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스파이
한편 독일 각지에서 활약하는 레드 오케스트라 요원들은 아프베어가 추적하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공산주의자 크루스는 서둘러 자신의 서류, 무전기, 암호 해독기 등을 분해해서 가방 안에 넣고 집 밖으로 나섰다. 집주인 아주머니가 크루스에게 웃으며 말했다.
"커피 드시겠소?"
"괜찮습니다."
어쩌면 저 집주인 아주머니가 자신에 대해 눈치를 채고는 이미 아프베어에 밀고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크루스의 방에는 무전기가 있었고 집주인 아주머니는 가끔 차를 끓였다며 크루스의 방 문을 두드리고는 했다. 크루스는 그 때마다 황급히 무전기를 숨겨야 했다. 크루스는 확실히 다 챙겼는지 확인했다.
'빠진건 없나?'
크루스는 모든 장비를 챙기고 인근 숲으로 달려갔다.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며 따라오는 자가 있는지 확인했다. 크루스의 주머니에는 통조림 모양의 미니 폭탄과 회중시계 권총이 있었다. 따라오는 자가 있으면 이걸로 사살해야 했다. 크루스는 한참을 깊숙히 들어간 다음 숨을 돌렸다.
"헉..허억..."
크루스는 커다란 나무 세 그루에 x자로 표시를 해놓고는 그 세 나무가 이루는 삼각형의 무게중심 지점에 땅을 판 다음 모든 장비를 묻어 두었다.
그리고 이 시각, 한스는 최전선 사령부에서 실시간으로 소련군 움직임에 대한 보고를 듣고 있었다. 최근 아프베어는 케셀링을 통하여 모스크바에 거짓 정보를 흘려보냈다. 하지만 소련군의 부대 이동을 보니 이 거짓 정보에 속아넘어가지 않은 듯 했다.
한스는 주먹을 세게 쥐었다.
'이 망할 스탈린 새끼...'
한스는 독일군이 최근에 잡은 포로들이 가족으로부터 받은 편지도 모조리 자신에게 보고하라고 했다. 한스는 러시아인들의 사기를 분석하기 위하여 그 편지 내용을 직접 읽어보았다. 한스가 속으로 생각했다.
'이들은 절대로 쉽사리 항복하지 않을 것 이다...'
이렇게 나오면 독일 입장에서는 어떻게던 모스크바를 완전히 점령해야 할 것 이다. 현재 한스는 최근 마르틴 사건 때문에 상당히 자신의 입지가 불리해진 상황이었다. 이럴수록 어떻게던 전공을 세워야 했다.
잠시 뒤, 한스는 최전선 사령부에서 카나리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스탈린이 함정에 걸려들지 않았소."
카나리스가 말했다.
"원래 스탈린은 첩보원들이 주는 정보를 쉽사리 믿지 않았소. 심지어 가장 고위급 첩보원이 얻어낸 정보도 반신반의했지. 이런 이중 첩보 작전은 쉬운 일이 아니오."
한스가 말했다.
"남은 레드 오케스트라 잔당들을 제거하는데는 시간이 얼마나 걸리오?"
"첩보전에 대해서는 완전 잘못 아시는구려. 레드 오케스트라 조직을 완전히 추적하는것은 불가능에 가깝소. 그리고 주요 요원들을 잡아들여도 일주일만에 첩보망이 재건될 것 이오. 또 일부 잔당을 추적해서 잡으면 나머지 주요 요원들은 모조리 도망가 버리오. 물론 몇 년 이상 시간을 들여서 추적하면 그물로 한 번에 대어들을 낚을 수 있을 것 이오!"
카나리스는 비싼 최고급 샴페인을 마시며 태연하게 말했다. 한스는 식은 땀이 줄줄 흘렸다.
"지금 빨리 모스크바를 점령하는게 독일이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오. 올해 내에 결판을 내지 않으면 승리할 확률이 훨씬 줄어들 것 이오. 지금 전세계가 이번 전쟁으로 독일이 농업국가 수준의 경제력으로 전락하기를 바라고 있소. 점점 석유 등 전쟁에 필수적인 자원을 수입하는게 어려워 질 것 이오."
