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팔금침법佰捌金針法
금침화기金針化氣
금침은 녹아 사라지고
괴질제근怪疾除根
괴질은 뿌리 뽑히다
오작과 치우는 일회용 법보를 만들었다. 오작이 주문을 새기고 법력 주입은 치우가 했다. 그렇게 주머니를 여럿 만들어 미처 소매에 넣지 못한 황금을 담았다.
그때, 영지의 문이 빼꼼 열렸다 닫혔다. 황금에 빠진 치우와 형천은 미처 몰랐지만, 오작은 소소의 도착을 알아챘다.
갑자기 생긴 성감 덕분이었다. 눈으로 본 것도 아니고 귀로 문 열리는 소리를 들은 것도 아니고, 그저 움직임이 느껴졌다.
"와서 황금이나 나눠."
오작의 평이한 말투에 소소가 입을 삐죽이며 모습을 드러냈다.
"내 몫은 얼만데?"
"넷이 똑같이 나누기로 했잖아. 거기 주머니 네 개 가져. 우린 소매에 꽉 채웠으니까 네 개면 대충 맞을 거야."
소소는 일곱 주머니 중에서 네 개를 자기 소매에 집어넣었다. 그걸 본 오작은 아차 싶었다. 일회용 법보를 더 만들어 소매 안의 황금까지 담은 후 다시 소매에 넣으면 공간을 절약할 수 있다.
황금에 안 흔들리려고 꽤 애썼지만, 결국엔 막대한 재물에 홀려 제정신이 아니었다. 치우나 형천처럼 수시로 소매에 손을 넣어 황금을 만지며 황홀한 표정을 짓는 것보단 나았지만, 오십 보 도망친 놈이 백 보 도망친 놈을 비겁하다고 비웃는 거나 별반 다름이 없다.
오작은 일회용 주머니를 더 만들어 소매 안의 황금도 모두 임시 법보에 넣었다. 주머니가 총 열일곱 개가 나왔다. 오작은 하나 남은 주머니를 여자 요괴한테 던져줬다.
"기한이 없는 일회용 주머니입니다. 안에 든 물건을 조금이라도 꺼내면 효력을 잃습니다. 그러니까 함부로 손을 안 넣는 게 좋습니다."
요괴는 황금을 인간보다 훨씬 좋아한다. 인간에겐 그저 재물일 뿐이지만, 요괴한테는 힘을 키울 수 있는 영약이나 다름없다.
직접 황금을 먹어 힘을 키우는 요괴도 있고, 모산파에 황금을 주고 원하는 법보를 만들어 실력이 비약적으로 성장하는 요괴도 있다.
"고맙다. 그런데 내 상처는 어떻게 할 거야? 그 산이 동부와 중부 사이에 있는데, 거긴 산이 천 개도 넘잖아. 게다가 요괴 영지여서 위치만 알고 찾기도 힘들어."
여자 요괴가 처음보다는 많이 누그러진 말투로 오작에게 질문했다.
"황금으로 상처를 감싸면 영지를 떠나도 괜찮을 겁니다. 구왕이나 다른 요괴가 여길 찾아오기 전에 일단 도망치고, 밖에 나가서 상처를 치료할 요괴나 술사를 찾아야겠습니다."
그때 소소가 끼어들었다.
"에헴. 황금 한 주머니만 주면 내가 치료하지. 이래 봬도 백팔금침법을 최고의 경지까지 익힌 치료사라네."
"이래 봬도? 자기가 어떻게 보이는지는 잘 아는 모양이군."
치우가 구시렁댔다. 가장 따르고 싶은 오작과 닮은 것도 싫고, 소소라는 이름도 싫고, 자신과 마찬가지로 은신술이 뛰어난 것도 싫었다.
"내가 좀 어리게 보이잖아. 그래서 너희가 내 실력을 의심할까 봐 그러는 거지."
"실패한다고 큰 문제가 되는 건 아니지?"
오작의 질문에 소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부탁한다."
오작은 소매에서 주머니 하나 꺼내 소소에게 던졌다. 소소는 주머니를 받아 소매에 넣은 후 바로 여자 요괴의 상처를 살폈다.
"으흠. 교혈법咬穴法이구나. 이거 벌이가 시원찮겠는데."
말을 마친 소소는 품에서 길고 짧고 굵고 가는 침을 가득 꺼냈다.
