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겨울
로빈은 힘을 주어 어떻게든 철조망을 잘라보려고 했는데, 실수로 철조망 가시에 손가락을 베였다.
‘아앗! 젠장!’
하지만 프랑스 병사들에게 들킬 까봐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다.
탁!
가끔 동료들도 철조망을 자르다가 실수해서 탁 하는 소리가 나기도 했다. 그 때마다 철조망 절단조 병사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 적의 동태를 살폈다. 다행히도 아직 놈들이 눈치채지는 못한 것 같았다.
‘돌격대는 언제 전투 하는 거지?’
로빈은 불현듯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가 철조망을 다 자르지 못했는데 돌격대가 패배해서 탈출해야 한다면?’
로빈은 더욱 속도를 내서 철조망을 자르기 시작했다. 장갑 여기저기가 철조망에 긁혀서 너덜거렸다. 그 순간, 저 쪽에서 금속 소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끼기긱 끼기기긱
철조망이 깔려 있는 넓은 지대의 양 측에서 두 개의 절단조가 몰래 철조망을 자르며 프랑스 군이 점령한 농가에 접근하고 있었고, 전차들이 가운데 쪽에서 철조망을 짓밟으며 밀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보병들이 전차 뒤에서 소총을 들고 따라오고 있었다.
로빈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이제 놈들은 우리가 공격하고 있다는 걸 알겠지···’
역시 그러했다. 프랑스 병사들의 고함 소리와 함께 잠시 뒤, 여기 저기서 기관총 소리가 요란하게 공기를 두들겨대기 시작했다.
드드득 드드드득 드득
로빈은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프랑스 놈들은 이제 파인애플형 수류탄도 전차를 향해 던지기 시작했다.
쿠광!! 콰과광!
로빈은 차가운 흙바닥에 납작하게 드러누워서 하늘을 보고 있는 상태로 철조망도 자르지 않고 그대로 시체처럼 멈춰 있었다.
드드득 드드드득
콰광!쿠과광!
로빈은 공포심에 숨도 쉴 수 없었다.
‘어떡하지..빠져 나가야 해..’
하지만 지금 로빈은 소총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대로 도망치다간 놈들의 기관총의 밥이 될 것이 분명했다. 결국 그대로 누워 있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로빈은 애써 숨을 가다듬으려고 노력했다.
“어헉···헉···.”
천만 다행히도 기관총은 가운데로 밀고 들어 오고 있는 전차부대만을 노리고 있었고, 로빈이 있는 쪽으로는 총알이 전혀 날라오지 않았다.
드드득 드드득 드득
끼이이익 끼이이익
기관총에서 나오는 수 많은 총알들은 마치 강낭콩처럼 전차 장갑에서 튕겨져 나왔다. 로빈은 독일 전차가 천천히 프랑스 군을 향해 전진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전차 뒤로는 아군 보병들이 소총을 들고 천천히 따라오고 있었다. 전투에서 패배할 경우, 아군 보병들은 로빈과 다른 절단조가 양측에 미리 철조망을 잘라놓아 만들어 놓은 통로로 도망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잘라야 해···손을 움직여! 어서 잘라!’
“헉···어헉..”
로빈은 겨우 숨을 가다듬고, 다시 철조망을 자르기 시작했다.
타악!
총소리가 워낙 컸기에 이제는 철조망을 자르는 소리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로빈은 얼어 붙은 손가락으로 가위에 힘을 주어 철조망을 잘라냈다.
탁!
“헉···헉···헉···”
프랑스 병사들의 비명 소리와 독일 병사들의 비명 소리가 양 쪽에서 공기를 찢어 놓았다.
“으아아악!!! 아악!!”
“놈들이 오고 있어!”
“전차다!”
“돌격해!”
한 쪽에서는 독일어로, 다른 쪽에서는 프랑스어로 여기 저기서 비명 소리가 들렸다.
“아악! 나 맞았어!”
“의무병!”
이 때, 한스는 티거에 탑승한 채로 천천히 프랑스 군을 향해 전진하고 있었다.
“전진! 그대로 전진한다!”