카나리스가 말했다.
"내가 말한대로만 해주시오."
그 날, 한스는 사령부의 장성들에게 조만간 모스크바를 점령할거라고 호언장담을 했다. 그리고는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현재 소련군 첩보망 핵심에 우리 쪽 이중스파이가 있소! 스탈린 측근 중에도 우리 쪽 첩자가 있소. 조만간 모스크바는 점령될 것 이고 제 때 도망가지 않은 어리석은 스탈린의 목이 따일 것 이오."
참고로 한스는 일부러 목소리를 크게 냈다. 아마 바깥에 있는 녀석들도 다 이 말을 들었을 것이었다. 그리고 입이 싼 녀석들은 분명 여기저기 소문을 내고 다닐 것 이었다.
한스가 속으로 생각했다.
'소련군의 첩보망을 완전히 분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스탈린으로 하여금 그 정보들을 신뢰하지 않게 하는게 유일한 방법이지...'
분명 스탈린 성격대로라면 히스테리를 부려서 주변인들을 숙청할 것 이었고, 한스는 그것을 노린 것 이었다.
그리고 이 시각, 영국의 일간지에 독자 마당에는 그닥 눈에 띄지 않는 작은 수필이 실렸다. 그 수필의 주인공의 이름과 기타 특징은 MI6의 핵심 요원 중 한 명과 똑같았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사람을 찾는다는 광고에는 MI5 비밀 요원들의 이름과 신체 특징이 적혀 있었다.
이 일로 인하여 영국의 MI5와 MI6는 완전히 뒤집어졌다. 도대체 어떻게 요원들의 정보가 노출된건지 알아내야 했다. MI5의 국장은 책상을 내려치고 재떨이를 던지고 신문에 있는 모든 글자를 읽어 보았다.
그렇게 MI5, MI6는 영국 내에서 활동하는 레드 오케스트라를 소탕하기 시작했다. 중절모를 쓴 한 사내는 대영박물관의 쓰레기통 옆에 검은색 상자를 놓고 갔다. 그리고 잠시 뒤, 다른 사내가 은근슬쩍 그 쓰레기통으로 가서 상자를 주워들려는 순간, MI5 요원들이 클로로포롬을 이용하여 그 사내를 마취해서 납치했다.
MI5의 국장이 책상을 치며 호통을 치며 명령했다.
"빨리 국내에 빨갱이들을 소탕해야하네!!"
그 때, 한 직원이 식은 땀을 질질 흘리며 뉴욕 타임즈 한 부를 건네주었다.
"이게 뭔가?"
그 직원은 국장을 향해 식은 땀을 뻘뻘 흘리며 억지 미소를 지었다.
'도망가고 싶다!!!'
MI5 국장은 뉴욕 타임즈를 펼쳐보았다.
[영국의 모든 정보는 모스크바로 향하고 있었다!!]
아프베어는 이렇게 레드 오케스트라가 영국, 프랑스, 미국에서 첩보 활동을 하고 있었단 증거를 모조리 언론으로 까발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영국과 프랑스 국민들의 여론은 독일이고 소련이고 둘 다 좆같은 녀석들이니 같이 망해버려야 한다는 의견이 대세였다. 미국에서는 돈이나 많이 벌면 된다는게 대다수의 인식이었다. 하지만 영국인들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소련의 위협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술집에서 사람들이 모이면 주위를 둘러보면서 혹시 맞은편 테이블에 앉은 녀석들이 스파이는 아닌지 의논하고는 했다.
카나리스가 흡족하게 웃으며 한스에게 말했다.
"이제 서방에서도 소련의 위험성을 잘 알게 될 것 이오!"
