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상흔의 잔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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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의대화
작품등록일 :
2020.05.11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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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28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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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28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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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 효시(嚆矢)_1화_무언 마법사의 조우

DUMMY

아침이 밝았다.

지난 몇 일간 정말 정신없이 달리고 또 걸으며 지나 왔었다. 그렇기 때문에 벨리안느는 극심한 피로를 느꼈고, 그와 동시에 오늘도 상당한 거리를 걸어야 한다는 사실에 정신적, 육체적인 피로가 더욱 심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벨리안느는 주체 할 수 없는 불안감 속에서 다시금 일어나 발걸음을 떼야했다.


그 불안감은 자신의 생사가 걸린 문제였다.

그녀는 언제라도, 심지어 얕은 잠을 자고 있을 때라도 자신의 목이 떨어져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고, 또 실제로 그렇게 세상과 이별할 뻔 한 적도 많았다.


벨리안느는 가던 길을 멈추고 기지개를 켜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주위의 풍경이 지난날과 다르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확실히 월영시로 다가갈수록 나무들도 작은 것이 몇 아름이나 되었고, 큰 것은 높이 또한 높아서 고개를 치켜들고 보기조차 어려울 정도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감탄으로 그칠 경치였지만, 이상하게도 벨리안느는 하늘을 향해 손을 뻗고있는 그 수많은 나무들이 마치 형벌을 받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언제쯤 나는 평온을 되찾을 수 있을까?’

벨리안느는 이렇게 생각을 하면서 한편으로 자신에게 진정한 의미의 평온은 하나 밖에 없음을 알고 있었다.


만인의 적인 그녀가 유일하게 취할 수 있는 평온인 죽음. 그러나 벨리안느는 그것 또한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죽음도 자유롭게 선택하지 못하는 만인의 적은 그만 하늘을 향하던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그리고는 메마른 땅에 한줌의 빛을 뿌렸다.


“웬놈이냐?”

벨리안느는 마치 놀란 산 짐승과 같은 표정을 지으며 얼른 눈을 훔쳤다. 그리고는 소리가 나온 곳을 바라보며 자신의 가느다란 검에 손을 가져갔다. 방금 전까지 들었던 온갖 우울감과 슬픔은 이미 벨리안느를 떠난지 오래였고 긴장감으로 온몸에 힘이 들어간 상태였다.


빽빽하게 들어서있는 숲 사이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인형들이라면 마법의 기운을 느꼈을 테지만,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이 사람이라는 것은 금방 알아차렸다. 그러나 사람이라고 한들 안심할 수 없었다.

그녀는 만인의 적이었으니까


지금이라도 도망칠지를 생각하고 있는 그 사이에 마침내 그들의 모습이 완전하게 드러났다. 20명의 건장한 사내들이 울창한 숲에서 걸어 나왔다. 모두들 칼을 한 자루씩 들고 두툼한 털외투를 걸치고 있었고 그 털 외투 안에는 겹겹으로 된 미늘 갑옷이 아침의 둔한 햇빛을 받아 번쩍였다. 벨리안느는 그 갑옷을 보자마자 저들이 월연방국 소속의 병사들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라? 여자애잖아?”


눈이 가느다랗고 얼굴이 길쭉해 그다지 품위가 없어 보이는 자가 나서서 말을 했다.


“인형이라고 했던 놈 누구야? 빨리 돈 내놔. 이 근방에는 인형 따윈 없다고 내가 분명히 말했을 텐데? 멍청이들.”


“인형이 아닌지 어떻게 아냐고! 네가 사제라도 되는 거냐? 저거 봐. 손에 칼을 쥐고 있잖아.”


“야. 인형이 저렇게 겁먹은거 봤냐? 그냥 길 잃은 여자애라고. 어서 돈 내놔 칼 뽑기 전에.”


순간 아수라장이 된 틈을 타 도망을 칠까하던 벨리안느는 아무 말 없이 다가오는 한 사람 때문에 얼어붙고 말았다.


“조용히 해라.”


벨리안느 앞에 다가선 사내는 뒤를 돌아보고 그렇게 말을 하고 벨리안느를 힐끔 쳐다보았다.


“길을 잃었나?”


무미건조한 말이 벨리안느의 귀속에 파고 들었다. 그러나 벨리안느는 대답 할 수 없었다. 너무나 긴장을 하고 있었고 지난 몇 개월간 인간은 만나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벨리안느에게는 만인의 적, 대륙 최고의 마법사 말고도 또 다른 별명이 있었다. 그것은 무언(無言) 마법사였다.


“내 말이 들리지 않나?”


