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 (1)
안녕하세요.
황궁의 정전(正殿).
고관들은 자신의 업무를 황제에게 보고하고, 황제는 윤허를 내리는 조회(朝會)가 열리고 있었다.
“폐하, 왕제(王弟)가 현재 진행 중인 마물의 숲 토벌에 황실의 기사단과 마법병단 병력을 증원해 주십사 청하였습니다.”
황제는 자신의 유일한 동복형제이자 자신을 어릴 적부터 따랐던 사랑하는 친동생의 일을 듣자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왕이 된 직후부터 왕위에 위협이 될 수 있으니 제거해야한다는 신하들의 충언에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황제와 왕제의 우애는 각별했다.
“얼마나 요청하던가?”
“황실 기사 1천과 황실 마법병 2백입니다.”
“왕제가 원하는 대로 증원하라!”
“불가합니다.”
황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황제가 앉은 군주의 자리 뒤쪽은 발로 가려져 있었고, 그로부터 몇 계단 더 올라간 곳에는 어떤 사람의 인영이 희미하게 비치고 있었다.
황제는 그를 설득하려는 듯 반쯤 뒤를 돌아 병력 증원을 주장했다.
“국사(國師)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제 아우는 지금 황실을 돕기 위해 목숨을 내걸고 마물의 숲을 토벌하고 있다는 것을요. 돕지 않는다면 어찌 앞으로의······.”
“그래도 아니 됩니다.”
황제의 말을 끊는 국사의 단호한 말.
만약 국사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당장에 본인뿐만 아니라 그와 인연이 닿는 모든 자들이 멸족됐을 반역이었다.
하지만 황제는 오히려 국사의 말에 한껏 위축된 모습을 보였다.
“부, 부탁입니다. 사정을 헤아려 주십시오.”
눈치를 보던 대신은 국사의 뜻을 직접 물었다.
“국사, 어찌할까요?”
황제의 앞에서 최종결정을 타인에게 묻는다?
이것 역시 반역이었다.
황제의 부탁에 아무 말이 없던 국사는 잠시 뒤 입을 열었다.
“왕제가 요청한 병력의 4분의 1만을 허한다.”
“예, 뜻을 받들겠나이다.”
이후로 이어진 조회 역시 마찬가지였다.
“금일 다루는 사안 중 중요한 것들은 직접 나에게 보고하라.”
대부분 국사와 대신들의 1 대 1 보고와 결재.
황제는 그저 인형처럼 자리에 앉아있었다.
조회가 마친 뒤 모든 신하들이 빠져나갔고, 황제의 뒤편 단상에 앉아 있는 국사는 나지막이 황제에게 말을 건넸다.
“오늘 심기가 불편하셨습니까?”
한껏 굳어있던 황제는 표정을 바꿔 미소 지으며 답변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국사는 제 은인이자 이 국가의 실질적인 아버지 아니십니까.”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때가 되면 곧 모든 것은 끝나게 될 것입니다.”
왕위에 오르던 20년 전부터 수없이 들어왔던 말이었다.
“허허. 제가 저와 제국을 생각하는 국사의 마음을 모를 리 있겠습니까? 저를 이 자리에 있게 해준 분이 국사라는 건 절대 잊을 수 없지요.”
“그리 말씀해주시니 천은이 망극할 따름입니다.”
황제는 조회를 마치고 자신의 편전(便殿)으로 향하며, 뒤를 따르는 환관에게 쏘아붙이듯 말했다.
“어린 계집들을 데려오너라. 오늘은 그 년들의 속살 외에는 아무것에도 손대지 않을 것이다.”
* * *
새벽의 참사가 벌어진 다음날.
세 사람은 대도시 아스에 도착했다.
[마약 밀매범 수배 전단]
혹시나 여행자금을 벌어볼 수 있을까 싶어 카이는 광장에 붙어 있는 범죄자 수배 전단에 눈길을 주고 있었다.
“카이, 뭐해. 가자.”
“응. 아리아.”
마침 아스에서는 오전부터 왕제의 환영 행사가 한창이었다.
왕제는 대륙 곳곳에 퍼져있는 마물의 숲을 토벌하기 위해 마침 황실의 병력을 이끌고 아스를 지나가던 중이었다.
“우와~ 저 마법사랑 기사들이 황실 마법병이랑 황실 기사야?”
“기사들 입은 갑옷 봐. 엄청 멋있다.”
