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게임 속 나혼자 플레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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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찬솔
작품등록일 :
2022.09.15 01:46
최근연재일 :
2024.04.20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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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24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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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엘촌으로

DUMMY

동훈의 신형이 앞으로 쏘아졌다.


힘과 민첩 스텟이 한데 버무려져 탄환처럼 쏘아진 동훈은 돌진하는 힘을 이용해 칼을 휘둘렀다.


슁!


동훈의 칼이 허공을 가르자 서슬 퍼런 소리가 났다.


“끄아아악!”


처음부터 겁을 집어먹었던 도적의 앞섶이 갈라지며 피가 터져 나왔다. 영웅 등급의 칼은 유려하게 휘둘려 손쉽게 적을 베어 버렸다.


동훈이 싸우는 법에 대해 아는 거라곤 초등학교 때 놀 듯이 배운 태권도 자세 몇 토막과 중학교 때 마지막으로 했던 주먹다짐이 다였다.


그렇잖은가. 법과 질서가 버젓이 존재하는 현대사회에서 피와 살이 튀는 전투란 건 교통사고처럼 우연한 계기로만 터져 나오는 사고에 불과했다.


분명 그럴진대, 이토록 자연스럽고 능숙한 움직임은 뭐란 말인가?


앞섶이 베인 도적은 혼비백산하여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런 동료를 보고 아까부터 덤벼들려던 도적은 당황해서 욕을 했다.


“기사다, 분명 기사야!”

“잭! 도망가지 마! 저 머저리!”


동훈의 일검은 자연스럽기 그지없었다.


오랫동안 칼을 잡아온 칼잡이의 그것처럼 칼 휘두름에 걸리적거림이 없었다.


다만 현대인 특유의 폭력을 꺼리는 기색이 움직임에 묻어나와 정말 무술에 조예가 있는 이가 본다면 동훈의 움직임이 어딘지 뚝뚝 끊기는 부분이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을 터였다.


물론 그런 조예 있는 이가 도적질을 하고 있을 리는 없었다.


“사, 살려,”

“말로! 말로 합시다!”


도적들은 혼비백산했다.

그들로서는 어디서 이런 괴물 같은 인간이 나타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곳이 반왕의 중요한 영토던가? 남쪽 변방에 불과하지 않던가?


저런 위용을 뽐내는 자라면 반왕의 기사 혹은 그에게 높은 귀족 작위를 받은 자일지도 몰랐다.


그런 자가, 이런 변방에서 대체 무얼 했길래 자신들에게 날벼락을 떨어뜨린단 말인가!


동훈은 도적들이 목숨을 구걸하는 모습에 단호하게 대답했다.


“난 몬스터랑 말 안 해. 테러범과 협상하지 않는다, 몰라?”


게임 속 캐릭터는 어떻게 싸웠지? 더 벨룸의 캐릭터는 칼을 든 팔을 크게 휘두르는 게 다였다.


동훈 또한 그렇게 했다.


신기한 건 그렇게 하니 칼 휘두르는 게 자연스러울뿐더러 강력했다. 온몸의 힘 스텟이 전부 뿜어져 나오는 것 같달까?


동훈의 머리에 문득 떠오른 한 토막의 명언은, ‘기술이란 대저 기본기의 합일 뿐이다.’


‘어디서 들었더라? 책에서 본 건가? 어디서 본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내가 휘두르고 있는 칼질은 그 말에 딱 들어맞네. 횡베기, 종베기로 모든 움직임을 설명할 수 있어. 시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나가는 공격, 어딘지 전투에서 한걸음 떨어져 있는 듯한 심리 상태는 동훈에게서 긴장감을 앗아갔다.


게다가 동훈의 찌뿌둥하고 항상 어딘가 결리던 현실의 하자 있는 몸이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은 동훈에게 더욱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현실에서는 동영상에 나오는 춤 한 동작도 제대로 따라 추지 못하는 목각인형 같은 뻣뻣함을 가진 게 동훈이었다.


“하앗!”


쉬잉!


기합과 함께 내지르는 칼은 매섭게 휘둘러졌다.


