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마지막 회
“염라대왕께서 니 하소연이 사리에 어느 정도는 맞다 허시고, 나헌티 아주 약간만 능력을 주고 오라시더라.”
‘능력? 어떤 능력?’
순덕의 귀가 솔깃해서는 방장석에게 얼굴을 들이댔다.
“···뭔디유?”
“너도 예비 저승사자 아녀? 그러니 뭔가 혜택이 있어야겄다 생각허셔서 너가 집에 들이는 짐승허고는 말을 헐 수 있게 해주고 오라시더만.”
순덕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정말유?”
“그려.”
“그럼 검둥이랑은 말 통하는 거쥬?”
“아, 그려.”
순덕이 안절부절하며 방장석에게 물었다.
“저기, 그것도 주문 외야 해유?”
“왜? 주문 외야 되게 해줘?”
“예? 아녀유, 아녀유. 아이고, 아부지. 지 생각 해주는 건 아부지 밖에 없슈.”
“염라대왕님이 들으실건디···.”
순덕이 방장석의 말에 하늘을 향해 넙죽 엎드리며 아주 다소곳하게 말했다.
“아이고, 염라대왕 마마님, 제가 정말 그럴 마음은 아닌디 죄송, 죄송혀유. 그리고 아주 많이 감사혀유. 제가 쫌 성질이 더러워서···, 뭐 한 식구라고 생각해 주시니 이해해 주실 거쥬?”
옆에 서있던 방장석이 순덕의 그 모습을 보고는 혀를 찼다.
“아주 지랄을 혀, 지랄을. 언능 일어나! 아직 헐 말이 더 있구먼.”
순덕이 발딱 일어나 방장석 옆으로 붙었다.
“뭔디유?”
“너 제사 좀 오래 모셔야겄다. 명절에 육포 좀 많이 가져와. 자, 이렇게 염라대왕님 심부름은 끝이 났고···, 그리고 이거나 받어.”
방장석이 던져준 것은 아주 번쩍이는 흰돌이었다. 돌이 반질반질한 것이 아주 예쁘기는 했지만 염라대왕의 바둑돌을 떠올린 순덕의 눈이 샐쭉해졌다.
“이건 뭐래유?”
“바쁜 삼신 할매께서 대신 전해주라신다. 잘 간직 혀. 흠흠.”
뜬금없는 삼신 할매 타령에 순덕이 눈만 꿈벅였다. 아직 그럴 일이 없는데 아버지는 새 인연이 들거라 하고, 삼신 할매는 생기지도 않은 애 태몽을 심부름으로···? 세상에 이런 경우도 있나?
순덕이 혼란스러워하거나 말거나 방장석은 제 할 말을 다 마쳤다는 듯 미련없이 돌아섰다.
“그럼 다음에 또 보자. 자꾸 일 안 허고 뭐하냐고 저-기서 부르는구먼. 간다.”
“아니, 아부지, 그냥 그러고 가시면 지가 뭔 말인지 어떻게 알아유? 아부지! 아부지!”
“할머니, 할머니, 왜 그러세요?”
순덕은 자면서 제 아버지 방장석을 부르자, 자다가 그 소리를 듣고 놀라 순덕의 방으로 들어온 인한이 순덕을 흔들어 깨웠다.
그 덕에 순덕은 잠에서 깼다.
“아니, 무슨 잠꼬대를 그렇게 하세요? 혹시 가위 눌리셨어요?”
순덕이 벌떡 일어나 주변을 살펴보았다.
아직 날이 밝지는 않았다.
아버지가 오셨던 게 틀림없었다.
순덕의 잠꼬대로 인한 소란에 검둥이마저 잠에서 깨서 순덕에게로 왔다.
이유는 모르지만 순덕에게 친근감을 많이 느끼는 검둥이었다.
- 할머니, 괜찮아요? (월, 월.)
얼결에 검둥이의 말을 알아들은 순덕이 대답했다.
“잉, 괜찮어. 검둥아, 가서 자.”
- 네. (월!)
검둥이 역시 순덕의 말을 알아듣고는 제 자리에 가서 다시 누웠다.
옆에서 보고 있던 인한이 순덕과 검둥이를 번갈아보다가 물었다.
“혹시 검둥이 말 알아들으신 거예요?”
“잉? 그렇네? 아하하하하하.”
순덕은 방금 꿈에서 본 아버지 이야기를 인한에게 하였다.
다시 검둥이와 말할 수 있을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말하는 순덕의 표정이 밝았다.
여전히 인한의 표정은 반신반의하는 듯 했지만 순덕은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순덕이 인한에게 말했다.
“근디 아부지가 새 인연이 곧 집에 들어 올거라 허시는디 이게 뭔 소린지 모르겄어.”
순덕의 말에 인한의 어깨가 순간 움찔했지만 순덕은 미처 보지 못했다.
얼굴이 붉어진 인한이 얼른 일어나 제 방으로 향했다.
“할머니, 저 좀 더 잘게요.”
“그려.”
순덕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중얼거렸다.
