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상흔의 잔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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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의대화
작품등록일 :
2020.05.11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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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4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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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 악몽(9)

DUMMY

진월대의 최고층에서 월영시 밖을 내려다보면 없던 특권 의식마저 생길 정도였다.


날씨가 괜찮은 날이면 월영시의 모든 곳을 관찰할 수 있을 뿐만아니라, 지금과 같이 밤이면 도시가 내뿜는 빛을 내려다 볼 수 있어 마치 밤하늘을 다스리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이런 광경을 매일 볼 수 있는 자들은 특권층에 속했다. 진월대 하층부에 거주하는 예비사제와 일반사제와 달리 오로지 고위사제들만이 진월대 상층에 거주하며 월 연방국을 통치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랬기에 일반 사제였던 페니탈 파트나는 특권을 누릴 수 있는 기회가 있을 때 누리고자 했다. 물론 경치를 보는 것 외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서글퍼지긴 했지만.


복잡한 마음으로 월영시의 야경을 바라보던 페니탈은 이 장소의 주인이 돌아오는 소리를 들었다. 잠시뒤, 집무실 문이 거칠게 열리며 턱 밑까지 오는 흰수염을 기르고 짙은 밤색의 로브를 걸친 노인이 들어왔다. 사제의 상징인 로브를 둘렀음에도 그 사이사이로 다부진 체격이 드러나 왠만한 월영군 병사와 격투를 해도 지지않을 것 같은 사람이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샤즐 노리탄 사제님.”


“이 늙은이가 언제까지 이래야 하는지, 원. 이제 전투사제 관리는 네가 해도 되지 않냐?”


“아시지 않습니까, 저의 애매한 마법 실력을... 스승님과 같이 뛰어난 마법 실력이 있었다면 어엿한 병부사 차관이 되었을텐데 말이죠.”


“그래, 그래. 쓸데 없는 소리해서 미안하다. 내가 죽을 때까지 전투 사제를 관리하도록 하마.”

제정론의 명률에 따라 모든 마법사는 달의 여신을 모시는 사제가 되어야 했다.

때문에 인형과의 전투에 필수적인 마법사들 또한 사제들로 구성되었고, 월영군의 지시가 아닌 병부사라는 별도 조직의 지휘를 받았다.

그리고 월영시의 인형 침입 방지부터 마법 전투까지 전투사제의 모든 업무를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이 바로, 샤즐 노리탄 병부사 수장이었고, 이번 인형 침입건으로 막 현장을 정리하고 돌아온 참이었다.


“그 대신 네가 서류 작업 하나는 똑부러지니 그걸로 만족하지. 보고해야 할 사항 중 특이사항 있는가?”


로브 안에 걸친 가죽 갑옷을 벗어던지고, 장작없이 마력으로 불길이 살아있는 화로 앞, 소파에 앉아 축 늘어진 그는 만사가 귀찮다는 표정이었다.


“오늘 스승님게서 추적했던 인형은 월영시 외곽에 숲에서 매복 중이던 수색대에 의해 파기 되었습니다. 참고로 인형 파기자는 수색대 야묘급 카니엘 시닉스 입니다."


“또 그 자야? 이젠 이름까지 외워 버렸구만. 무슨 전생에 인형에게 원한이라도 졌나?”


“전생까지 갈 필요는 없습니다. 그의 가족은 무혼반란(無魂反亂) 때 인형에게 모두 살해 당했으니까요.”


페니탈은 무미 건조하게 말을 했고, 샤즐 또한 그리 놀라지 않았다.


12년전, 대륙의 공적(公敵), 벨리안느 이얀으로 인하여 사회의 충실한 일꾼이었던 인형들이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을 파괴하는 살인자로 변해 버린 그 사건은 대륙 역사를 통틀어 유래가 없을 정도로 많은 사망자를 냈기 때문이었다.


각인진으로 무장한 월영군이 진압했음에도 월 연방국에서만 10만명이, 압도적인 군사력을 자랑하는 일리오스 제국조차 15만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었고, 도시 연합에서는 정확한 통계를 산출 할 수 없을 정도의 심각한 피해를 입었었다. 그러니 그 중에 일가족이 몰살 당한 사례도 얼마든지 발견 할 수 있어 놀랄 일도 아니었다.


“그래서 이렇게 인형을 파기하는 건가. 이거 이러다 벨로나처럼 최연소 단장이 또 탄생하겠구만.”