캉! 테엥! 탱그랑!


동훈의 칼과 부딪힌 도적의 조잡한 칼은 부딪히는 순간 이까지 나가버렸고 동훈의 힘을 못 이긴 도적은 칼을 놓쳤다.


도적의 칼은 힘에 못 이겨 저 멀리 튕겨 날아가 버렸다.


한 칼에 한 부위씩. 무아지경으로 휘두르는 칼은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어, 어억! 이 자식이!”

“악! 아악!”


동훈의 현실감각을 돌려놓은 것은 상대의 피륙을 갈라놓은 감각이었다.


살과 가죽을 가르는 섬뜩한 감촉은 삼겹살을 썰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살아있는 사람의 살과 가죽, 뼈는 질긴 생명으로 붙어있어 끊어내기가 여간 곤란한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동훈이 살인을 망설였다는 건 아니었다.


기이할 정도로 왔다갔다 하는 현실감각은 전투 본능처럼 동훈을 전투로 몰아넣었다.


그럼에도 사람의 질긴 목숨은 좀체 끊어지지 않았다. 동훈의 무감각하고 기계적인 손속에 피를 리터 단위로 쏟고 장기와 뼈를 드러내도 기어이 숨을 쉬며 버르적거리고 마는 것이다.


“끄아악!”

“헛, 헛, 꺽! 꼴깍.”


단말마와 숨 넘어가는 소리.


시체에 칼질하는 게임은 없다. 적이 시체로 변하자 동훈의 전투 본능은 마치 스위치 내리듯 사라져버렸다.


이미 죽어버려 파르르 떨리는 도적의 시신을 살아있는 것으로 착각해서 목과 가슴 부분을 한 번씩 더 찌른 건 온전히 동훈의 자유의지였다.


그 결과 시신은 완전히 난도질 되었다.


“이런 젠장.”


동훈은 끝내 욕을 뱉고야 말았다. 기분 좀 더럽네. 불쾌한 골짜기 같아.


하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동훈의 게임과 같은 감각은 여전히 뇌리 한 부분에 남아 동훈을 정신적인 충격으로부터 보호했다.

동훈이 꼴사납게 뒹굴거나 구역질하거나 눈물을 흘리는 일은 없었다.


다만 잠시 시체를 보며 묵념할 정도의 머뭇거림은 감출 수 없었다.


동훈이 그렇게 잠시 시체에 눈을 고정한 채 머뭇거리는 동안, 어디선가 이질적인 파공성이 들려왔다.


슉!


화살 소리! 그것을 깨닫는 순간 화살은 이미 목표물에 꽂혔다.


퓩!


“으억!”


화살이 공기를 찢어내고 사람의 몸통에 박혔다. 동훈은 뒷목에서 느껴진 섬찟한 기운에 화들짝 놀랐다.


“내가 말했잖나. 무리 지어 다니는 놈들일 거라고. 항상 뒤를 조심해야지.”


반다르였다.


그는 어느새 활을 꺼내 들고 있었다. 활을 든 반다르는 지금껏 보여줬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은은하게 풍기는 위압감과 어디로도 도망갈 수 없다는 압박감이 반다르로부터 느껴졌다.


그에게서 레벨은 보이지 않았지만 절대 낮은 레벨이 아니라는 것을 동훈은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반다르의 화살을 맞은 도적은 이미 시체가 되었다.


[도적 lv.1]


주변에서 망을 보던 놈일지도 모르겠다. 동훈이 죽인 도적들보다 레벨이 낮은 걸로 보아 못된 짓을 하려니 망을 보게 시킨, 밀려난 놈이 분명했다.


물론 1레벨짜리가 동훈에게 위해를 끼쳐봐야 얼마나 끼치겠나.


동훈은 뽑기를 진행할 만큼 진행한, 어엿한 과금러라고 할 수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스텟 상승이 유의미한 정도일 것이다.


기본적인 스텟부터 다를 테니 동훈의 방어 스텟을 뚫지 못하고 데미지를 넣기란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그렇다한들 반다르에게 도움을 받지 않은 게 아니었다.


