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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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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영화는 언제나 미래영화다! (7)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UCLA로 돌아온 단편 프로젝트 멤버들은 다시 모범생 모습으로 변모했다.

류지호 역시 학업에 충실했다.

세계영화사 입문 강의가 끝나고 류지호가 책가방을 챙기는데, 맥도웰 교수가 말을 걸어왔다.


“지호군, 다음 수업이 곧바로 있나?”

“아닙니다. 오전에는 교수님 강의밖에 없습니다.”

“내 방에서 차 한 잔 할 텐가?”

“좋습니다.”


한국이었으면 조교를 시켜 자신의 방으로 부르거나, 일방적으로 자신의 방으로 가자고 했을 터.

맥도웰 교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강의를 할 때는 온갖 독설을 서슴지 않는 교수다.

그런데 학생의 시간을 빼앗는 것에 대해 몹시 미안해하는 투로 대화를 청했다.

류지호가 보기에 UCLA 교수들은 기본적으로 학생들이 찾아오는 걸 좋아했다.

학생이 대학생활의 애로사항이나 공부에 대한 걸 물어오면 교수는 매우 친절하고 열정적으로 대화를 나눴다.

수업보다 그런 대화를 더 즐기는 것이 아닌가 할 정도다.

류지호는 맥도웰 교수의 방으로 자리를 옮겨 마주했다.

처음에는 가벼운 이야기가 오갔다.


“최근 통계를 보니 다른 소수인종 보다 아시아계 이민자들 자녀들이 성공할 확률이 높다고 하더군.”

“부모들의 교육열 때문일 겁니다.”

“맞네. USC 사회학 교수의 글을 읽은 기억이 나더군.”

“무슨 내용이었습니까?”

“주말에 히스패닉 아이들은 공원에서 스케이트보드를 타는데, 한국계 아이들은 부모 손을 잡고 도서관에 가는 걸 보고 두 집단의 10년 후 미래가 대충 그려진다는 내용이었던 것 같네.”

“한국계 아이들의 대학 진학률도 높고 성적도 백인 평균보다 높지만, 넘어야 할 산은 많습니다.”

“그렇지. 미국의 주류사회로 들어가려면 넘어야 할 난관이 한 둘이 아니지.”


한국계 미국인들은 백인과 경쟁하기 전에 다른 소수민족과 먼저 경쟁해야 한다.

단적인 예로 일부 미국 기업 문화 속에선 ‘아시아인은 똑똑하지만 리더십이 부족하다’는 편견이 존재했다.

과거에는 일본인들이 그런 평가를 주로 받았는데, 이젠 모든 아시아계에게 그런 프레임을 씌우고 있다.

‘흑인은 게으르다‘라는 프레임처럼 그 같은 편견이 아시아계가 주류로 나아가는데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류지호가 미국에서 소유하고 있는 사업체만 봐도 답이 나온다.

래리 킴을 제외하고 한국계는 단 한명도 없다.

한국인뿐만 아니라, 다른 아시아계 역시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중요 직책은 모두 백인 차지다.

또 다른 난관은 늘어나는 다양한 국가의 이민자들이다.

백인과의 밥그릇 싸움은 둘째 치고, 비백인들과 제한된 파이를 두고 벌이는 경쟁이 만만치 않다.


“한국에서 오는 유학생들의 스펙은 어마어마하지. 그런데 자네는 그들보다 훨씬 못 미쳤어.”


류지호 본인이 잘 알고 있는 부분이다.

맥도웰 교수가 입가에 미소를 베어 물고 말을 이었다.


“자네가 제출한 두 편의 에세이는 매우 인상 깊었네.”


UCLA는 기본적으로 포트폴리오나 추천서를 받지 않는다.

에세이를 철저하게 본다.

류지호는 에세이나 인터뷰에서 트라이-스텔라 픽처스에 대한 이야기를 전혀 넣지 않았다.

모리스 메타보이의 조언 때문이다.

그는 기부활동, 봉사활동, 방송부 동아리 활동, 결혼식 비디오 촬영, 태권도 수련, 영화제 수상경력 등을 주어진 주제에 따라 잘 구성해보라고 조언했다.


