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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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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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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영화는 언제나 미래영화다! (6)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타이틀 <재단사>.

테일러 숍에서 일하는 재단사 보조 닉은 사장이자 스승인 알랜의 신뢰와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재단사 알랜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고령이었고, 그의 사후에 테일러 숍을 닉에게 물려 줄 생각도 가지고 있다.

재단사 알랜은 원칙주의자에 지나칠 정도로 정리정돈에 집착하는 노인이다.

그를 아버지처럼 따르는 닉 또한 알랜의 성품을 닮아 꼼꼼하고 정리정돈에 강박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매일 같은 시간에 출근해 같은 작업을 하는 똑같은 노동의 일상.

어느 날 외출을 하고 돌아온 닉은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며 옷을 만들기 시작한다.

마침내 닉이 완성한 옷은 여성용이 아닌 남성의 정장이다.

피팅을 위해 테일러 숍을 찾아온 닉의 애인은 잘생긴 남성이다.

삶과 생활에 어떠한 파격과 변화도 원치 않는 알랜은 크게 화를 낸다.

닉은 남자 애인과 함께 홀연히 테일러 숍을 떠나버린다.

홀로 남은 알랜은 여전히 지루하고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게 되는데....

쉘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류지호를 향해 물었다.


“할아버지가 가슴을 움켜쥐고 죽어 가면서 체스판처럼 질서정연한 테일러 숍이 엉망진창이 되면서 영화가 끝이 나는 거네?”

“그 장면을 제외하고 모든 화면을 매우 안정되고 균형감 있게 다룰 생각이었어. 노인이 죽어가며 그런 균형과 안정이 무너지는 걸 떠올렸지.”


류지호와 쉘라, 더스틴이 스터디 룸에 모였다.

단편 <재단사> 시나리오를 각색하기 위해서도.


“Jay는 어떻게 안정된 일상을 이렇게 다 망가뜨리고 싶어 해?


쉘라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톡 쏘아붙였다.

류지호가 ‘큭큭‘ 웃고 나서 입을 열었다.


“지루한 삶이 얼마나 불행한데? 쉘라도 매일 반복되는 무의미한 삶을 살아봐. 그 삶이 얼마나 숨이 막히는지.”

“단조로운 일상 자체가 아름다운 삶도 있어.”

“그런 삶은 내가 조금 더 마음에 여유가 생기면 다뤄보도록 할게.”

“현실에서는 자상하고 친절하면서 영화는 어쩜 이렇게 삐딱하담...!”


쉘라가 한숨을 폭 쉬며 투덜거렸다.


“친한 감독이 대부분 삐딱해서 그런가봐.”

“그 친한 감독이 도대체 누군데?”

“있어. 그런 감독이.”


류지호가 떠올린 대표적인 인물이 조엘 고언과 쿠엔 태런티노다.

쉘라가 찌푸렸던 안색을 고치고 진지하게 물었다.


“암튼 이 일상 시리즈들은 어떤 계기로 떠올린 거야?”

“떠올렸다기보다는.... 셰익스피어의 <맥베스> 5막 5장의 유명한 독백 한 구절.”

“<멕베스> 5막 5장이라면?”


가만히 대화를 경청하고 있던 더스틴이 입을 열었다.


“그거구나. 인생이란 단지 걸어 다니는 그림자에 불과한 것(Life is but a walking shadow).”


류지호가 <맥베스>의 5막 5장 마지막 독백을 중얼거렸다.


“인생이란 그저 걸어 다니는 그림자일 뿐, 주어진 시간 동안 무대 위에서 자신을 뽐내고 안달하지만, 영영 사라져 버리는 가련한 광대. 인생은 바보가 떠드는 이야기. 소음과 분노로 가득 하고, 아무 의미도 없는 바보 이야기.”

“그래서 세편 모두 다 죽는 걸로 끝을 맺는 구나?”