"이제부터 백팔 개의 침을 네 몸에 꽂을 거야. 십이경맥의 시작과 중간 그리고 끝인 서른여섯 대혈에 장침을 꽂을 거고, 경맥과 경맥이 만나는 칠십이 교혈交穴에 세침을 꽂을 거야. 네가 조금이라도 움직이거나 반항하면 치료가 실패할 수 있으니 절대 저항하지 마."
"걱정할 거 없다. 난 인간 출신이어서 육체가 허약하고 법력도 묶였다."
"좋아. 시작한다."
말을 마친 소소가 침을 허공에 흩뿌렸다.
'재주는 있네.'
봄바람을 만지는 듯한 부드러운 손놀림으로 허공에 흩어진 침을 하나씩 잡아 요괴의 몸에 정확히 꽂는 모습에 치우는 작게 감탄했다.
치우는 물론이고 오작도 저런 섬세한 모습은 보여주기 힘들다.
채 숨을 두 번 쉴 틈도 없이 요괴의 몸엔 백팔 개의 침이 꽂혔다. 침마다 꽂힌 깊이가 달랐고 꽂는 각도도 달랐다.
침 끝을 살짝 건드려 제대로 되었는지 확인한 소소는 빠르게 주문을 외웠다. 주문이 진행됨에 따라 어떤 침은 더 깊이 들어가고 어떤 침은 밖으로 조금씩 나왔다.
"백팔금침법!"
주문을 마친 소소의 외침과 함께 침들이 사라졌다.
"금자金者, 용침야冗浸也, 무역류혜無逆流兮."
오행에서 금의 성질은 가라앉고 단단하며 물러서지 않음이 대표적이다. 백팔금침법은 이러한 금의 성질을 이용해 쓸모없는冗 기운을 밑으로 내려보낸다.
금의 묵직함으로 쓸모없는 기운이 역류하지 못하게 밑으로 꾹 눌러 배출하기에 웬만한 병은 다 치료한다.
스스슥 소리가 오작의 귀에만 들렸다. 여자 요괴의 법력을 동결凍結한 구왕의 법력이 발바닥의 용천혈을 통해 나가는 '소리'였다.
'빨리 적응해야겠다. 그런데 치우의 은신술도 찾아낼 수 있을까?'
오작은 귀를 괴롭히는 소리를 억지로 참았다. 새로운 감각이 생겨서 그런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 오작은 예전처럼 평정을 쉽게 유지하기 어려웠다.
'황금을 보고 조심성을 잃기도 하고. 그토록 노력했는데도 정신 수양이 여전히 부족하구나.'
사실 오작의 성취나 경지 그리고 나이에 비하면 정신 수양이 엄청 높은 편이다. 그러나 오작이 처한 처지나 적의 강함을 생각하면 모든 면에서 한없이 부족하다. 그나마 자랑으로 생각하던 정신 수양마저 흔들리자 마음이 파도쳤다.
"됐다. 빨리 수습하고 떠나자."
소리가 멈추자 오작은 바로 일행을 재촉했다. 소소는 영지 문 앞에 서서 주문을 중얼중얼 외웠다.
해봉법으로 봉쇄를 해제하려면 법력이 구왕보다 몇 배 많아야 한다. 그래서 소소는 해봉법을 변형해 작은 틈을 만드는 식으로 변통했다.
"이걸 갖고 최대한 멀리 도망치세요. 사람이 많고 부유한 마을로 가서 조금씩 꺼내 쓰고요."
오작은 미리 빼둔 작은 황금 덩이를 두 시종에게 건넸다. 두 시종은 허리를 깊이 숙여 고마움을 표현한 후, 문틈으로 잽싸게 빠져나갔다.
소소를 마지막으로 일행도 구왕의 영지를 벗어났다. 작은 다툼은 있어도 대체로 평화롭던 요수촌은 어느새 엉망이 되었다.
요수촌의 여섯 세력 중 세 세력은 구왕을 죽이러 가고 남은 두 세력은 구구방의 졸개들을 처리하려고 요수촌에 남았다. 구왕이 금맥의 출현을 미리 알아챌 수 있다는 말에 다섯 세력이 급히 회동하여 내린 결정이다.