한편, 오토를 포함한 만토이펠 대대원들은 지옥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부상자들을 치료할 의약품이 없었고 파리 떼가 부상자들에게 달려들었다. 심지어 벌레들도 살이 썩어가는 냄새와 피 냄새를 맡고는 부상자들의 상처 부위로 접근했다. 위생병들은 이 벌레와 파리들을 일일히 하나씩 처리해야 했다.
군마가 죽으면 병사들이 모조리 달려들어서 살점을 때어냈다. 한 우크라이나 병사는 손이 피칠갑이 된 상태로 죽은 군마의 가장 두터운 넙적다리 살을 때어냈다. 그렇게 때어낸 살점을 이즈빗 코펠로 완두콩 스프 블럭과 같이 끓이면 그야말로 특식 중에 특식이었다.
여전히 하늘에서는 추적추적 비가 오고 있었다. 그래도 비가 오는 덕분에 소련군이 폭격을 할 수 없게 되어서 다행이었다. 지금은 오후 1시였고 아직 밤이 되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 소련놈들은 주로 야간의 공격을 했기 때문에 밤만 되면 또 총격전이 벌어질 것 이었다.
지금 전차들의 연료는 모조리 바닥이 났기 때문에 소련군이 침투할 수 있는 곳에 비치해둔 상태였다. 그렇게 전차가 배치된 곳 근처 건물에는 전차를 엄호해주는 아군 저격수와 기관총 사수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오토가 걱정이었던 것은, 현재 기동불가된 전차는 아군의 엄호가 필수적이었다. 그런데 그 저격수와 기관총 사수 새끼들은 야간에 자꾸 소련군이 있지도 않은 곳에 헛사격을 하며 총알을 낭비하고 있었다.
소련군 또한 포위된 독일군이 심리적으로 매우 쪼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았고, 수시로 조명탄을 쏘고 일부러 독일군이 포위된 방향으로 박격포를 한 두 발씩 쏘면서 겁을 주었다. 그 때마다 독일군 보병들은 허공을 향해 총알을 흩뿌렸던 것 이다.
지금 포위된 병력 중에는 우크라이나, 백군, 헝가리, 루마니아, 오스트리아계가 뒤섞여 있었고 이 또한 상당히 골칫거리였다. 독일군에 합류한 소련군이나 소련 주민들은 히위라고 불리운다. 루마니아군이나 우크라이나군은 러시아인을 매우 싫어했기때문에, 히위들이 이들에게 공격당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물론 상부에서는 각국의 부대들에 인종 차별을 금지하고 사이 좋게 지내도록 명령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런 포위 상황에서 각국의 부대의 교류가 증가했고 종종 살벌한 분위기로 이루어지고는 했다. 소련군은 포위된 지역에 여러 국적의 부대가 모여있다는 것을 알아냈고, 각국의 언어로 된 삐라를 수시로 뿌렸다.
[왜 독일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가?]
[고향에서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다!]
[여기서 싸우는 것은 독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 이다!]
슐레프 중대와 같은 건물을 쓰는 우크라이나군이 이 삐라를 이용해서 담배를 말아 피우며 말했다.
"멍청하기는...난 독일을 위해서 싸우는게 아니라 러시아 네 놈들의 목을 따러 싸우는 것일 뿐이야!"
오토는 슬쩍 소련군 출신의 바실리를 쳐다보았다. 바실리는 다행히 아까부터 계속 자고 있었다.
"제각기 다양한 이유로 싸우는거지."
오토 소대의 오스트리아계 포수 폴스터는 자신이 왜 독일군으로 싸우게 되었나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대학에서 공산주의자들이 벽보를 붙이고 학생들을 선동했습니다. 저랑 친하게 지내던 녀석도 알고보니 공산주의자였죠. 저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대학 군단에 들어갔습니다. 민병대에서 활동하다가 공산주의자 한 놈을 죽이는데 성공했습니다. 놈들이 경찰청을 무단 점거하고 무기를 약탈하고 법무성에 테러를 했는데 가만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대단하군! 훌륭해!"
폴스터가 신나서 말을 이었다.