“그런 거지. 현대에 와서는 그런 게 상투적이긴 해도. 인생은 죽음으로 향하는 행진일 뿐, 허망하기 짝이 없다. 바람 앞에서 춤추는 촛불처럼 짧은 생명이고, 그래서 우리는 모두 걸어 다니는 그림자요. 무대 위에 잠깐 등장했다 사라지는 슬픈 광대. 더 우울한 것은 그럼에도 우리 현대인들이 어떤 의미도 찾지 못하고 매일 반복되는 삶을 살아간다는 거지. 안정과 안주라고 자위하면서.”

“그런데 jay?”

“응?”

“광대에게도 역할이 있잖아. 비록 작은 역할이라도 짐짓 뽐내며 걸어보기도 하고, 관객을 웃기기 위해 안달하기도 하고. 아무 의미가 없지는 않아.”


쉘라가 맞장구를 쳤다.


“맞아. 우리가 마음을 열고 진정성 있게 다가가면 바보의 이야기에도 분명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거야.”


류지호는 설득하려드는 두 사람을 향해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거창하지? <맥베스>라니....”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는 인간이 서서히 타락하는 과정과 그 끝의 파멸을 묘사한 작품 아니었어?”

“뭐 그런 거지. <맥베스>에 얽매이지 말아줘. 그 유명한 구절이 내게는 부싯돌 같은 거야. 실제로는 <맥베스>와 아무런 연관도 없어. 솔직히 실토하자면 그저 그 구절이 멋졌기 때문이야. 어차피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인생이고, 그런 인생의 무대에서 연습은 없다. 따라서 하루하루가 실제 공연이기 때문에 비루하고 반복적인 지루한 일상은 아무 의미도 없지 않을까 하는 의문. 그래서 처음 쓴 이야기가 <슬럼가의 그림자>였고, 그것에서 몇 개의 이야기가 파생된 거지. <재단사>와 <내 삶의 물고기>를 묶어 일상 시리즈라고 거창하게 명명해서.“


쉘라가 엄지를 씹으며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그녀의 눈을 초롱초롱 빛나고 있다.


“그래서 이걸 로맨틱한 분위기가 아니라 흑백필름으로 찍을 생각이었구나. 아름답고 예쁜 이야기가 아니라. 어딘지 고루하고 진부한 느낌을 주려고.”

“딱히 그런 건 아닌데, 흑과 백, 밝은 것과 그림자만으로 관객의 보는 재미를 빼앗아 보고 싶었어. 아무래도 색이 들어가면 화면이 풍부해지고, 시각적으로 약간이라도 자극을 받게 되니까.”


엄지를 씹으며 고뇌에 차 있던 쉘라가 펜을 들어 노트에 뭔가를 적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류지호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툭툭.


더스틴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스터디 룸을 빠져나갔다.

원작자는 여기까지다.

나머지는 각색을 하게 될 쉘라와 연출 할 더스틴의 몫이다.


❉ ❉ ❉


LA 다운타운 끄트머리에 위치한 역사가 오래된 테일러 숍.

아침부터 UCLA 학생 몇 명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길가에 익숙한 익스플로러가 세워져 있다.

운전석에 앉아 있는 류지호가 쉘라가 각색한 <재단사> 시나리오를 읽고 또 읽었다.

쉘라는 오리지널 시나리오에 약간의 살을 더했다.

메시지나 작품의 의도는 전혀 건드리지 않았다.

<맥베스>라는 말에 휘둘려 고뇌하거나 슬퍼하거나 갈등하거나... 그런 장면은 하나도 넣지 않았다.

류지호가 단편영화에서 별로 좋아하지 않는 에피소드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몽타주도 없다.

쓸데없는 장면과 에피소드의 낭비 없이 본래 전달하고자 했던 것만 짚어서 묘사했다는 말이 된다.

영화의 수많은 씬들은 어쩌면 단어 하나 메시지 하나를 위해 존재하는 걸지도 모른다.