다시 그 사내가 물어왔다. 하지만 이번에도 벨리안느는 대답할 수 없었다. 물론 사람과 거의 같은 인형들과는 짧은 몇 마디를 나눌순 있었지만 지금 벨리안느 앞에 서 있는 것은 유한한 삶을 맥박치며 살아가는 인간이었다.


“아무래도 귀가 먹은 것 같습니다, 백부장님.”

눈이 가느다란 그 사내가 말을 했다.


“혹은 벙어리 일수도.”

백부장이라고 불린 그 사람은 그렇게 말을 하고는 벨리안느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자 벨리안느는 반사적으로 칼을 빼들었다. 분위기는 순식간에 싸늘해졌고 나머지 사내들은 저도 모르게 자신의 검에 손이 갔다. 그 상태로 몇 초의 대치가 이루어졌지만 사내들은 곧 상대방이 귀먹어리,혹은 벙어리인 게다가 가느다란 검을 쥔 소녀라는 사실을 알고는 긴장을 풀었다.


“뭐야. 성깔 좀 있다는 거냐?”


눈이 가느다란 사내는 그렇게 말을 하며 벨리안느에게 다가가려고 했지만 백부장이란 자가 저지했다.


“조용히 해라, 사빈..... 난 월하시 타이칸 소속의 제142 독립중대, 현호급 백부장인 타하란 카츠라고 한다. 묻는 말에 답해주길 바란다. 혹시 말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면 고개를 끄덕여라.”


벨리안느는 사실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너무나 당황하고 긴장을 하여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결국 고개를 끄덕이지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자 타하란이라고 하는 그 중대장은 필기류를 꺼내어 몇 마디 끄적거리고는 벨리안느에게 보여주었다.


‘귀가 들리지 않는거냐?’

그러나 벨리안느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뒤에서 갑갑해 미칠듯한 표정을 짓고있던 눈이 가느다란 사빈이 결국 불만을 내뿜었다.


“백부장님. 하루 종일 이 여자아이에게 매달릴 생각이십니까? 그냥 무시하고 갈 길을 가는 것이 어떻습니까? 안그래도 대대에서 떨어졌는데 이러다 월영시에 도착할 때까지 합류도 못하겠습니다.”


“어쩌면 버려진 아이일 수도 있습니다. 말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그런 아이일 듯 한데... 우리가 보모 역활을 할 수 없잖습니까? 사빈말대로 명령 받은 것도 있지 않습니까?”


뒤에 있던 나머지 사내들이 한결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을 듣던 타하란 중대장은 잠시 동안 생각을 하더니 이내 벨리안느를 꼼꼼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훑어보던 타하란은 결국 한가지 결론을 내렸다.


“우리가 데리고 간다.”


“무슨 말입니까?”

다른 월영군 뿐만아니라 벨리안느도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우리의 임무는 설표 군단이 상승 행군이 마칠때까지 월영시에서 보충병 역할을 하면 될 뿐이야. 중간에 누구를 데려가든 상관없지.”


순간적으로 벨리안느는 귀가 솔깃 해졌다. 월영시라면 자신의 목표 방향과 같았고 그렇다면 힘들이지 않고도 월영시로 갈수 이었다.

그러나 벨리아느는 곧 자신이 누군지 알아차렸다. 대륙의 공적인 벨리아느는 자신이 뒤따르는 길에 파멸이 있었고, 이들 또한 파멸 속에 온전치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벨리안느는 이들과 어느 정도 동행을 한 뒤 틈을 타 도망치자고 마음을 바꿔 먹었다. 적어도 한끼 정도는 제대로 식사를 한뒤 도망쳐도 괜찮지 않을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사령부의 명령은 둘째치고요. 저 아이의 의사는 확인 해야하지 않겠습니까? 말이 안통하긴 하는데.... 아니, 그저 길 잃은 아이일 가능성이 높으니 차라리 인근 도시에 데려다 주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만."


사빈이 그렇게 따져오는데도 백부장인 타하란은 아무런 기색이 없었다. 보통 상관 같았으면 사빈을 크게 꾸짖었을 테지만 타하란은 계속해서 벨리안느를 뚫어져라 쳐다만 볼 분이었다.


“저 아이의 동의는 구하지 않는다. 칼을 뺏고 저 여자를 구속해라.”


“예?!”


타하란은 그렇게 말을 하면서 다른 병사들의 반응을 기대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직접 아직 힘조차 주지않고 있던 벨리안느의 검을 재빨리 올려쳤다. 충격을 채 느끼기 전에 벨리안느의 검은 둔한 빛을 뿌리면 뒤쪽으로 날아갔으며, 동시에 벨리안느는 자신의 목에 들어온 칼날을 바라볼 수 있었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벨리안느는 갑자기 일어난 상황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다만 모두의 시선이 타하란의 칼날에 집중될 뿐이었다.