“근디 제사를 오래 모시란 말씀은 뭔 소리여?”
순덕의 중얼거림을 들은 인한이 제 방으로 가면서 말했다.
“제사 오래 지내시려면 오래 사셔야죠. 뭘 고민하세요?”
염라대왕과의 약속을 모르는 인한이 고민도 없이 말을 뱉고는 제방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순덕은 인한의 말을 듣고 정말 그런 뜻인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되면 손주까지 다 보고 가도 되는 건데 싶은 생각이 들자 작은 흥분에 가슴이 울렁거렸다.
한참 이런저런 생각에 빠졌던 순덕은 새벽에야 잠에 들었다.
***
새해 초부터 순덕은 식당일로 정신없이 바빴다.
순덕이 돌아오자 식당도 더 활기가 돌았다.
단골들은 오랜만에 보는 순덕을 붙잡고 안부 묻기 바빴고, 순덕 역시 자신이 없어도 발걸음을 돌리지 않은 단골들에게 꼬박꼬박 감사 인사를 했다.
검둥이는 저와 말이 통하는 순덕을 아주 잘 따랐다.
순덕은 인희에게 검둥이가 혼자 다니지 않게 검둥이 마음에 드는 강아지를 한 마리 찾아보라 했고, 인희 역시 그럴 필요가 있다고 동의했다.
박 경감은 인한과 인희를 찾아와 당시의 상황을 세세히 물었다.
당시 화상을 입고, 다리나 팔, 갈비뼈 등이 부러진 깍두기들에게서 불개의 이야기가 또 나오자 흰둥이의 부검 결과까지 챙겼지만 흰둥이에게서는 어떤 특별한 점도 알아내지 못했다.
정황이 명확하고, 경수와 인한, 인희의 증언이 있어 사건 자체가 미궁으로 빠지지는 않았지만 찾을 수도 없는 불개에 대한 진술은 여전히 박 경감을 괴롭혔다.
흰둥이의 시체는 이주일 뒤에 인수받았다.
순덕은 반려견 장례식장을 통해 조용히 흰둥이의 장사를 치루었다.
인한은 현수와 경수에게 연락을 취해보려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현수야 어디선가 재판을 받고 있을 거라 생각할 수 있었지만 경수에게도 연락이 닿지 않는 것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현준의 사건은 뉴스에도 나지 않았다.
인한은 경수에게 언제든 필요하면 연락 달라는 문자를 남기고, 더 이상 연락을 취하려 애쓰지 않았다.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가 며칠 후면 2월이었다.
요 며칠동안 인한이 엄청 바쁘게 움직였다.
나쁘게 말하면 산만하게 움직였다.
대놓고 민정을 챙기는 것은 그렇다 쳐도 민정이 조금만 움직여도 안절부절을 못 하는 모습을 보고 순덕은 속으로 ‘저놈이 저렇게 팔불출이었나’ 싶어 혀를 찼다.
순덕이 주방 일을 챙기고, 카운터로 나왔을 때 꼬박 지난 1년간 얼굴을 보이지 않던 이가 보였다.
바로 제게 1년을 조심하라고 했던 그 노인이었다.
노인이 식당으로 들어오는 것을 본 순덕은 반가움에 서둘러 그를 맞았다.
“아휴, 잘 지내셨슈? 어째 그리 한 번도 안 오셨대유?”
반가움에 높아진 순덕의 목소리에 노인이 웃으며 순덕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허허, 안 본 사이에 일이 많았구만. 이제 별일 없겠어.”
순덕이 놀라서 물었다.
“그게 보여유?”
“그럼, 사람의 얼굴이란 것이 제가 살아온 대로 그려지는 도화지 같은 것이지. 또 제가 쌓은 업(業)이 그대로 그려지기도 하고. 어쨌든 축하하네. 고비를 넘겼으니 이제 오래 살면서 자손 볼 일만 남았구먼.”
노인을 자리에 앉힌 순덕이 그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잉? 자손이유? 언제유?”
노인이 순덕의 말에 헛웃음을 웃었다.
“나, 이제 여기서 평생 밥 공짜로 먹을 수 있는 건가?”
“아, 말허면 잔소리쥬. 근데 언제유?”
때마침 종업원이 뼈해장국을 들고 오자 잠시 말이 끊겼다.
“언제유?”
“올해 안에 보겠는데? 좀 기다려봐. 좋은 소식이 곧 올 테니.”
노인의 말은 거기서 끝이었다.
***
저녁에 인한이 모는 차를 타고 집으로 향하던 순덕이 궁시렁거렸다.
“아니, 뭔 수로 올해 안에 자손을 봐? 내 참.”
운전하다 그 말을 듣던 인한의 얼굴이 벌개졌다.
아무리 어둡다지만 거리가 워낙 훤하고, 차도 훤한 터라 인한의 얼굴색이 변하는 것이 가려질 정도는 아니었다.
“잉? 너는 왜 그려?”
한참을 말을 못하던 인한이 입을 열었다.
“할머니, 저 좀 더 일찍 결혼부터 하면 안 될까요?”
