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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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디귿
작품등록일 :
2018.01.08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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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02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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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1.23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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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시자 - 뒷골목 삼겹살 집

DUMMY

서울 도심에서 보기 쉽지 않은 붉은 노을이 하늘을 수놓았다. 하지만 높다란 빌딩 사이로 바쁜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 대부분은 하늘에 펼쳐진 아름다움을 보지 못했다. 그저 서쪽 하늘로 넘어가던 태양빛을 막아선 빌딩의 그림자로 저녁에서 밤으로 넘어가고 있다는 사실만 느낄 뿐이었다.


사이먼은 옥상 난간에 기대앉아 빌딩 사이로 사라지고 있는 태양을 보고 있었다. 그 태양은 어딘지 쓸쓸해 보였다. 마치 무언가에 이끌려 어쩔 수 없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있어야 할 곳에 있지 못하고 끌려가는 슬픔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듯 했다.


태양에 내 모습을 투영한 건가?

보스는 어째서 그런 의뢰를 받아들인 걸까?

우리가 납득하지 못할 상황이란 것을 알면서도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은 이유는 도대체 뭘까······.


“사이먼!”


미심쩍은 상황과 대장에 대한 서운함은 히로의 목소리에 부서져 사라졌다. 사이먼은 담배에 불을 붙이며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연락이 왔어요.”


빌딩 옥상 난간에 성능 좋은 카메라를 걸치고 인도를 유심히 살피던 히로의 이어진 말은 중국어였다. 사이먼은 아무 대답 없이 담배를 깊게 빨며 빌딩 숲 사이를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을 쳐다봤다. 뭐가 그리 바쁜지 저마다 다른 걸음을 열심히 옮기고 있는 이들을 하나둘 확인하듯 보던 사이먼이 히로의 어깨를 쳤다.


“오른쪽 녹색 간판, 올리브, 화장품 가게.”


사무적이다 못해 기계적인 사이먼의 빠른 말에 히로의 움직임이 분주해졌다. 카메라를 들어 위치를 바꾸고 몸까지 틀어 사이먼이 가리킨 방향으로 카메라 렌즈를 향하는 히로의 움직임은 매우 기민했다.


“잡았습니다.”


히로는 목표가 카메라 화면에 들어오자 녹화 버튼을 누르고 렌즈를 조작해 확대와 축소를 적절히 반복했다. 인파 속을 천천히 걷는 사내를 따라 카메라를 조작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히로는 생각보다 일이 수월하자 마음이 놓여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그런데 왜 우리가 한국까지 와서 저 남자를 따라 다녀야 하는 거예요?”


사이먼은 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바로 직전까지 같은 의심을 품고 있었지만 그 생각을 그대로 말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하는 일도 그렇게 어렵지 않고, 보수도 괜찮아서 하고는 있지만 요즘은 제가 불륜이나 쫓는 사설탐정이 된 것 같아요.”


사이먼은 역시 대답하지 않았다. 히로도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그는 워낙 말 수가 적고 감정 표현도 없는 로봇처럼 딱딱한 사람이었다. 지난 삼 년 동안 한 번도 그가 누군가와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임무 중에도 정확히 필요한 말만 할 뿐이었다. 그래서 그와 함께 일을 할 때엔 아예 대답을 기대하지 않고 혼자 지껄였다.


“이런 유치한 탐정 일도 일은 일인가 봐요. 아까부터 보니까 우리만 일 하고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히로의 카메라가 쫓고 있는 표적에게 눈을 떼지 않던 사이먼의 시선이 빠르게 히로에게 옮겨졌다.


“제가 시차적응을 못하는 줄 알았어요. 마카오에서 한국인데 말이죠.”


히로는 사이먼의 진지한 눈빛을 모른 체 자신의 농담에 혼자 키득거렸다.


“무료해서 우리 팀 숫자를 세고 있는데 자꾸 다섯인 거예요. 몇 번을 세도 말이죠. 우리는 지금 네 팀으로 움직이고 있잖아요. 그런데 더 웃긴 건 뭔지 아세요? 제가 그만 사이먼과 나를 그 숫자 안에 포함 시키지 않았더라고요.”


