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코의 성
트리스탄을 코를 골며 자기 시작했다.
"저 녀석 넉살 하나만큼은 인정해 줘야겠네."
앨빈은 아무 일 없이 잘 자는 트리스탄을 보고 헛웃음을 흘렸다.
"여긴 있을 곳이 못 되니 이동을 해야겠어."
테드버드는 주변을 둘러보고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테츠는 어디로 간 겁니까?"
알프레드의 말에 앨빈이 어깨를 으쓱했다.
"오크 사냥하러 뛰쳐나갔어.
루안은 활을 당겼다 놨다 하면서 힘을 가늠했다. 아까 오크를 잡을 때는 활시위가 쉽게 당겨지더니 지금은 또 힘이 들어갔다.
몸이 이렇게 개운하기는 첨이었다. 날아갈 듯한 느낌이었다. 이론상 내공을 일으키는 방법을 알고 있지만, 막상 해 보려니 잘되지 않았다.
"루안, 너의 기분은 알겠지만 일단 이동하자."
"아, 네,"
루안은 화들짝 놀랐다. 그는 잠들어 있는 트리스탄을 안아다 마차 위에 올려놓았다.
"테츠가 돌아오면 바로 출발하자고. 몸에서 피 냄새가 진동하고 있어."
***
수풀 속을 달리다 오크 무리가 있으면 달려들어 흡성대법으로 진기를 취했다.
"덩치 차이가 있는가? 오우거에 비하면 진기가 영 별로네. 어찌 수십 마리를 취해도 오우거 한 마리만도 못하니. 쩝."
테츠는 나무 위로 신형을 띄우고 조용히 주변을 살폈다. 벌써 오크 수십 마리의 진기를 뽑아냈다. 루안의 임독양맥을 타동시키고 탈퇴환골도 시켰고 거기다 일갑자의 내공을 넣어 주었다. 오크의 진기를 취해 보충할 생각이었다.
"오우거는 없나? 오크만 떼거리로? 응? 뭐지 저놈은?"
테츠는 수풀 속에 웅크리고 있는 사내를 찾아냈다.
사내는 숨을 죽이고 가만히 웅크리고 있었는데 그의 손에 뭔가 들려있었다.
테츠는 호기심에 사내가 숨어 있는 근처 나무 위로 날아내렸다.
손에든 것은 일종의 향로 같은 건데 새하얀 연기를 뿜어 올리고 있었다.
'저놈 봐라. 이 야밤에 향로 같은 걸 들고 숲속에 숨어 있다고? 어라? 또 다른 놈이다.'
그와 멀지 않은 곳에 또 다른 인물이 있는 것을 테츠가 알아챘다.
'이놈들 고도로 훈련받은 놈들이다. 기척을 지우는데 상당한 실력을 갖춘 놈들이다. 내가 집중하지 않았다면 발견하지 못했을 수도 있었어.'
테츠가 가만히 보니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이는 길을 유도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놈들이 오크를 몰아 왔구나. 저 향로 같은 것이 오크를 자극하는 거겠지? 이놈들 봐라. 우리가 여기 왔는걸 알고 대비하고 있었구나.'
테츠는 이놈들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복장으로 보니 기사는 아닌 것 같고 모험가도 아닌 것이 용병 같기도 했다.
테츠는 나무 위에서 떨어져 내리며 사내의 혈도에 지풍을 날렸다.
점혈 당한 사내는 꼼작도 하지 못하고 굳어 버렸다.
테츠는 다음 상대로 접근했다. 역시 혈도를 찍어 점혈했다. 그리고 또 다른 인물을 찾아낼 수 있었다. 이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긴 행렬을 이루고 있었다. 테츠는 차례차례로 그들을 제압해 가면서 앞으로 나갔다.
그리고 일곱 번째의 사내를 제압했을 때 한 무리의 인간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모두 여섯 명인 사내들은 달빛 아래 빈 공터에 모여 있었다.
테츠는 그들에게 들키지 않게 조심스럽게 이동하면서 근처 나무 위로 올라갔다.
내공을 올리고 청각을 확장하니 놈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이 정도면 놈들이 무너졌지 않을까?"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강하다고는 하나 야밤에 수백의 오크 무리는 감당할 수 없을 겁니다."
"날이 밝으면 확인할 생각입니까?"
"그래야겠지. 지금 움직이면 우리도 오크 때문에 곤란해 질 수 있어. 오크가 흩어질 때까지 기다려야지. 그런데 이 친구들이 조금 늦는군. 슬슬 철수 할 때가 넘은 것 같은데?"
"천천히 올 겁니다. 그동안 먼저 가서 보고를 드리고 올까요?"
"아니 아직 일러 날이 밝고 놈들의 상태를 확인하고 나서다. 혹시 도망간 녀석이 있을지도 모르니 여덟 명의 시신을 모두 확인해야지."
"날이 밝지 않아도 될 겁니다. 지금쯤 모두 오크에 당했을 겁니다."
"장담할 순 없어. 검은 후작들도 물리친 놈들이니 확인은 해 봐야지."
