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룡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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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13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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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8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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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백(1)

DUMMY

-설백(雪白, snow white)-




나 여무명이 이 땅의 암살자들에 대한 도장 깨기에 나선지도 몇 달째다.

이번 놈은 산속 암자에서 요즘 유행하는 ‘자연인’인 양 생활하다는 요물이로구나.

암호명은 ‘백혈(白血) 도사’!

그렇담 목에서 흰 피가 솟구쳤다는 신라의 순교 승려 이차돈인가?

아니란다. 부인과 딸까지 두고 있다는 파계승이란다.


평소에는 산속에서 거처하다 당의 명령이 떨어지면 살인귀로 변신하는 가족 형태의 조직이다.

다만 부인과 딸은 이곳 호남이 아닌 영남지역에서 생활한다니 무슨 연유일까?


부인은 꽤 유명한 도예가라고 한다. 그것도 설백색의 달항아리 백자를 빚는···.

암흑계에서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부인이 도살 작업 후 부산물인 인간 뼛가루를 점토에 섞어 도자기로 굽는단다.


영혼이 빠져나간 시체는 시간이 지나면 육신은 썩어 사라지지만 뼈는 그렇지 않아 완전범죄로 만드는데 어려움이 있다.

이걸 해결한 영악함이라니! 게다가 도자기 판매로 부수입까지 올리면서···.

그러면 부인이 만든 작품은 소뼈를 갈아 원료로 사용하는 영국식 도자기인 본차이나(bone china)가 아니겠나?


언제부터인가 기후변화 때문인지 호남지방에도 대설이 자주 내리더라.

오늘도 마침 동장군이 기승을 부린다. 눈 덮인 곡창지역이 끝없이 펼쳐지다가 밑도 끝도 없이 솟구친 설백의 기암절벽들! 여기가 월출산(月出山)인가 싶다.


전남 영암군에서 강진군까지 걸쳐 있는 명산이다.

달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산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괴승이 살고 있다는 거처를 향해 산을 오르는데 그리 높지 않은 코스임에도 이상하게 숨이 막힌다.

산 밑 계곡 사이로 강한 기가 흘러 심장을 조이는 특이한 지역이었다.

역시나 등산로 표지판에는 ‘심장마비 주의’라고 적혀 있다.

남방 출신이 나로서는 견디기 힘든 짐승 같은 추위까지도···.


멀리서 풍경(風磬) 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걸 보니 어느덧 백혈도사의 숙소에 도달한 듯싶다.

이곳은 깊은 산속 절이나 암자 같은 곳이어서 적막이 흐르는데, 범패(梵唄-절에서 재를 올릴 때 부르는 노래)만이 흩날리는 눈과 어우러져 노래 가락을 형성하고 있구나. 정말 조지 오웰의 소설 ‘동물농장’에 나오는 은백색의 ‘슈가캔디 마운틴’과 같도다.


“계십니까? 지나가는 등산객인데 눈이 많이 내려 잠시 쉬어갈까 합니다. 괜찮겠습니까?”

고리가 부딪치는 석장(錫杖-승려들이 사용하는 지팡이) 소리가 나면서 등장한 노인은 걸음걸이가 연화보(蓮花步-정숙하고 아름다운 걸음걸이)와 같다.

사전 정보에 따르면 칠순이 가깝다는데 이상타.

“청컨대 다른 길로 행하소서.” 단칼에 조난당한 등산객의 청을 자르다니 자비가 일도 없는 게 땡중이 확실한 터.


“길 잃은 과객을 어찌 차마 내치려 하시나이까? 바라옵건대 자비를 베푸시옵소서.” 쌍 장군에게 배운 고승들의 말투를 이참에 써 보았다.


자칭 중은 불쾌한 기색이 역력함에도 나의 언사에 자극받은 탓인지 몰라도 애써 염화미소(拈華微笑)를 만들어 내며 나를 맞이하더라.

암자 곳곳에 달항아리가 보이고 그 안에는 각종 과일주가 담겨져 있다니!

개 중에는 인삼주의 향이 너무 짙어 이곳이 절간인지 주막인지 알 수 없을 정도였나니. 승려가 술을?

실내에서 키우는 화초란 것도 대마가 아니더냐? 짐승 사체에서 나는 끈덕진 냄새였다. 봄이 오면 밖에서 대량으로 재배하겠구나.


