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계(靈界)
안녕하세요.
카이는 신검을 손에 쥔 채로 울프와 함께 게이트를 통과했다.
게이트 너머에는 괴상한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하늘에는 온통 먹구름이 가득했고, 먹구름 사이사이로 강과 바위들이 보였다.
‘환상세계처럼 하늘에도 산과 강이 있네?’
카이가 하늘의 풍경을 보고 가장 먼저 떠올린 건 마법과 오만의 도시에서 들어갔던 환상세계였다.
카이는 이쪽 세계를 파악하기 위해 주변을 둘러봤다.
그의 주위로는 수천, 아니 수만은 족히 될 법한 사람들이 창, 검을 들고 싸우고 있었다.
‘하, 지겹군. 이쪽 세계에서도 전쟁이라니.’
카이는 괜한 싸움에 휘말릴까 싶어 조용히 떠나려고 했다.
하지만 긴 은빛 장검을 들고 있는 그의 모습과 수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울프의 몸집은 숨기려야 숨길 수 없었다.
머잖아 모든 사람들의 이목이 카이에게 집중됐다.
‘젠장, X 됐다.’
점점 다가오는 병사들.
카이는 뒷걸음질 치며 손을 내저었다.
“저, 저기요. 제 말 좀 들어주세요. 전 사람 한 명 찾으러 왔습니다.”
하지만 병사들은 멈추지 않았다.
“수상한 녀석이다. 사로잡아 장군께 보내자.”
‘아, XX.’
카이는 답답한 마음에 속으로 욕을 한 바가지 쏟아냈다.
곧이어 병사들의 창이 카이를 향해 찔러 들어왔다.
순식간에 수십의 병사들에게 둘러싸인 카이는 울프에게 당부했다.
“울프, 최대한 사람들이 다치지 않게 제압해줘. 우리 목적은 벤을 찾는 거야. 괜히 적을 만들어 봤자 좋을 거 없어.”
[알았다 주인.]
울프는 신속히 뛰쳐나가 앞발로 병사들을 제압하기 시작했다.
카이도 최대한 상처 없이 적들을 제압하기 위해 신검을 내려놓았다.
검이 아이슬리의 모습으로 변했다.
“우와~”
그 모습을 보던 병사들은 입이 찢어질 듯 탄성을 질렀다.
“아이슬리는 싸우지 말고 그냥 있어. 괜히 사람들 다칠라.”
“치잇, 알았어.”
카이는 신검을 대신해 마력으로 만든 채찍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물의 정령왕 운디네와 바람의 정령왕 실피드까지 소환 했다.
물과 바람은 꽤나 부드러운 운용이 가능한 원소였다.
‘적당히 힘 조절 하면 괜찮겠지.’
카이는 도처에 널려있는 수만의 병사들을 상대할 준비를 마쳤다.
카이가 소환한 정령왕들과 아이슬리, 울프를 보고는 위기를 느낀 병사들도 더욱 조직적으로 카이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수십으로 시작됐던 공격이 이제는 기백의 병사들로 규모가 커졌다.
‘쳇, 이러다가 수만 명이 다 나한테 달려드는 거 아냐?’
카이의 불안감은 곧 현실이 되었다.
처음 카이가 봤을 때만 해도 두 진영이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카이의 등장으로 어느새 전투는 한 진영과 카이의 싸움으로 변해버렸고, 다른 한 진영은 손을 놓은 채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수만의 군세가 카이 하나만을 놓고 공세를 펼쳤다.
‘수천도 아니고 수만이면 너무 심한데.’
비록 증폭의 돌로 어느 정도 운신의 폭은 있다지만 싸움이 길어질수록 몸에 부담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촤르륵 착!
손에 들린 마력 채찍으로 병사들의 공격을 막아내던 카이는 특단의 대책을 생각했다.
‘이렇게 가다간 끝도 없겠어. 확실한 한 방이 필요해.’
카이는 정령왕들에게 명령했다.
“실피드, 운디네. 최대한 많은 병사들을 뒤로 밀어줘.”
카이의 명령에 두 정령왕들은 상급, 최상급 정령들을 불러냈다.
순식간에 카이가 이끄는 무리가 기백이나 형성되었다.
공격하던 병사들은 입을 떡 벌리고 경악했다.
