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작우치우烏鵲遇蚩尤
영여웅우英與雄遇
영웅이 영웅을 만나니
명내천정命乃天定
운명은 하늘이 정한 게 틀림없도다
독구의 혈액과 독수를 배불리 마신 홍영창은 얌전히 오작 손으로 돌아왔다. 독구의 부하들은 다리가 풀렸는지 엉금엉금 기어서 도망갔다.
"난 청제의 신하고 방관자니까 괜찮을 거야. 넌 빨리 도망쳐."
독구 부하들이 사라지자 주인이 오작을 다그쳤다. 오작은 이런 상황에도 남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는 주인에게 깊이 감명받았다.
"괜찮습니다. 아무리 강한 자가 와도 이 창이 날 지킬 거고, 제 숙부도 곧 돌아올 겁니다."
오작의 확신에 찬 말투에도 걱정이 가시지 않는지 주인은 큼직한 손으로 머리를 벅벅 긁었다.
"저는 오작이라고 합니다. 주인장은 성함이 어찌 됩니까?"
"응. 성은 공孔이야. 이름은 이제부터 주보로 해야지."
이름은 부모가 지어주기도 하고 주변에서 많이 부르는 호칭으로 대신하기도 한다. 그리고 사는 곳을 이름으로 하는 경우도 있다. 독구毒丘가 바로 지명에서 온 이름이다.
보통은 여러 호칭 중 가장 자랑스러운 것을 고르기에 주보라는 관직을 이름으로 하는 건 당연한 결정이다.
"숙부가 구망 어르신과 친분이 깊다고 했으니 너무 걱정 안 하셔도 괜찮습니다."
"오장국은 경내에 독물이 많은 곳이야. 매일 몇 명씩 불의의 사고로 죽는 곳이어서 성정이 독하기도 하고. 무력은 평범하지만, 온갖 독으로 사람을 괴롭게 죽여서 근방에 악명이 자자한 국가야. 정정당당한 복수가 어렵다면 몰래 독으로 죽이려고 할 거야."
오작이 전혀 떠날 기색을 비치지 않자 주보는 자신이 아는 정보를 풀어 설득하려고 노력했다.
"그럼 당신도 위험한 것 아닙니까?"
"난 청제의 신하야. 뇌공이나 풍백 그리고 운사나 우사처럼 중요한 신하도 아니어서 건드리지 않을 거야. 죽여봤자 청제한테 별 타격도 못 주면서 꼬투리만 잡히니까."
주보가 설득을 멈출 기미를 안 보이자 오작은 타협책을 꺼냈다.
"오장국에서 소식을 받고 오려면 하루는 걸리겠지요?"
"걸어서 이틀 걸리는 거리에 있어. 독구는 아마 근처에 놀러 왔다가 말의 소문을 들었을 거야. 어제 여기서 술 마신 놈 중 하나가 입을 싸게 놀렸겠지."
"그럼 오늘까지 여기 있고, 숙부가 안 돌아오면 다른 대안을 세우겠습니다."
오작은 끝까지 도망간다는 말을 안 했지만, 주보는 오늘까지 기다리고 떠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설득을 멈췄다.
그러나 여전히 일손이 잡히지 않는지 멍하니 서 있기도 하고, 조금만 큰 기척이 들려도 목을 움츠리며 사방을 살피곤 했다.
오작은 주막 마루에 편하게 앉아 동해의 파도를 구경하며 멸천칠절공의 구결을 고민했다.
'숙부는 겨우 흉내만 낸 거였어. 실제 파도는 훨씬 상대하기 어렵구나.'
도단류로는 동해의 파도와 같은 강한 힘을 어찌할 수 없다. 그렇다고 소도류를 익히자니 제멋대로 움직이는 기운이 마음에 걸렸다.
'벽력혼원수가 위력이 강하긴 한데, 기운의 성질이 사나워서 다스리기가 백 배는 어려우니 참으로 안타깝구나.'
벽력혼원수로 생각이 미치며 엉뚱한 발상이 떠올랐다.
'두 무공의 장점만 취할 수 있으면 참 좋을 텐데. 벽력혼원수의 단순함과 위력을 멸천칠절공의 다양한 기술에 접목할 수 있다면.'