“감사합니다. 방심했군요.”


“방심은. 싸우는 걸 보니 방어력도 뛰어났을 것 같군. 이 녀석의 칼이 자네에게 닿을 수나 있었겠나.”


이곳에서 방어력 스텟, 그러니까 더 벨룸식 방어력 AC는 현실이었다.


명중 스텟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을 도적의 공격이 동훈의 방어 스텟을 뚫지 못하고 빗나가버렸으리란 건 반다르나 다른 이 세계 주민들도 짐작할 수 있는 바였다.


공격이 저절로 빗나가버린다니!


미쓰MISS가 나는 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건 그것이 이 세상의 법칙이기 때문이었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명중 낮은 사람의 공격이 방어 높은 사람에게 맞지 않는 건 더 벨룸 세상의 법칙이었다.


“그래도 도와주신 건 도와주신 거죠. 방어 뚫고 칼 박히는 건 아니어도.”


반다르도 인정한 바지만 감사를 전하는 건 일종의 사회생활이었다.

그래도 기껏 생각해줘서 활을 쏜 건 사실 아닌가.


고맙다고 말하는 게 돈 드는 일도 아닌데 감사에 인색한 건 미련한 것이다. 불교에서도 감사는 돈 안 드는 보시라고 하던데.


아니나 다를까 반다르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근데 그 미소가 일 잘하는 사원을 본 사장, 뛰어난 노예를 본 노예 상인 같은 미소 같아서 찝찝하긴 한데.


“훌륭한 칼솜씨였어. 흉흉한 세상을 살아가기에 꼭 필요한 능력이지. 필요한 수준을 상회하는 것 같지만 말이네.”


칭찬에 인색한 반다르는 뒤에서 보며 정말 감탄했다.

싸움이라고는 할 줄 모르는 듯했던 이방인이 기사의 능력을 지닌데다 귀신같이 칼을 휘두르는 모습은 오래 살아온 반다르에게도 놀라운 일이었다.


‘외모부터 다른 이방인이 아니었다면 나조차도 반왕의 기사라고 생각했을 거야.’


물론 반다르는 동훈의 칼질에서 어딘지 뚝뚝 끊기는 어색함을 발견한 바 있었다. 그 또한 전장에서 구른 세월이 있었으니.

이질적인 외모와 조금은 어색한 칼솜씨는 반다르의 동훈에 대한 의심을 모두 털어내게 했다.


그런 점에서 동훈의 믿기지 않는 수준의 실력이 태반은 좋은 무기에서 나왔다고도 말할 수 있었지만 반다르는 무기를 다루는 사람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사람이었다.


반다르가 동훈의 싸움 실력을 칭찬하는 건 동훈을 띄워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런 칼솜씨를 지닌 떠돌이라. 자네는 왕을 참칭하는 자인가?”


참칭자. 혹은 플레이어.


더 벨룸 스토리상 고대의 통일왕조인 오블론 왕조가 무너지고 수백년간 이 땅에 제대로 된 왕이 나타나지 않았다.


오블론 왕조가 남겼던 유산은 여전히 신비와 마법에 뒤덮여 여러 지역에 잠들어있었다.


요컨대 그럴싸한 통치자는 없고 세상에 보물은 널려 있는 상황이라는 뜻이다.


그런 혼란의 시대에 난립하는 영웅들, 왕이 되려는 자들이 나타나는 것이다. 바로 참칭자들, 더 벨룸 세상에 접속하는 플레이어들이지.


그들은 군주 직업을 가지고 다른 플레이어들을 혈맹으로써 복속시켜 왕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싸운다. 그러기 위해서 보스도 잡고 오블론 왕조의 옛 성도 먹으려는 것이다.


‘참칭자에 대해 안다는 건 이곳에 참칭자가 있다는 건가? 나 말고 다른 플레이어가? 나보다 빨리 들어왔다면 얼마나 빨리? 레벨은 어느 정도 먹은 거지?’


자신보다 먼저 들어온 사람이 있다. 왠지 직감은 그쪽이 아닌 것 같았다. 다른 쪽인 거 같은데....


