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남자

138화. 격식없는 만남 (시즌2-57)

"대리님 이렇게까지 도와주시지 않으셔도 괜찮은데..."

"이미 알아버렸으니 안 도와줄 수가 없네요"

"그런 건가요? 그럼 말하길 잘한 건가요? 하하하"

"헐... 하하하"

"끝나면 제가 밥 살게요""

"오~케이!"

일요일에 회사로 출근했다.

인사팀 배유진 사원의 사내 도서관 건립에 조금이나마 힘을 보태고자 자처해서 출근했다.

며칠 전 야근 중에 홀로 창고를 치우고 난 후 비워진 공간에 도서관을 꾸미기 위한 본격적인 인테리어 작업이 시작되었다.

인테리어라고 해봐야 별거 없지만 칙칙한 창고를 좀 아늑하고 화사하게 꾸미기 위해 페인트를 칠하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총무팀에 업무협조를 요청하여 회사 비품 창고에 보관 중이 페인트를 사용하도록 미리 허락받았다.

사전에 철저한 준비를 한 듯하다.

그녀는 얼룩진 멜빵바지에 검은 야구 모자를 눌러쓰고 나타났다.

양손에는 어디서 구했는지 빨간 고무 코팅이 된 목장갑을 끼고 있다.

회사에서 항상 원피스 정장에 구두를 신고 있던 모습만 보던 나에게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격식이 파괴된 그녀의 모습은 또 다른 신비함을 불러일으킨다.

“유진씨 이렇게 입고 있으니까 다른 사람 같아 보여요”

“대리님도 그건 마찬가지 같은데요”

오늘 페인트 작업을 위해 나도 청바지에 버려도 상관없을법한 목이 다 늘어난 티셔츠를 입고 왔다.

그녀도 항상 하얀 셔츠와 정장바지에 구두 그리고 회사점퍼만 입고 있는 나의 모습만 보아왔다.

복장은 사람과의 관계를 의도적으로 방향으로 형성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첫 만남에서 어떤 복장으로 만나느냐는 그 사람의 첫인상을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 첫인상은 뇌리에 각인되어 왠만한 반전 혹은 시간의 축적 과정이 없이는 잘 변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격식을 파괴하면 상대방에게 호감을 사는 것이 쉽지 않다.

인간은 시각적 동물이다.

격식 있는 복장은 상대방에게 격조 있는 모습으로 비춰질 수 있다.

반대로 복장이 근거 없는 신뢰감을 심어준다.

또한 격식 있는 복장은 상대방에 대한 긴장감을 유지시켜주고 말이나 행동의 실수를 줄여준다.

행동을 제어하는 효과가 있다.

그것이 어떻게 보면 상대방에게 매너 있는 사람으로 비칠 수 있다.

물론 복장부터 말과 행동까지 시종일관 딱딱하다면 그 자리는 면접장소 같은 분위기가 된다.

격식 있는 복장에 말과 행동이 예의에 어긋나지 않을 정도의 비격식이 첨가되면 상대방에게 신비감을 심어 줄 수 있다.

과거 격식 없는 만남의 추억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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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볼까요?]

[예?! 지금 이 시간에요?]

[예. 뭐 서로 격식 차릴 필요 있어요?]

[음... 뭐 가식적인 모습보단 나을 수도 있겠네요]

[뭐 입고 있어요?]

[예? 갑자기 그건 왜?]

[전 츄리링 입고 있는데 그냥 이렇게 바로 나갈게요]

[헉! 저도 츄리닝 입고 있는데...]

[잘 됐네요 그럼 30분 뒤에 츄리닝 입은 체로 그냥 츄리하게 @@카페에서 보는 걸로 하죠]

[츄리하게? 하하하 음.... 오케이! 그래요 그럼]

대구에 입성한 지 1년이 지나도록 이성교제와 담을 쌓고 살아왔다.

이성에 대한 감을 잃어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매일 계속되는 야근과 주말 특근에 이성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그냥 쉬고 싶다는 생각만 간절할 뿐이다.

그냥 주말이면 원룸 방구석에 처박혀 하루 종일 영화를 보거나 가까운 산에 오르거나 하는 걸로 일상에 지친 몸과 마음의 힐링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래도 이성과의 관계의 끈을 놓지 않으려 생각한 것이 온라인 만남이었다.

오프라인에서 만남이 여의치 않다면 온라인으로라도 이성에 대한 감을 유지해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내 손안에 스마트폰은 새로운 인류 포노사피엔스(Phono Sapiens)로의 진화을 일으키고 있었다.

당시 그런 신인류의 니즈에 맞춰 남녀의 만남도 손안에서 시작된다.

온라인 남녀 데이팅 어플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기 시작했다.

수요가 있기에 공급이 있는 것이다.

그 누구도 자신이 데이팅 어플로 이성을 만난다고 얘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온라인으로 일을 하고 쇼핑을 하고 안부를 전한다.

하지만 이성 관계 만큼은 눈빛을 교환하고 살을 맞닿아야 한다는 고정관념 때문인지

모두가 그런 데이팅 어플을 통한 만남에 부정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누구도 그런 류의 어플을 이용해서 이성을 만난다고 떠벌리고 다니는 이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라인에 익숙해진 사람들의 데이팅 어플 사용자들은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었다.

시간과 노력 그리고 비용을 최소화하고 더 많은 이성과의 접촉을 가능케 하는 자본주의 경제논리는 남녀연애시장에도 어김없이 적용되고 있었다.

“어! 이 여자 우리 집 근처네”

스마트폰의 위치 추적 기능은 반경 몇 킬로미터 안에 있는지 내가 설정한 옵션사항에 맞는 여성들을 찾아내주는 서비스까지 탑재했다.