또는 그 모든 씬들은 그저 부수적인 걸지도 몰랐다.


“감독 입장에서 시나리오를 보는 방식인가? 아니면 촬영감독도 이런 시선이 필요한 걸까.”


류지호는 중요하지도 않은 문제를 놓고 고민에 쌓였다.

다행히 그런 류지호를 낸시가 구원해 주었다.


“Jay! 테일러 숍 사장님이 촬영해도 좋데!”

“아! 그래? 그럼 출동!”

“호호호. 그게 뭐야?”

“주문이야 주문.”


재단사 보조인 닉이 외출하는 장면 하나와 애인과 떠나는 장면.

그렇게 두 씬을 로케이션에서 찍고 나면 나머지는 영화와 TV학과(Department of Film and Television)에 있는 사운드 스테이지에 촬영할 예정이다.

4학년이 졸업 작품을 위해 만들어 사용했던 세트가 있었다.

그 세트를 재활용해서 마네킹과 약간의 분위기 소품을 배치해 촬영할 예정이다.

졸업반 선배가 찍은 단편의 콘셉트가 가정집 거실이었다.

가벽에 발라놓은 벽지 질감이나 모양이 튀지 않고 무난해 <재단사>의 콘셉트와도 얼추 맞았다.


“로이! 광각렌즈가 좋겠지?”

“라저!”


류지호는 촬영에 뛰어난 소질이 있다거나 완숙한 기술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전문적인 부분은 모두 로이와 상의를 해서 촬영했다.

로이는 자신이 카메라를 잡지 못하는 것에 불만이 없었다.

가르치면서 배운다는 말처럼 가끔 류지호가 엉뚱한 질문과 요구를 하면 그걸 해결하기 위해 이런저런 시도를 하면서 얻어가는 것도 많았다.

가령 류지호는 로이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예쁘고 잘생긴 배우를 예쁘게 잘생기게 찍는 것이 기술일까? 아니면 아름다운 장면 안에 배우들을 넣어둠으로써 아름답게 보이도록 하는 게 기술일까?”


또는.


“자연스러운 화면이라는 것이 실제를 실제처럼 보이게 찍는 걸 말하는 걸까? 실제를 영화적으로 실제처럼 표현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화면일까?”


류지호는 그런 질문을 던져놓고, 다양한 실험을 했다.

단편영화 <재단사>의 촬영 콘셉트는 자연스러움과 부드러움.

그리고 절제된 명암대비과 단순한 실루엣이다.

류지호가 경험한 한국영화는 사람의 얼굴을 밝기의 기준으로 삼았다.

자연스럽다는 것 그리고 사실적이라는 면에서 봤을 때 과연 그것이 옳은가?

실제 실내에서는 사람의 얼굴이 어두운 경우가 많고, 밝은 날에는 또 눈부실 정도로 밝다.

그걸 그대로 영상으로 옮기는 것이 사실적인 표현이 되는 걸까?

사실 정답은 없다.

로이가 매거진을 새것으로 교체하며 류지호에게 말을 걸었다.


“너랑 일하면 뮤직비디오나 광고를 찍는 것 같아.”


영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작업 환경을 말하는 것이다.

광고나 뮤직비디오는 자본의 지원이 충분한 편이다.

금전적인 안정성은 매 장면마다 더욱 더 알찬 화면을 위해 장비와 시간이 투자된다.

보다 정교하고 앞서가는 영상을 시도해 볼 수 있다.

쉽게 말해, 류지호가 단편영화에서도 돈지랄을 한다는 의미다.


“인생은 원래 불공평해. 그런 현실을 불평할 생각하지 말고 그냥 받아들여.”


헨리 게이츠(Henry Gates)가 마운틴 휘트니 고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에서 한 말이다.

로이가 불퉁거렸다.


“쳇!”

“내가 한 말이 아냐.”

“누가 한 말인데?”

“헨리 게이츠.”

“파인 소프트?”

“응.”