꼬리를 물고 이어지려는 상념을 멈추고 반다르의 질문으로 돌아왔다.


게임의 궁극적인 목표는 게임 내 일인자가 되는 것.


곧, 오블론 왕조의 뒤를 잇는 통일 왕조인 혈맹을 세우는 것이 게임의 궁극적인 목표인 셈이다.


군주가 되는 것이 목표인 동훈에게 왕을 참칭하는 참칭자냐고 묻는 건 정곡이었다.


참칭자냐고? 맞아. 군주가 될 거니까.


하지만 동훈은 답하지 않고 잠시 생각했다.


오랜 사회생활로 다져진 동훈의 경험상 반다르가 말하는 단어의 맥락에서 은은한 멸시를 느꼈다.


참칭자, 그 단어가 반다르의 잇새에서 발음될 때 감출 수 없는 감정이 새어 나왔다.


단서를 가진 동훈은 대답해야 했다. 더 늦어지면 이상할 테니.


동훈의 대답은 인정인가, 부정인가? 겸손인가, 선언인가?


잠시 말을 고른 동훈은 대답했다.


“그 이름을 참칭할 자격부터 갖춰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직 저는 아무것도 없는 부랑자에 불과합니다.”


동훈의 대답은 절묘했다. 부정으로 거짓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참칭자인 것을 확언하는 것도 아닌, 여지를 주면서도 당당한 태도를 잃지 않는 수였다.


동훈이 해온 사회생활, 눈치를 살피고 상황을 판단해온 세월이 빛을 발했다.


반다르는 동훈의 대답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생각에 잠기더니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마녀 할머니 아니, 아델라 누님이 엉망이 된 모습을 대충 추스르며 다소곳하게 고개를 숙였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마녀가 마법도 못 쓰고 웬 쪼렙 도적들한테 당하고 계신 건가요? 물을 수도 없고. 다만 동훈도 마녀NPC의 레벨을 모르니 긴가민가했다. 진짜 쪼렙 도적들에게 당할 짬인가?


아델라는 공손하게 예를 표하며 송구스럽다는 듯 말했다.


“구해주신 은인께 제가 드릴 게 없어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저희 집에서 식사라도 대접해드리고 싶네요. 폐가 되지 않는다면 은인 분들을 초대해도 괜찮을까요?”


마녀의 집? 게임에서 몇 번이고 들어가 봤다.


정체불명의 보라색 액체를 끓이는 검은 솥과 말린 약초,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이한 재료들이 가득한 한약방을 어찌 잊으랴.


물약 상점을 겸하는 마녀의 집은 다엘 캐릭터를 한 번이라도 플레이해본 사람이라면 한 번씩은 들어가 봤을 것이다.


근데 동훈이 알기로 마녀에게는 물약도 많고 약초 같은 것도 많은 걸로 알고 있는데. 드릴 게 없다니. 이게 구해줬더니 보따리 아까워하는 그거냐?


하여간 동훈은 꿍꿍이속을 모를 마녀의 집으로 가 속 편히 밥을 얻어먹을 마음이 없었다.


“괜찮습니다. 그러실 것 없습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죠. 가족들과 따뜻한 식사를 나누시죠.”


퀘 보상도 들어왔고요.


===

부가 퀘스트 완료!

보상획득 : 2백 크로네, 10% 경험치, 일반 장비 소환 레시피 조각 1개

===


동훈은 퀘스트 보상을 대충 보아 넘겼다. 보상이 짜다. 부가 퀘스트는 원래 그랬다.

동훈은 바로 보상을 획득하지 않고 잠시 미뤄뒀다.


한편 동훈의 말에 아델라는 자신의 치맛자락을 꾹 잡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의 미모를 생각하면 누구라도 그녀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하지만 동훈이 누구인가.

아델라의 진면모를 아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쭈글쭈글한 피부, 사납게 구부러진 매부리코, 얼굴에 우둘투둘하게 난 사마귀를.


그렇게 슬슬 회피하려는데 어디선가 야생 풀잎을 주워 입에 꼬나문 반다르가 동훈에게 충고했다.