대부분은 황금을 목적으로 요수촌에 왔지만, 일부는 요수촌의 삶이 마음에 들기도 했다. 그래서 요수촌의 질서를 흐릴 수 있는 구왕과 구구방의 존재가 탐탁지 않아 제거하기로 했다.
금맥 지도의 소문을 듣고 욕심이 난 자들도 있지만, 괜히 들키면 구왕처럼 숙청당할 게 뻔하기에 억지로 탐념을 눌렀다.
"자네들도 빨리 도망치게. 오랜만에 금맥이 나타나서 싸움이 좀 격해."
싸움판에서 내기를 벌이던 인간 노인이었다.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노인은 금맥이 나타날 때마다 벌어지던 작은 다툼이 크게 번진 줄로만 알았다.
오작 덕분에 황금 수십 근을 벌었기에 눈에 띄자 작은 충고를 건넸다.
"그렇군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오작 일행도 티 안 나게 요수촌을 벗어날 수 있었다.
경계사는 중부로 가는 길을 막지 않는다. 중부는 남은 넷 중에 셋을 합친 만큼 인구가 많고 둘을 합친 만큼 강하다. 공격받을 가능성도 적고, 넷과 모두 접하여 누굴 공격할 일도 없다.
하지만, 진령산맥秦嶺山脈은 예로부터 요괴와 마수가 많기로 유명하다. 특히 말이 안 통하는 마수가 득실거려 아무리 오작 일행이어도 함부로 넘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안전이 어느 정도 확보된 길로 구불구불 에돌아야 했다.
"야, 넌 왜 계속 우릴 따라오는데?"
치우는 누가 들어도 심술 가득한 말투로 소소를 다그쳤다.
"혹시 너희 중 누가 요괴한테 다치기라도 하면 내가 구해줘야지. 게다가 난 원래부터 중부로 가려고 했어."
소소는 여유만만한 미소로 치우의 기를 채웠다.
여자 요괴는 통성명을 거부했지만, 약속을 지켜 치우와 오작을 홍영창이 있는 산까지 안내하기로 했다. 형천은 불사과가 있는 중부로 가야 하기에 진령산맥을 넘을 때까지는 어차피 동행해야 한다.
그러나 소소의 동행은 치우도 오작도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치우는 그냥 싫은 거고, 오작은 정체가 짐작 가지 않는 소소가 껄끄러웠다.
"어디까지 동행할 생각입니까?"
소소는 갑자기 말투가 바뀐 오작에게 조금 섭섭했지만, 싫다는 사람들한테 자신이 들러붙는 것이기에 참아야 했다.
"글쎄. 진령을 넘으면 생각해 봐야지. 저 덩치랑 다니는 게 재밌을지 너희랑 다니는 게 재밌을지."
"우리랑 다녀. 교혈법인지 뭔지 하는 거 고쳐준 보답도 해야 하니까."
여자 요괴는 소소한테 치료받은 게 마음에 걸리는지 함께 다니자고 말을 꺼냈다. 그날 백팔금침법을 펼치는 데 사용한 침들은 전부 녹아 사라졌다. 굳이 세상 물정을 몰라도 가늘고 단단하게 만든 침이 흔하고 싼 물건이 아니라는 건 추측할 수 있다. 그래선지 여자 요괴는 유독 소소한테만 친절했다.
"형님, 여기서 쉬시죠. 비 막아줄 나무도 있고 근처에 개울도 있습니다. 기운이 고이는 곳도 아니어서 요괴나 마수가 없을 겁니다."
형천의 말에 일행은 나무 아래서 밤을 새우기로 했다. 유일한 요괴인 여자도 인간이 요괴로 변한 거여서 체력이 평범했다. 오히려 사람이냐 싶은 치우나 형천이 더 요괴 같았다.
"근데 넌 왜 저 도련님을 형님이라고 불러?"
소소의 질문에 형천은 얼굴을 붉혔다.
"나 열네 살이야."
"나도."
소소는 치우와 형천을 번갈아 보다가 바닥에 훌쩍 드러누웠다.
"거짓말. 저것들이 나랑 동갑이라니. 이건 거짓말이야."
"난 백 살이 넘어."
여자 요괴가 끼어들었다.
"요괴는 논외야. 천 살이 넘어도 새끼 모습인 요괴도 있잖아. 근데 저 둘이 나랑 동갑이라니."