사이먼의 눈이 빠르게 움직였다. 표적 주변의 인파와 주변 상가, 정체된 도로 위의 자동차, 수많은 빌딩과 옥상까지 빠르게 시선을 옮겼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지하철역에 있는 한 팀을 포함하면 여섯이다. 히로가 센 숫자보다도 한 팀이 더 많았다. 대장은 같은 임무를 이인일조로 구성된 네 팀에게 맡겼다. 서로 방해도 협력도 없이 각자 같은 임무에 충실 하라는 지시였다. 이해할 수 없는 지시였지만 언제나처럼 대장을 따랐다. 하지만 일의 특성상 연계는 반드시 필요했기에 지하철 팀에게 연락을 받았던 것처럼 약간의 협력은 존재했다.


그렇다고 다른 팀의 위치까지 알고 있는 건 아니었다. 사이먼과 히로는 보란 듯이 옥상에서 느긋하게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지만 다른 팀들의 위치는 알 수 없었다. 그런데 표적을 감시하는 움직임을 보이는 무리가 두 군데나 더 눈에 띄었다.


대장이 앞선 네 개의 팀 모르게 추가 파견을 할 리 없다.

그렇다면 전혀 다른 팀이라는 얘긴가?

의뢰자가 우리 외에 다른 조직에게도 의뢰를 했다면 이건 그냥 넘길 일이 아니다.

대장도 이 일을 알고 있을까?

저들은 이미 우리 존재를 파악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 건 무슨 이유지?

고작 평범한 자유계약 작가를 감시하고 영상 촬영하는 것치곤 상황이 너무 복잡하다.


사이먼의 머리는 빠르게 회전했지만 어떤 답을 내릴 수 없었다. 아직 정확하게 이중계약이라는 확신도 없었다. 하지만 만약 이중계약이 확실해질 경우 계약 파기는 물론이고, 배신에 준하는 행동으로 상대를 판단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최악의 경우 의뢰자와 총구를 겨누는 상황까지 갈 수도 있는 심각한 문제였다.


사이먼은 의심을 지우려 머리를 가로 저었다. 임무 자체에서 벗어나 생각을 품고 의심을 키우는 순간 임무는 실패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느 것 하나 확실하지 않은 상황이라면 임무에 충실 하는 게 옳았다.


* * *


이제 막 어둠에 덮인 빌딩 뒷골목 식당가는 숨 쉬는 것과 숨 쉬지 않는 것들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소음으로 가득했다.


벌써부터 건하게 취해 비틀거리거나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거나 고함을 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한쪽에선 먹은 것들을 토해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떤 이들은 역한 감정이 섞인 고함을 지르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서로에게 반가움을 외치기도 했다.


골목을 울리는 오토바이, 건물 넘어 빌딩 숲에서 들려오는 수많은 자동차 소리, 커다란 솥에서 부글부글 사골 끓이는 소리들도 사람들이 입을 통해 내는 소리 속에 적당히 어우러졌다. 절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시끄러운 소리의 조합은 뒷골목 식당가의 소리라는 이름을 갖고 그 자리에 있었다.


딸랑딸랑.


꽝!


미닫이문이 방울 소리를 내며 힘차게 열리다 못해 반대쪽 문에 부딪히며 큰 소리를 울렸다. 누가 시비라도 거는 듯 열리는 문으로 식당 안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남의 집 문 다 부술 거야?”


주방 쪽에서 종지에 김치를 덜고 있던 풍채 좋은 육십 대 주인 여자의 앙칼진 목소리가 식당을 가로질러 열린 문을 향해 날아갔다. 그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식당 안의 시선은 도로 주방을 향했다.


“이모, 저희 또 왔어요!”


앙칼진 식당 주인의 목소리에 전혀 굴하지 않으며 맑고 밝은 목소리가 식당을 울렸다.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젊은 여자의 목소리에 식당 안의 시선이 다시 문을 향했다.


“이 년아, 두 번만 왔다가는 우리 집 다 작살내겠다.”


“헤헤. 죄송해요. 저희 고기 먹을 거예요.”


주인 여자는 식당 안으로 들어오는 젊은 여자를 단번에 알아봤다. 일주일에 한 번은 꼭 오는 성격 밝은 처자였다. 키는 커도 배짝 마른 것이 남자친구하고 둘이 와서 사내 셋이 먹는 양을 먹고 가는 덕에 첫날 바로 얼굴을 익혔다. 거기에 술은 어찌나 잘 먹는지 두 시간만 있으면 상 위에 안주보다 빈병이 더 많았다.


“저기 앉아. 근데 오늘은 셋이네? 하나 더 만든겨?”


주인 여자가 익살스럽게 웃으며 주방 앞자리를 가리켰다. 식당 안으로 들어온 밝은 목소리의 여자와 키가 큰 두 사내는 주인 여자가 가리키는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아현과 제강, 예였다.