류지호와 로이가 노닥거리고 있을 때, 배우에게 디렉션을 주고 돌아온 더스틴이 힘차게 외쳤다.


“스탠바이!”

“레디! 카메라! 롤! 레코드! 스피드!”


딱!


경쾌한 클래퍼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촬영이 시작되었다.

쉘라가 각색한 <재단사>에는 오리지널과 달리 대사가 들어가 있다.


[옷이란 추억을 공유하는 것이란다, 닉. 이렇게 맞춤 형식이 옷의 본질에 더 가깝지. 사람들은 점점 한 시즌 입고 버리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행하지. 입고 잊어버리는 옷이 아니라 오랜 시간 간직하면서 기억하는 것이 바로 옷인 게야.]


알랜 그 자신도 아버지가 물려준 시계를 고쳐 쓰고, 8년 전 손수 맞춘 옷을 아직도 손질해 가며 아껴 입는다.


“컷! 오케이!”


더스틴이 만족한 듯 외쳤지만, 류지호가 제동을 걸고 나섰다.


“아! 미안! 포커스가 안 맞았어.”


로이가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이냐며 류지호를 째려봤다.

류지호는 못 본 척 무시하고, 뷰파인더에 눈을 댔다.


“컷! 오케이!”

“진짜 미안! 카메라가 살짝 흔들렸어.”


간간이 류지호가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NG를 냈다.


“......!”


바보가 아닌 이상 잦은 NG를 의심해 볼 수밖에.

더스틴은 류지호가 일부러 NG를 내는 걸 알아차렸다.

더욱 집중하고, 정신을 다잡았다.

게다가 류지호는 자신이 원작자이면서도 틈만 나면 시나리오를 읽었다.

호기심이 동한 낸시가 류지호에게 물었다.


“네가 쓴 거잖아. 이미 머릿속에 다 들어있는 거 아니었어?”

“들어 있지. 근데 이번에 각색된 더스틴의 이야기를 좀 더 잘 이해하고 잘 표현하려고.”


류지호가 낸시에게 하는 말을 모두가 들었다.

당연히 연출을 하는 더스틴도 들었다.

이곳은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할리우드가 아니다.

생각지 못한 현장의 불확실성이 튀어나올 확률이 매우 높았다.

그렇다보면 모두가 기술적인 것에 매몰될 수밖에 없었다.

그럴 때마다 류지호는 콘티 대신 시나리오를 읽었다.

감독의 의도를 좀 더 상기할 수 있을 것만 같아 생긴 버릇이다.

연출을 하는 더스틴 역시 자극을 받을 수밖에.

류지호와 세팅을 바꿀 때면 틈틈이 시나리오와 콘티를 열심히 보게 되었다.

다른 친구들도 그걸 따라했다.

류지호가 연출에 집중하는 더스틴을 보며 흡족해 중얼거렸다.


“좋네.”


그의 감탄대로 더스틴은 연기 디렉션이나 촬영파트와의 소통도 점점 향상되는 모습을 보였다.

확실히 영화를 백편 보는 것보다 직접 경험해 보는 것이 얻는 게 많다.

덩달아 조감독 역할을 수행하는 쉐인도 현장진행이 몸에 붙었다.

그들만 성장하는 게 아니다.

명확하게 규정지을 순 없지만 류지호 역시 뭔가 껍질 같은 것이 한 꺼풀 벗겨지는 것 같았다.


‘감독의 연출과 촬영감독의 연출.’


둘 사이에 다른 점을 언뜻 알 것도 같다.

촬영은 시간과 공간을 다루는 분야다.

그런 걸 표면적으로 다루는 걸 넘어 그 안에 감독이 표현하고 싶은 은유도 함께 담아야 함을 알게 되었다.


‘절제 할 것이냐 드러낼 것이냐‘


감독의 고민 중에 하나다.

영화의 모든 요소들은 유기체처럼 하나의 이야기 안에 녹아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영화가 심심하고 너무 단순해진다.

