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홀
안녕하세요.
넓은 평야.
저 멀리 보이는 시계 폭포의 물이 끊기며 낮과 밤이 역전되기 시작했다.
어둡던 땅이 순식간에 낮으로 변하며 밝은 땅과 어두운 하늘이 한눈에 들어왔다.
하늘에 고여 있는 폭포수가 다시금 땅으로 흘려 내렸다.
“전군! 전진!”
카이의 호령(號令)소리와 함께 영지군이 반왕군의 점령지를 향해 일제히 내달리기 시작했다.
다시 밤이 되기까지 남은 시간은 12시간.
카이는 가능하면 오늘 안에 모든 것을 끝내고 싶었다.
‘시간을 길게 끌면 끌수록 불리한 건 나다.’
카이는 병력을 총동원해 모든 전선에서 동시에 진격을 시작했다.
기존의 병력에 충원병력까지 끌어 모아 만든 12만의 병력.
카이와 모리 그리고 여왕을 선두로 새로운 전투가 시작되었다.
진격을 하기 2시간 전.
‘카이님, 저도 함께 가겠어요.’
‘여왕님께서는 후방에 계십시오. 너무 위험합니다.’
‘이렇게라도 해야 조금이나마 마음의 짐이 덜어질 것 같아요.’
여왕의 간곡한 부탁으로 인해 하는 수 없이 카이는 여왕을 전투에 참전시켰다.
대대적인 영지군의 공세에 미리 준비를 하고 있던 반왕군도 모든 병력을 끌어 모아 대응을 시작했다.
겨우 2만쯤 되어 보이는 적은 병력.
양 측의 병력 차이만 무려 6배에 달했다.
2만의 병사들을 이끄는 반왕군 장군들의 표정은 비장했지만 회의적이지는 않았다.
열세인 병력을 이끄는 자들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는 듯한 모양새였다.
12만과 2만의 군대가 서로 부딪쳤다.
콰과광!
사람의 몸과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에 불과했지만 수만의 병사들이 서로 섞이며 일으키는 소음은 천지를 울릴 만큼 컸다.
영지군을 이끄는 것은 카이, 모리, 여왕 그리고 반왕군을 이끄는 것은 벤, 비시였다.
여왕은 먼발치에 있는 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수세에 몰리더니 결국 친정(親征)을 나섰군.’
카이는 발록 세 마리를 소환해 적진으로 보냈다.
‘전쟁이 길어질 경우를 생각하면 최대한 마력을 아껴야 해.’
카이는 최악의 상황에서 사용하게 될 암흑 에너지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모리는 적진으로 쇄도해 들어가며 무자비하게 두 주먹을 휘둘렀다.
“베니 죽인다! 모리가 죽인다!”
한때 자신들의 앞에서 적들과 맞서 싸우던 모리의 광분에 반왕군은 한껏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비시는 비록 정령왕을 소환할 수는 없었지만 별동대를 이끄는 지휘관으로서 전장에 참여했다.
“1군은 전방을 향해 돌진하라! 2군은 나와 함께 우측으로 돌아간다!”
여왕은 자신의 죄책감을 씻으려 발버둥을 쳤다.
일국의 군주로서는 감수하기 어려운 위험부담을 떠안으며 반왕군을 향해 깊숙이 침투해 들어갔다.
쉬익!
그리 뛰어나진 않은 궁술 실력으로 부지런히 활을 쏘아대며 적군 병사들을 하나하나 줄여나가는 여왕.
‘부, 부인.’
전장에서 종횡무진 활약하는 여왕의 모습을 발견한 벤은 병사들에게 일제히 명령했다.
“여왕을 사로잡아라! 절대 여왕을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 여왕의 실오라기 하나도 건들지 말고 생포하라!”
병사들은 수적으로 열세인 상황에서 적의 군주까지 생포해야하는 임무를 수행하며 죽을 둥 살 둥 치열하게 싸웠다.
두 진영이 맞붙은 초기에는 부족한 병사에도 불구하고 반왕군이 꽤나 잘 대응을 하며 팽팽하게 맞섰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씩 흐를수록 전세는 영지군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설령 카이와 모리가 없었더라도 이 흐름은 다르지 않았을 것처럼 보였다.
12만 대 2만의 싸움은 그렇게 영지군의 승리로 기울어 갔다.
서쪽과 남쪽의 전선이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크악!”