“와~ 왕제님~ 사랑해요~”
황제를 대신해 백성의 안전을 위협하는 마물을 토벌하러 가는 늠름한 모습의 왕제는 백성들에게 제국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아스는 그들이 도시를 관통해 마물의 숲으로 떠나기까지 온통 그들에 대한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세 사람은 왕제의 군대와 동선이 겹치게 될 경우 많은 인파로 귀찮아질 것을 우려해 왕제의 군대가 아스를 멀리 떠나갈 때까지 한동안 아스에 머무르기로 결정했다.
“후~ 낮에 본 황실 군대는 대단하긴 했어.”
카이는 품에 강아지를 안고는 낮에 보았던 광경을 떠올렸다.
“그렇긴 하지. 아까 들어보니까 한 사람 한 사람이 최소 3등급 병사는 된다고 하던데.”
아리아는 카이의 말에 대꾸했다.
그때 대화에 참여하지 않고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아샤를 발견한 카이는 걱정하며 그녀에게 물었다.
“아샤,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으응. 아니야. 그냥 좀 피곤해서.”
“그래? 그럼 일찍 여관 잡고 쉬자.”
세 사람은 식당을 나와 여관을 찾았다.
그때 그들의 뒤에서 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아샤?”
아샤는 순간 몸이 경직됐다.
가만히 선 채로 손가락조차 움직이지 못하고 그대로 정지해 있었다.
한 여성을 옆구리에 낀 채로 세 사람의 앞으로 걸어온 남자는 꽤나 부자인 듯 온 몸에 귀금속을 치렁치렁 걸고 있었다.
“맞네! 아샤! 오랜만이야.”
아샤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이야~ 많이 컸네? 예전에 봤을 때는 어린 애더니. 이제 여자가 다 됐어.”
남자는 아샤의 위아래를 훑으며 기분 나쁜 눈빛을 보냈다.
아샤는 아무 말이 없었다.
“예전에 너희 언니 소식 들었을 때 너 앞으로 위로금 보냈는데 잘 받았는지 모르겠다.”
이제야 멍하게 있던 아샤의 눈빛에 강한 분노가 서리기 시작했다.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아리아는 아샤의 팔짱을 끼며 서둘러 자리를 뜨기로 했다.
“아샤, 좋은 방 얻으려면 어서 가야 돼.”
“으응. 가자.”
인사도 없이 그 남자를 지나친 세 사람의 뒤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당장 필요한 돈 있으면 저택으로 찾아와. 너라면 얼마든지 도와줄게.”
언뜻 보면 배려하는 말 같지만 전혀 고맙게 느껴지지 않는 말이었다.
<아스 아주 잘 왔으 여관>
‘대체 이 나라는 여관 이름이 다 왜 이래?’
세 사람은 이상한 이름의 한 여관으로 들어갔고, 나란히 붙어있는 두 개의 방을 정한 뒤 다시 1층 테이블에 모였다.
“아샤, 아까 무슨 일이야? 그 사람은······.”
“미안해.”
“응? 뭐가?”
“나 너희들과 이만 헤어져야 할 것 같아.”
질문하던 카이와 그 옆에서 듣고 있던 아리아는 놀랐다.
“무, 무슨 일이야? 왜 그래?”
“그냥 아무것도 묻지 말아줘. 이렇게 갑자기 헤어져서 정말 미안해. 혹시······.”
아샤는 입술을 짓씹으며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이내 두 사람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나중에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때 모든 걸 다 얘기해줄게. 정말, 정말 미안해.”
아샤는 다시 2층으로 올라가 자신의 짐을 챙긴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여관을 떠났다.
카이의 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저건 사고 치기 직전의 눈빛이야. 막아야 돼.’
카이는 자신의 품에서 잠든 강아지를 방에 내려놓은 후 아리아의 손을 잡고 여관 문을 나섰다.
“아리아, 따라와.”
도시 외곽의 한 저택.
아까 전 카이 일행과 마주쳤던 그 남녀가 함께 저택 문을 들어가고 있었다.
아무리 외곽이라고는 하지만 땅값이 비싼 대도시에서 이런 대저택을 소유한 것을 보면 남자는 상당한 재력가인 듯했다.
아샤는 그의 저택에 있는 정원 안에 숨어 그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크크큭. 그 년이 얼마나 매달리던지 내가 발로 뻥! 하고 차버렸지.”
“깔깔깔. 그 다음엔 어떻게 됐는데요?”
“며칠 뒤에 목매달았다고 하더라고. 멍청한 년. 내가 준 돈으로 장사만 해도 평생 먹고 살았을 텐데. 크크크큭.”
저급한 대화를 주고받는 두 남녀의 하하호호 웃음소리가 저 멀리서부터 들려왔다.
아샤는 활에 시위를 걸었다.