“흉흉한 세상에 레이디를 홀로 집에 보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기껏 구해놓고 다시 그런 일이 벌어지면 어쩌려고.”


아저씨, 이 여자 그런 여자 아니거든요? 완전 흉악한 마녀거든요? 흉흉한 세상이 오히려 무서워할 정도거든요?


하지만 반다르까지 그렇게 말하니 동훈이 완강하게 거부할 명분이 약해졌다.

여기서 싫어요! 안 가요! 하면 동훈은 겉보기엔 여려 보이는 이 마녀 아가씨를 범죄 가득한 세상에 던져두고 나 몰라라 하는 냉혈한이 될 판이었다.


‘그냥 죽일까? 썰려고 해봤다가 썰리는 게 나면? 렙차 나면 장비가 좋아도 조금 힘든데.’


NPC의 레벨 설정은 어떻게 되어있을까? 게임 안에서 레벨 설정이 되어 있는 NPC는 경비병뿐이었다.

물약팔이 마녀 NPC는 기본적으로 공격 불가 판정이니 이게 현실로 들어오면서 어떻게 변했는지는 부딪혀 봐야 알 수 있으리라.


하지만 동훈이 살육에 미친 사람도 아니고, 도적들을 다 죽인 판국에 그의 피해자인 아델라까지 살육하는 건 모양새도 나빴다. 동훈은 그녀의 의도에 대한 판단도 보류한 바 있지 않은가.


그래, 그래도 마녀 할머니는 다엘캐를 위한 초반 물약 NPC였다. 무슨 일 있겠어? 원래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면 안 되는 법이었다.


‘초보자를 위한 NPC가 설마 나쁜 짓을 하겠어? 무슨 일 있으면 도망가면 그만이야. 아무리 쎄도 도망은 칠 수 있겠지.’


“제가 미처 그 생각을 못 했네요. 안내하시죠. 한 끼 신세 좀 지겠습니다.”


역시나 아델라의 집은 다엘촌에 있었다.


목적지가 다엘촌이었으니 망정이지 완전히 먼 곳에 있어 봐라. 드러누워서라도 그냥 다엘촌으로 가자고 땡깡을 부렸을 텐데.


아델라의 집이 다엘촌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반다르가 신기한 일을 다 봤다는 듯


“인간이 다크엘프들의 마을에 살다니, 내 살아오면서 들어보지도 못한 일일세. 무슨 연유로 다크엘프들과 부대껴 살게 된 거요?”


다크엘프 또한 인간과는 다르지만 계통으로 따지자면 사람에 속하는 이들이었다. 아인종이니 사람으로 분류되지.


피부색만 달라도 꺼리는 게 사람일진대 하물며 종족까지 다르다면.


“제 남편이 다크엘프에요. 남편의 종족을 뛰어넘는 구애에 결혼했죠. 결혼 후에 다크엘프 마을로 넘어와 살았어요. 지금은 제 고향 같은 곳이에요.”


저게 거짓말인 걸 이 세상에서는 아마 나만 알 거다. 당신, 사랑의 묘약으로 남편 얻었잖아.


인간과 다크엘프의 혼인은 사랑만 가지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기본적인 수명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그들의 문화 차이가 극명했다. 외국문화 정도의 수준이 아니었다. 종족 자체가 쌓아온 토대가 다르니 그럴 수밖에.

서로 다른 문화의 충돌은 단지 사랑한다고 결혼하기에는 걸림돌이 많았다.


물론 이 누님은 사랑만으로 결혼한 건 아니지. 사랑의 묘약만으로 결혼한 거지.


“세기의 커플이시군. 허면 부군은? 다크엘프들은 부군이 있는 여인을 홀로 다니게 두지 않을 텐데?”


“남편은 몇 해 전에 세상을 떠났어요. 역병이었죠.”


이 이상으로는 동훈도 모르는 서사였다.


다엘 남편을 묘약으로 꼬셨고 알 수 없는 이유로 저주를 받아 끔찍한 할머니의 모습으로 변모했다는 것이 마녀 NPC에게 부여된 이야기의 끝이었다.