“이, 이거 뭐야?”
기백의 정령들은 연합하여 추동(推動) 마법을 시전했다.
“어, 어어! 왜 이래?”
병사들은 빠르게 뒤로 밀려 나가기 시작했다.
‘정도껏 밀면 알아서 도망가겠······.’
“와아~ 공격해라! 지금이 기회다!”
가만히 지켜보던 진영의 병사들이 적들이 밀려나는 상황을 틈 타 공격을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던 카이는 곤란해 하며 얼굴을 찡그렸다.
‘하, 이러려던 게 아닌데.’
카이는 일전에 이세계에 넘어갔을 때에도 개입을 최소화하기 위해 무척이나 애를 썼었다.
이방인으로서 함부로 타 세계에 개입하는 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알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게 카이의 생각대로 흘러가진 않았다.
열세였던 진영의 군사들은 유리한 상황을 이용해 적들을 몰아붙였다.
곳곳에서 처절한 전투가 벌어졌고, 수적으로 우세했던 진영의 병사들이 뒤로 물러나며 전세가 역전되어 버렸다.
상황을 주시하던 카이가 소환을 해제했음에도 흐름은 바뀌지 않았다.
전투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전장은 빠르게 정리되었다.
카이의 앞에 한 남성이 다가왔다.
장대한 기골의 사내.
얼굴은 붉고 수염이 길게 나 있는 그의 얼굴은 기괴한 인상을 주었다.
‘장군쯤 되는 사람인가?’
사내는 카이에게 정중하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영지군의 장군 타스라고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유리 카이입니다.”
“저희 전하께서 귀하를 뵙고 싶어 하십니다. 저희의 초대에 응해주시겠습니까?”
“네?”
카이는 갑작스러운 초대를 듣고 생각했다.
‘벤을 잡으려면 이곳을 파악하는 게 먼저야. 지도층과 연을 쌓아둬서 나쁠 건 없겠지.’
카이는 웃으며 응답했다.
“좋습니다.”
“따라 오십시오.”
카이는 타스 장군의 안내에 따라 진영의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척!
경비병들의 경례를 받으며 타스가 말했다.
“전하를 뵈러 왔다. 아뢰어라.”
곧이어 전해진 신하의 말.
“전하께서 기다리십니다. 안으로 드십시오.”
신하는 아이슬리와 울프를 넌지시 쳐다봤다.
그의 뜻을 눈치 챈 카이는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이슬리와 울프는 여기서 기다려줘. 금방 다녀올게. 그리고 울프는 몸집 좀 줄이고 있어.”
“으응. 알았어. 빨리 와 자기~”
[알았다. 주인.]
카이는 타스를 따라 천막으로 들어섰다.
매우 소박하게 꾸며진 천막의 내부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호오~ 어서 오시오.”
그곳에는 널찍한 귓불을 가진 후덕한 인상의 남성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는 카이를 보자 의자에서 일어나 카이 곁으로 다가왔다.
터억!
카이의 양쪽 어깨를 잡은 그의 두 손.
‘꽤나 묵직한데.’
카이는 절로 어깨가 좁아지는 느낌이었다.
“반갑습니다. 이리 앉으시지요.”
국왕은 카이를 긴 탁자로 안내했다.
“저는 영왕(靈王) 신입니다.”
‘외자(字) 이름인가?’
“안녕하십니까. 저는 타란투스 대륙, 헬리온 제국의 백성인 유리 카이라고 합니다.”
“난 아이슬리에요.”
“호오~ 이렇게 경계를 넘어 온 타란투스 대륙의 사람은 처음이군요.”
“네? 저희 대륙을 아십니까?”
카이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영왕 신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카이에게 말했다.
“허허. 카이님은 모르시는 게 당연하지요. 이곳은 영계(靈界)입니다.”
‘영계?’
“우리 세계와 연결된 곳은 총 다섯 곳이지요. 정령계, 마계, 인간계의 수명이 다 한 자들이 이곳으로 오게 된답니다.”
“아······ 그럼 이곳이 저승이란 말입니까?”
“뭐, 그렇게 말 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영혼만 두둥실 떠다니는 그런 곳은 아닙니다. 이곳에서는 이곳의 삶이 존재하니까요.”
“허······.”