“자신만의 스토리. 자넨 그걸 영리하게 에세이에 녹여냈더군. UCLA는 리더를 기르고 싶은 거지, 참모나 보좌관을 교육시키려고 하지 않네. 그런 의미에서 자네의 에세이는 스스로가 리더로 클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어필했어.”


다른 우수한 지원자들을 제치고 류지호가 이 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던 이유를 대강이나마 알게 되었다.


“영화·TV학과만 따로 떼어놓고 봐도 그렇다네. 진취적인 예술가 좋지. 우리는 여전히 그 전통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네. 하지만 시대가 변했어. 우리는 이제 영화현장에서 당장 적응할 수 있는 만능을 양성하려고 하고 있네. 그래서 학생들에게 교양과목을 많이 듣도록 하고 있는 것이고.”


류지호는 가만히 듣기만 했다.

논쟁이나 토론할 주제도 아닐뿐더러 맥도웰 교수는 항상 학생들에게 한번 쯤 고민할 만한 어떤 메시지를 던지곤 했기 때문이다.


“난 자네에게 영화만 생각하지 말라고 충고하고 싶네.”


드디어 맥도웰 교수가 본론을 꺼냈다.


“자네가 영화를 열심히 찍어 보는 것도 좋아. 결코 나쁜 방법은 아니네. 그렇더라도 교양수업을 많이 들어보라고 권하고 싶군. 심리학, 기호학, 커뮤니케이션, 고고학, 역사. 또 이과 계열에는 천문학도 재미가 있을 거야. 별에도 이야기가 있으니까.”


류지호의 고개가 크게 움직였다.

끄덕.


“자네는 영화에 한정해서는 굳이 대학에서 배울 것이 별로 없을 것 같더군.”

“배울 게 너무 많아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모를 지경입니다.”


겸양이 아니다.

류지호는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난 자네가 이 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찍은 단편영화를 모두 봤네.”


류지호는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다.

뉴욕에서 파커 가족과 일부 지인들에게 <영정사진>을 시사한 것 외에 <Help Me, Please>는 미국에서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이 없다.


“1월에 잠시 프랑스로 여행을 떠난 적이 있었지. 그때 Moe가 내게 시간 나면 클레르몽-페랑에 한 번 가보라고 하더군. 부루인스 신입생이 작품을 출품했다고.”

“아.... 네.”

“Moe와 나는 오랜 친구라네. 자네는 몰랐겠지만, 난 Moe가 보내주는 영화에 대해 리뷰를 해주고 있다네. 물론 꽤 비싼 돈을 받아가면서.”

“그러셨군요.”


모리스 메타보이 CEO는 UCLA 영화과와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그것을 토대로 할리우드의 인적 네트워크를 견고히 하고 있다.

그 스스로가 유대계이기 때문에 할리우드 전통의 기득권들과 끈끈한 유대를 가지고 있었고, 자신이 졸업한 UCLA의 각종 단체와 모임에서도 적극적으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난 자네가 그린라이트를 켠 <나 홀로 집에>에 대해 혹평을 써서 보냈어.”


업계 용어 그린라이트(Greenlight).

이 말은 스튜디오에서 영화 프로젝트의 촬영과 진행을 최종 결정한다는 의미로 쓰였다.

할리우드 스튜디오에서는 고위 임원의원회의에서 이 권한을 행사한다.

최종 결정은 대부분은 최고경영자가 행사하는 편이다.

그렇듯 류지호가 가진 다섯 편의 영화 선택권리가 일종의 그린라이트 권리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아는 Moe는 그런 엉터리 스크립트로 영화를 만들 사람이 아니네.”


할리우드에서는 영화 대본을 의미하는 용어로 시나리오(Scenario)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영화의 각본을 뜻하는 영어 단어는 스크린플레이(Screenplay)이다.

한국 충무로에서 시나리오를 ‘책‘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할리우드에서는 일반적으로 스크립트(Script)라고 칭한다.

시나리오란 말은 이탈리아의 '코메디아 델 아르떼'라고 불리는 즉흥 희극의 대본을 뜻하는 말이었다.