게다가 혼자 수행하는 게 아니었다. 보살이 여럿 보이는 데다가 저들이 간단한 사이가 아닐 텐데?

저들의 옷차림은 또 뭔가? 승복 외에는 구두며 시계며 온갖 명품으로 휘감았나니! 산골에서 패션쇼라도 하는 겐가?

행실이 괴악(怪惡)한 중이로다.

절의 전반적인 분위기도 결단코 수도사의 거처처럼 고요가 가득하지 않더라.

내 눈에 결코 정토(淨土-부처와 보살이 사는 곳으로 번뇌와 속박을 벗어난 청정세계)가 아니라 큰 뱀들이 똬리를 틀고 있는 음습한 형상일 뿐.


내가 이들의 관계를 의심하는 걸 눈치챈 걸까? 그자는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여인네들을 ‘참 앙아리 보살’이라고 소개한다.

말도 안 돼! 그렇담 이 여성들이 천수관음을 따라 다니는 호법선신(護法善神)이란 말이냐!


그러더니 내게 건네는 찻잔 역시 본차이나였다. 선입견일까? 차 맛이 비릿한 게 소름마저 돋게 한다.

난 늙은 암살자와 마지막 일전을 벌이기 전에 한번 이자의 정체성과 가치관을 떠보기로 했다.

아무리 극악무도한 닌자라도 살면서 나처럼 삶의 목표가 바뀔 수 있는 것이니까.


“아무리 파계승이지만 살생을 금지하는 것이 불교의 기본이 아닌가요? 부처의 오계가 불살생(不殺生), 불투도(不偸盜), 불사음(不邪婬), 불망언(不忘言), 불음주(不飮酒)라던데? 스님께서는 한 개도 지키는 게 없는 것 같구려.”


이자는 뻔뻔스럽게도 세상에서 가장 인자하고 지혜로운 표정으로 바뀌더니 한마디를 던진다.

“소승은 궁리진성(窮理盡性-하늘의 이치를 궁구하고 사람의 본성을 다하게 한다.)에 힘쓰는 불자랍니다. 속세에 있을 땐 군부독재에 항거하던 5.18 민주화 유공자였습니다. 허나 이렇게 세상에 실망하여 부처님께 귀의한 것이지요. 나무관세음보살···”


난 이자의 속셈을 알아채자 더욱 세게 나갈 수밖에 없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나이까? 귀신은 귀신을 알아본다고 감히 저를 속이리이까?”


그러자 놈이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더라.

“자네두 말씀 아닐세. 피 냄새가 아직도 몸뚱어리에서 진동하는 놈이 그런 말을 하다니! 그렇잖아? 이놈아!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으려무나. 여기가 어디라고!”


괴승은 나를 향해 석장을 꼰아쥐고 있고 보살들도 이미 죽창을 들고 곧 찌를 태세다.


난 이자들을 일단 진정시키기 위해 간첩들이 쓰는 암호를 던졌다.


“과메기를 먹을 수 있소?”

그러자 이들은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바로 반응하더라.

“오! 39계단. 내려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몰라봐서 죄송합니다. 직접 오신 걸 보니 무슨 중요한 작전이라도 있는 것인가요? 난 평양에서 태어났지만 부친은 이곳 전라도에서 빨치산으로 날리던 분이외다.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 밑에서도 싸웠지요. 당시 차일혁 경무관이 이끌던 빨치산 토벌대를 겨우 피해 월북에 성공했답니다.”


난 시치미를 뗀 채 대화를 이어 나갔다.

자칭 ‘백혈도사’라는 자는 자기의 공적을 자랑하기 시작했다.


“저는 조국의 통일을 위해 분골쇄신해왔습죠. 80년대에는 운동권 학생들에게 기문둔갑(奇門遁甲)을 가르쳤고요."

중국 출신이 나 여무명은 너무나 궁금해 바로 질문에 들어갔다. “고대 중국에서 은밀하게 내려온 금서(禁書), 다시 말해 음양의 변화에 따라 몸을 숨기고 길흉을 택하는 용병술(用兵術)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삼국시대 촉나라의 제갈공명이 발전시키고 당나라 태종 때 신하이자 명장이었던 이정(李靖)이 활용했다는 그 둔갑술(遁甲術) 또는 은신술(隱身術)?"