언제부턴가 한스는 전차에 탑승하면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모든 엿 같은 것들을 머리 속에서 떨쳐 내고, 오로지 전차에만 집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티거의 무한궤도는 한스의 양 다리 같았고, 티거의 관측창은 한스의 눈이었다. 심장은 빠른 속도로 두근거렸지만 머리는 차가워졌다. 한스가 우렁차게 소리쳤다.
“오늘 저 농가를 탈취하면 모두 따뜻한 밥을 먹고 휴식을 취할 수 있다! 전진해!”
-2020년 12월 어느 날-
한 독일 청년이 친구들과 함께 촬영기기를 들고 농가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을 방문했다. 취미 삼아 밀리터리 유투버를 하는 그 청년은 촬영기기로 영상을 찍으며 실시간 스트리밍을 하면서 자신의 구독자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구독자 여러분. 드디어 제가 이 곳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1차 대전 당시에 독일군과 프랑스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지역입니다. 오늘 운이 좋다면 이 곳에서 인식표나 헬멧을 주울 수도 있지 않을까요?”
나무들은 잎이 모두 떨어져 앙상한 나뭇가지만이 남아있었고, 하늘에는 회색빛이 감돌았지만 그 독일 청년이 촬영하는 풍경은 꽤나 쓸쓸하고 적막하면서도 제법 운치가 있었다.
“경치가 참으로 기가 막히죠? 이 곳에서 병사들은 생과 사를 넘나들며 치열한 전투를 했다고 합니다. 지금 날씨가 제법 추운데, 겨울이라면 특히 더 끔찍했을 것 같네요.”
친구들은 이미 1차 대전 당시 독일 군복을 입고는 철제 깡통이랑 기구를 이용해서 커피를 끓이고, 비스킷을 먹고 있었다. 그 독일 유투버는 촬영기기로 자신들의 친구를 찍으며 말했다.
“1차 대전 당시에 병사들이 이런 식으로 커피를 끓여서 비상식량을 요리했습니다.”
친구가 찬 바람에 덜덜 떨며 커피를 끓이고는 화면 앞에 자신이 준비한 비스킷을 보여주었다. 마트에서 비스킷을 사서 포장을 벗긴 이후에, 옛날 느낌이 나는 헝겊으로 싸서 군복 주머니 안에 넣어둔 것 이었다.
“이게 제 군용 식량입니다. 전투 뒤에 즐기는 꿀맛 같은 휴식이죠.”
친구들이 모두 킥킥거리며 웃었다. 유투버는 친구들과 함께 방송을 하며 이 흥미로운 시간을 시청자들과 함께 즐기고 있었다. 실시간 스트리밍에는 점점 많은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시청자들이 채팅창에서 실컷 떠들어댔다.
[그 당시 병사들은 미래에 후손들이 사서 썡고생 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거야!]
[20세기 초 병사들 : 미래에는 자동화된 기계들이 전쟁을 할 거야. 21세기 초 유투버 : 코스프레 군복을 입고 커피를 끓인다]
[21세기 젊은이들의 재미있는 취미생활]
유투버는 촬영기기를 옆에 내려놓고, 친구들과 같이 준비한 군용 식량을 끓여 먹으며 방송을 했다. 그러자 근처를 지나가던 사람들이 그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촬영하기도 했다.
그 유투버는 친구가 끓인 군용 식량과 커피를 맛보며 말했다.
“윽···참 오묘한 맛이군요. 하지만 1차 대전 당시 군인들에게는 귀한 식량이었겠죠?”
친구가 웃으며 말했다.
“먹고 싶으면 니가 알아서 요리하던가 이 자식아”
유투버가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2020년 코로나로 최악의 한 해를 보내고 있는 분들에게 제 영상으로 조금이나마 재미를 드리고 싶어서 준비했습니다.”
유투버의 말에 실시간 스트리밍 채팅창이 불타올랐다.
[2020년 젊은이 : 올해가 최악의 한 해야. 1914년 젊은이들 : 뭐라고 이 자식아? 1917년 젊은이들 : 뒤지고 싶냐?]
유투버는 앞에 커다랗게 ‘?’ 가 그려져 있는 박스를 가지고 오면서 이야기했다.