소설처럼 쓴 것도 있고, 아주 간단한 트리트먼트 수준의 글도 있고, 장소와 장면의 주제만 적어놓은 것만 가지고 영화를 만들기도 한다.

아직도 유럽에서는 시나리오에서 자유로운 형식을 보인다.

한국의 충무로는 시나리오란 용어나 각본의 형식에서 일본을 따라 했다.

외형적으로 미국식 방식을 따르지만 지문을 아주 간결하게 쓰고 짤막한 대사를 중심으로 쓰는 일본의 각본 방식을 한국의 영화인들이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류지호는 2020년대 충무로 시나리오 스타일대로 썼다.

그것이 익숙했다.

그 때문에 류지호의 <영정사진>, <Help Me, Please> 시나리오를 본 충무로 스태프들이 매우 낯설어 하면서 저급하게 봤던 것이다.

현재 충무로에서 잘 쓴 시나리오라고 불리는 것들은 대체로 일본식 형식을 따른 것이니까.

할리우드를 비롯한 미국의 영상산업은 스크립트에 상당히 엄격한 형식을 따진다.

모든 것을 산업적 표준에 맞추려는 미국인들의 성향으로 인해 장면의 제목, 지문, 인물의 이름, 대사의 위치 등에서도 표준적인 레이아웃이 있다.

심지어 제본의 형태까지도 A4 용지를 철 핀 3 개로 묶은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스크린플레이 중에서도 투자사와 제작사로 접수되는 스크립트를 스펙 스크립트(spec script)라고 또 다르게 부른다.

스펙 스크립트에 그린라이트가 켜지면 촬영용 대본이 만들어진다.

그것이 슈팅 스크립트(shooting script)다.

스펙과 슈팅 스크립트의 가장 큰 차이는 장면의 제목(씬 타이틀)에 숫자가 붙었는지 아닌지를 보면 된다.

슈팅 스크립트를 가지고 씬브레이크다운을 만들고 감독은 콘티를 작성한다.

표준이 만들지니 공정이 체계화될 수가 있다.

의사결정이 쓸데없이 복잡하고 길어지는 단점도 있다.

암튼 <나 홀로 집에>의 스펙 스크립트에는 맥락 없는 회상 장면과 난데없는 주인공 케빈의 다락방 몽환장면 같은 것들이 들어있었다.

트라이-스텔라 픽처스 측에서는 강력하게 대본 수정을 요구했다.

그 같은 강권을 이기지 못한 죠셉 콜럼버스 감독은 슈팅 스크립트 수정과 편집 부분에서 요구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트라이-스텔라 픽처스가 요구한 편집본으로 흥행이 대폭발했다.

영화에 대한 간섭으로 트라이-스텔라 픽처스에 대한 안 좋은 감정을 품었던 죠셉 콜럼버스 감독은 흥행 대성공으로 지금은 간이라도 떼 줄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


“솔직히 촬영단계 직전의 스펙 스크립트는 엉망이긴 했어요.”


류지호가 맥도웰 교수의 말을 순순히 인정했다.


“대학에서 자신만의 영화 스타일을 완성하겠다는 생각은 버리게. 자네는 이미 어느 정도 연출을 할 줄 알아. 그러니 앞으로 남은 대학생활에서 자네가 왜 영화를 찍어야만 하는지를 고민해보게.‘

“.....?”

“교수로서의 충고가 아니라 영화 선배로서의 부탁이야.”


맥도웰 교수로서 오랜만에 발견한 재능 있는 학생이다.

전도유망한 영화학도가 할리우드의 겉멋만을 쫒지 않길 진심으로 바랐다.

맥도웰 교수가 무엇을 우려하는지 류지호는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자신이 트라이-스텔라 픽처스에서 의사결정을 내린 영화들은 다소 일관성이 없었다.

<못 말리는 람보>부터 아카데미상을 받은 <늑대와 춤을>까지.

좋게 말하면 영화를 대하는 스펙트럼이 넓은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손익계산에 밝은 것으로 비춰질 수 있다.

그런데다가 지금까지 찍은 단편영화들도 제각각이다.