칼날은 겨울의 기운을 간직한 채 벨리안느의 목선을 따라 휘감더니 목뒤로 늘어진 머리카락에 가서 움직임이 멈추었다. 그리고는 차디찬 겨울의 기운을 내뿜으며 잠시 동안 호흡을 가다듬는 듯 했다.

마침내 칼날은 길게 곡선을 그었고, 칼등으로 올려진 머리칼이 춤을 추듯 공중에 흩날렸다. 그리고 타하란은 그 순간에 벨리안느의 뒷목에 새겨진 아주 복잡한 무늬를 보았다.


수 십 마리의 뱀이 꽈리를 틀고 있는 듯한 그 무늬를 보는 순간 타하란의 눈은 하염없이 커졌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하시는 겁니까? 몸이 불편한 얘 건드려서 뭣하게요!”

뒤늦게 사빈과 그의 동료들이 타하란에게 달려들었다. 그들은 평소에 침착한 백부장이 왜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지 이해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벨리안느는 어렴풋이 그의 의도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한가지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벨리안느는 마법 시전을 머뭇거렸다. 상대는 인형이 아닌 사람이었다. 자신의 과오로 고통을 받을 줄 아는 사람..


그런 머뭇거림 속에, 타하란은 분대원을 뿌리치고 날렵하게 날아들어 검을 휘둘렀다.


커다란 호를 그리며 칼은 목표물에 정확히 닿았고, 벨리안느는 소리 없이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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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4장 - 개벽(開闢)_1화_ 선고 (1) 20.06.05 68 4 10쪽
34 3장 - 효시(嚆矢)_5화_전조_(2) +2 20.06.04 69 4 12쪽
33 3장 - 효시(嚆矢)_5화_전조_(1) 20.06.03 66 3 12쪽
32 3장 - 효시(嚆矢)_4화_구금소 (2) 20.06.02 60 3 7쪽
31 3장 - 효시(嚆矢)_4화_구금소 (1) 20.06.02 65 3 9쪽
30 3장 - 효시(嚆矢)_3화_만인의 적이 지나가는 길(3.끝) +2 20.06.01 64 3 9쪽
29 3장 - 효시(嚆矢)_3화_만인의 적이 지나가는 길(2) 20.06.01 64 3 11쪽
28 3장 - 효시(嚆矢)_3화_만인의 적이 지나가는 길(1) +2 20.05.31 68 4 8쪽
27 3장 - 효시(嚆矢)_2화_하늘층 회의(2) +1 20.05.29 74 4 12쪽
26 3장 - 효시(嚆矢)_2화_하늘층 회의(1) 20.05.29 76 4 7쪽
» 3장 - 효시(嚆矢)_1화_무언 마법사의 조우 20.05.28 80 4 10쪽
24 2장 - 일체일념(一體一念) _8화_일체일념(끝) 20.05.28 84 3 11쪽
23 2장 - 일체일념(一體一念) _8화_일체일념(4) +1 20.05.25 90 5 10쪽
22 2장 - 일체일념(一體一念) _8화_일체일념(3) 20.05.25 88 4 9쪽
21 2장 - 일체일념(一體一念) _8화_일체일념(2) +2 20.05.22 92 6 7쪽
20 2장 - 일체일념(一體一念) _8화_일체일념(1) 20.05.22 99 5 8쪽
19 2장 - 일체일념(一體一念) _7화_ 별빛과 망루(2) 20.05.21 111 5 10쪽
18 2장 - 일체일념(一體一念) _7화_ 별빛과 망루(1) +1 20.05.21 106 7 7쪽
17 2장 - 일체일념(一體一念) _6화_ 거점 투입 20.05.19 117 5 11쪽
16 2장 - 일체일념(一體一念) _5화_담소 (談笑) +1 20.05.18 134 6 10쪽
15 2장 - 일체일념(一體一念) _4화_월몰 기도식 20.05.18 123 6 9쪽
14 2장 - 일체일념(一體一念) _3화_스승과 제자(2) 20.05.16 134 5 10쪽
13 2장 - 일체일념(一體一念) _3화_스승과 제자 20.05.15 178 8 9쪽
12 2장 - 일체일념(一體一念) _2화_흠결 20.05.15 178 6 7쪽
11 2장 - 일체일념(一體一念) _1화_만인의 죄인 20.05.14 284 7 12쪽
10 1장 - 악몽(9) 20.05.14 250 6 12쪽
9 1장 - 악몽(8) 20.05.13 261 6 11쪽
8 1장 - 악몽(7) 20.05.13 291 7 8쪽
7 1장 - 악몽(6) 20.05.12 302 7 7쪽
6 1장 - 악몽(5) +2 20.05.12 403 10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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