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부대혼란北部大混亂
흑제용계黑帝用計
흑제가 계책을 부려
군웅난투群雄亂鬪
난투를 불러오다
요괴들은 겁에 질린 채 눈물을 뿌리며 도망쳤다. 치우는 장담했던 대로 죽은 요괴의 삼혼을 마환도로 가둬버렸다. 귀신 되는 것보다 더 참혹한 일이어서 똥오줌을 갈긴 요괴도 꽤 되었다.
치우는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오작을 그러안고 펑펑 울었다. 사실 이제까지 오작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떠올린 적 없다.
그런데 몸도 성치 않은 오작이 갑자기 사라지자 커다란 공포가 치우를 덮쳤다.
혹시 자신이 불덩이를 제대로 못 막아 오작이 재도 못 남긴 게 아닌지 하는 걱정. 결계 밖으로 튕겨서 즙무혼의 손에 들어가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 결계의 비밀을 풀고 위험한 곳으로 간 게 아닌지 하는 걱정.
난생처음 느낀 공포에 이성을 반쯤 잃은 치우는 법력도 없는 몸으로 인간과 요괴 수십 명을 죽였다. 그리고 결계에 막혀 삼계윤회환으로 못 가고 허둥대는 혼들을 모조리 마환도로 흡수했다.
그런 상황에 갑자기 결계가 찢기고 북망산이 무너지자 치우의 가슴도 무너졌다. 북망산의 크기가 어마어마하여 오작이 밑에 깔렸다면 제때 꺼낼 수 있을지 너무 걱정되었다.
그런 상황에 오작이 모습을 드러내자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열다섯 나이를 보면 당연한 모습인데, 덩치나 지금까지 보여준 성격을 생각하면 의외이기도 했다.
"그만 그쳐. 애처럼 왜 이래."
오작이 시큰거리는 코를 한껏 찡그렸다.
"나 애 맞거든."
공공은 둘이 하는 꼴을 어이없게 바라봤다. 한 놈은 세상 똑똑한 것 같고 한 놈은 세상 두려울 게 없는 듯했는데, 같이 질질 짜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유 모를 열불이 일었다.
"멀쩡하면 즙무혼 잡으러 가자."
공공의 말에 치우가 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오작 역시 심호흡으로 울렁이는 가슴을 진정하고 결계가 있던 곳을 따라 움직였다.
어렵지 않게 즙무혼과 악불산의 흔적을 찾았다. 그런데 채 반나절도 안 되어 둘의 흔적 모두 사라졌다.
"난 이만 빠져야겠다."
공공은 부하한테서 편익조로 답신을 받고 즙무혼을 추격하는 행렬에서 빠지겠다고 말했다. 열심히 흔적을 찾던 오작과 치우는 기운이 쫙 풀렸다.
공공도 흑제의 죽음을 바라기에 즙무혼을 상대하는 일에선 믿음직한 아군이다. 실력도 엄청 강해서 갑자기 빠진다고 하니 상실감이 꽤 컸다.
"즙무혼이 수작을 부렸어. 흑제 자리를 내놓는다고 발표했고, 다음 흑제는 가장 강한 국왕을 추대한다고 했어."
"국가 세우러 가는 겁니까?"
"응. 나보다 약한 자가 흑제 되면 싸움이 끝나지 않을 거야."
"네가 그냥 양보하면 되잖아. 다른 오방신은 누구도 제가 되려고 안 하는데."
치우는 공공이 빠지는 게 싫어서 아무 말이나 마구 주워섬겼다.
"다른 놈들이야 홀몸이니까. 날 바라보는 수백 명 부하랑 그 부하들한테 딸린 식구들 생각도 해야지."
공공도 치우와 오작과 헤어지는 게 꽤 섭섭했다. 그러나 오랜 기간 정을 쌓아 온 부하들을 생각하면 흑제가 되기 전까진 멈출 수 없다.
공공과 아쉬운 작별을 한 오작과 치우는 힘이 탁 풀렸다.
"형. 우리 둘에 악불산까지 합치면 즙무혼 죽일 수 있을까?"