유성길 촬영감독이 지적한 것처럼 거칠고 미성숙한 날카로움 보다 기교(겉멋)와 대중영합주의 함정에 빠진 것 같은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본질적인 것을 등한시 할까 염려가 되는 모양이다.


“쉽게 답을 쓸 수 없는 어려운 숙제를 내주시는 군요.”

“자네에게 부탁할 것이 한 가지 더 있네.”

“충고 고맙게 받겠습니다.”

“충고 아니네. 부탁이야.”

“말씀해 보세요.”

“자네 영화를 2학년 학생들에게 보여주고 싶네.”

“......?”

“다음 학기부터 영화·TV를 전공하게 될 학생들은 졸업할 때까지 많은 영화를 직접 찍어볼 거야. 수업에 일환으로 명감독들의 훌륭한 영화를 지겹도록 경험할 테지. 그런데 자신들과 동시대를 살고 있는 젊은 작가의 작품을 경험할 일은 많지 않아.”

“차라리 3대 단편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은 작품들을 보여주시죠.”

“최근에 우리 학교 학생이 찍은 주목할 만한 영화가 있잖은가. 왜 외부사람의 영화를 보여주겠나.”


류지호는 맥도웰 교수의 생각을 알 것 같았다.

영화·TV학과 학생들을 자극하고 싶은 것이다.


“이번 기회에 UCLA 영화TV학과 단편영화 기준이 조금은 높아지겠지....”

“대신 UCLA에 와서 찍은 단편을 틀고 싶습니다.

“......?”

“한국에서 찍은 두 편은 프로들과 작업한 겁니다.”


맥도웰 교수는 그것이 뭐가 문제냐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반칙이잖아요.”

“반칙이라.....!”


맥도웰 교수가 류지호의 배짱에 통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UCLA에서 사귄 친구들과 진행한 단편 프로젝트로 완성한 작품들과 몸 풀기 작업이었던 <Quiz>까지 모두 네 편을 영화·TV학과 조교에게 보내주기로 했다.

누군가 자신의 영화를 좋게 평가해 주고, 나아갈 방향에 대해 걱정해 준다는 것은 기쁘고 고마운 일이다.

류지호는 한국에서 찍은 두 편을 보았던 맥도웰 교수가 UCLA에서 찍은 단편영화들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릴지가 무척 궁금했다.


❉ ❉ ❉


학기 마지막 맥도웰 교수 수업에서 류지호의 단편영화가 상영됐다.

단순히 영화만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교수와 학생이 토론도 함께 진행하는 수업이다.

수업 시작부터 맥도웰 교수로서는 드물게 독설을 내뱉지 않았다.

첫 번째 영화는 <Quiz>.


[성기는 족보 쓰는 신성한 필기구다.

낙서하지 말자, 다시는.]


“뭐야 저 말은?”


교양수업 강의를 듣던 한국인 유학생 몇 명이 킥킥거릴 뿐.

한국인 학생을 제외하고 뉘앙스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의미를 알아들은 학생들이 옆 자리의 학생들에게 뜻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와하하하!


잠시 장내에 폭소가 터져 나왔다.


두 번째 영화는 <이카루스>다.

짧았다.

불에 타올라 불꽃 재로 산화하는 장면이 강렬하게 남았다.

그런데 마지막을 장식하는 국경 표시판이 거슬렸다.


MEXICO ONLY.

NO USA RETURN.


누군가는 멕시코 가족을 동정할지 모르고, 누군가는 그들을 격려할 수도 있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들을 비웃을 지도 모르는....

맥도웰 교수가 마이크를 들고 잠시 스크린 중앙에 섰다.


- 어떤가 매우 짧지?


대부분의 학생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동조했다.


- 일반적으로 상영시간 20분 이내의 영화가 단편영화로 분류돼. 여러분이 수업을 들어서 알겠지만, 영화의 역사는 단편영화부터 시작했지. 세계 최초로 상영된 영화는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가 만든 작품으로, <열차의 도착>이야. 그 외 1분 내외의 짧은 작품 10편이 연속 상영되었다고 하지. 당시에는 장편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없었어. 그런 면에서 보면 세계 최초의 영화가 단편영화라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지.