카이는 새로운 사실에 헛웃음을 지어 보였다.
‘마물이든, 정령이든 사람이든 죽으면 이곳에서 다시 태어난다는 얘긴가?’
카이는 다시 한 번 넌지시 타스의 얼굴을 쳐다봤다.
‘어쩐지 사람 같지 않아 보이더라니.’
카이는 마음속으로 타스는 분명 마물이었을 거라 추측했다.
“어떻게 넘어오시게 된 겁니까?”
신 국왕의 질문에 카이는 다시 정신을 차렸다.
“아, 저는 게이트를 통해 넘어왔습니다.”
“게이트요? 전장에 있던 그 연녹색 문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저희 세계에서 악당······, 음······, 그러니까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좇다가 동료들과 이곳까지 오게 됐습니다.”
“아하, 그렇다면 그 자가 카이 님 세계에서 죄를 저지르고 도망 온 죄인이었겠군요.”
“벤, 아니 그 자를 보셨습니까?”
영왕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누군가가 연녹색 문을 통해 넘어왔다는 보고는 받았습니다. 그 자는 이곳에 도착한 뒤로 반군에게 포로로 잡혔지요. 그 뒤로는 저희도 그 자의 소식을 알 수가 없군요.”
“아, 그렇군요.”
카이는 맥이 빠졌다.
‘그럼 반군이랑 전쟁이라도 해야 하는 건가?’
카이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전장에서 병사들에게 카이님의 무용담을 들었습니다. 정령왕을 둘씩이나 소환하셨다더군요.”
카이는 영왕의 눈빛을 살폈다.
‘내 능력에 관심이 있군.’
카이는 최대한 이 세계에 대한 개입을 줄이고자 먼저 선을 긋고 나섰다.
“저는 그 자를 잡아 서둘러 제 세계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 외에는 이 세계에 개입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흐음.”
카이의 의도를 알아챘는지 영왕은 간투사를 흘리며 입을 꾹 닫았다.
“카이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잘 알겠습니다.”
영왕의 의기소침한 모습을 보며 조금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벤이 시간의 돌로 우주의 질서를 어그러트렸던 것처럼 자신도 혹시나 이세계의 질서를 어지르게 될까봐 카이는 스스로 경계심을 곧추세웠다.
“여봐라!”
“네, 전하.”
“영지(靈地)를 방문하신 손님이니 카이님을 위해 식사와 잠자리를 준비하라.”
“명을 받들겠나이다.”
카이는 영왕에게 배려에 대한 감사의 인사를 한 뒤 신하를 따라 움직였다.
그에게 배정된 숙소는 그리 크진 않았지만 하룻밤 묵기에는 꽤나 좋아 보였다.
‘하룻밤만 묵고 내일부턴 벤을 찾아 나서야겠어.’
카이는 침대에 몸을 뉘었다.
“으~아~! 좋~다~!”
지난 일주일 간 죽기 직전까지 힘을 소진했던 탓에 카이는 지금의 휴식이 세상 그 무엇보다 달콤하게 느껴졌다.
아이슬리와 울프도 카이를 따라 침대에 올라왔다.
“흐으으으응~ 카이랑 오랜만에 누워보네.”
[끄응. 오랜만에 쉬는군.]
카이는 울프의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너희 둘 다 나 때문에 그동안 쉬지도 못했지? 미안해.”
“흐응~ 아니야. 이렇게 돌아왔으니 됐어.”
아이슬리는 카이의 어깨에 볼을 비비며 얼굴을 묻었다.
[주인 때문에 나도 살이 좀 빠진 것 같긴 하다. 고기를 좀 먹어야겠어.]
울프도 제 나름대로 앙탈을 부리며 카이의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하하. 이쪽 세계에서 고기를 구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구할 수만 있다면 좋은 걸로 먹여줄게.”
카이는 아리아의 얼굴이 떠올랐다.
자신의 왼손에 끼워진 반지를 바라보는 카이.
‘하루라도 빨리 벤을 처리하고 돌아가야지.’
카이는 다시 한 번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일주일간 쌓였던 피로가 몰려왔다.
서서히 카이의 눈이 감겼다.
댓글로 달아주신 여러분의 의견을 참고하여 실력 향상에 적극 반영하겠습니다.
-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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