생각을 멈춘 오작은 자조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익히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전혀 뿌리가 다른 무공끼리 합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얘기다.
설사 오작이 운 좋게 둘을 합칠 방법을 찾았다고 쳐도 직접 펼치면서 부족한 부분을 찾고 보완해야 하는 문제가 남았다. 오작은 멸천칠절공도 위력이 약하게만 펼칠 수 있고 벽력혼원수는 현재 엄두도 못 낸다.
그러니 기운을 제대로 통제하기 전까지는 머리로 아무리 고민해도 소용없다.
머리를 비우고 망아지와 잠깐 놀아줬다. 그러나 곧 싫증 내고 오행마 곁으로 간 망아지 때문에 오작은 다시 마루에 앉아 무공 생각으로 시간을 흘렸다.
그렇게 주보와 오작은 서로 다른 고민에 휩싸여 하루를 보냈다.
'겨울의 해가 짧아서 빨리 어두워지는 걸까? 아니면 해가 뜨는 동쪽이어서 서쪽보다 먼저 어둠이 찾는 걸까?'
어느새 서쪽 하늘이 붉게 타오르며 밤이 오기 전의 마지막 광명을 세상에 뿌렸다.
하루 장사를 공친 주보도 흙 가마에 물을 붓고 저녁 준비를 했다. 아침의 싸움이 소문났는지 하루 내내 술 찾는 손님이 없었다.
이히힝.
갑자기 오행마가 기쁨에 찬 울음으로 적막을 깼다. 주보는 나무 뚜껑을 가마 위에 던지다시피 내려놓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제 숙부가 돌아오는 모양입니다. 저 말은 숙부와 영통靈通했거든요."
과연, 반 각도 안 되어 먼바다에 작은 점이 나타났다. 그리고 점은 점점 커졌다.
오행마 곁에 서서 함께 바다를 바라보던 망아지가 점의 정체를 확인하곤 화들짝 놀라며 또각또각 오작 곁으로 도망쳤다.
자기보다 덩치가 훨씬 작은 오작 뒤에 숨으려고 몸을 한껏 움츠리는 망아지의 귀여운 헛짓거리에 종일 죽상이던 주보가 드디어 얼굴을 활짝 펴고 웃음을 터뜨렸다.
푸른 점의 정체는 커다란 바다거북이었다. 그러나 쉽게 볼 수 없는 덩치에 세 개나 되는 머리만 봐도 평범한 바다거북은 아니다.
"구망 어르신을 도와 천일도를 지키는 삼수녹參首綠이야. 어부들 말을 듣고 허풍이라고 여겼는데, 실제로 보니 듣던 것보다 훨씬 크네."
삼수녹 등엔 익숙한 체형의 자단 외에도 한 명 더 있었다. 그러나 견문이 넓은 주보도 자단 곁에 사람이 누군지 알지 못했다.
더는 헤엄 못 칠 정도로 바다가 얕아지자 삼수녹은 그대로 멈췄다. 발 달린 거북이니 걸어서 올라와도 되련만, 무슨 사정이 있는지 세 머리까지 움츠리고 가만히 있었다.
짧게 대화를 주고받은 자단과 푸른 옷을 입은 노인이 동시에 몸을 날렸다. 수십 장은 되는 거리를 단숨에 뛰어오는 모습에 주보가 엉거주춤 뒷걸음쳤다.
자단이 해변의 모래를 밟자 얌전히 있던 홍영창이 휙 날아서 주인 곁으로 갔다. 홍영창을 잡고 반갑게 쓸던 자단이 이마를 찌푸리며 곁에 푸른 옷을 입은 노인에게 말했다.
"사고가 좀 있었어. 우리 계획을 약간 미뤄야 할 것 같아."
"난 괜찮아. 조금 늦는 게 큰일도 아니고."
둘이 대화하는 사이, 오작이 접근해 인사를 올렸다.
"무사히 다녀오셔서 참으로 기껍습니다. 곁에 분은 아무래도 숙부께서 자주 언급하신 지우至友(아주 친한 친구) 구망 어르신이겠지요? 소질의 인사를 받으십시오."
포권하고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하는 오작을 보며 구망이 껄껄 웃었다.