맥도웰 교수가 말을 하며 스크린 주변을 서성거렸다.

그러다가 한 학생에게 질문을 던졌다.


- 영화 제작 기술이 발달한 현대에는 어때?


학생이 맥도웰 교수의 질문에 막힘없이 대답했다.


“단편영화와 장편영화의 관계는 시와 소설의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단편영화에는 감독이 말하고 싶은 바가 더 함축적으로 밀도 있게 담겨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유효한 장르라고 생각합니다.”


세 번째 영화는 <재단사>.

흑백필름으로 찍은 이 형식미 넘치는 단편영화가 학생들에게는 더욱 친숙했다.

앞에 두 편은 어딘지 학생 특유에 치기와 아마추어적인 면모가 짙었다.

반면에 <재단사>는 고도로 계산된 앵글, 조명, 구도 등 미장센이 돋보였다.

특히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이다.

화면을 꽉 채운 수 십 개의 마네킹이 사열 종대로 질서정연하게 정렬된 가운데, 오른쪽 구석에 마네킹 하나와 함께 쓰러져 있는 노인의 모습에서 감탄이 터졌다.


“......!”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쩍 벌린 채 굳어버린 몇몇 학생들.


“흠!”


강의실 맨 뒷줄에 앉아 함께 영화를 감상하던 영화·TV학과 교수들의 입에서도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재단사 노인의 삶, 그의 가치관, 그의 강박 등을 한 화면에 담는 동시에 노인의 죽음과 함께 결말을 따로 보여주지 않고 닉의 상황을 암시한 장면이다.

맥도웰 교수가 다시 마이크 잡고 나섰다.


- 세 번 째 본 영화는 영화전공 학생들에게 무척 익숙한 양식일 거야. 고전영화를 떠올리게 하고, 표현주의 영화를 연상시키기도 하니까. 앞에 두 영화와 달리 대사가 있는 영화지. 대사의 기능은 극히 제한적이었지만. 감독이 보여주기 싫을 걸 대화로 처리해 버렸군. 아니면 제작비와 시간이 모자랐거나.


맥도웰 교수는 또 다른 학생에게 마이크를 내밀었다.

학생은 아무 거리낌 없이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불친절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영화에서 자세히 다루어지지 않은 내용은 내 마음대로 상상해보는 재미가 쏠쏠했습니다. 또 사건이 늘어지지 않고 중요한 것만 묘사했기 때문에 흑백영화이지만 잠시도 눈을 뗄 수 없었습니다. 음.... 마치, 핵심 내용만 콕콕 집어주는 알짜 참고서 같다고 할까.....?”


맥도웰 교수가 다시 마이크를 자신의 입 앞으로 가져갔다.


- 단편영화란 그런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이야기가 짧게 압축되어 있어 생각해볼 거리가 많은 결말. 그리고 더욱 진한 여운이 가능한. 그런 매력이 있지.


마지막으로 <내 삶의 물고기>.

목이 잘리는 부분에서 학생들이 헛웃음을 흘리거나, 인상을 찌푸렸다.

학생들은 일상에 찌든 남편 농부와 바구니에 들어있는 구워진 물고기의 모습이 묘하게 닮았다는 인상을 받았다.


딸깍딸깍!


강당의 모든 불이 들어왔다.


짝짝짝!


단편영화 상영이 모두 끝이 났다.

맥도웰 교수가 마이크를 들고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 일상이란 주제의 연작 세 편을 봤어. 맨 처음 본 영화는 매춘에 대한 공익광고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아.


하하하.


학생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 <Quiz>의 한국어 시는 사실 나도 완벽히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니야. 족보라는 것은 미국에도 있었지. 아마 여러분은 모를 거야. 19세기 말에 미국인들이 유럽의 귀족 가문에 뿌리를 둔 것처럼 보이기 위해 족보를 만들어 신분을 과시하려 했다는 것을. 유럽 콤플렉스에서 비롯된 유행이었지.


한국의 족보는 가문의 시조부터해서 이름을 적어 놓은 문서 족보다.