촬영은 배우의 감정선을 이끌어가는 구조적인 영상을 만들어야 하고, 그 감정선을 화면 구성이라는 방식으로 관객과 일치시켜야 한다.


‘어렵네.....’


류지호의 촬영은 때로 공간의 분위기를 따라가기 못했다.

그럴 때면 렌즈도 바꿔보고, 조명 세팅도 만져보며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 노력했다.


“어디 가?”

“심심해서....”


류지호가 마네킹들이 일정한 패턴으로 놓여있는 세트 안으로 들어갔다.

그 패턴 속에 몇 개의 마네킹을 살짝 다른 마네킹과 등지도록 돌려놨다.

뭔가 부조화처럼 보이지만, 사실 전체적으로 보면 통일성이 유지되고 있다.

전체적으로 마네킹들이 가지런히 줄을 서서 정렬하고 있어서 그렇다.


“앨런은 그대로 정면을 바라보는 자세로, 닉의 상체는 약간만 앨런을 등지세요.”


배우들의 자세로 바꿨다.

카메라 앵글은 테이블에 수평에 정확하게 맞춰져 있다.

재단사 앨런은 정면을 바로 보는 자세로 앉아 일을 하도록 하고, 닉은 앨런을 약간 등지도록 했다.

자세만으로는 완전한 대칭은 아니다.

다만 두 사람이 정확하게 화면에서 이 등분되어 있다.

그런 화면 배치로 인해 비대칭의 긴장감을 불러일으키지는 않는다.

류지호는 조형의 기본 요소인 반복 패턴, 조화, 리듬, 균형, 대칭을 집요하게 화면에 담았다.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주지만, 약간의 파격을 넣어 시각적 재미가 있는 구도를 만들었다.

16mm 흑백 필름의 거친 화면은 80년대 이전 감성이 녹아있다.

따라서 고전영화를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영화 내내 안정감과 패턴의 반복을 보여주다가 영화 엔딩에서 그 패턴과 반복이 깨진다.

그때 비로소 최고의 효과를 발휘할 것이다.

마네킹이 사열 종대로 늘어서 있는 것이 모두 쓰러지거나 한쪽이 무너지면 재미가 없다.

사열 종대의 앞 줄 왼쪽의 단 하나의 마네킹만 무너져 있다면 어떨까.

그 화면은 꽤나 파격적으로 다가온다.

시선이 그것으로 집중되기 때문이다.

세 편의 단편영화를 온전히 혼자서 촬영하다 보니 류지호는 점점 촬영에 익숙해졌다.

그런 과정에서 중요한 걸 깨달았다.

빛을 다룰 때는 빛이 닿는 곳보다 그림자가 닿는 곳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것.


‘난 촬영감독이 될 생각이 없는데, 배운 걸 어디에 써먹어야 하지?’


류지호는 촬영의 마지막으로 접어들수록 또 하나 중요한 것을 알게 되었다.

촬영감독은 감독에 비해 잡생각을 할 여유가 조금이라도 있다는 것을.


“오케이!”

“모두 수고했어!”


그렇게 또 한편의 단편영화 작업이 끝이 났다.

촬영장비를 수습하는 류지호의 곁으로 낸시가 다가왔다.


“오늘 촬영 어땠어?”


류지호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한마디로 정리했다.


“죽여줬어.”


쉐인이 다가와 류지호에게 말했다.


“네가 촬영감독이라면 감독으로서는 그 보다 멋진 파트너가 없을 것 같아.”


아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는 말이다.


“속단하지 말라고 친구. 내가 과연 촬영을 맡길 만 한 재주가 있는지 완성된 영화가 나오고 나서 생각해도 늦지 않아.”

“아니야, 넌 충분히 대단해.”


한 번 촬영된 필름은 되돌릴 수 없다.

화가는 작품이 맘에 들지 않으면 캔버스를 찢어버리면 그만이다.

