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4)
평소라면 소년은 하녀를 불러 옷을 갈아입었을 것이다.하지만 오늘 소년은 할 일이 있었다.
소년은 소리가 나지 않게 발뒤꿈치를 들고 발 끝으로만 걸어 옷장으로 갔다.그리고 옷장을 뒤적여 입을만할 옷을 찾아내려 했다.그러나 옷장에는 입을만할 옷이 하나도 없었다.물론 옷장의 옷들은 다 훌륭했다.왕국의 최고의 장인들이 만들 것들이니 훌륭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문제는 지금 소년이 찾는 옷은 그런 옷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소년은 수수한 옷을 찾고자 했다.평민들이나 입을법한 눈에 안 띄고,평범하고,좀 심하게 말하면 초라하기까지 한 옷.
하지만 소년의 옷장에 그런 옷이 있을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하녀를 불러서 평범한 옷을 갖다 달라고 했다간 단번에 자신의 계획이 들통날 것이 틀림없었다.
결국 소년은 옷장에 있던 옷 중 그나마 나은 옷을 골라 입었다.소년은 방 한 구석에 있는 전신 거울에 몸을 비춰봤다.
자색 와이셔츠의 깃과 소매에는 금실로 복잡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바지의 양 주머니에는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었다.
아무리 좋게 봐줘도 귀족 이하로는 봐주지 못 할 것이다.
소년은 고개를 휘휘 내저으며 침대 바로 옆에 있던 검을 들었다.한 눈에 봐도 좋은 검임을 알 수 있었다.
하얀 검집은 각양 각종의 보석들로 꾸며져 있었고 손잡이 부분에는 푸른 장미가 새겨져 있었다.
소년은 검집에서 검을 뽑아서 한 번 휘둘러봤다.날씬한 검신이 허공에 선을 그었다.
검신에는 소유자의 이름이 써져 있었다.
'제이드 폰 베네스 2세'
제이드는 만족스럽게 검을 다시 검집에 집어넣고 왼쪽 허리에 찼다.
그리고 그는 침대 밑으로 기어들어가 숨었다.침대 밑은 매일 청소해서 그런지 먼지 없이 깨끗했다.그래도 침대 밑에 있다는 게 그리 기분 좋지는 않았다.
하지만 제이드는 꾹 참고 숨을 한 번 힘껏 들이키고 소리를 질렀다.
"으.아.악,네.놈.은.누.구.냐?감.히.이.나.라.의.왕.인.나.의.방.에...으.윽!"
국어책 읽듯이 어설픈 연기였지만 밖에 있던 경비병들은 속았는지 급하게 방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그들은 방 안을 이리저리 둘러봤지만 왕과 그를 공격한 듯한 자객은 보이지 않았다.
경비병들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아마 왕은 자객에게 납치된 것 같았다.이 사실을 알려지면 그들은 죽은 목숨이다.
둘은 눈빛을 교환했다.그들은 뜻이 통했음을 알았다.
먼저 한 명이 입을 열었다.
"그,그래.우리가 들었던 건 환청이야.그치?폐하를 납치할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
다른 한 명이 말을 받았다.
"맞아.그런 환청을 듣다니.하하하.집에 가서 잠 좀 자야겠어."
그렇게 그들은 서로에게 주입시키고 방을 나가려 했다.
한 편,침대 밑에 숨어있던 제이드는 당황하고 있었다.
원래 그의 계획은 자신이 납치된 줄 아는 경비병들이 데론을 부르러 간 사이 복도 끝에 있는 창문을 통해 밖을 빠져나가는 것이었다.하지만 예상 외로 경비병들은 그의 납치를 숨기려 하고 있었다.
제이드는 왕궁을 빠져나가기 위해서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잔머리 하나는 최고인 그는 계획을 다시 세우고 침대 밑을 빠져나왔다.
침대 밑에서 누군가가 불쑥 튀어나오자 경비병들은 놀라 그 사람을 창으로 찌를 뻔 했다.하지만 그 사람이 자신들의 왕이라는 사실을 알자 황급히 창을 거둬들이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 둘을 번갈아 바라보던 제이드는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너희들이 무슨 짓을 하려 했는지 아느냐?"
경비병들은 더더욱 머리를 조아렸다.왕이 납치당했던 것을 숨기려 하다니,자신들은 분명 사형을 당할 것이다.
"너희들이 짐이 납치당하면 어찌 할까 궁금하여 한 번 해봤더니 아주 가관이더구나.하!환청이라니.너희 앞에 서 있는 짐 역시 환시로 보이느냐?"