"일하기 싫어서 또 드러누운 거 좀 봐."
길지 않은 동행이지만, 치우는 소소의 속셈을 알아챘다. 장작을 줍고 사냥하는 일이 싫어서 숙영할 때마다 핑계를 대고 드러눕는 소소였다.
이제쯤은 댈 핑계가 마르지 않았을까 싶었는데, 이런 억지를 부릴 줄은 몰랐다. 예전에 셋의 대화를 엿들어 치우와 형천의 나이는 이미 알아야 했다.
"오는 길에 딴 과일 있잖아. 그거 먹고 그냥 쉬자. 날도 따뜻하니 모닥불 피울 필요도 없고."
오작의 말에 치우는 눈알을 살짝 굴렸다. 그러다 오작의 손을 확인하고 땅에 궁둥이를 붙였다.
"그래. 나도 장작 줍고 사냥하는 거 지쳤어. 형천아, 어제 그 초식 마저 알려줄게."
의젓한 척하려고 애쓰지만, 나이는 속이기 힘들다. 치우가 무공 초식을 알려준다는 말에 형천은 어깨를 들썩이며 쪼르르 달려왔다.
- 몇이야?
치우는 손으로 오작에게 질문했다.
- 셋. 더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때, 소소가 불쑥 대화에 끼어들었다.
- 누군지는 알고?
'머리는 더럽게 똑똑하네.'
치우는 그간 함께 다니며 소소가 둘의 손으로 하는 대화를 파악했음을 깨달았다. 오작과 함께 단어를 만든 자신도 가끔 헷갈리는데, 지켜보기만 하는 거로 대화를 배운 소소에게 질투의 감정이 끓었다.
- 놈 같기는 한데, 확신하기 힘들어.
오작은 성감으로 뒤를 쫓는 자들을 발견했다. 공교롭게 길이 같을 수도 있어 계속 지켜봤는데, 오작 일행이 예상보다 일찍 멈추자 놈들도 멈췄다.
- 놈? 세 세력이 몰려가 놈을 죽이려는 것까지 봤는데. 거기서 살아 나왔다고?
오작이 그저 놈이라고 했지만, 소소도 치우도 누굴 말하는 건지 알아챘다.
- 내가 미끼 할게.
소소가 미끼를 자처하자 오작과 치우 모두 침묵했다.
- 놈은 여기서 내가 제일 싫을걸. 여자나 너희 셋은 얕보고 있을 거야. 가장 껄끄러운 날 먼저 제압하려고 할 거야.
- 넌 쟤한테 무공 가르쳐.
오작의 말에 치우는 멀뚱한 표정으로 있는 형천에게 어제 가르치다 만 무공 초식을 설명했다. 치우의 설명이 다소 추상적이고 자세하지 못했지만, 형천은 용케 알아듣고 바로 몸으로 펼쳤다.
- 자신은 있고?
오작의 질문에 소소가 손으로 대답했다.
- 내 옷이 법보야.
오작과 소소는 가끔 바닥에 글자를 써가며 함정을 어떻게 팔지 상의했다. 손으로 하는 대화에 한계가 있기도 하고, 요괴 대부분은 인간의 말을 알아도 글자는 모른다. 손과 글자를 섞은 대화기에 둘 중 하나만 알면 뜻을 이해하기 어렵다.
오는 길에 딴 풋과일로 배를 채운 후 나무 밑에 누웠다. 여자 요괴가 따로, 소소가 따로, 그리고 치우와 형천과 오작이 따로 잤다.
다섯 중에 체력이 가장 약한 여자 요괴와 소소가 먼저 코를 골았다. 노을이 아예 사라지고 달이 하늘을 점령할 즈음 오작도 코를 골았다.
힘이나 체력 모두 웬만한 요괴를 아래로 보는 치우와 형천은 무공에 관한 얘기를 도란도란 나누다 늦게야 잠들었다.
다섯 모두 고른 숨소리로 꿈나라에 빠졌을 때, 추적자들이 움직였다.
- 작가의말
소소는 도둑과 힐러 듀얼 클래스였습니다. 치우는 네크로맨서에 전사 듀얼이고 형천은 전사이며 오작은 마법사와 창술사 듀얼입니다. 요괴는 아직 튜토리얼 중이어서 스킬을 받지 못한 상황이고요.
Comment '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