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꿈
안녕하세요.
깊은 밤.
카이는 침대에 누워 곤히 잠들어 있었다.
수차례 있었던 루프의 습격과 카르발에서 겪었던 일들 때문이었을까?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려는 듯 자는 중에도 그의 품속에는 기억의 단검이 안겨 있었다.
생생한 꿈을 꿨던 지난밤의 그때처럼, 기억의 단검이 분홍색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점점 강해지는 분홍빛.
그 빛은 또다시 카이의 전신을 덮어버렸다.
햇볕이 내리쬐는 오후.
카이는 300 명이 넘는 적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황도의 건물들 사이사이로 적들의 모습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많은 수의 마법사와 기사들.
그뿐 아니라 황도의 하늘을 새까맣게 덮고 있는 드래곤 나이트까지.
황도에 있는 모든 병사들이 오직 카이 하나만을 노리고 있었다.
카이는 손에 쥔 두 개의 단검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삽시간에 커진 두 자루의 단검.
마치 처음부터 긴 장검이었던 것처럼 날카로운 마력이 예기를 내뿜고 있었다.
카이는 적들을 향해 달렸다.
무려 300명의 적들.
카이의 움직임은 신속했다.
두 자루의 검은 적들의 목을 하나둘씩 베어갔다.
적들의 검에도 강한 마력이 느껴졌다.
상당한 실력.
하지만 카이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카이의 이마에서는 굵은 땀방울이 흘러 내렸다.
하늘을 덮은 드레이크들은 카이를 향해 소형 브레스를 뿜어냈다.
피아 식별조차도 없는 막무가내 공격이 계속됐다.
아군은 어찌되든 카이만 죽이면 된다는 듯한 공격.
카이를 둘러싼 300명의 적들 중에도 아군인 드레이크의 브레스에 맞아 쓰러지는 사람들이 있었다.
카이는 하늘로 자신의 검기를 날려 보냈다.
그의 검기에 맞고 한 마리의 드레이크가 휘청거렸다.
쿵!
땅으로 내려앉은 드레이크의 모습은 드래곤만큼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거대했다.
카이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온통 붉은색의 몸을 가진 불의 정령왕 이프리트.
영롱한 푸른색의 몸을 가진 물의 정령왕 운디네.
투명하게 일렁거리는 바람의 정령왕 실피드.
갈색의 근육질 몸을 가진 땅의 정령왕 노아스.
4대 원소 정령왕들이 카이의 부름에 한꺼번에 소환되었다.
카이를 지켜보고 있던 적들은 모두 경악했다.
일평생 하나의 정령왕을 보는 것도 어려운 일.
하지만 그들의 앞에서 넷씩이나 되는 정령왕들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카이는 그들에게 명령했다.
“쓸어버려.”
정령왕은 사방으로 흩어지며 300명에 달하는 적들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정령왕의 특성상 단순한 물리공격은 통하지 않는다.
아무리 마력을 사용하는 기사라 할지라도 결국 주 공격은 물리력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정령왕을 상대하는 데는 기사보다는 마법사의 효율이 더 나을 터.
적들의 마법사가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들은 빠르게 정령왕에 대응해 나갔다.
불의 정령왕을 상대하는 마법사들은 빙결 계열의 마법사들을 쏘아댔다.
바람의 정령왕을 상대로는 염화 계열의 마법들을,
물의 정령왕을 상대로는 대지 계열의 마법들을,
땅의 정령왕을 상대로는 바람 계열의 마법들로 각각 대응했다.
다수의 적을 상대하기에 조금은 벅찼는지 정령왕들은 자신들의 권속들을 불러내기 시작했다.
4대 정령왕의 부름을 받고 소환된 최상급 4대 원소 정령들이 자신들이 있는 황도의 동쪽 구역을 가득 채웠다.
정령들의 공격에 적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수적 우위도, 상성의 우위도 모두 잃은 지 오래.
카이는 황도에서 가장 높은 건물로 올라갔다.
성벽의 방어탑.
그곳에서 하늘을 덮은 드레이크들을 향해 검기를 무더기로 발사했다.
드레이크의 숫자가 워낙 많은 탓에 조준조차도 필요치 않았다.
오직 고갈되지 않는 마력만 있으면 충분했다.
[키에에엑]
쿵!
카이의 검기로 열댓 마리의 드레이크들이 땅으로 쳐박혔다.
서너 마리의 드레이크가 카이를 발견하고 첨탑으로 다가왔다.