“그게 뭔 소리여?”
“그냥, 식장 이런 거 안 잡고, 상견례만 하고, 가족끼리 조용히 모여서 결혼식하면 안 될까요?”
가만히 인한의 말을 듣던 순덕이 물었다.
“너, 사고 쳤냐?”
인한의 얼굴이 더 붉어졌다.
“아, 파리 잡아먹은 두꺼비처럼 입 꽉 닫지 말고 지대루 말 혀!”
“저기, 2개월이래요.”
“뭐?”
“임신··· 2개월이래요.”
순덕은 인한의 말에 눈만 껌벅였다.
잠시 후 순덕이 조용히 말했다.
“내일부터 민정이 나오지 말라고 혀.”
“예? 왜요? 민정이는 죄 없어요!”
“이놈이, 지금 뭔 소리를 하는 거여? 내가 검사냐? 경찰이여? 죄는 뭔 죄? 그럼 그 몸으루 나왔다 애 떨어지면 니가 책임질 겨? 진작에 챙겼어야지!”
“아···, 저도 며칠 전에 알았어요.”
“우리 집안이 손이 많길 허냐, 아니, 민정이 걔는 왜 진작에 말을 안 혔대?”
“저기···, 민정이도 며칠 전에 알았어요.”
순덕이 답답함에 가슴을 쳤다.
“으이구, 둘이 똑같어, 아주. 쯧쯧쯧.”
“···.”
“너, 내일 당장 민정이 부모님께 다녀와. 가서 자초지종 말씀드리고 빨리 뵙자고 혀.”
“···네.”
그야말로 일사천리로 진행된 결혼이었다.
순덕은 인한에게 민정과 의논해서 둘의 보금자리가 될 작은 아파트부터 구하게 했다.
결혼식도 양가의 가족과 직원들의 축복아래 간소하게 했지만 실속 있게 치뤘다.
순덕은 한번뿐인 결혼이니 둘의 뜻대로 하라고 했지만 민정은 제 몸이 힘든 것도 있었고, 허례허식에 쓰느니 그 돈 모아서 저축하겠다고 한 탓에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이루어진 결혼이었다.
하지만 둘이 만족하니 그것으로 되었다 생각한 순덕이었다.
인희는 인한의 방도 제 것이 되었다며 좋아했다.
인한이 빠져나간 방은 새로 들일 강아지 물품과 인희 방에 있던 각종 사료 등을 보관하는 곳으로 변했다.
인한의 결혼식에 인희의 졸업식까지 그야말로 정신없이 시간이 지났다.
***
응애, 응애, 응애···.
“아이고, 이뻐라, 내 새끼!”
순덕은 제 품에 안긴 핏덩이가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신생아실에서 나온 아기가 처음으로 순덕에게 안긴 것이다.
민정은 병실에 앉아서 아기를 안고 좋아하는 순덕을 바라보며 배시시 웃었다.
“이놈, 계속 우는 거 보니께 기저귀 갈아야 하나보다.”
순덕이 조심스럽게 아기를 싼 이불을 펼치고 기저귀를 펼쳤다.
“흐흐흐흐흐. 맞구먼. 아이구, 시원하겄다, 내 새끼.”
순덕의 입이 닫히지 않았다.
기저귀를 갈고, 배내옷을 정리하던 순덕이 움직이던 손길을 흠칫 멈췄다.
“할머니, 왜 그러세요?”
민정의 물음에도 순덕은 아기의 어깨를 살피며 손으로 조심스레 만졌다.
“···음, 우리 손주 어깨에 번개 모냥의 상처가 있구먼?”
“네?”
민정이 아기의 어깨를 살폈다.
“아, 이거요? 태어날 때 보니까 그때도 있었어요.”
“그려?”
순덕이 당황한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 무심한 표정으로 배내옷을 정리했다.
‘어째 모냥이 멧돼지헌티 내가 다쳤을 때 상처하고 똑 같은 겨?’
민정이 웃으며 순덕에게 말했다.
“그렇잖아도 그이가 그 무늬 보더니 예전에 흰둥이가 멧돼지한테 다쳤을 때 상처하고 모양이 같다고 그러더라고요. 할머니 보시기에 흉해요?”
순덕이 얼른 손을 저었다.
“아녀, 이게 왜 흉하겄어? 우리 손주는 잃어버릴 일이 없구먼. 안 그려?”
“푸흡, 네, 할머니.”
순덕이 아버지 방장석의 말을 떠올렸다.
‘새 자손이 나와 인연이 깊다고 혔는디···, 그럼 흰둥이 말하는 거여? 얘가 흰둥이 환생이여?’
순덕은 한참동안 손주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사돈어른헌티 이름 받기로 한 게 언젠디 아직까정 말이 없어?”
“호호호, 오늘 가지고 오신 댔어요.”
민정의 말을 들은 순덕은 아기를 꼭 안고 토닥이며 속삭이듯 말했다.
“인연은 인연인가 벼. 내 새끼로 와줘서 참말 고마워.”
- 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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