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어린 왕자와 같은 마음으로 (시즌 2-74)
"글쎄요? 유진씨랑은 기숙사에서 거의 마주칠 일이 없어서요,
저도 요즘 설계 업무가 너무 많아서 거의 매일 야근이고 들어오면 자기 바쁘거든요, 뭐 집이 대전이라 주말엔 집에 가서 월요일 아침에 바로 출근하고 하니 거의 볼일이 없더라고요, 유진 씨가 또 말수가 많지 않아서 얘기를 많이 나눠본 적도 없어요"
"아 그렇군요, 혹시 유진 씨가 누굴 데려오고 한 적은 없나요?"
"아뇨, 항상 방에 혼자 있는 거 같던데요, 아! 근데 최근 들어 늦은 밤에 자주 밖에 나갔다 오는 거 같더라고요"
“그래요?”
“밤마다 누가 찾아오는거 같더라구요, 아마도 남자가 생긴 거 같은데··· 그게 희택씨 아녔나요? 큭큭”
“네? 아뇨, 전 아닌데요”
“그럼 도대체 그 시간에 누굴 만나러 나간거지? 회사 여직원들 사이에선 희택씨랑 유진씨랑 뭔가 있는 거 같다는 소문이 파다하던데 하하하 둘이 사귀시는 거 맞죠?”
“아···니 그건 아니구요”
회사라는 좁은 공간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직장인들은 사내에서 벌어지는 업무 이외의 일들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어있다.
특히, 그것이 이성에 관련된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리고 이런 루머는 여자들 사이에서 더욱 빠르게 퍼져나간다.
유진 씨의 룸메이트에게서 그녀의 행적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찾아왔지만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는 듯 보인다.
"죄송한데... 유진 씨 방에 좀 들어가 볼 수 있을까요?"
"영장 들고 오셨어요?"
"예?!"
"하하하 농담이에요, 얼마 전에도 경찰들이 들이닥쳐서 유진씨 방을 보고 갔거든요, 희택 씨처럼 이것저것 물어보고"
"아 그랬군요"
"들어가 보세요 뭐 훔치고 할 사람은 아닌 듯 하니 하하하"
그녀의 방에 들어선다.
방안 가득 익숙한 그녀의 체취가 느껴진다.
기분이 편안해진다.
잠시 눈을 감는다.
그녀의 체취와 창가로 비춰 들어오는 햇살의 온기가 마치 그녀가 바로 앞에 있는 듯한 착각을 들게 한다.
"어~ 유진 씨?"
그녀의 형상이 희미하게 눈앞에 나타난다.
그녀는 입가에 미소를 띤 채 눈물을 흘리고 있다.
손을 뻗어 그녀에게 닿고자 한다.
그녀는 멀어진다.
난 눈을 뜨면 그녀가 사라질까 눈을 감은 채 한 걸음 그녀에게 다가간다.
다가가려 하면 조금씩 멀어진다.
닿을 수 없다.
손 끝에 잠시라도 닿아보려 손을 뻗어 한걸음 한걸음 그녀에게 다가간다.
손가락 끝에 딱딱한 무언가가 닿은 느낌에 눈을 뜬다.
"The little prince?!"
[어린 왕자] 영문판 책이다.
책장에는 여러 가지 책들이 꽂혀있고 뻗는 손 끝 중지에 닿은 것은 우연찮게도 그 책이었다.
'너는 장미에게 바친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그 장미가 그토록 소중해진 거야'
나는 나도 모르게 조용히 읊조린다.
그녀가 과거 어린 왕자 속 이 문구를 나에게 들려주며 나에게 적잖은 울림을 줬던 기억이 떠오른다.
책장에서 책을 꺼내 펼쳐본다.
"헉! 이게 뭐야?"
무심코 펼쳐 든 책을 보고 화들짝 놀란다.
영문으로 인쇄되어 있어야 할 책 안은 수기로 적힌 한글이 빽빽하게 적혀있다.
[ 5/26, 비행기 잘 뜰 날씨
사장님과 미국 출장길에 올랐다. 마케팅팀으로 입사 후 해외 출장이 잦다.
내가 미국 출신이라서 일까 아님 같은 동문 후배라서 일까? 그가 미국 출장길에 오를 때면 항상 나를 대동한다.
내가 해외 마케팅 파트이긴 하지만 나의 위로 과장 그리고 부장도 있다.
그들의 영어실력도 Not bad 하다.
다른 직원들이 얘기로는 사장과 사원 둘이 출장 가는 건 내가 거의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한다.
난 그게 뭐가 이상한가 이해하지 못했지만 한국 기업문화가 그렇단다.
사장은 나에게 젠틀(gentle)하다.
나와 단둘이 있을 때면 항상 영어로 얘기한다.
그는 회사에서 볼 수 없는 웃음과 미소를 나에게 보여준다.
그는 비즈니스 클래스이고 나는 이코노미이다.
그런데 그는 공항에서 티켓팅 할 때 나의 좌석을 비즈니스로 업그레이드해줬다.
덕분에 정말 편하게 왔다.
역시 사장이 좋긴 좋구나]
이 책은 그녀의 일기장이다.