"저와 동료들은 괴벨스의 연설을 듣고 진작에 나치당에 입당 원서를 냈습니다. 저는 제 스스로가 완벽한 독일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대 내에는 나치당 지지자, 사회민주당 지지자, 가톨릭중앙당 지지자가 있었고 이들은 굳이 서로의 정치 성향을 비난하지 않았다.
현재 오스트리아인은 모든 독일 주민들과 동등한 권리를 가졌으며, 폴스터와 같은 오스트리아계 병사들은 자신이 독일인이라 생각했다.
인종차별 의식이 있는 독일인들조차도 오스트리아계는 자신들과 같은 민족이라 생각했고, 실제로 오스트리아계에는 암묵적인 차별조차 없었고 진급에서도 불이익을 받지는 않았다.
사실 오스트리아계를 제외한 다른 다국적 군들은 절반 이상이 문맹이었다. 뿐만 아니라 루마니아 장교들은 군에 있어서 기초적인 교리조차 모를 정도로 수준이 낮았고, 어떤 루마니아군 부대는 대다수가 범죄자 출신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헝가리 군은 전투에 있어서 그닥 열의가 없었다. 러시아 백군과 우크라이나군은 지나치게 잔인했고 이들은 서로의 정체를 알게 되면 서로 죽이겠다며 싸우는 일도 흔했다.
우크라이나군과 핀란드군 모든 부대 중에서 가장 사기가 높기로 유명했다. 이들은 소련에게 계속해서 지배당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선택할 것 이었다. 그리고 전쟁터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병사만큼 쓸모있는 것은 없었다. 다른 병사들이 고개를 내밀지 않고 허공에 소총을 쏠때, 우크라이나 출신 베테랑은 소련군이 점거한 건물에 수류탄을 집어넣고는 했다.
오토가 속으로 생각했다.
'우크라이나 녀석들은 어떻게 저럴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투지가 강한 녀석들 덕분에 지금 포위 당한 상황에서도 나름 잘 버티고 있었다. 독일군은 우크라이나군과 러시아 백군의 전쟁 범죄를 거의 눈감아주고 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괜히 이들을 건드렸다간 부대 간 싸움이 벌어질 수도 있었고, 단체로 탈영을 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지크프리트 4인조의 크리스티안이 말했다.
"또 순무의 겨울이 오는 것은 아닌가 모르겠군..."
마티아스가 지크프리트 4인조에게 물었다.
"순무의 겨울은 어땠습니까?"
에밀도 물었다.
"커틀릿, 빵, 커피 모든게 순무로 만들었다는게 사실입니까?"
올라프가 말했다.
"순무 빵 정도면 양반일세! 나중엔 아예 톱밥으로 빵을 만들었다고!"
로베르트가 말했다.
"아직도 그 빵만 떠올리면 내장이 뒤틀리네."
알프레트가 말했다.
"하..하지만 외국으로부터 식량은 사들이고 있으니 그 때와 같은 일은 생기지 않을 겁니다. 비록 놈들이 바가지 씌우고 팔고 있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호르스트가 말했다.
"이보게 자네들은 영국, 프랑스 그 새끼들을 믿나? 놈들은 독일에 이를 갈고 있네! 아마 이번 전쟁으로 독일과 소련 양쪽 다 망하길 바라겠지! 놈들이 과연 곡물을 계속 수출할지 확신할 수 없네. 어쩌면 서부에서 뒤통수를 칠 수도 있지!"
크리스티안이 호르스트의 대가리를 퍽 때렸다.
"사기 떨어지는 소리 그만해!"
그 때 오토가 와서 지크프리트 4인조에게 말했다.
"뒷골목에 고기 파는 곳이 있는데 같이 갑시다!!"
최근에 소련군이 야음을 틈타서 침투하는 일이 흔했기 때문에 가능하면 정예병들과 같이 이동하는 것이 좋을 것 이었다. 그렇게 오토는 지크프리트 4인조와 함께 뒷골목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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