“그럴려면 벨리안느가 되살아 나야하지 않겠습니까? 벨로나의 그 말도안되는 승진은 공적을 잡아 처형한 것 때문이니까요.”


“되살아 나더라도 카니엘이란 자가 벨로나처럼 대륙의 공적을 잡아낼 인물이겠냐?”

대륙의 공적을 잡은 것 이외 무수한 전공이 있었던 벨로나를 나름 칭찬하기 위해 한 말이었지만 페니탈은 조금 진지하게 받아 들였다.


“.. 카니엘 시닉스에 대한 신상정보를 조사해서 올려드릴까요?”


“농담이니,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마라. 다음 보고 사항!”


“..말이 나온 벨로나 세라트너 단장이 월영군 사령부에 정식 공문을 보내었습니다.”


“벨로나가 사령부에 공문?”

자신의 관리 부서에 공문을 보냈다는 것이 얼핏들으면 이상했지만, 제정론으로 다스려지는 월연방국이었기에 그것은 일종의 항의 메시지였다. 사제에게 직접 의사를 전달할 길이 없으니, 일종의 대자보 마냥 불특정 다수의 사제에게 소식이 들어가도록 머리를 쓴 것이었다.


“그래서 그 공문 내용은?”


“카릿치오스 지방에 있는 월영군 철회를 주장했습니다.”


“......흑표 군단 말이냐?”


그때서야 샤즐은 자세를 바로 고치고는 장작 없이 불타는 화로를 주시했다. 화로의 불길은 샤즐의 복잡한 머리속을 투영하듯 갑자기 하늘하늘한 춤사위를 벌였고, 페니탈은 자신은 부릴수 없는 그 마법 실력에 감탄 하면서 동시에 자신도 이건에 대한 생각을 정리했다.

대륙의 최남단. 대륙이 세워지기 이전에 존재했던 고대 제국의 유산지라고도 일컫는 카릿치오스 지방은 완벽한 무소유지 땅이었고, 그러니 그곳에 월영군이 있을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최정예병 3천명이 파견되어 있었고, 그 사실 관계만 놓고 본다면 전혀 합리적이지 못했다.


“벨로나가 조바심을 내는군.”


“네?”


“확실히 흑표 군단이 있을 곳은 카릿치오스가 아니지. 벨로나는 그 병력들이 필요할 경우가 생길까봐 조바심을 내는 거다.”


“최근 몇 년간 인형들과 대규모 전투는 없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갑자기 전면전이 벌어지까봐 불안 한 것이겠지.”


“혹시 다른 이유가 있어서는 아닐까요? 3천명의 병사들이 돌아온다면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을테니.”

페니탈의 뜻을 이해 못한 것은 아니었으나, 샤즐은 완강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벨로나는 월영군 지휘 이외 다른 일을 벌일 사람이 아냐. 나조차도 3천명의 병력을 놀리고 있는게 이해가 안되는데 정작 지휘권을 가진 그녀는 어떻겠나.”


“하지만.. 외람 되오나 스승님께서도 파견 관련해서 만월 회의 때 동의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녀를 믿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두 마리의 표범을 월영국 내부에 둘 필요는 없지. 게다가 흑표 군단의 군단장인 피를로니아는 벨로나의 최측근이니 둘을 떨어뜨려 놓는 것이 좋았다. 그곳이 최전방든 숲 밖에 없는 카릿치오스든.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의견을 제시한 트리스트 듀에가 직접 카릿치오스로 가겠다고 했으니, 더 할나위 없었지.”

다시 생각해도 자신의 결정이 흡족하여 미소를 짓던 샤즐이었고, 페니탈은 일단 스승님이 그 순간을 잠시 즐기도록 놔두자고 생각했다.


“안타깝지만, 벨로나의 의견은 무시하기로 하고. 그래서, 혹시 그 깡촌에서 새로운 고대 유물이라도 발견했나? 카릿치오스 관련 소식은?”


“카릿치오스 파견건 관련해서 알아낸 사항은 두 가지 정도 있습니다. 지시한 바와 같이 그곳에 투입되는 자원들을 조사했는데, 대부분 바르나프 가(家)를 통해 공급되는 건축 자재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뭐? 바르나프? 왜 사제가 하는일에 민간이 나서고 있는거지?”


