있었다.


딸깍.


“여보세요.”


몇 번의 신호음이 울리고 자동응답기로 넘어가자 무거운 사내의 음성이 들렸다.


“어떻게 된 거야? 별 일 없는 거지? 너 괜히 무모한 짓 하고 다니지 마. 너도 알다시피 지금 분위기가 섣부른 행동 할 때가 아니잖아. 어머니도 아버지도 네 걱정 많이 하시고 계셔. 하아······.”


전화기 너머 상대는 깊은 한숨을 쉬고 다시 말을 이었다.


“제강아. 아버지 어머니께 말씀 드렸다. 아현이에 대한 이야기 말씀 드렸어. 잠시 돌아오라신다. 내 생각에도 지금 넌 혼자 있을 때가 아닌 것 같아. 널 못 믿어서가 아니라 거기엔 네게 힘이 돼줄 사람이 없잖아. 무슨 말인지 알지? 이 거 듣는 대로 바로 연락 좀 해.”


전화가 끊어졌다. 거실에 죽은 듯 엎어져 있는 사내는 바로 제강이었다. 전화기 너머의 사내는 예였다.


제강의 시선은 여전히 시들어 죽은 화초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그 시선은 조금 전처럼 선명하지 못했다. 추위에 눌리고, 피로가 덮인 탓인지 금방이라도 감길 듯 눈꺼풀이 반쯤 내려와 있었다. 시야도 흐릿해졌다. 그 흐릿한 시야 너머로 아련한 얼굴이 떠올랐다. 아현의 얼굴이었다. 벌써 한 달이나 지났다. 그녀가 사라진지······.


그녀는 약 한 달 전 말 그대로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날은 평소와 다른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제강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전화기를 집어 들고 통화 단추를 눌렀다.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이거나······.”


당연히 들려야 할 익숙한 신호음 대신 녹음된 여자의 기계적인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 잠이 덜 깨 눈을 반쯤 감은 채로 전화를 걸던 제강은 눈을 번쩍 뜨고 휴대 전화 화면을 봤다.


아현의 번호가 확실했다. 통신상의 오류나 기계적 오류일 가능성을 생각하며 몇 번이나 다시 걸어봤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뻔히 아현의 번호임을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단축번호 대신 직접 하나하나 번호를 눌러서 통화를 시도했지만 결과는 같았다.


제강은 바로 아현의 집으로 달려갔다. 택시에서 내려 미친 듯이 달려 아현의 집 앞에 섰다. 어제 본 그 모습 그대로였다. 초인종을 눌렀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불안한 마음에 초인종을 누르면서 문까지 두드렸지만 여전히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끝없는 불안이 엄습해 왔다. 머릿속은 하얗게 변해 어떤 사고도 똑바로 할 수 없는 상태가 됐다. 옆집! 옆집에 물어보자! 제강은 바로 옆집 문을 두드렸다.


“누구세요?”


이제 막 잠에서 깬 것 같은 젊은 여자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렸다.


“저 죄송한데 말씀 좀 물을게요.”


“뭔데요?”


여자의 짜증 섞인 목소리에 신경 쓰지 않고 제강은 빠르게 물었다.


“옆집. 사백오 호 사는 사람 혹시 보셨어요?”


“무슨 소리에요. 그게?”


“최근에··· 그러니까 어제나 오늘 옆집 사는 여자 혹시 못 봤냐고요?”


“뭔 소리하는 거야······. 아저씨, 사백오 호 사람 안 살아요.”


머리에 벼락이 떨어진 것 같았다.


“네? 무슨 소리에요? 이십대 후반 아가씨 살았잖아요.”


“아, 진짜 짜증나게··· 제가 이 집에 이사 온지 일 년도 넘었는데 그 집에 사람 사는 거 본 적 없어요.”


거짓말이야. 아니면 꿈이다. 이럴 수는 없어.


“아저씨, 이상한 소리 자꾸 하면 사람 부를 거니까 그냥 가세요.”


제강은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쓰러질 것만 같았다. 바로 어제만 해도 심야영화를 보고 헤어졌다. 집에 들어와서 간단히 통화를 하고 끊었다. 조금도 이상한 낌새가 없었다. 모든 상황이 일상 그대로였다.


짝!


뺨을 세게 후려쳤다. 기대와 달리 고통이 찾아왔다. 꿈이길 바랐지만 꿈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뭔가 행동을 해서 이 상황을 확실히 파악해야 했다.


제강은 스스로 때린 뺨에 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일단 온 신경에 정신을 집중했다. 무엇을 할지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선 지금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는 게 중요했다.


제강의 신경에 가장 먼저 잡힌 것은 조금 전까지 실랑이하던 옆집 여자의 기척이었다. 낯선 남자의 목소리에 경계하며 문을 열지 않고 대화하던 여자는 문 밖의 남자를 확인하기 위해 문에 붙어 온 신경을 집중했다.


제강은 숨을 죽이고 기척을 지웠다. 여자는 불안한 상황을 정리하고 싶은 생각에 으름장을 놓은 것이었겠지만 일을 복잡하게 만들 수 있는 요인을 미연에 방지할 요량이었다.