“이야, 처자 진짜 재주 좋네? 묵은 남자 친구도 잘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새 거는 양코배기네?”


“아니에요. 우리 오빠 어릴 적 친구에요.”


주인 여자는 물통과 컵이 담긴 쟁반을 가운데가 뻥 뚫린 둥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제강은 주인 여자의 농담이 익숙한지 실실 웃으며 묵묵히 컵에 물을 따랐다.


“그래? 가까이서 보니까 이 양코배기 진짜 잘 생겼네? 한국말 할 줄 알아?”


“저 양코배기 아니에요. 고향이 보성 벌교에요.”


“아이고, 깜짝이야. 이 썩을 놈아. 그러면 그렇다고 미리 얘기해야지. 너 땜시 애 떨어질 뻔 했다.”


주인 여자는 예의 한국말에 진짜 놀란 눈치였다. 뭔가 말을 더 이으려던 그녀는 다른 상에서 부르는 소리에 짧고 걸쭉한 욕을 한 마디 털어놓고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제강은 주인 여자의 뒷모습과 예를 번갈아 쳐다보며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너 이젠 제법 이런 농담도 잘 한다.”


“나이가 몇 살인데 그럼 아직까지 철부지처럼 굴까?”


“왜요? 예 오빠 예전엔 어땠는데요?”


아현은 상에 팔을 괴고 몸을 앞으로 당기며 물었다.


“이 새끼. 진짜 까칠한 놈이었어. 식당이 조금만 더러워도 안 들어가고, 모르는 사람이 지금처럼 농담하면 정색하고, 화내고. 진짜 가관이었어.”


“정말? 전혀 안 그렇게 보이는데.”


아현은 제강의 말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내 말이 그 말이야. 생긴 것 봐. 바른생활 할 것처럼 생겼잖아? 지금은 사람 됐지만 몇 년 전만 해도······.”


“철없을 때 얘기하기냐? 나도 썰 좀 풀까?”


제강의 험담을 잠자코 듣고만 있던 예의 한 마디에 제강은 입을 다물지 않을 수 없었다. 꼬투리 하나 잡은 것에 신이 나 열심히 떠들던 것이 후회로 돌아왔다. 서로 험담을 할 경우 잃을 것이 많은 건 제강이었다.


“에이, 친구야! 사랑하는 친구야! 우리 그러지 말자!”


예는 과장된 표현과 목소리로 어떻게든 무마하려는 제강에게서 시선을 아현에게 돌렸다. 아현은 그 모습이 재밌는지 얼굴에 떠나지 않을 것 같은 미소를 지으며 예와 눈이 마주칠 때 한쪽 눈을 찡긋 감았다. 이런 모습을 더 보고 싶다는 의미였다.


“왜? 오빠도 옛날에 뭐 있었어?”


“아니. 없어. 절대 없어. 무조건 없어.”


“그렇게 나오니까 더 의심 되네? 설마 여자 문제야?”


아현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제강을 노려봤다.


“우와, 얘 미쳤나봐. 무슨 그런 숨넘어갈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냐? 고기는 왜 안 나오는 거야? 돼지를 잡으러 가셨나······. 이모! 이모!”


제강은 벌떡 일어나 주인 여자를 부르며 주방 쪽으로 걸어갔다. 아현은 그 사소한 모습이 뭐 그리 재밌는지 얼굴 가득 익살스런 표정을 지으며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예는 생각했었다.

어둠 속에 사는 이들에겐 절대 텔레비전이나 영화 속에 나오는 것처럼 평범한 일상은 허락되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서 절대 일어날 수 없을 것 같던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었다. 불가능이 현실이 되는 기적.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제 더 이상 어둠과 사랑의 관계 같은 건 떠오르지 않았다. 떠올릴 필요가 없었다.


“근데 오빠 진짜 고향이 보성 벌교에요?”


고개를 살짝 숙이고 산타할아버지에게 선물을 바라는 것 같은 맑고 순수한 눈망울로 올려다보며 말을 걸어오는 이 여인이 고마웠다. 꿈과 상상 속에만 존재할 것 같던 세계를 가장 소중한 형제에게 알게 해줬다는 것이, 형제의 꾸밈없는 웃음을 보게 해준 것이, 불가능이 현실이 되는 기적의 세계에 자신이 함께할 수 있게 해준 것이 고마웠다.


“아냐. 벌교는 한 번도 못 가봤어.”


“아, 어쩐지. 왠지 오빠랑 벌교는 안 어울리는 것 같아요.”