“직접적인 지원은 아닌 것 같고.. 아무래도 카릿치오스의 위치상 도시연합과 가깝다 보니 중개무역 형식으로 자재공급이 이뤄지는 것 같습니다. 그 중개무역에 바르나프 쪽의 협력이 필요했던 모양이며, 관련 거래에 대한 자금 흐름은 지금 조사 중에 있습니다.”


“그 자재들로 도대체 뭘 하는 거지?”


“카릿치오스에 있는 유적 복원말고는 딱히 다른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아 보입니다.”


“트리스트 자식은 자신만의 도시를 세우고 싶은가 보군. 아무튼 계속 조사를 진행 해보도록하고, 나머지 하나는 뭐야?”


페니탈은 다음 말을 꺼내기 전에 잠시 숨을 골랐다.


“그 정보부 국장 트리스트 듀에가 돌아왔습니다.”


그러자 예상했던 침묵이 페니탈와 샤즐 사이를 감쌌다. 그 소식을 들은 뒤 샤즐은 곧바로 손깍지를 끼더니, 그 위에 턱을 괸채 심각한 표정을 지었고 화로의 불꽃 또한 벨로나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와 다르게 거칠게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언제?...”


“오늘 오후경 진월대에 들어온 것을 목격했습니다.”


다시금 이어진 긴 침묵. 그리고 멈춰버린 듯한 그 시간 속에서 샤즐은 트리스트에 대해서 잠시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짧은 시간에 샤즐이 트리스트에 대해 내린 결론은 언제나 하나였다.

‘이해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

하지만 그렇다고 손을 놓고만 있을 순 없었다.


“제 아무리 월연방국을 벗어나 카릿치오스에서 벌어지는 일이라고 해도, 민간 업체와 협력하는 것은 명백한 사제의 권력 남용이다. 제정론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야.

트리스트가 돌아왔다면 이 사실을 다른 원로 사제들과 검토해 묵과해서는 안될 것 같군.”


“이번 만월 회의 때 건의 해보실 생각입니까?”

페니탈이 묻자 샤즐은 살짝 주저했다. 일단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실제로 트리스트가 바르나프 가를 압박했는지, 또 그 결과 카릿치오스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확실한 것 하나 없었다. 그렇다면 트리스트의 영향력 때문이라도 고위 사제들은 쉽사리 결론 내지 못할 것이 뻔했다..


“...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군. 어느 정도 여론을 만든 다음 대응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니, 최대한 정보를 모을 수 밖에.”


“트리스트 사제에 대항하는 여론 말입니까?”


“인정하기 싫지만, 트리스트측 세력이 만만치 않으니까. 우리도 만반의 준비를 하는 수 밖에. 당장 행정부와도 이야기 해봐야겠군.”


샤즐은 그렇게 말을 하면서 소파에서 일어나 떠날 채비를 했다. 이 이상으로 이야기가 이어지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 페니탈은 그 틈에 재빨리 궁금한 것을 물어보려 했다.


“스승님!... 개인적인 궁금증입니다만, 스승님께서는 왜 그토록 트리스트 사제를 견제하십니까?”


“그 자는... 제정론의 근간을 흔들 수 있는 자이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뺀다고, 월 연방국 개국 이후에 들어온 사제 중 고위 사제는 그가 유일한데, 세력도 만만치 않아. 당연히 제정론을 위해 경계해야 할 대상이다.”


좀 더 자세한 이유가 나오길 기대했던 페니탈은 세력 싸움의 원론적인 이야기가 나오자 살짝 실망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사실이 크게 상관 없었기 때문에 군말 없이 스승의 외출 준비를 돕기 시작했다.


“아.. 그리고, 당연히 트리스트와 바르나프 뿐만 아니라, 벨로나에게도 감시를 붙여라. 아니, 벨로나 감시건은 네가 주도하도록 해.”


“...벨로나 단장은 군 지휘외 다른 일은 하지 않을거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트리스트가 온 이상 모든 세력이 감시대상 세력이다. 명심해라 페니탈.”


“네. 알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스승의 로브 두건을 정리하는 것을 끝으로 준비를 마쳐낸 페니탈은 짧게 대답하며 집무실 문 밖을 나서는 스승을 배웅했다.


그리고 그의 발소리가 멀어지자 다시금 창가로 다가가 월영시의 야경을 물끄러미 내려다 보았다.


“결국 제정론 인건가.”


그의 혼잣말은 발 아래 어둠 속 월영시 상공에서 흐트러졌다.


- 1장. 악몽,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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