나는 이러면 안되는 줄 알지만 멈출 수가 없다.
고개를 돌려 반쯤 열려있는 방문을 보고는 조용히 방문을 닫는다.
다시 일기장을 들여다본다.
[7/17, 날씨 is pretty good for picnic
미국의 전시회 참가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에 홀로 출장을 왔다.
사장도 지금 이곳에 있다.
얼마 전부터 그는 회사 직원들의 눈치 때문인지 나를 대동하고 출장 가는 것을 피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가 미국 출장을 가면 나는 그보다 며칠 전 혹은 며칠 후 출장 일정이 잡힌다.
사장에게서 문자가 왔다.
나와 그의 모교인 스탠퍼드 대학 교정에서 만나자고 한다.
그와 모교 캠퍼스에서 만났다.
그와 학교 안 편의점에서 산 두툼한 햄버거를 먹으며 캠퍼스를 거닐었다.
그는 과거 대학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는 듯 했다.
그가 말했다.
나와 있으면 좋다고 그의 눈빛이 씨리어스(serious)하다.
무언가가 잘못되어 가는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나는 어느 샌가 그녀의 일기장을 들고 의자에 앉아서 읽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이러면 안되는 줄 알지만 계속 빠져든다.
[7/18, 비가 내린다 like my mind.
사장이 늦은 밤에 나의 숙소로 찾아왔다.
그는 약간 술에 취한 듯한 모습이다.
그는 나에게 써든리(suddenly) 키스를 하려 한다.
나는 순간 팔꿈치로 그의 얼굴을 hit 했다.
그는 내가 태권도 유단자인 줄 몰랐을 것이다.
그는 균형을 잃고 얼굴을 거친 벽면에 부딪치고는 넘어졌다.
순간 임베레스(embarrass)한 나는 그를 일으켜 세웠다.
그의 얼굴에선 피가 흐르고 있었다.
나는 늦은 시간 그를 기숙사 방 안으로 데리고 들어와 얼굴을 소독하고 약을 발라주었다.
다행히 룸메이트는 주말 자신의 홈타운으로 가서 기숙사에 없었다.
거즈로 상처를 덮어주고 나니 그가 said sorry 했다.
나도 I said sorry too 했다.
그는 자신이 아닌 모습으로 사는 게 너무 힘들다고 말했다.
아버지인 회장의 기대가 그에게는 셰컬즈 (shackles, 족쇄) 같단다.
그는 내 앞에서 눈물을 흘린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를 안아주었다.
내가 그때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알 수 없는 심퍼시(Sympathy)가 느껴졌다.
그가 안정을 찾았을 때 나는 그에게 말했다.
회사를 다니기 힘들겠다고
그는 제발 떠나지 말라고 얘기했다.
앞으로 이러지 않겠다면서 나를 persuade(설득)했다.
그럼 나는 더 이상 그와 같이 있지 않게 해달라고 얘기했다. ]
[8/1, 대구는 덥다더니 too hot
인사팀으로 발령이 났다.
사장은 내가 했던 부탁을 반만 들어줬다.
둘이 있는 시간은 없지만 그가 그의 집무실로 가는 길목에 있는 인사팀으로 나를 옮겨놓았다.
그는 출퇴근 할 때마다 나의 책상 앞을 지나간다.
길거리에 떨어진 10센트짜리 동전을 바라보듯 무심한 표정으로 한 번씩 쳐다보고는 지나간다.
기분이 좋지 않다.
그렇다고 이젠 회사를 그만둘 수도 없다.
내가 바라보고 싶은 사람이 회사 안에 생겼기 때문이다.
전대리님이 얼마 전에 나에게 했던 말이 기억난다.
“좋은 사람을 보고 싶으면 싫은 사람도 보는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게 그게 직장생활이고 인생 살이라고···”
나는 처음에 그 말 Understand 되지 않았다.
왜 좋은 사람만 보면 되지 Why 싫은 사람을 봐야하냐고
Now I got it what that means. (이제 무슨 말인지 알겠다)
좋은 사람에게 좋아한다고 싫은 사람에게 싫다고 말하지 못한다.
모든 걸 놓치지 않고 살아가야 하는 어른들의 마음은 dry해져 간다.
갑자기 또 어린 왕자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어른들은 이상하단 말이야”
또 보고 싶어진다. 말할까? 보고 싶다고? 그냥 아이처럼···]
그녀의 마지막 문장에 나의 가슴에 뭔가 알 수 없는 울컥함을 치밀어 오른다.
우리는 [어린 왕자] 속 이야기처럼 어린 아이의 눈과 귀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과 행동
을 하면서 살아간다.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아프면 아프다 슬프면 슬프다고 말할 수 없다.
좋은 마음도 싫은 마음도 아프고 슬픈 것도 모두 숨기며 살아가야 한다.
순수한 마음은 표현되지 못한 채 그렇게 조금씩 사라져 간다.
동심을 잃어버린 어른은 동심을 가졌던 그 시절을 그리워만 한다.
그 누구도 그 시절 그 때의 마음으로 돌아갈 용기를 내지 못한다.
어쩌면 진정한 용기란 어린 시절의 그 때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린 왕자가 가진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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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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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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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즐거운 하루 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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