미국에서 유행했던 족보는 그림 족보가 대부분이었다.


- 당연히 족보를 만든 사람들은 백인이었어. 가장 최근에는 12년 전에 족보 유행이 있었지. 여러분도 알지 모르지만 <뿌리>라는 TV시리즈가 있었네. ABC에서 방영한 이 드라마는 실로 엄청난 시청률을 기록했지. 그 시리즈로 인해서 미국인들로 하여금 백인들은 물론 흑인들까지 '뿌리' 찾기에 나서도록 만들었어.


참고로 당시에 미국에 족보 회사들이 난립했고 사립 탐정들이 족보 추적에 나서는 일도 벌어졌다.


- 자, 한국과 미국 사례에서 족보가 의미하는 것이 뭘까? 나는 비디오 아트 혹은 그저 치기어린 감독의 장난 같은 초단편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해 봤지. 미국에서 족보가 유행했던 시기는 보기 드문 경제호황기였어. 경제적 호황으로 과거를 돌아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을 때 심리적으로 과거를 정리해 두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는 것이지. 불행하게도 미국에서 다시 족보 유행이 도래할 것 같진 않아. 미국의 불경기가 꽤 오래 지속될 것 같으니까. 또한 70년대 말 <뿌리>로 촉발된 족보 열풍은 흑인들에게 조상에 대한 그리움만 새삼스럽게 일깨워 주었을 뿐... 아프리카 시절에 대한 뿌리 찾기가 사실상 불가능한데다가 그 추적 비용이 너무 비쌌지. 아마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그로 인해 좌절감을 다시 느꼈을지도 모르겠어.


류지호가 전혀 생각해보지 못한 관점의 접근이다.


‘영화과 교수는 뭔가 달라도 다르구나.....’


류지호의 작품의도와 한참 먼 분석이다.

그런데 그 분석이 류지호에게 영감을 줬다.


- 마지막에 본 영화는 어때? 아니 오늘 본 영화들은 어땠지?


학생 한 명이 물었다.


“처음에 본 공익광고는 제외하는 겁니까?”


또 한 번 학생들의 폭소가 터졌다.

맥도웰 교수가 익살스럽게 양 팔을 벌려보였다.

학생 둘이 차례로 손을 들고 대답했다.


“낭비가 없습니다.”

“어떠한 기교도 부리지 않고, 담백합니다.”

- 커트 구성을 봤지? 마지막 영화의 클로즈업은 최대한 절제되어 있지. 그리고 물고기를 발견하고, 물고기를 꼭 잡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드러나는 순간에만 사용되었어. 그 외에는 풀 샷, 롱 샷으로 구성되었고. 어떤 가?

“효율적입니다.”

“함축적입니다.”

- 이 감독이 다루는 사람들의 삶은 드라마가 없어. 우리는 시련을 겪는 사람을 보고, 그를 사랑하거나 미워하거나 하는 감정이 생겨. 여러분이 본 네 편의 단편영화들에서 다루는 사람들은 이야기만 놓고 보았을 때 매력이 없지. 재미가 없어. 하지만 이 영화는 마지막에 반전을 주면서 이야기에 드라마를 만들어냈지.


‘진짜 저 양반이 내 영화를 자기 교재로 사용하고 있네?‘


류지호가 맥도웰 교수의 강의를 들으며 내심 투덜거렸다.


- 이 단편들은 모두 한 명이 기획, 각본, 연출, 촬영, 편집을 했어. 네 작품의 색감, 무드, 빛 모두 현란해.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이 있어. 이 감독은 각기 다른 스타일 형식의 이야기를 푸는데 있어서 일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지. 스타일과 형식미를 넘어서는 무언가를 각기 다른 영화에 묻혔다는 거야.


고개를 끄덕여 동의하는 학생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별 반응이 없었다.


- 여러분이 지금까지 본 영화들은 1학년 학생들이 만들었어. 어쩌면 여러분의 후배가 될 수도 있겠지.


오오오.


학생들이 술렁거렸다.

지금 본 영화들이 모두 영화제 대상 작품이거나 유명한 감독이 학생시절 찍은 영화들인 줄 알았다.