그러고 보니 게임에서는 마녀의 남편 되는 다크엘프를 누구도 본 적이 없으니 이런 배경이 있었구나 싶었다.


반다르는 미안한 말을 했다는 듯, 젠틀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는 노신사 같은 기운을 풍겼다.


“부군께서 자애로운 신의 품에 안기셨기를. 괜한 기억을 꺼내게 한 게 아닌가 싶군.”


“제 부군은 신실하고 삶에 충실한 사람이었죠. 분명 자애로운 신께서 데려가셨을 겁니다. 그리고 괜한 기억은요. 전 그이와의 기억으로 살아가는 걸요.”


“숭고한 삶을 사시는군. 사람을 위해 사는 삶은 숭고한 거야.”


반다르의 말에 아델라는 살풋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싱그러운 미소는 사람을 홀릴 만큼 아름다웠다.


사람을 위해 사는 삶이라. 반다르는 멋있게 늙은 남자라 무슨 말을 해도 캬, 하게 되는 무언가가 있었다. 게다가 발음까지 고전적이긴 하지만 고급스럽게 굴러가는 느낌이라.


마녀 아델라 또한 말에 현기가 있어 두 사람은 두런두런 이야기를 잘도 나눴다.


그 광경을 동훈은 반다르의 개와 함께 제삼자의 자리에서 보았다. 게임 캐릭터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은 동훈으로서도 신기했다.

뭔가 플레이어인 자신을 빼고도 돌아가는 세계가 주는 기묘한 소외감과 생경함은 동훈을 세계에서 동떨어뜨려 놓으면서도 그것을 가지고 싶게 하는 소유욕을 들끓게 했다.


반다르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부인께서는 툴레도라는 다크엘프를 아시오? 그 마을에 사는 다크엘프인데 아마 2년쯤 전에 마을로 돌아왔을 거요.”


반다르의 물음에 아델라는 고개를 꺾으며 고민했다. 잠시 고민한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툴레도의 이름을 입에 굴리던 아델라는 도무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툴레도? 툴레도... 모르겠네요. 2년 전에 외지에서 돌아온 마을 사람은 없었어요. 죄송해요. 아는 게 없어서.”


반다르는 정말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부인께서 괘념치 마시길. 그 친구 변덕은 나도 잘 알고 있으니. 어디 박혀 야바위놀음에 빠져있을지 모르지. 그 친구의 도움을 받으러 온 건데 헛걸음이었어.”


“유감스럽네요. 그래도 제 음식을 드시면 저희 마을에 오신 걸 후회하진 않으실 거예요. 이래봬도 제 남편이 제 요리를 엄청 좋아했거든요.”


아델라는 수줍게 웃으며 반다르를 위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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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행운(2) 22.10.17 519 16 17쪽
30 행운(1) 22.10.16 529 8 16쪽
29 각 잡고 뽑기 22.10.14 554 15 21쪽
28 퇴사각(2) 22.10.13 551 18 20쪽
27 퇴사각 22.10.12 547 13 14쪽
26 함 뜰까? +1 22.10.11 576 12 17쪽
25 반왕 22.10.10 626 12 20쪽
24 손동훈의 혈맹 22.10.10 629 13 12쪽
23 PK유저의 수수께끼 22.10.09 657 11 12쪽
22 PK 유명인 +1 22.10.08 656 13 17쪽
21 과감하게 가자 쫄지 말고 22.10.06 659 15 16쪽
20 안녕, 다엘촌 22.10.06 722 11 18쪽
19 [내가니싸부] 22.10.05 765 11 19쪽
18 퀘스트 완료 22.10.03 818 11 18쪽
17 너, 마녀잖아 +1 22.10.01 859 12 22쪽
16 메인퀘스트 22.09.30 887 15 19쪽
15 자리 22.09.29 901 18 18쪽
14 공공장소에서는 큰소리를 삼가세요 +1 22.09.28 919 15 13쪽
13 게임과 현실 22.09.27 934 14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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