“오늘 제가 아주 특별한 것을 준비했습니다. 제가 운 좋게 입수할 수 있었는데요.”
스트리밍 채팅창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짝퉁 철십자 훈장이냐?]
유투버가 고개를 지으며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 짝퉁 철십자 훈장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엄청난 걸 준비했습니다.”
유투버는 캠핑용 나이프로 상자를 찢고는 조심스럽게 윗부분을 열었다. 그 안에는 녹이 슬어 표면이 거칠거칠해진 독일 병사의 헬멧이 들어 있었다. 유투버가 촬영기기를 들어 헬멧을 가까이서 촬영하였다. 실시간으로 5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몰려와서 영상을 보고 있었다. 유투버가 말했다.
“이 헬멧을 쓴 병사가 느꼈을 두려움을 상상해 보십시오. 사방에서 총알이 비오듯 쏟아질 때, 이 앙상하고 가는 나무들은, 그닥 좋은 엄폐물이 되지는 못했을 것 같네요.”
유투버가 촬영 기기로 주변에 있는 나무들과 땅에 파여 있는 얕은 구덩이들을 보여 주었다. 그는 그 얕은 구덩이 안으로 들어가서 몸을 수그려 보았다.
“흠···이 정도 구덩이에서는 엄폐가 되지 않았을 것 같네요.”
실시간 채팅창에서 사람들이 떠들어댔다.
[야전삽 안 갖고 왔냐?]
[군인이면 삽질이지.]
[다른 스트리머는 참호도 파던데 넌 참호 안 파냐?]
유투버가 자리로 돌아와서 다시 헬멧을 촬영하며 말을 이었다.
“그는 전투에서 살아남았을까요? 다행히 이 헬멧에는 총알 자국은 없네요. 어떤 헬멧들은 발견 당시에 총알 자국이 두어 개 남아 있는 것도 있다고 합니다. 심지어 어떤 헬멧은 안 쪽에 핏자국이 현재까지 남아있다고 하네요..”
유투버가 조심스럽게 헬멧을 뒤집어 보았다. 재미없게도, 이 헬멧은 안 쪽에 핏자국은 없었다.
“이것은 땅에 오랜 시간 묻혀 있었는데, 금속 탐지기에 의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이 헬멧은 어쩌다가 땅에 묻히게 되었을까요? 이 헬멧의 원래 주인이 총에 맞은 걸까요? 아니면 필요 없어져서 버려진 걸까요? 어쩌면 이 헬멧의 주인은 포로로 잡혔을지도 모릅니다.”
[모든 헬멧은 각자의 주인이 있는 법이지.]
[뭔가 좀 슬프군.]
[어쨋던지 저 헬멧을 쓰던 병사는 죽었을 거야.]
[누군가는 저 헬멧의 주인을 그리워하지 않았을까?]
그 날 유투버는 친구들과 촬영을 마치고 짐을 정리했다. 그 중 한 친구가 유투버를 부르며 말했다.
“이봐! 루카!”
하지만 그 유투버는 촬영해둔 영상을 핸드폰으로 보느라 정신이 없어서 친구의 말을 듣지 못했다.
“야! 루카 파이퍼! 짐 챙기라고!”
“아아 미안.”
루카 파이퍼는 금속 탐지기를 들고 친구들과 길을 가기 시작했다.
“근데 이게 통할까?”
그렇게 한참을 금속 탐지기를 들고 왔다 갔다 하는데, 금속 탐지기에서 삑삑거리는 소리가 났다.
삑삑
“파 볼까?”
“추운데 그냥 가자 동전이겠지.”
하지만 루카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삽으로 얼어 붙은 땅을 파기 시작했다.
“젠장 존나게 안 파지네! 니들도 좀 도와줘!”
“어?? 저게 뭐야?”
“야 조심해서 파!”
루카가 조심스럽게 녹슨 금속 덩어리를 꺼냈다. 친구 펠릭스가 말했다.
“이···이거···약협이잖아!”
“누가 이 근처에서 포를 쏜 거야!”
루카가 금속 탐지기로 주변을 더 살펴보았다. 그들은 몇 개의 기관총 탄피를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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