"만나서 참으로 반갑다. 듣던 것보다 훨씬 영민하구나."
그때, 구망 뒤에서 바스락거리는 기척과 함께 오작과 비슷한 키의 아이가 머리를 빼꼼 내밀었다. 오작은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한 것에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고 아이와 눈을 마주쳤다.
오작과 잠깐 눈빛으로 교류한 아이는 혀를 쑥 내미는 개구진 표정으로 인사를 대신하고 다시 구망 뒤로 숨었다.
"오작아, 숙부가 이 친구 외손자를 양자로 들였다. 네 동생이니 잘 가르치고 보살펴야 한다. 치우야, 형한테 인사해야지."
그제야 구망 뒤에서 나온 치우는 스무 개도 안 되는 이를 환하게 드러내며 인사했다.
"안녕, 난 치우야. 형은 이름이 뭐야?"
"난 오작이라고 부르면 돼."
그때 주보가 쭈뼛쭈뼛 다가와서 허리를 숙여 예를 올렸다.
"말로만 듣던 구망 어르신을 직접 뵈어 영광입니다. 누추하지만, 안으로 모셔도 될까요?"
"어차피 바로 돌아갈 생각이 아니었는데 잘 됐군그래. 신세 좀 지겠네."
주보가 만든 저녁을 나눠 먹고 밖으로 나오니 삼수녹은 어느새 종적을 감췄다. 자단과 구망은 소위 계획이라는 걸 상의한다며 술을 보관한 움에 들어갔고 주보와 치우 그리고 오작은 마루에 앉아 둥근 달을 구경했다.
"형, 저기 달에 토끼가 산대."
치우의 말에 오작은 고개를 끄덕여줬다. 사실 오작은 달에 토끼가 산다는 걸 믿지 않지만, 치우의 동심을 깨고 싶지 않았다.
"얼마나 맛있을까? 형은 알지?"
치우는 입맛까지 다시며 오작에게 질문했다.
"그건 나도 모르는데?"
대답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치우는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왜 몰라? 진짜 형 맞아? 형 몇 살이야? 치우는 네 살인데."
치우의 말에 오작과 주보의 눈이 커다래졌다. 오작과 비슷한 키여서 열 살 정도는 될 거라고 여겼는데, 고작 네 살에 키가 육 척(1m)이라니 놀라지 않고 배길 수 없었다.
'다 자라면 일 장(1.7m)은 훌쩍 넘겠는데?'
놀란 가슴을 달랜 오작은 목청을 가다듬고 치우의 질문에 대답했다.
"형은 올해 스물네 살이야."
갓난아기 모습으로 살다가 네 살 때 현무루를 마시고 키가 삼 척으로 자랐다. 그때부터 세상을 기억하기 시작했고.
그 상태로 이십 년 동안 자단의 등에 업혀 돌아다니며 주작란을 찾으려고 신빙성이 거의 없는 정보에도 목을 맸다.
결국, 갸륵한 정성에 하늘이 감동했는지 전혀 믿기지 않는 정보를 따라 마적 소굴을 덮쳐서 주작란을 얻었다.
오작의 대답을 들은 주보는 눈을 아까처럼 크게 뜨고 입도 목젖이 보일 정도로 커다랗게 벌렸다. 치우 역시 동그란 눈을 더 동그랄 수 없을 정도로 동그랗게 떴다.
'아버지가 스무 살인데.'
흉수의 습격에 죽은 치우의 아버지가 살아 있다면 지금 스무 살이다.
'형 말고 큰아버지라고 불러야 하나?'
그러나 오작의 숙부인 자단을 양부로 삼고 아들이 되었기에 형이라고 부르는 게 맞는다. 나이보단 촌수가 우선이니까.
그렇게 놀랄 일이 끝났지 싶을 때, 우물쭈물하던 주보가 입을 열었다.
"말 함부로 해서 죄송합니다."
치우와 오작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주보의 입을 주시했다.
"저 지난달에 스물 됐습니다. 형님."
도무지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주보를 바라보던 치우와 오작은, 험상궂은 얼굴에 가려진 때 묻지 않은 순수한 눈빛을 확인하고 동시에 한숨을 지었다.