혼혈이지만 황인보다 백인에 가까운 외모와 구수한 전남의 이미지는 어쩐지 연결이 잘 되지 않았다.


“술 나왔습니다. 식전주食前酒부터 시작 합시다.”


자리를 비웠던 제강이 둥근 양철 쟁반에 소주와 잔, 김치 한 접시를 가지고 돌아왔다. 예는 두 사람이 얼마나 이곳에 자주 왔으면 주문도 하지 않고 알아서 술과 찬거리를 가지고 올까 생각하며 제강을 도와 쟁반에 올려있는 것들을 상 위로 옮겼다.


따닥!


누구에게 뺏길 새라 아현이 먼저 소주병을 낚아채 잽싸게 뚜껑을 땄다. 시원한 소리를 내며 열린 뚜껑을 상 한쪽에 밀어두고 먼저 예 앞으로 내밀었다.


“먼저 한 잔 드릴게요.”


아현이 내민 소주병은 예의 잔을 채우고 제강의 잔을 채운 후 제강의 손으로 옮겨갔다.


“오늘은 제발 좀 적당히 마시자. 알았지?”


제강은 이미 아현이 잔을 들고 앞으로 내밀었지만 바로 따르지 않고 다짐을 받으려는 듯 힘을 주며 말했다. 하지만 아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입술만 비죽 내밀었다.


“야, 첫잔부터 뭘 또 그러냐. 줘봐. 내가 따라줄게.”


예는 제강의 손에서 소주병을 빼앗아 아현의 잔을 채웠다. 아현은 잔이 조금씩 차는 모습을 보며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난 모르겠다. 오늘은 네가 죽어봐라. 악!”


단념한 듯 손사래 치던 제강이 갑자기 소리를 빽 질렀다. 소리 지름과 동시에 왼쪽 정강이를 쓰다듬는 걸로 보아 아현의 발길질을 예상할 수 있었다.


“제강 오빠 하는 말은 신경 쓰지 마세요. 그냥 제가 술 많이 마시는 걸 별로 안 좋아해서 그래요. 그러는 의미에서 짠!”


여전히 아픈 다리를 문지르는 제강은 신경 쓰지 않고 예에게 잔을 내밀었다. 예는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일단은 아현의 장단에 맞춰야겠다고 생각했다. 아현은 잔을 단숨에 비우고 바로 잔을 채우려 병을 들었다. 빈속이었기에 반만 마시려던 예는 하는 수 없이 전부 입에 털고 잔을 받았다.


“술 잘 하나봐?”


입 안에 감도는 소주의 쓴 맛에 미간을 찌푸리며 소주병을 받아 아현의 잔을 채웠다.


“좋아해요. 오빠도 좋아하시죠?”


“나야 뭐······.”


어쩐지 잘못된 선택을 한 것 같다는 불길한 기운이 감돌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그럼 오늘 밤새 달리는 거예요!”


예가 시선을 돌렸지만 제강은 아예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예는 정신을 차리려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직 몸을 못 가눌 정도로 취하진 않았지만 아현의 뒤쪽 벽에 걸린 달력의 숫자가 언제부턴가 정확히 보이지 않고 제멋대로 춤을 추고 있었다. 시선을 돌려 시계를 보니 식당에 들어온 지 아직 두 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상 위에는 소주병뚜껑이 열 개도 넘게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것을 포함하면 적어도 서너 병은 더 될 것 같았다.


“오빠 괜찮죠?”


아현의 목소리는 처음하고 똑같았다. 제강은 거의 마시지 않았으니 둘이 마셨다는 얘긴데 아현의 상태는 멀쩡해도 너무 멀쩡했다.


“아니. 점점 힘들어지는 것 같아.”


“에이, 그러면 안 되죠. 아까 나랑 같이 밤 새기로 했잖아요.”


아현의 실망한 듯한 표정도 마구 흔들려 정확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헷갈렸다. 아무래도 이제 더 이상은 마시지 못할 것 같았다. 열서너 병을 둘이 나눠 마셨다면 최소한 각자 여섯 병 이상을 마셨다는 얘긴데 평소 예의 주량은 소주 서너 병을 넘기지 못했다. 지금 눈을 뜨고 있는 것도 기적이었다.


“무슨 약이라도 먹었어? 어째서 그렇게 멀쩡할 수 있어?”