얼마간 밖의 기척을 살피던 여자는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자 집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제강은 여자의 기척이 집안으로 완전히 들어가자 주머니에서 접이식 작은 칼과 핀 하나를 꺼내 405호 문 앞에 섰다.


철컥!


자물쇠 앞에 쪼그리고 앉아 몇 번 손놀림을 놀리자 마치 열쇠로 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문이 열렸다. 제강은 주변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집안으로 들어갔다.


바로 어제까지 봤던 그 구조가 분명했다. 하지만 집안 어디에도 아현의 흔적은 없었다. 벽에 걸려있던 그녀가 직접 그린 그림이 들어있는 액자, 벽에 걸려있던 텔레비전, 거실 중앙에 있던 탁자, 외투가 걸려있던 옷걸이, 전신거울, 식탁, 신발. 어느 것 하나 남아있는 게 없었다. 말 그대로 빈집이었다.


무시로 드나든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꽤 자주 오는 편이었다. 그 매 순간이 전부 허상이나 헛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된 걸까? 제강은 평소보다 더 신경에 집중해 주변을 살폈다.


탁자가 있던 자리, 텔레비전이 있던 자리, 거울이며 옷걸이가 있던 자리 등 사람이 머물렀던 흔적과 온기와 향기에 이르기까지 기억속의 모습과 현재를 비교하기 시작했다.


‘불가능해.’


분명 1년 이상 비어있던 집은 아니었지만 불과 며칠 전에 짐을 뺀 건 아닌 것 같았다. 아마도 마지막 방문 직후인 보름 전이 분명했다. 더 오랫동안 비어있던 것처럼 꾸밀 의도는 없었던 것 같았다.


그렇다면 어떤 사정에 의해 먼저 이사를 가고, 사정을 밝히지 않고 모습까지 감춘 거라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집에 분명 있어야 하는 것이 없었다.


바로 사람의 흔적이 없었다.


마치 물건만 넣었다 뺀 것 같이 사람이 살았다는 흔적을 어디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사람이 머물면 어쩔 수 없이 남을 수 밖에 없는 향이나 온기 같은 흔적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의 장 바티스트 그루누이라면 모를까 현실에선 가능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눈앞에 그 불가능이 펼쳐져 있었다. 제강은 다시 한 번 강한 혼란에 빠졌다.


고작 보름동안 집을 비웠다 해서 사람의 온기며 향이 완전히 사라질 수 있을까? 귀신이나 악마가 아닌 이상 그건 불가능 하다.


그렇다면 이 집과 관련된 아현의 말이 모두 거짓이라는 것인데 그것도 말이 안 된다. 분명 보름 전에 왔을 때만 해도 이 집은 사람이 사는 집이었다.


고작 보름 사이에 존재 했던 것을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게 하는 게 가능한 걸까? 불가능이라 판단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 기준일 뿐이다. 하지만 왜? 평범한 이십대 여자가 나도 할 수 없는 방법으로 흔적을 지우고 연기처럼 사라진 걸까?


생각에 생각을 더하고 꼬리에 꼬리를 물수록 제강의 머리는 더욱 복잡해지고 출구는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았다.


‘돌아가자.’


더 이상 이곳에 있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 제강은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갔다.



지난 밤 내린 비는 거짓말처럼 그치고 한겨울이라 믿기 힘들만큼 강렬하고 포근한 볕은 편견 없이 세상을 비추며 제강의 집 거실로 들어왔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조금씩 거실을 덮어가던 볕은 결국 제강의 온몸을 감쌌다. 그 흔한 텔레비전이나 소파도 없이 작은 탁자 하나 있는 썰렁한 거실 한 구석에 죽은 듯 엎어져있던 제강은 눈을 자극하는 강한 빛에 눈을 떴다.


얼마나 누워있었던 걸까. 눈을 뜨자 익숙한 거실 풍경이 흐릿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거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강렬한 태양빛 때문에 눈을 뜨고 있기 힘들었지만 다시 눈을 감으면 그대로 잠들 것 같아 몸과 정신이 온전해 지도록 정신을 집중했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씩 흘러감에도 맑아지는 정신과 달리 몸은 제 상태를 찾아가지 못했다. 보이지 않는 끈으로 꽁꽁 묶인 것 같은 몸은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았고, 흐릿한 세상도 여전히 선명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작가의말

사람이 참 단순한가 봅니다.

1주일에 6일, 60시간 이상 일할 때는 몰랐는데 지난 10여 개월동안 주 5일씩 일하다 보니 요즘 일에 치여 6일 일하는 게 그렇게 힘드네요.. 

일주일도 너무 길구요...

그래도 돈은 더 벌어서 좋네요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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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감시자 - 경고 18.02.01 84 0 19쪽
9 뺨 맞은 남자의 어줍잖은 꼼수 18.01.30 255 0 17쪽
8 의도 속 재회 18.01.26 109 0 15쪽
7 잘 생긴 남자가 살아가는 법 18.01.24 102 0 11쪽
6 감시자 - 뒷골목 삼겹살 집 18.01.23 70 0 19쪽
5 "아현" 18.01.21 113 0 10쪽
4 "예" 18.01.14 75 0 9쪽
3 Santiago de Compostela 18.01.12 70 0 29쪽
2 제작 발표회 18.01.09 95 0 17쪽
1 레온(Leon) 18.01.08 113 1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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