탑에서 도약하는 카이.
첨탑에서 뛰어내려 한 마리의 드레이크 위로 착지했다.
“흐익!”
촤악!
드레이크를 조종하는 기사를 단칼에 베어내고 조종석에 앉았다.
사방에 날아다니는 드레이크를 향해 검기를 날리며 돌진했다.
하늘에서는 드레이크들이 춤추며 복잡하게 엉켰다.
드레이크들의 그림자들이 황도의 건물들에 일렁거렸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몬스터들의 공포스러운 울음소리가 온 황도에 울렸다.
카이는 쉬지 않고 검기를 날렸다.
그의 허리에는 손에 잡고 있어야할 고삐가 묶여 있었다.
그렇게 비행은 방치한 채 오로지 두 손으로 검기를 날리는 데만 집중했다.
그랬기에 하늘의 풍경은 더욱 어지러웠다.
마음대로 날아다니는 한 마리의 드레이크를 공격하기 위해 수십 마리의 드레이크가 접근했지만 도저히 예측할 수 없는 궤도와 카이가 날리는 검기로 인해 드래곤 나이트들은 혼란에 빠져버렸다.
어느덧 수십 마리에 달했던 드레이크들은 이제 겨우 열댓 마리만 남았다.
[키에에에엑]
드래곤 나이트는 하는 수 없이 퇴각하기 시작했다.
카이는 그 모습을 지켜보곤 땅에 내려앉았다.
촤악!
자신이 타고 있던 드레이크의 목을 벤 카이.
이제 지상의 적들도 정령들에 의해 대부분 정리가 되어 있었다.
카이는 서둘러 황궁이 있는 방향으로 달렸다.
황도의 광장을 지나 양쪽에 역대 국왕들의 동상이 세워진 대로를 넘어 황궁의 입구에 도착한 카이는 이미 활짝 열려져 있는 궁문을 그대로 통과해 들어갔다.
곳곳에 널린 시체들을 보며 누군가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불타고 있는 화려한 정전을 지나 황제가 거하는 편전에 들어섰다.
그곳에서 카이는 차드 헤안과 마주쳤다.
멈칫!
차드 헤안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검을 꺼내들었다.
카이도 자신의 두 단검에 검기를 흘렸다.
그렇게 두 사람이 격돌했다.
팡! 팡! 팡!
두 사람의 검기가 부딪치며 편전을 울렸다.
마치 지진이 난 것 같은 건물의 울림이 계속됐다.
두 사람의 검기가 스치기만 해도 벽은 금이 갔고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두 자루의 단검으로 빠른 속검을 구사하는 카이와 한 자루의 장검으로 검술의 정석을 보여주는 헤안.
“내가 네게 단검술을 가르친 것을 후회할 날이 올 줄은 미처 몰랐다.”
헤안의 말에 카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제는 내 말에 대꾸도 하지 않는 게냐.”
카이는 그저 헤안을 노려보기만 했다.
“어차피 너나 나나 물러날 곳은 없으니 빨리 결판을 내자는 의미겠지······.”
헤안은 자신의 검을 다잡으며 카이에게 말했다.
“와라.”
짧은 헤안의 말 한 마디에 카이는 그대로 몸을 튕겨 앞으로 나갔다.
카이의 엄청난 속도에도 불구하고 헤안은 카이의 모든 공격에 반응하고 있었다.
사람의 눈으로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괴물들 간의 싸움.
카이는 부지런히 두 단검의 검기를 자신의 스승을 향해 내리꽂았다.
텅! 텅! 텅!
반복되는 연속 공격.
헤안은 멀찍이 물러났다.
왈칵!
그의 입에서는 검붉은 피가 쏟아졌다.
“정말로 많이 성장했구나. 이제는 내가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겠어.”
헤안은 온몸의 마력을 검으로 집중시켰다.
“이제 끝을 내보자꾸나.”
두 검귀(劍鬼)가 전력으로 부딪쳤다.
쿠콰콰콰콰쾅!!!
검기의 충돌을 이기지 못하고 편전이 무너져 내렸다.
건물에서 날린 회색 먼지가 사방으로 펴져나갔다.
잿빛의 폐허가 되어버린 편전의 모습.
벽과 천장이 완전히 무너져버린 그곳에서 카이만 우뚝 서있었다.
잔해에 파묻혀 왼손만 삐져나와있는 헤안의 손을 잠시 내려다보던 카이는 이내 황궁의 후원을 향해 달렸다.