그런데 영화는 그럴 수가 없다.

촬영한 필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폐기처분 할 수 없다.

그렇다고 최악의 결과물이 무용지물은 아니다.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수십 차례 하게 해주니까.


후우.


진이 빠진 더스틴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쉘라가 고개를 들이밀며 물었다.


“괜찮아?”


더스틴이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사실 괜찮지 않았다.

정신적으로 매우 지친 상태다.

촬영이 끝나기 직전까진 괜찮았다.

막상 끝이 나니 정신적이 피로감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물 마실래?”


쉘라가 건네는 물을 더스틴이 받아 벌컥벌컥 마셨다.

차가운 물이 몸속으로 들어오자 무겁던 머리가 조금은 가벼워지는 것도 같다.

영화감독은 정신노동을 하는 사람이다.

머리 쓰는 일 역시 엄청난 열량을 소모한다.

비록 학생 단편영화일지라도.


❉ ❉ ❉


UCLA가 있는 웨스트우드에서 20분 거리에 세계 최대 요트 항구가 있다.

바로 마리나 델 레이(Marina Del Rey)다.

눈부신 햇살에 반짝이는 새하얀 색의 수 천 척의 요트들이 청명한 캘리포니아의 하늘과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고 있다.

이 지역은 1960년 전까지는 소규모 선착장으로 쓰이던 갯벌이었다.

이후로 방파제 등을 쌓아 인공 만(灣)으로 조성하면서 새롭게 태어난 해양레저단지다.


부우우웅.


에메랄드 빛 잔잔한 바다에 시끄러운 엔진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선체길이가 42m가 넘고 최대 승선 인원 12명을 자랑하는 크루즈급 대형 요트가 마리나 델 레이 선착장을 출발해 파도가 일렁이는 태평양으로 나아갔다.

선실에 침실은 물론이고 거실, 화장실, 주방 등 다양한 기능을 갖추고 있어 장기간 항해가 가능한 요트다.

이 요트에는 류지호의 단편영화 프로젝트에 참여한 친구들이 탑승해 있다.

럭셔리 슈퍼요트를 렌트한 것에 대해 친구들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단편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류지호가 부자인 것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했으니까.

널찍한 요트 갑판에서 저 멀리 수평선까지 탁 트인 바다를 보고 있자니 저절로 탄성이 터졌다.


“이 예!”

“야호!”

“아! 시원하다!”

“가슴이 뻥 뚫는 것 같아.”


류지호는 친구들과 그들의 파트너를 위해 대형 요트를 렌트했다.

곧 학기말고사다.

여름방학 기간 동안 모두가 뿔뿔이 흩어져 세 달 후에나 만날 수 있다.

세 달 간 이어진 단편 프로젝트의 쫑파티이기도 했고, 방학 동안 헤어질 아쉬움을 달래는 파티이기도 했다.

거침없이 바다를 헤치고 나아가던 요트가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이내 요트가 완전히 한 곳에 멈췄다.


부르르르.

통통.


선장이 류지호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이 포인트가 명당까지는 아니지만, 낚시하기도 좋고 파도도 잔잔한 편이야.”


출발하기 전에 팁을 두둑하게 찔러줘서 그런지 선장은 무척 친절했다.


“고마워요. 캡틴.”

“즐거운 시간 보내기를....!”


선장이 조타실로 돌아갔다.

일행은 각자 여기저기 흩어져 개성대로 선상 파티를 즐기기 시작했다.

해상구조대 같은 모습의 류지호의 경호원들이 한쪽에서 바비큐를 굽고, 낸시와 여학생들은 선실 지붕에 마련된 선베드에서 일광욕을 즐겼다.

류지호는 선원들이 가르쳐주는 대로 선상 낚시를 즐겼다.

먹고 마시고.

모든 걸 내려놓고 즐겼다.

캘리포니아주 LA지역.

흥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운 동네다.