“마, 막아랏!”
반왕군의 병사들은 목숨을 걸고 필사적으로 싸웠지만 절대적인 병력의 열세는 극복하기 힘든 결정적인 문제였다.
개전 단 2시간 만에 반왕군의 점령지역은 반으로 쪼그라들었다.
아무리 압도적인 전력 차이라고 해도 너무 빠른 진군속도였다.
영지군의 병사들은 한껏 희망에 차 있었다.
몇백 년을 끌었던 지겨운 전쟁의 끝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사랑하는 부인을 만나 생명나무로부터 선물 받은 자녀들을 키우며 평화롭게 사는 모습.
수백 년의 전쟁을 통해 정신이 피폐해진 병사들은 간절하게 그런 평화를 갈망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영지군은 더욱 거세게 반왕군을 몰아 세웠다.
전장을 내려다보고 있던 벤은 간투사를 흘렸다.
“흐음······.”
그가 생각하고 있던 작전의 시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그는 다시 한 번 여왕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병사들을 이끌며 전장의 최전선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는 여왕.
그가 그렇게 그리워했던 부인의 모습이었다.
벤은 그녀를 보며 자신의 딸을 떠올렸다.
여왕이 자신의 부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 반왕군의 영토 내를 샅샅이 뒤졌던 시간들.
하지만 딸의 모습을 한 사람은 찾아볼 수 없었다.
‘결국 리나를 찾으려면 영계 전체를 뒤져야 한다.’
벤이 영계를 점령해야 하는 명확한 이유가 하나 더 늘어났다.
그의 목표는 세계의 리셋, 부인과 딸과의 재회.
벤은 천천히 눈을 감고 그 거대한 계획을 위해 마음을 가다듬었다.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아직도 가야할 길이 너무나도 많아.’
벤은 마법석에 마력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조금씩 반응하는 공간의 목걸이와 증폭의 팔찌.
초록색 빛과 붉은색 빛이 어우러지기 시작했다.
각인되지 않은 마법석을 우회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터득한 벤.
시간의 돌을 바탕으로 다른 마법석의 부차적인 효과를 이끌어내며 더 큰 시너지를 분출하고 있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만들어진 검은색 공동(空洞).
심연의 어두움을 담은 그 구멍이 전장 곳곳에 생성되기 시작했다.
아주 작은 구멍에 불과했지만 그것이 뿜어내는 인력(引力)은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초월적인 힘이었다.
“으아, 으아아아악!”
“뭐, 뭐야? 사, 살려줘!”
14만의 병력이 뒤엉켜진 채 서로 싸우고 있는 전장터에는 무려 세 개의 검은 공동이 생겨났고, 빠르게 주변의 것들을 빨아들였다.
처음 느끼는 감각.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거부할 수 없는 인력.
병사들은 속수무책으로 구멍에 빨려 들어갔다.
카이의 현재 위치와 가까운 곳에도 검은 공동이 만들어졌다.
“끄아아!”
병사들의 비명소리를 듣고 카이는 곧바로 암흑 에너지를 만들어냈다.
공동을 중심으로 카이의 암흑 에너지가 에워싸기 시작했다.
인력(引力)과 척력(斥力)의 대립.
방금 전과는 달리 확연하게 인력의 영향이 줄어들었다.
비록 힘이 줄어들었다고 해도 일반 병사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영향권을 벗어나는 것은 어려운 일.
게다가 구멍은 카이가 만들어낸 암흑 에너지마저 빨아들이며 자신을 저항하는 척력의 힘을 빠르게 줄여나가기까지 했다.
각 부대에서도 마력 운용이 뛰어난 엘리트 병사들이 인력이 약해진 틈을 타 조금씩 빨려 들어가고 있는 병사들을 하나씩 구출하기 시작했다.
카이는 서둘러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최대한 이곳에서 멀리 떨어지세요!”
카이가 이끄는 병사들은 하릴없이 빠르게 퇴각했다.
여왕이 이끄는 병력들 사이에도 검은 구멍이 생겨났다.
제 나름대로 마력운용에 자신이 있는 병사들은 온몸에 마력을 돌리며 영향권을 빠져나오려 시도했지만 무용지물.
어느 누구도 공동을 빠져나올 수 없었다.
공동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사람들은 반왕군의 병사들뿐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한 명의 예외가 있었으니.
단 여왕.