약점을 알기에 더 쉬울 것 같지만, 약점을 안다는 사실을 들켰으니 오히려 어렵다. 알려진 약점은 요해가 아닌 부위보다 더 철저히 보호하기에 공략하기 힘들다.
"난 즙무혼이 어디 갔을지 알 것 같아."
"어딘데?"
"남화교."
오작의 말에 치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맞아. 둘이 같은 편이었지."
"북망산에서 생각해 봐. 적무혈은 밖에 있었고 미무골은 안에 있었어. 내가 결계를 통해 간 곳에 적무혈과 미무골이 다퉜다는 기록도 있었어. 그리고 즙선기와 적표노는 사이가 나빠. 공공이랑 축융도 그래서 사이가 나쁜 거고. 이렇게 보면 즙무혼과 미무골은 같은 편이 분명해."
"그럼 혈지로 가자."
"아니야. 먼저 금계산부터 들러야지."
둘은 곧 방향을 잡고 달렸다. 그러나 법력을 얼마 회복 못 한 치우 때문에 속도가 나지 않았다.
"둔각이 그립네."
오작은 둔각이 위험할까 봐 두고 온 게 후회되었다. 예전 망아지 때처럼 사고라도 칠까 봐 설영한테 맡겼는데 치우의 법력이 고갈되다시피 한 상황에선 너무 아쉬운 결정이었다.
"밥도 먹고 좀 쉬자."
오작과 치우는 가까이 보이는 마을로 가서 음식점을 찾았다. 치우가 열 명이 먹고도 남을 양의 음식을 시키자 주인이 돈 먼저 내라고 했다.
음식값을 치른 치우는 먼저 나온 죽부터 후루룩 삼켜 허기진 배를 달랬다.
시간이 흐르자 삶은 채소와 삶은 고기 그리고 볶은 고기 등이 연이어 나왔다. 구운 닭까지 내온 주인이 힘이 빠져 더는 음식을 못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치우는 남은 음식 재료로 알아서 지지고 볶았다. 어차피 맛보다는 양이기에 소금간도 제대로 안 된 요리를 허겁지겁 입에 쑤셔 넣었다.
그때. 열 명 정도 되는 병사가 마을에 들이닥쳤다.
"열 살부터 서른 살까지 남자 스무 명을 징발한다. 스무 명을 못 채우면 이 마을을 다 태워버리겠다."
대부분 사람은 평생 자기 마을을 안 벗어난다. 다른 마을로 교역을 다니는 자들이 아이들의 영웅으로 여겨지는 세상이다.
병사 숫자가 적다고 몽둥이 들고 반항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대부분 사람은 마을 밖 세상이 생소하여 도망갈 데도 없다.
"형. 그냥 놔둬?"
"우리가 나설 일이 아니야. 어차피 북부 전체가 전쟁터 되는 건 시간 문제야."
"형은 흑제 될 생각 없어? 양부 구하고 나서 즙무혼까지 죽인 다음 돌아와서 가문 재건하고 왕국 세우자. 내가 도울게."
"구려국은 어쩌고?"
마음만 앞섰던 치우는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하지 못했다.
"숙부 찾아내는 것만 해도 우리한텐 버거운 일이야. 그러니 그 뒤에 일은 일단 생각지 말자. 숙부 찾는 데만 집중하고, 일 끝나면 다음 걸 고민하자."
치우와 오작은 은신술을 펼쳐 마을을 떠났다. 어차피 북부 전체가 환란을 겪을 것이기에 사람 한둘을 구하는 건 의미 없다. 게다가 그 작은 호의가 커다란 악의로 도움 받은 자들한테 돌아갈 수도 있기에 둘 다 불편한 마음으로 외면했다.
"그 멧돼지만 신나겠네."
"무슨 소리야?"
치우는 인충이라고 불리는 멧돼지 이야기를 오작한테 들려줬다.
"이게 그냥 일이 아니구나."
치우의 얘기를 들은 오작이 이마를 찌푸렸다.
"그게 왜?"
"인충이 왕이 되면 근처 나라들도 강한 요괴한테 빌붙을 수밖에 없어. 네 말을 듣고 보니 인충은 꽤 많은 요괴를 거느린 것 같으니까."