음악이 있는 곳엔 반드시라고 할 정도로 춤이 있다.

류지호의 친구들이 흥겨운 댄스파티를 벌였다.

그러다 술기운이 오르면 선실과 베드에 흩어져 낮잠을 즐겼다.

신나게 춤추고 놀았던 낸시가 선실 소파에서 잠들었다.


쪽.


류지호가 낸시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갑판으로 나왔다.

맥주 한 병을 챙겨 요트 선수에 걸터앉았다.

그의 양 옆으로 더스틴과 로이가 자리를 잡았다.


챙!


세 사람이 맥주병을 부딪쳤다.

더스틴이 수평선 저 멀리에 시선을 두고 말을 꺼냈다.


“내가 찍고도 믿어지지 않아. 내가 영화를 찍다니....”

“어때? 기분이?”

“재미있었어. 엄청! 대단히!”


더스틴은 짜릿한 전율에 감전된 것처럼 살짝 몸을 떨었다.


“그래서 우리가 UCLA에 온 거야. 그런 기분을 항상 맛보려고. 하하.”


로이가 웃으며 말했다.

한 번 생선을 맛 본 고양이는 부뚜막에 매일 드나드는 법이다.

처음 시도하는 것이 어려울 뿐.

로이가 류지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캡틴, 이번처럼 촬영에 관해 수많은 질문에 시달려본 적이 없어.”


더스틴이 낄낄대며 맞장구쳤다.


“지호는 마치 유치원 어린이 같았어.”

“로이.”

“응.”


류지호가 아련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존경하는 촬영감독님이 계시거든.”

“누군데? 니크비스트? 톨랜드?”


스벤 니크비스트(Sven Nykvist)는 거장 잉마르 베리만의 영화 대부분을 촬영한 빛의 거장.

그레그 톨랜드(Gregg Toland)는 <시민케인>에서 딥 포커스(deep focus)를 만들어낸 영화촬영의 선구자다.


“내 고향에서 활동하는 촬영감독.”

“한국인이야?”

“성길 유란 분인데, 그분의 영화를 보고 자라면서 대가란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어.”


훌륭한 촬영감독은 서로 다른 감독들과 영화를 찍어도 자기 색깔을 남겨 놓는다.

한 마디로 자신의 철학이 있다.

철학에 기반 한 일관성도 있다.

이번에 단편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류지호가 촬영과 조명을 직접 디자인하고 실행해보면서 다시 한 번 확인한 것이 있다.

진짜 중요한 것은 촬영이나 조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영화는 한 예술가에 의한 창조의 산물이 아니다.

감독과 스태프 그리고 관객이 하나의 체험 속에서 공존하게 하는 어떤 것이다.

상업영화, 작가영화, 그 무엇을 하든.

자신감 그리고 자신 확신이 있어야 한다는 점.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없는데, 어떻게 타인을 설득하고 감동을 줄 수 있을까.

이는 영화에만 해당되는 건 아니다.

삶에서도 해당된다.


“정말 미친 듯이 찍었어.”

“앞으로는 절대 이런 짓은 사양이야.”

“맞아. 모든 걸 쏟아낸 기분이야. 내 영혼이 모두 고갈된 기분이라니까.”

“비워야 모두 채우지.”

“자동차도 기름이 떨어지면 달리지 못해. 캡틴.”


한 쿼터 동안 원 없이 단편영화로 달렸다.

그 시간 동안 류지호는 비즈니스고 뭐고 다 잊었다.

단편영화 작업만 미친 듯이 몰두했다.

막상 끝나고 나니 약간 공황장애 비슷한 것이 찾아오는 것도 같았다.


“그렇다면, 정열적으로 놀아 볼까. 다시 에너지를 보충해야하니까!”

“파티 타임!”


류지호와 친구들은 럭셔리 요트에서 미친 듯이 놀았다.

마치 내일이 없는 것처럼.


작가의말

즐겁고 행복한 하루 보내십시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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