‘반드시 죽여 버리겠어.’
100보, 90보, 80보, 70보······.
지금도 충분히 죽일 수 있는 거리였지만 아샤는 그가 죽는 모습을 가까이서 보고 싶었다.
‘언니, 내가 꼭 복수해줄게.’
아샤가 남자를 향해 시위를 놓으려고 하는 그때.
갑자기 아샤의 뒤에서 그녀를 감싸는 손길이 느껴졌다.
“으읍~~!”
두꺼운 천이 아샤의 입과 코를 막았고, 잠시 발버둥을 치던 아샤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휴우~ 시간 겨우 맞췄네.”
아리아의 방음마법과 수면마법의 도움으로 최악의 상황을 피한 카이는 아샤를 들쳐 메고 저택을 빠져나왔다.
다음날 아침.
아샤가 눈을 떴다.
‘뭐지? 어제 어떻게 된 거지?’
어제 자신은 뒤에서 어떤 손길이 느껴짐과 동시에 정신을 잃었고, 오늘 아침, 어제 묵기로 했던 여관방에서 정신을 차렸다.
어리둥절해 하는 아샤를 보던 아리아는 그녀에게 어제의 일을 설명해 주었다.
“그, 그랬구나. 카이와 네가 나를 막았던 거구나.”
아리아의 부름에 어느새 카이도 합류해 있었다.
카이는 진중하게 말을 건넸다.
“아샤, 우리가 오래 만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친구지?”
아샤는 눈이 번쩍 뜨이는 느낌이었다.
“응? 그, 그럼.”
“우리에게 그 자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줄 수 있어? 만약 우리가 도울 게 있으면 최선을 다해서 도와줄게.”
아샤는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자신을 이렇게까지 따뜻하게 대해주는 카이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사실은······.”
아샤는 숨겨왔던 과거의 가정사를 모두 털어놓았다.
“그게 정말이야? 그거 완전 개X끼네.”
아리아는 카이의 품에서 하품을 하는 강아지를 슬쩍 쳐다보더니 움찔거렸다.
“아, 아니. 그 X끼 완전 개보다 못한 X끼네.”
카이는 강아지를 쓰다듬던 손을 멈추며 이야기를 정리했다.
“결론은 네가 어렸을 때 순진했던 언니가 프릭 자작이라는 놈의 꼬임에 넘어가 사랑에 빠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언니에게 질린 그 놈이 돈 주머니를 던지면서 언니를 버리자 언니가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그 말이야?”
“응. 맞아. 그 자식이 그냥 우리 언니만 버렸으면 몰라. 언니의 뱃속에 있던 아기까지······.”
“하! 그 X발 X끼 죽여도 그냥 죽이면 안 되겠네. 아샤! 걱정하지 마. 내가 가장 고통스럽게 죽는 마법을 찾아서 아주 사지를 XX해서, 내장을 XX버릴라니까.”
다인의 공개 고백 때만큼 분노한 아리아였다.
“너희 일정에 방해되지 않는다고 했는데 혹시 나 때문에 너희 일정에 문제가 생길까봐 나 혼자 복수하려고 했어. 미안해.”
“아스에 들어오면서부터 안절부절 못했던 이유가 이거 때문이었구나? 혹시라도 그 녀석을 마주치게 될까봐.”
“맞아. 그래도 금방 떠날 거라고 생각하고 내색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왕제의 군대 때문에 갑자기 며칠 머무르게 돼서 불안했어. 그러다가 운명의 장난으로 그 놈을 마주쳤지.”
그때까지 씩씩 거리던 아리아는 테이블을 내려치며 소리쳤다.
쾅!
“카이! 너도 내 일정에 따른다고 했지? 그럼 대장으로서 명령한다. 그 X끼 조지기 전엔 우리는 아스 안 떠난다!”
깜짝 놀라 잠에서 깬 강아지는 낑낑거렸고, 카이는 그런 강아지를 쓰다듬으며 아리아에게 원망의 눈초리를 보냈다.
아리아가 카이의 시선을 받고 주춤거리자 카이는 그제야 아리아에게 향했던 따가운 시선을 거두고 아샤에게 말했다.
“사실 우리 전문분야가 뒤가 구린 놈들 조지는······, 아니 혼내주는 거야. 그러니까 네 손에 피 묻히지 말고 이번에는 우리한테 맡겨줘.”
“맞아! 우리 전에 인신매매하던 백작 놈 하나도 저~기로 보내 버린 적 있어.”
아리아는 파토스 백작을 말하며 손가락은 땅바닥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샤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고, 고마워 얘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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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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