"검은 후작 말입니까? 설마?"
"그 설마다. 놈들은 며칠 전 검은 후작들을 제압했다. 그리고 저기 마테니의 카르마의 형제들을 몰살시켰어."
"정말입니까? 일개 모험가들이 그런 능력을 지녔다니 믿을 수 없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어떤 암수나 특별한 무기가 있었을 거야. 그렇지 않고서는 검은 후작들을 잡아 낼 리 없었겠지."
그 소리에 한쪽에 떨어져 있던 인물이 고개를 휙 돌리며 싸늘한 음성으로 말했다.
"머저리들 제롬이 그딴 헛생각을 했기 때문에 검은 후작이 당한 거야. 놈들은 개개인이 최상급 소드 익스퍼트의 실력을 갖췄어. 특히 한 인물은 검은 후작의 단장인 제롬을 가지고 놀 정도였다. 내가 그때 눈치를 보고 피하지 않았다면 이 자리에 서 있지도 못했을 거야."
말한 인물은 바로 마테니였다. 검은 후작의 길잡이로 섰다가 테츠가 제롬을 제압할 때 눈치를 보고 도망쳤다.
그는 테드버드 일행에게 자신의 형제들을 모두 잃고 복수심에 불타고 있었다.
테츠는 여섯 명의 인물 중 대장 격인 인물과 마테니를 파악했다.
"흥, 마테니 그건 너희의 실력이 딱 그 정도라는 이야기다. 우리는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그들을 제압했다."
"누가 누굴 제압했다고?"
"누구냐?"
밤하늘을 크게 울리며 들려온 소리에 여섯 명은 검을 뽑아 들고 소리가 나는 쪽을 쳐다봤다.
"가만히 듣고 있자니 한심해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놈은 혼자다. 제압해."
여섯 명이 검을 뽑아 들고 덤벼들었다.
테츠는 이들의 검이 일반 기사의 검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검술이 아닌 상대의 약점만 노리고 일격을 가하기 위해 들어오는 사악한 어찌 보면 매우 단순한 검의 궤적이었다.
자신의 안위를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공격에 모든 것을 거는 일격필살의 검이었다.
하지만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테츠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테츠가 팔을 한번 휘저으니 달려들던 여섯 명은 모두 퉁겨져 날아갔다.
"누가 너희를 시켜 오크를 풀었지?"
"죽여라."
"이놈들은 힘의 차이를 느끼지 못하나?"
테츠는 파천수라장을 날려 맨 앞의 인물을 쳐서 쓰러뜨렸다.
"이곳에는 테드버드가 없어. 내가 잔인하다고 탓하지 말고 네놈들의 우둔함을 탓해라."
다시 파천수라장이 뿜어지자 두 명이 흙바닥에 얼굴을 처박았다.
"뭐냐?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냐?"
이 무리의 대장 격으로 보이는 인물은 몇 발짝 뒷걸음질 치며 쓰러진 동료를 바라봤다.
남은 것은 자신과 한 명뿐이었다.
"아니, 마테니 이놈은 어디로 갔어?"
그가 고개를 휘둘러 봤을 때 마테니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사실 마테니는 테츠를 보자마자 근처 수풀로 몸을 던졌고 이미 줄행랑을 친 상태였다.
"아, 한 놈은 꽁지가 빠지라 도망쳤어. 사실 일부로 놓아 준거다. 놈이 어디로 도망치겠냐? 자신의 상급자가 있는 곳으로 도망치겠지? 우린 그놈을 추적하면 되는 거다. 자. 덤빌래? 말래? 아니면 네 놈의 정체를 밝히던가?"
그는 옆에 서 있는 동료를 바라봤다.
"공격해!"
그가 검을 다시 잡고 뛰려 할 때 옆 동료는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꼬꾸라졌다.
그의 몸이 급제동이 걸린 것처럼 경직됐다.
"제발 좀 주제를 알아라. 상대가 강하면 얼마나 강한지 후딱 파악해서 빨리 무릎 꿇고 빌어야지. 저놈들처럼 자살할 테냐?"
사내는 멍했다. 자신들이 누구인가? 마치 장난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느낌에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빨리 결정해. 살래? 죽을래?"
테츠가 장난삼아 말라는 것은 놈에게 공포감을 심어 주기 위해서다. 그래야 고문을 하지 않더라도 알고 있는 사실을 아낌없이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녀석에게는 꿈 같은 현실이겠지만, 물론 꿈은 지독한 악몽이다.
"미친 이럴 수는 없다."
사내는 검을 세우고 달려들었다. 테츠는 놈을 완벽하게 제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천마비행으로 날아올라 놈의 주변으로 연속해서 파천수라장을 뿌렸다.
사내가 쥐고 있던 검은 파천수라장을 맞고 뒤로 튕겨 나갔고 바닥에는 손바닥 자국이 생겨나며 흙먼지가 뿌옇게 흩날렸다.