"그게 큰 문제야?"
"요수촌을 생각해. 요수촌은 북부의 땅과 가장 가까워. 요수촌의 요괴들이 국가를 선포하고 흑제 자리를 노리면?"
"그럼 헌원은 흑제랑 같은 편이 되겠네?"
"거기에 강제명이 적제가 된다면?"
치우는 마땅한 답이 떠오르지 않아 손가락으로 옆얼굴을 긁적거기만 했다.
"북부와 중부 그리고 남부가 힘을 합쳐 동부를 공격할 수도 있어."
"우린 공공이 있잖아."
"공공이 흑제가 되어도 마찬가지야. 만약 강제명이 적제가 된다면 공공은 남부랑 중부하고 손잡을 거야."
"그런데 희운이 황제는 아니잖아."
"수십이 넘은 요괴랑 계약한 놈이야. 게다가 유웅국 백성과 군대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중부의 무기랑 갑옷 중 절반을 유웅국에서 만들어. 남부와 북부의 도움을 받으면 황제 자리를 뺏는 건 일도 아니야."
유웅국은 장점과 더불어 약점도 명확한 국가다. 곡물 생산이 부족하여 인구가 면적보다 적다. 꽤 많은 인력을 광석 캐는 데 동원하다 보니 노동력이 부족한데, 경작지가 적어 인구를 못 늘인다.
"형. 일단 이런 거 생각지 말자. 먼저 양부 구한 다음 형세를 보며 결정하자."
암울하기만 한 전망에 치우는 생각을 않기로 했다.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갑갑하여 싫은 것도 있지만, 오작에 대한 믿음이 바탕에 깔렸다.
어떤 상황이 오든 오작이 해결책을 만들어 잘 헤쳐나가리란 믿음이 있었다.
"형. 근데 빙령도에 편익조 안 보내?"
"아까 보냈어. 형세가 안 좋으니 최대한 휘말려 들지 말고 지켜보라고 당부했어."
둘은 적당한 속도로 달리면서 충분한 휴식을 취했다. 몸에 피로가 너무 쌓이면 법력 회복이 느려진다. 게다가 오작 역시 큰 부상에서 빠르게 회복한 바람에 정신적으로 살짝 붕 뜬 느낌이 있었다. 충분한 명상으로 평상심을 찾아야 한다.
충분히 휴식하면서도 부지런히 달려 어느새 북부와 중부의 경계에 도착했다. 오작과 치우는 모닥불을 지펴놓고 사냥감을 구웠다.
"형. 나 태극보인을 다시 만들 수 없을까?"
"쏟은 물을 어떻게 다시 담아."
"법력 회복이 너무 느려 미치겠어."
사실 치우의 법력 회복은 술사 중에서도 최상위에 드는 속도다. 그러나 이제껏 태극보인 덕분에 법력을 쉽게 모으고 쉽게 회복한 탓에 느리게만 느껴졌다.
또 치우의 법력이 차곡차곡 쌓은 게 아니라 귀기를 통해 급속히 성장한 문제가 있다. 고된 수련으로 쌓은 법력이었다면 회복이 더 빠를 수도 있는데, 지금은 다시 수련하는 것과 비슷한 상태다.
아예 처음 시작하는 것보다는 몇 배 빠른 상황이지만, 강한 힘을 보유했던 기억 때문에 치우의 성에 차지 않았다.
"치우야. 뭐든 때가 있는 거야. 우리가 숙부를 구하겠다고 육지를 밟은 지도 꽤 시간이 흘렀지? 우리가 그간 노력 안 한 것도 아니고 고생 안 한 것도 아니야. 그런데 이제야 겨우 기회가 생겼지? 그것도 조공명의 방해가 없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깔렸어. 네 법력도 마찬가지야. 쉽게 얻었고 순식간에 잃었어. 어느 정도까지는 다른 사람보다 진도가 빠르겠지만, 일정 수준에 이르면 커다란 벽이 널 가로막을 거야. 급하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니까 차분한 마음으로 때를 기다려. 넌 천재니까 문제가 생겨도 쉽게 해결할 거니까."