"모르고 한 짓이니 꾸중은 하더라도 죄는 묻지 말아주십시오. 이후 형님으로 깍듯이 모시겠습니다."
"네. 저는 괜찮습니다."
"형님, 편하게 대해 주세요. 자꾸 말을 높이시면 어린 동생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오작은 쉽게 떨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놀렸다.
"알·았·어. 주·보·야."
그렇게 놀라움 속에서 서열이 의외의 방향으로 정리될 때, 망아지가 슬금슬금 다가와서 이마로 치우를 툭툭 건드렸다.
"이거 형 망아지야? 이름은 뭔데? 내가 타고 놀아도 돼?"
"이름은 둔각臀角이야. 성질이 사나운데 괜찮겠어?"
엉덩이에 뿔났다는 의미로 이름을 둔각으로 지었다.
"근데 형은 왜 아픈지 알아?"
"뭐가?"
"둔각 말이야. 배가 아프다고 자꾸 그러는데."
풀을 가려서 먹었던 일, 전조도 없이 등에 탄 자신을 떨어뜨렸던 일. 그게 단순한 심술이 아닌 배의 통증 때문이었다니.
망아지의 심술로 많이 고민했던 오작이기에 치우의 말을 바로 이해했다.
"아니, 아픈 줄 몰랐어."
치우는 '그것도 모르다니 형 맞아?'라는 의미를 담은 눈빛을 보낸 후 둔각에게 다가갔다.
"귀안투시술鬼眼透視術."
시동어를 외치자 치우의 눈이 맹수처럼 파랗게 빛났다. 파랗게 변한 눈이 따끔거리는지 치우는 자주 손으로 주변을 문질렀다.
"장에 피똥이 뭉쳤어."
투시술을 거둔 치우는 망아지한테 다가가서 머리를 쓰다듬으며 귓속말을 했다.
"내가 꺼낼 거야. 아파도 참아."
망아지가 고개를 연신 끄덕이는 걸 확인한 치우는 옷을 홀라당 다 벗어버리고 엉덩이 쪽으로 갔다.
"자신 있어?"
오작은 걱정을 가득 담아 질문했다. 작은 실수에도 망아지의 목숨이 위험하다. 네 살이라는 나이를 듣기 전이라면 걱정보다 기대가 컸겠지만, 나이를 알고 나니 왠지 안 미더웠다.
"응."
해맑게 대답한 치우는 망아지 항문으로 손을 쑥 집어넣었다. 그리고 한참 지나서 천천히 팔을 뽑았다.
팔이 뽑힘에 따라 역한 냄새가 확 퍼졌다. 그리고 치우 손에는 돌멩이처럼 굳은 혈변이 들려 있었다.
'멍청한 말 장수가 어린 망아지한테 못 먹을 걸 줬구나.'
몇 달 동안 망아지의 아픔을 외면한 죄책감까지 더해 말 장수를 원망했다. 그러나 말 장수를 아무리 욕해도 미안한 마음이 덜어지지 않자 곧 그만뒀다.
투시술을 한 번 더 펼쳐 치료가 끝났음을 확인한 치우는 알몸으로 바다에 풍덩 뛰어들어 몸에 묻은 말똥을 씻었다. 킁킁거리며 냄새까지 사라진 것을 확인한 치우는 부엌 아궁이에 가서 몸을 말렸다.
"고마워 치우야. 망아지 너 줄게."
아픈 걸 알아달라고 그렇게 심술을 부려 표현했는데도 외면했던 게 미안했다. 말과 대화가 통하는 치우라면 더 잘 돌볼 수 있다는 생각에 오작은 아쉬운 마음으로 망아지를 새로 생긴 동생한테 선물하기로 했다.
"아니. 그러지 말고 우리 둘 다 망아지 친구 하자."
그때, 뻘건 얼굴과 게슴츠레한 눈을 한 구망과 자단이 움에서 나왔다.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풀풀 풍기는 역한 술 냄새로 움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만했다.
"이거 술값이네."
자단이 소매에서 은색 조개껍데기 두 개를 꺼내 주보한테 건넸다.
- 작가의말
두 번째 주인공 치우 등장했습니다. 우리 귀요미 네 짤 치우 많이 사랑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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