뭐라 대답할 말이 없었다.
"너희들은 죄는 사형받아 마땅한 것이다.허나,짐은 아까운 생명들을 죽이고 싶지 않다.다시는 그런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을 맹세하겠느냐?"
경비병들은 왕의 앞이라는 사실도 잊고 머리를 번쩍 들었다가 다시 숙였다.그들의 눈은 희망으로 빛나고 있었다.
"무,물론입니다,폐하.맹세합니다."
"저 역시 맹세합니다."
제이드는 소리 내지 않고 웃었다.모든 일이 생각대로 되어가고 있었다.
"좋다.그럼 짐은 잠시 백성들의 생활을 둘러보고 올 것이니 그대들은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소,소신들도 같이.."
"내 몸 하나는 나 혼자서도 지킬 수 있다.그대들은 방 문이나 지키고 있어라."
제이드의 말을 들은 경비병들은 입을 모아 합창했다.
"예,폐하."
"그대들은 짐이 나가면 고개를 들고 방을 나가라."
"예,폐하."
잠시 후,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났다.
경비병들은 머리를 들고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푸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폐하도 이제 철이 드셨나 봐.어제까지만 해도 장난만 치며 백성들은 안중에도 없으셨는데 말야."
"그러게.우리도 용서해주시고,순시도 나가시고.분명 성인이 되시면 성군이 되실 거야."
어느새 왕에게 콩깍지가 씌여져 버린 경비병들이었다.
방을 나간 제이드는 복도 끝에 있는 창문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갔다.
자신의 방에 있는 창문은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개방 정원 쪽으로 나 있지만,복도 끝의 창문은 사람들이 거의 없는 쓰레기장 쪽으로 나 있다.
그 곳에는 쓰레기들이 가득하니 떨어질 때 쿠션 역할을 해줄수도 있었고,몇몇 사람만 아는 비밀 통로 역시 그 곳에 있어서 몰래 왕궁을 빠져나가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어느새 창문에 도착한 제이드는 몸을 밖으로 내밀어 사람들의 유무를 확인했다.아무도 없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창문 밖으로 몸을 던졌다.
제이드는 이 계획을 며칠동안 짰다.그리고 계획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창문 밖으로 떨어지기'를 생각할 때는 공중에서 몇 바퀴 구르면서 떨어지는 멋진 모습을 상상했었다.
하지만 역시 현실은 가혹했다.
"끄아아아아아아!"
제이드는 계획에는 없던 비명을 지르며 수직으로 낙하했다.
쓰레기들과 부딪치기 직전에야 낙법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렸지만 그럴 새도 없이 그는 우당탕탕 굴렀다.
"끄응..."
제이드는 신음 소리를 내며 일어섰다.
멋진 옷들은 여기저기가 찢어져 있었고 퀴퀴한 냄새가 났다.무엇보다 발목을 살짝 삔 것 같았다.
"괜찮아,괜찮아.옷은 수선하면 되고,발목은 나중에 치료사한테 치료해달라고 하면 돼."
자신을 위로하며 제이드는 한 쪽 발을 절며 걸어갔다.절뚝거리며 왕궁을 둘러싸고 있는 높은 벽에 도착한 그는 무릎을 꿇고 아랫 부분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대충 여기 쯤이었을 텐데..아!찾았다!"
제이드의 얼굴이 환해졌다.그의 손가락은 어떤 벽돌을 꾸욱 눌렀다.그러자 거짓말처럼 그 벽돌이 사라졌다.그는 연달아 주위의 벽돌을 눌러댔다.그 벽돌들 역시 사라져 제이드 앞에는 아치 형태의 구멍이 생겼다.제이드는 그 구멍을 엉금엉금 기어갔다.구멍은 보기보다 길었다.
한참을 기어가던 제이드의 눈 앞에 마침내 빛이 보였다.그에 따라 사람들이 시끄럽게 흥정하는 소리,싸우는 소리 역시 들리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그는 들뜨기 시작한 마음을 억지로 누르고 속도를 올려서 기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제이드는 길고 길었던 어둠 속을 빠져 나왔다.
하지만 제이드는 곧 실망해 버렸다.
그는 사람이 바글바글한 시장을 기대했었다.하지만 이 곳에는 마차만 지나다닐 뿐,사람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잠시 잊고 있던 발목도 다시 아파오기 시작했다.제이드는 길바닥에 주저앉아 무릎에 고개를 묻었다.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얼마 뒤,제이드 앞에 화려한 마차 한 대가 멈춰섰다. 그리고 그 마차에서 한 소년이 내렸다.
에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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