치우가 오작의 말을 감명 깊게 듣던 그때. 가늘고 기다란 침이 치우의 목에 꽂혔다. 동시에 오작이 소매에서 창을 꺼내 부드럽게 휘둘렀다.
침에 찔린 치우는 미동도 못 하고 굳어버렸다.
"무슨 일이지?"
오작은 익숙한 모습의 요괴를 바라보며 말했다. 요수촌에서 음식점을 열던 모기 요괴 중 하나였다.
"흥. 네놈들 때문에 요수촌을 뺏겼어. 법력을 제때 섭취하지 못해 어린 모기가 벌써 몇 명 죽었는지 알아?"
"그게 우리 탓이라고?"
"저놈이 마을의 영지 절반을 부수지 않았다면 많은 요괴가 떠나지 않았을 거야."
치우의 동주철갑은 낮은 등급에도 불구하고 치우와 인연이 깊고 상성이 좋아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다. 더구나 치우가 귀기에 침습 당했을 때 수많은 법보와 법력을 품은 물건을 포식했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을 치우조차 몰랐다. 그래서 제물을 바쳐 법보 등급을 올릴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다.
낮은 등급 탓에 동주철갑은 강한 힘을 품고도 모기 요괴의 침을 막아내지 못했다.
반면, 오작의 직선녀가 만든 것으로 추정하는 팔괘자수선의는 모기의 침이 안 들어갔다. 덕분에 요수촌 잔당들은 둘을 에워싸기만 하고 감히 덤비지 못했다.
경지가 어마어마한 모기 요괴의 침도 안 들어가는 오작을 보고 그때 마을 절반을 박살 낸 치우의 모습이 떠오른 탓이었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뭐지?"
요괴들은 벙어리라도 된 듯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사실 그저 요괴답게 원한이 있는 자를 보고 죽이려던 거였지 딱히 원하는 건 없었다.
"이렇게 하자. 요수촌 위치를 옮겨줄게."
오작의 말에 모기 요괴를 비롯한 요수촌의 떨거지들 귀가 번쩍 띄었다.
"어떻게?"
"대모왕이랑 친분이 있어. 금의 이동 경로를 바꿔 달라고 하는 거 일도 아니야. 대신 조건이 있다."
모기 요괴들을 중심으로 뭉친 떨거지들은 전부 요수촌에 미련이 남은 자들이다. 이들은 황금보다는 요수촌의 존재 자체로 이득을 봤다.
이들한텐 황금보다 요수촌과 비슷한 환경이 이뤄지는 게 더 중요하다.
"북망산이 무너진 건 알겠지?"
"그래."
"거기로 금의가 다니게 바꾸라고 할 거야. 거긴 면적도 훨씬 넓으니 요수촌보다 규모가 더 큰 마을이 생길 거야."
"알았어. 근데 조건이 뭐야?"
모기 요괴는 여섯 개 다리를 싹싹 비비며 다급하게 질문했다. 요수촌 덕분에 법력 공급이 끊이지 않아 자식을 많이 낳았다.
그런데 요수촌이 갑자기 무너지면서 자식들이 하나둘 굶어 죽어 마음이 찢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요수촌이 부활할 수 있다고 하니 구미가 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빙령도랑 연합해. 그리고 공공하고도. 절대 국가를 선포하지 않을 걸 공표하고."
요괴들은 신들린 것처럼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오작은 편익조 세 개를 날렸다. 하나는 대모왕한테 보냈고 남은 둘은 각각 공공과 빙령도에 보냈다.
빙령도는 처음 방문한 고정된 섬의 젊은 관리한테 보냈고, 공공이나 대모왕은 자신을 찾는 편익조를 알아서 부르는 수준이 된다.
시간이 얼마 안 걸려 대모왕과 공공의 답신이 왔다.
"대모왕이 금의의 경로를 바꾼다고 승낙했다. 공공 역시 동의했고. 빙령도도 당연하니 걱정하지 말고 북망산에 가서 자리부터 잡아."
- 작가의말
잊고 얘기 안 했는데, 인충은 돼지의 옛 이름입니다. 양의 수많은 이름 중에 청조가 있듯이 돼지의 호칭 중에 인충이 있습니다.
Comment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