백혈도사는 거만을 떨며 답하더이다.

“뭐 그 정도는 아니지만 저의 기문둔갑은 공산주의자들의 비책인 ‘선전선동술’을 지칭하는 겁니다. 단어의 의미를 가볍게 둔갑시킨다고나 할까?

예를 들자면 정의와 평화를 비롯하여 ‘소득주도성장’, ‘성소수자’ 등등···.

소득주도성장은 경제학에 대한 이해가 조금만 있어도 개 풀 뜯어 먹는 소리란 걸 알겠지만 그럴싸해 보이잖소.

성소수자도 그래요. 아름답잖아?

아름다움이 세계를 구원한다는 도스도옙스키의 테제(thesis)가 아니겠소이까?

무식한 조선인들이 즐겨 쓰던 용어인 비역질(臂力質-남색)이나 밴대질(여자 동성애)이 또 뭐요? 망측하고 상스럽게끔. 문화인답게 소수를 끔찍하게 사랑하는 아량이 있어야지요.

쉿! ‘국정농단(國政壟斷)’이란 단어도 우리가 만들었습죠.

법률용어가 아니라오. 이건 중국 경전 맹자(孟子)에서 나온 말이라오. 이 짓거리 하려면 공부 많이 해야 한다니까. 선전선동을 의미하는 프로파간다(Propaganda)는 로마 교황청이 포교활동을 위해 1622년 세운 포교성(布敎省)이지요. 누구 말마따나 각 시대는 새로운 수수께끼를 내놓는데, 그 수수께끼에 가장 적절한 답을 제시하는 집단이 승리한다고 하잖아요. 단지 아쉬운 점이라면 요즘 젊은 놈들은 진보성향의 여자 얘들과 달리 대가리가 나빠서 말귀를 알아듣지 못해요. ‘이명박근혜’ 정권 9년간 제대로 된 정신교육을 못 받은 탓이라오.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반야(般若)는 지혜인데 이 새끼들은 지혜가 없다니까.”


난 이자가 한 말 중에 있는 수수께끼에 관해 나중에 찾아보니 ‘하워드 불룸’이란 사람이 쓴 ‘집단정신의 진화’에 나온 주장이었다.

그리고 선전선동에 대해서도 곰곰이 생각해 보니 현대 광고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에드워드 버네이스(Edward Bernays)’의 책 ‘프로파간다’에 나와 있듯이 ‘대중이 진실로 믿고 있는 것도 이미 선전에 정복당한 지식일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이 가슴에 와닿았다.

참고로 ‘에드워드 버네이스’는 정신분석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의 조카란다.


아무튼 재미있는 놈이다. 그리니 이놈의 계속되는 헛소리나 들어 보자.


“지금은 나이가 있어 직접 혁명 사업에 뛰어드는 데 한계가 있지만 그간 제자들을 많이 키웠습니다.

무속이 판치는 세상이잖아요?

저희 제자들이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 컨설팅 사업을 벌이고 있지요. 강의도 제법 많이 하고요. 유튜브에도 후학들을 쫙 깔아 놓았어요.

그들은 인간의 운세는 물론 국운까지 예측하지요. 물론 뻥이지만···.

전 그들로부터 주요 정치인들의 속내라든지 향후 계획을 손쉽게 수집하고 있답니다. 관료들도 마찬가지예요.

방법은 간단하거든요. ‘당신은 곧 뭐가 될 것이다.’ 라고 흥을 돋우면 환장들 해요.

방법은 간단해. 먼저 여편네부터 꼬드기면 돼! 나중엔 병신 같은 남편들은 다 따라와. 뭐 땅 짚고 헤엄치기죠.

저는 여기 호남 땅에서 사업을 전개하고 있고 제 처와 딸은 영남에서 현재 굶주린 팔공산(八公山) 호랑이들을 달래고 있지요.

이들을 잘 관리해야 하거든요. 언제 또 정권을 잡을지 모르니까요.

그땐 우리가 그동안 구축해 놓았던 진지로 숨어들어야 하거든요.

이탈리아 공산당을 창당한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의 ‘진지전(陣地戰, Position Warfare)’은 읽으셨죠?”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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