혀가 꼬이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귀에 이명(耳鳴)이 찾아와 제대로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어떻게든 이 힘든 상황을 버텨볼 요량으로 도움을 청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지만 제강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원래 체질인가 봐요. 저 누구랑 술 마시면서 한 번도 정신없을 정도로 취해본 적이 없어요. 그리고 제강 오빠는 잠깐 볼일 있다고 어디 좀 다녀온대요.”


예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드는 걸 느꼈다. 제강이 있다는 안도감에 어느 정도 정신을 놓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오늘 처음 보는 아현과 마주하고 있는 이상 긴장을 풀면 안 될 것 같았다. 치사량(?)에 가까운 소주를 마셨음에도 긴장을 도로 갖추는 순간 얼마큼 정신이 돌아오는 것이 신기했다.


“이 새끼는 어딜 가면 간다고 말을 하고 가지.”


“어? 아까 우리 오빠가 얘기하고 갔는데······.”


예의 기억엔 그런 일이 전혀 없었다. 아마 조금씩 기억이 끊겼던 것 같았다.


“아하하. 오빠 취하셨구나. 얼굴 표정 하나 안 변하셔서 몰랐어요. 우리 오빠도 그러던데. 진짜 닮았네요.”


아현의 웃음이 비웃음이 아니란 걸 알지만 창피함이 피어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예는 화제를 돌리기 위해 얼른 말을 받았다.


“제강과 내 어떤 점이 닮았다는 거야?”


“두 분이 서로 더 잘 알지 않아요? 남들 앞에서 절대 흐트러진 모습 보이지 않으려고 항상 긴장하고, 불필요한 감정표현 잘 안 하고, 누구한테 책잡힐 행동 안 하는 것도 똑같아요. 아, 그리고 말투도 비슷해요. 사용하는 단어나 억양이 비슷한데 오늘 우리 오빠가 욕하는 것도 처음 들었어요. 친한 친구한테 하는 표현이니 욕이라고 하긴 조금 그렇지만, 둘 다 서로에게만 그런 표현 쓰는 것 같더라고요.”


길지 않은 설명 속에서 제강의 모습보다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귀가 따갑도록 들었던 행동 규칙이었다. 아버지 역시 철저하게 그 모습을 지켰고, 언제부턴가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그런 사람이 되어 있었다.


“대단하다. 그런 걸 어떻게 다 알아봤어?”


“제강 오빠는 제 애인이니까 알 수 있었고, 예 오빠는 오늘 보는데 꼭 제강 오빠 도플갱어 같았어요. 얼굴은 다른데 행동이나 말투가 너무 똑같아서 그렇게 생각했죠.”


“같이 자랐으니 비슷할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 정도일 줄은 몰랐네. 그건 그렇고 두 사람 어떻게 만난 거야?”


그럴 일은 없겠지만 아현이 만에 하나라도 어떤 의심을 품을까 하는 노파심에 다시 말을 돌렸다.


“우리 오빠가 얘기 안 해줬어요?”


“응. 그 녀석 그런 자세한 얘기하는 섬세한 놈은 아니야.”


‘너에겐 충분히 섬세하고 자상한 녀석이라는 것도 알아.’ 라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아현이 더 잘 알고 있을 것 같았다.


말을 돌리기 위한 선택이었지만 실제로 두 사람의 만남이 무척 궁금했다. 도대체 얼마나 사귀었으며, 어떤 계기로 서로에게 호감을 느꼈는지 궁금했다.


“그리 오래 되진 않았어요. 육 개월 전에 스페인에서 만났거든요.”


육 개월 전 스페인이라는 말에 예는 속으로 뜨끔했지만 아무런 표현도 하지 않았다. 육 개월 전이면 제강이 스페인 레온에서 미심쩍은 의뢰를 처리했던 시기와 비슷했다. 아현은 그때를 회상하며 스페인에서 만난 일을 시작으로 두 사람이 다시 만난 이야기를 펼쳐놓기 시작했다.


작가의말

제방에 발코니가 있습니다.

책상 바로 옆이고, 발코니 쪽은 정확히 서쪽입니다.

컴퓨터 앞에 앉아있으면 눈이 너무 부십니다..

그래도 노을이 예쁜 날이 많아 참고 견딥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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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잘 생긴 남자가 살아가는 법 18.01.24 102 0 11쪽
» 감시자 - 뒷골목 삼겹살 집 18.01.23 70 0 19쪽
5 "아현" 18.01.21 113 0 10쪽
4 "예" 18.01.14 75 0 9쪽
3 Santiago de Compostela 18.01.12 70 0 29쪽
2 제작 발표회 18.01.09 95 0 17쪽
1 레온(Leon) 18.01.08 113 1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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