영지군에서 유일하게 공동의 영향을 벗어나 있는 사람이었다.
‘왜, 왜 이러지?’
여왕 스스로도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벤은 흐뭇하게 그녀를 바라봤다.
‘부인, 당신은 내가 지키겠소.’
여왕은 자신의 주변에서 심연의 어둠으로 끌려들어가는 병사들을 막아보고자 그들을 껴안으며 붙잡았다.
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크흑, 여, 여왕님.”
그의 상체를 붙들자 인력의 힘이 미치지 않는 여왕의 영향 탓인지 병사의 상체는 더 이상 끌려가지 않고 멈추었다.
‘다행이다.’
하지만 병사의 하체를 보는 순간 여왕의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여왕이 붙잡고 있는 상체와는 달리 엿가락처럼 길게 늘어져 구멍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 병사의 다리가 보였다.
여왕마저도 병사의 몸이 원자 단위로 잘게 쪼개져 구멍으로 쓸려 들어가는 것까지는 미처 막을 수 없었다.
자신의 몸이 잘게 쪼개지며 분리되는 모습을 보고는 혼절해버린 병사.
여왕도 깜짝 놀라 병사를 붙잡고 있던 손을 놓치고 말았다.
병사는 의식을 잃은 채로 구멍으로 빨려 들어갔다.
차마 눈으로 볼 수 없는 끔찍한 상황.
여왕은 눈을 질끈 감았다.
“전하!”
그때 익숙하고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이님?”
“괜찮으십니까?”
자신 주변에 있던 병력을 성공적으로 철수시킨 뒤 여왕을 구하기 위해 급히 달려온 카이는 유독 혼자만 인력의 영향에서 벗어나 있는 여왕의 특이한 상황을 인지했다.
“어, 어떻게······.”
“저, 저도 잘 모르겠어요.”
카이는 이 힘의 근원인 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카이와 여왕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여왕 전하를 주시하고 있어?’
카이는 무언가 위화감을 느꼈다.
‘지금 그걸 신경 쓸 때가 아니야.’
카이는 서둘러 암흑 에너지를 심연의 공동을 향해 펼쳤다.
인력이 약해진 틈을 타 병사들이 하나둘씩 몸을 피했다.
“전하, 일단 후퇴하시죠.”
“네. 알겠어요.”
여왕은 후퇴를 하면서도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벤의 시선이 계속 신경 쓰였다.
‘뭐야? 왜 이렇게 재수 없게 보는 거야? 소름끼쳐.’
두 사람 사이에 애틋한 감정은 오직 벤만이 가지고 있는 감정일 뿐이었다.
여왕은 벤을 극도로 혐오하고 있었다.
어느덧 카이가 이끄는 부대와 여왕이 이끄는 부대는 큰 피해 없이 군사를 물렸다.
하지만 또 다른 한 곳은 그야말로 처참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
2만의 군사들이 단 한 명도 남기지 않고 증발해 버린 것.
벤이 만들어낸 심연의 구멍 하나로 무려 2만의 병사들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영지군이 군사를 물리고 난 뒤 다행히 반왕군은 반격하지 않았다.
그렇게 전쟁은 다시 소강상태가 되었다.
진영으로 돌아온 뒤 카이와 여왕은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여왕님도 눈치 채셨겠지만 벤이 만들어낸 공동은 지난번 제가 보여드린 영상 속의 그것과 같은 것입니다.”
“대체 그건 뭘까요?”
“제가 확신할 수 있는 건 마법석이 만들어낸 시너지라는 것 정도입니다. 제 예상으로는 아마 중간계에서 가져온 공간의 돌과 증폭의 돌이 합성된 게 아닐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카이님과 그 자가 있던 세계의 마법석······.”
“제가 준비했던 힘으로도 완벽하게 막을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언제나 그렇듯 벤을 직접적으로 타격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할 것 같습니다.”
“······.”
거의 다 이긴 전쟁에서 마지막에 판을 뒤집을 적의 히든카드가 등장했다.
여왕은 근심이 깊어졌다.
“흐음.”
여왕이 고민에 빠져 간투사를 흘리고 있던 그때.
천지를 울리는 거대한 지진이 발생하고 있었다.
쿠르르르릉!
‘이건 또 무슨 일이야?’
댓글로 달아주신 여러분의 의견을 참고하여 실력 향상에 적극 반영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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