그곳에는 도처에 쓰러져 있는 친구들의 모습이 보였다.
활은 어디로 갔는지 하나의 화살만을 손에 꼭 쥔 채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아샤,
입에서 붉은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는 다인과 튜튼,
그리고 두 손이 잘려 있는 테티스와 그 주변에 떨어져 있는 단검을 쥔 두 개의 손.
카이는 서둘러 후원에 들어섰다.
그곳에서 많은 무리에게 둘러싸여 있는 아리아가 보였다.
“아리아!”
아리아는 숨을 헐떡이며 카이를 쳐다봤다.
카이를 본 그녀의 입에 미소가 지어졌다.
쉬~웅!
퍽!
그때 한 발의 화살이 그녀의 배로 날아와 꽂혔다.
털썩!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아리아.
카이는 그런 아리아를 보며 얼굴이 일그러졌다.
폭주하기 시작했다.
아리아를 둘러싸고 있던 그 많은 수의 적들이 순식간에 카이의 검에 목숨을 잃었다.
파괴와 살육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황궁 안에서 살아있는 것은 눈에 보이는 대로 베어버렸다.
밖으로 나간 카이는 황도를 돌아다니며 피아 식별 없이 모든 것을 베었다.
“크아아아악!”
분노에 휩싸인 카이의 모습은 그야말로 광인, 아니 악마의 모습이었다.
그렇게 황도를 점령했던 루프와 황실의 병력들까지 모조리 죽여 버린 카이는 황도 밖으로 조금씩 발걸음을 옮겼다.
황도 바깥에는 가난한 백성들이 살아가는 빈촌이 있었다.
하지만 카이에게는 그런 것을 구별할 이성이 남아있지 않았다.
한 걸음, 한 걸음······.
뭉클!
그렇게 움직이던 카이의 등에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카이. 이러지 마. 정신 차려.”
아리아의 목소리였다.
카이는 몸을 돌려 아리아를 봤다.
“아리아?”
그녀의 몸을 만지며 상처를 확인했다.
“괜찮아, 아리아?”
그녀의 배에는 아직도 피가 흐르고 있었다.
“난 괜찮으니까. 카이 그만해.”
카이는 아리아를 꼭 껴안았다.
“다행이야. 정말.”
카이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허억, 허억, 허억.”
자신의 품에서 빛나는 단검을 꺼냈다.
‘또 기억의 단검인가?’
단검에서 뿜어져 나오던 분홍색 빛은 점차 사그러들었다.
이렇게 생생한 꿈을 꾼 게 벌써 두 번째.
카이는 그저 안도의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자신과 아리아를 빼고는 모두 목숨을 잃었던 참담한 꿈속의 상황.
‘정말 다행이야. 이게 꿈이라서.’
* * *
파르잔은 수풀이 우거진 지역을 걷고 있다.
주변에는 무너져 내린 건물들의 잔해들이 있었고, 오랜 세월의 흐름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 잔해 위로는 수풀이 뒤덮고 있었다.
버려진 도시 같아 보이는 풍경.
파르잔은 한 폐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끼~익!
삭을 대로 삭아버린 계단은 파르잔이 발을 디딜 때마다 불쾌한 마찰음을 일으켰다.
파르잔은 품에서 카이로부터 받은 손수건을 꺼내들었고, 2층의 복도를 걸어갔다.
무언가를 찾는 듯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천천히 발걸음을 떼는 그.
복도의 끝에는 반쯤 문이 열린 방이 하나 있었다.
파르잔은 방으로 들어갔다.
방은 불에 그슬린 듯 온통 검게 변해 있었다.
썩어버린 책장, 부서져 내려앉은 책상과 의자들.
파르잔은 손수건을 든 손을 이곳저곳에 가져다 대었다.
부서진 나무 바닥의 구멍 속에서 무언가 반짝이는 빛이 보였다.
파르잔은 자신의 팔을 어깨까지 집어넣어 안을 뒤졌다.
무언가가 파르잔의 손에 잡혔고,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됐다.’
그의 손에 딸려 나온 건 작은 브로치였다.
브로치와 손수건은 서로 반응하며 빛을 내고 있었다.
파르잔은 브로치를 손에 꽉 쥐며 말했다.
“이제 알 수 있어.”
댓글로 달아주신 여러분의 의견을 참고하여 실력 향상에 적극 반영하겠습니다.
-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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