테츠는 그대로 날아내리며 사내의 혈도를 점혈시키고 완맥을 움켜잡았다.
"우아아악"
세상 살면서 이런 고통은 첨이었다. 배 속의 장기가 모조리 끊어지는 듯한 고통이 올라왔다.
"험, 험, 자 묻는 말에 대답해. 너흰 누구냐?"
"저희는 테오그의 까마귀입니다."
"테오그의 까마귀? 네놈들이 오크 무리를 조정했냐?"
"그렇습니다. 오크를 보낸 것은 우리였습니다."
"누구의 명령이었지?"
"카신, 카신이 명령을 내렸습니다."
"카신?"
"제 상관이자 테오그 까마귀의 부관입니다."
"그는 어디에 있지?"
"드라코 성입니다."
"성은 어디에 있어?"
"이 숲을 통과해 동쪽으로 한나절 정도 가면 나옵니다."
"아까 한 놈이 도망간 방향이지?"
"네 그렇습니다. 그러니 제발"
"사실 미안한 점이 있어."
"무엇입니까?"
"우리가 마교인데 마교를 건드리는 놈은 절대 살려 주지 않는다는 것이 내 신조거든."
"아는 걸 다 말해 줬는데 왜! 으악!"
"미안, 마교는 건드리지 말았어야지. 테드버드가 없어서 다행이구나."
일장에 녀석을 쳐 죽인 테츠는 시체를 들어 숲속으로 던져 버렸다.
잠시 고민에 빠졌다. 마테니를 미행할 것인지 아니면 테드버드 일행을 기다릴 것인지 말이다. 테츠가 고민하고 있을 때 숲속 멀리서 움직이는 소리를 들었다.
"후후, 고민할 필요도 없는걸! 알아서 찾아오는구나."
테츠는 공터 바닥에 글씨를 써 놓고 신형을 날렸다.
그가 사라지고 한참 뒤 빈 공터에 마차 한 대가 모습을 보였다. 그들은 테드버드 일행이었다.
앨빈은 공터에서 싸움의 흔적인 핏자국을 발견했다.
"여기서 테츠가 싸운 것 같은데? 가만 저기 뭔가 쓰여 있어."
앨빈은 테츠가 바닥에 남겨 놓은 글을 발견했다. 오늘은 유난히도 보름달이 밝은 밤이었다.
"테드버드 테츠가 드라코의 성으로 적을 추적한다고 적어 놓았어. 표식을 남길 테니까 쫓아 오라는군."
마차 안의 테드버드는 매우 곤란했다. 테츠에게 점혈을 당해 꼼짝하지 못하는 다섯 명의 사내에 관해서다. 테드버드는 테츠가 던져 놓은 사내 일곱을 발견했다. 아마도 자신이 움직이는 위치를 표시하려는 것 같았다. 두 명은 지나가는 오크에게 걸려 살해당해 있었다.
테드버드는 점혈을 풀기 위해 이리저리 노력하다 고개를 흔들었다.
"나중에 이 기술을 따로 가르쳐 달라 해야겠다. 이건 정말 어찌할 수가 없어."
"아니 그렇지 않아도 좁아터진 마차에 이들을 꼭 실어야겠어?"
실버팽이 강력하게 반발하자 테드버드도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들을 이곳에 던져 놓으면 분명 오크에게 살해당하거나 굶어 죽을 거야. 테츠에게 풀어 달라 해야지."
앨빈은 고삐를 힘주어 휘둘렀다.
"드라코의 성으로 출발한다."
***
테츠는 경공으로 쉽게 마테니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마테니는 테츠가 자신을 따라온다고는 꿈에도 모른 채 숲속을 벗어났다.
숲을 벗어나니 제법 넓은 평야가 나타났고 입구 쪽에는 수십 마리의 말이 있었다.
아마 이들이 숲에 들어가기 전에 묶어 놓았던 모양이다.
마테니는 말 한 마리를 잡아타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날이 밝고 해가 중천에 떠올랐을 때도 마테니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길은 험해지고 말이 지쳐 갈 때쯤 잠시 숨을 돌린 마테니는 말이 다시 활기를 찾자 박차를 가했다.
황혼이 하늘 한편을 물들일 무렵 그의 눈에 외딴 언덕 위 우뚝 선 회색빛 고성이 눈에 들어왔다. 회색빛이 감도는 석벽으로 단단히 쌓아 올린 성은 엄청난 두께의 화강암을 쌓아 만든 성이었다. 성벽의 두께가 성인 두 명이 나란히 서 팔을 벌릴 만큼 두터웠다.
인간이 만들었다고 하기에는 놀라울 만큼 웅장한 건축물이었다. 말이 입에 거품을 물고 투레질을 했다.
성 앞에 당도한 마테니는 크게 고함을 쳤다.
"성문을 열어라. 긴급히 보고할 정보가 있어."
성문 위쪽에서 경비를 서던 사내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누구냐? 너는 테오그의 까마귀가 아닌 것 같은데?"
"난 카르마의 형제들 마테니다. 어서 문을 열어."
성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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