맥도웰 교수가 보여줄 정도면 당연히 그래야만 했다.

헌데 자신들과 같은 UCLA 학생이며 심지어 후배가 찍은 영화란다.


- 여러분이 오늘 감상한 영화가 모두 훌륭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절반은 내가 UCLA에서 지내며 본 학생작품 중 탑 10 안에 들 것 같군.


극찬이다.

맥도웰 교수는 15년 가까이 UCLA 영화·TV학과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그 기간 동안 졸업 작품만 수백 편이었고, 학부와 대학원생들의 실습작품은 이루다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저 양반이 웬일로 칭찬을 다 한데?'


이전 삶의 류지호였다면 당연히 입이 귀에 걸렸을 것이다.

두 번째 삶을 살아가는 류지호는 이상이 너무 높았다.

스스로가 만족하지 못하면 그 누가 칭찬하더라도 마냥 기뻐할 수만 없다.

왜냐 하면 한국 영화계의 정점에 선 감독들, 할리우드의 거물들, 세계 영화팬들이 인정한 천재감독들 그리고 그들 모두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거대한 영화자본들,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서 류지호는 안주할 수가 없었으니까.


- 여러분 가운데 몇 명은 앞으로 영화를 만드는 일이 일상이 될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머지 학생들의 일상은 그렇지 못할 거야. 대다수의 삶은 지금 본 영화에 나온 사람들처럼 그저 그런 따분하고 지루한 일상을 살아갈 거야.


영화를 전공하게 될 학생들은 맥도웰 교수의 말에 내심 코웃음을 쳤다.

그들은 자신만만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나도 너희처럼 그랬단다, 애들아.’


성공하는 사람은 소수다.

대부분은 들러리가 된다.

영화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분야가 그렇다.


- 마지막으로 앙드레 바쟁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번 학기 강의를 마칠까 해. ‘단편영화는 언제나 미래영화다’. 여러분은 졸업할 때까지 부디 이 말을 잊지 마시길 바래.”


짝짝짝.


학생들의 열렬한 박수가 터져 나왔다.

맥도웰 교수의 연설에 감동한 것인지, 이제 곧 방학이 찾아오는 것에 대한 기쁨인지.

후자가 유력해보였다.

그렇게 숨 가쁘게 단편영화 작업에 몰두했던 UCLA에서의 1학년의 막이 내렸다.


작가의말

즐겁고 행복한 하루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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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9

  • 작성자
    Lv.92 낮게나는새
    작성일
    22.05.18 10:16
    No. 1

    이번편 좋았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37 my*****
    작성일
    22.05.18 10:45
    No. 2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59 루시오엘
    작성일
    22.05.18 12:56
    No. 3

    재있어요 굿굿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霧梟
    작성일
    22.05.18 12:59
    No. 4

    참고로 요즘은 한국인들이 교육수준에 비해 연봉이 낮아요...아시아계 중에서는. 인도와 중국, 일본계에게 밀리고, 필리핀계에 비해서 학력은 높지만 소득은 같던가... 난민출신이 많은 국가가 아니면 다 한국계 이민자들보다 소득이 높더군요.

    찬성: 2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霧梟
    작성일
    22.05.18 13:02
    No. 5

    maxico - mexico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44 트뤼포
    작성일
    22.05.21 12:41
    No. 6

    수정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무한땅꼬마
    작성일
    22.05.18 13:12
    No. 7

    재미있게 읽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OLDBOY
    작성일
    22.05.18 15:40
    No. 8

    해외에서 한국인의 연봉이 낮은 것은 정치를 못해서에요. 미국을 예로 들면 중국인, 인도인들은 무리를 지어 세를 과시하죠. 하지만 한국인들은 독고다이 하는 경우가 많아서 능력에 비해 불이익을 받아요. 뭐 백인-흑인-히스패닉의 구조는 넘사벽이고요. 잘 봤습니다.

    찬성: 3 | 반대: 0

  • 작성자
    Lv.96 하몽즈
    작성일
    23.10.24 13:44
    No. 9

    좋은 글이네요. 여기까지 달려온 일상 연작이죠. 잘 읽었습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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