집을 떠나 대구로 올라온 이후로는 지인들의 소개팅도 뜸해졌다.

대부분 부산에서 있는 지인들도 대구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나에게 아는 사람을 소개시켜주는 것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을 것이다.

주말부부는 선호 옵션이지만 주말연애는 아직은 기피 옵션인 듯 보인다.

결혼 적령기 남녀에게 부모나 지인을 통한 만남은 적지 않은 부담이 있는 게 사실이다.

그건 소개해주는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고 대놓고 결혼정보업체를 찾아 너무 결혼에 목매는 철 지난 매력 없는 이성으로 비칠 것 같다. 그렇다고 아무나 만날 수는 없다.

그런 남녀들의 고민을 어느 정도 해결해 준 것이 바로 소개팅 어플이다.

어플에서는 서로가 궁금해하는 남녀의 기본 정보부터 개인적인 취향까지 맞춰서 매칭을 시켜준다. 지역과 연령까지 원하는 카테고리를 설정하여 상대를 찾을 수도 있다.

좀 더 신빙성 있는 정보를 얻고 싶은 남녀를 위한 증빙된 세세한 정보까지 알려주는 유료 어플까지 생겨났다.

나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사는 여성과 한동안 퇴근 후 어플 채팅창을 통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어느 정도 친밀감이 생겼다.

그건 비단 나뿐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녀도 온라인의 그 느낌이 오프라인에서도 맞을까 하는 호기심이 생겨난 듯 보였다.

온라인의 만남은 오프라인으로 옮겨졌다.

이제는 온라인에서 오프라인으로 연결되는 비즈니스 모델이 대세가 되어가는 것 같다보인다.

서로가 잘 알고 있는 카페에서 평일 늦은 밤의 급 번개팅이 성사된 것이다.

밤 열 시가 다 된 시간 카페 안은 한산하다.

아직 그녀는 도착 전이다.

지금 오고 있는 중이라는 톡이 들어온다.

검은 야구모자에 노란 삼색 줄무늬가 들어간 남색 츄리링을 입고 시장표 삼디다스 슬리퍼를 질질 끌며 계산대로 간다.

양 손은 츄리링 상의에 꽂아 넣고 메뉴판을 올려다본다.

"카페모카 한잔이요"

진동 벨을 받아 들고 밤 야경이 내려다 보이는 이층 창가에 자리 잡았다.

잠시 뒤 창 밖 아래 검은 모자에 노란색 츄리링을 입은 여성이 들어온다.

그리고 어디에 앉아 있냐는 문자가 들어온다.

이층에 있다는 답장을 보내고 잠시 뒤 그녀가 계단으로 올라온다.

이층 계단 끝에선 그녀는 나처럼 양손을 상의 호주머니에 꽂아 넣은 체 고개를 한 번 돌려 주변을 스캔하더니 바로 나를 알아본다.

조리 샌들을 질질 끌며 내게로 다가온다.

삼색 검은 줄무늬가 어깨에서 발끝까지 떨어지는 몸에 달라붙은 노란 츄리링은 그녀가 몸매에 어느 정도 자신이 있다는 걸 과시하는 듯 보인다.

그 모습이 마치 영화 "킬빌(2003)"의 우마 서먼을 연상케 한다.

"희택씨?! 맞죠?"

"우마씨?!"

"예"

그녀는 이미 알고 있지만 예의상 재확인 후 자리에 앉는다.

그녀는 자리에 앉자마자 다리를 꼬고 등을 편안하게 소파에 기댄다.

"전 먼저 주문했어요"

"아 그럴 거 같아 저도 주문하고 올라왔어요"

"지 이이이잉~~"

"그럼 잠시!"

나의 진동벨이 울린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커피를 받으러 내려간다.

쟁반에 커피를 받아 들고 돌아서는 순간 그녀가 뒤에 서 있다.

비슷한 디자인의 츄리링에 비슷한 검은 모자 그리고 샌들까지 누가봐도 커플룩으로 오해받을 만한 복장이다.

카페 종업원은 말없이 서로의 쟁반을 연이어 들고 가는 우리 둘을 힐끔힐끔 쳐다본다.

"노란색을 좋아하시봐요?"

"예! 뭐 좀..."

"그쪽도 싫어하진 않는 듯요"

그녀는 팔짱을 낀 채 턱을 살짝 들어 나의 츄리닝의 노란 줄무늬를 가리킨다.

그녀의 다리는 길다.

긴 다리가 앞에 놓인 무릎 높이의 낮은 탁자에 닿는다.

그녀는 비스듬히 몸을 틀더니 다리를 꼰다.

그리곤 위에 포개어진 한쪽 다리를 까닥까닥 흔들어댄다.

그 모습이 어린 시절 가지고 놀던 두 다리가 묶인 방아깨비를 연상케 한다.

푹신한 소파 품에 안긴 상체와 엉덩이 때문인지 그녀의 다리가 더욱 길어 보인다.

나의 시선은 그녀의 까닥거리는 다리로 향한다.

그녀도 츄리한 나의 모습보다는 창 밖 야경이 더 좋은 모양이다.

가끔 내가 던지는 나의 물음에만 답할 뿐 그녀의 시선은 창 밖은 야경에 더 오래 머문다.

그리고 야경도 지겨운 모양이다.

입을 벌리고 하품을 한다.

내가 있다는 사실을 까먹었는지 입이 다 닫힐 때쯤에서야 손으로 입을 가린다.

하품은 전염된다고 했던가

나도 하품에 기지개까지 켜며 그녀의 반응에 동조한다.

"그만 갈까요?"

"그럴까요?"

그렇게 한 밤 중 격식 없는 남녀의 만남은 격식 없이 끝이 났다.

남녀에겐 격식을 벗겨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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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즐거운 하루 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