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게임 속 나혼자 플레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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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찬솔
작품등록일 :
2022.09.15 01:46
최근연재일 :
2024.04.20 20:15
연재수 :
12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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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13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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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퇴사각(2)

DUMMY

동훈이 눈을 비비고 조금은 진정한 마음으로 확인한 잔고는 놀라웠다.


총매입 40,550,000원

총평가 52,715,000원

총손익 +12,165,000원

EBB 선물인버스3X : 매입가 40,550,000원/ 평가손익 +12,165,000원 / 수익률 +30%


“미친, 미친. 왜, 왜 매입이 4천만원? 평가는 왜 5천만원?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간신히 진정시켰던 마음이 다시 널을 뛰며 동훈의 심박수를 올렸다. 이걸 어떻게 흥분 안 하고 참아? 보살님도 아마 진정 못 할 거야.


이게 레버리지의 힘인가?


피곤해서 풀매수를 때려놓았더니 동훈의 600만원이 증거금으로 잡혀 대출까지 나온 상태였다.

무슨 절차가 복잡하더라니. 전적으로 무지해서 벌어진 일이었다.


‘대출법 개정인가 뭔가 했다더니 대출이 이렇게나 받기 쉬운 거였어? 무슨 대출 받는 거라고 일언반구도 없이 그냥 대출을 떡하니 내줬네.’


경제 활성화를 위한 대출법 개정안 어쩌고를 뉴스로 대충 보고 넘긴 동훈은 그 실체를 직접 경험했다.

그리고 대출받는 거라고, 투자 책임은 본인에게 있는 거라고 경고도 있었지만 귀찮음에 대충 넘긴 건 동훈이었다.


겁도 없이 곱버스에 대출까지 받아가며 4천을 태우다니! 확실한 정보가 있어도 올인하기는 어려운 법 아니겠나.


누군가 그걸 봤다면 무식하다고 욕을 했을 것이다. 무식하면서 인생 다 걸었다고.

왜, 주식 주제 커뮤니티에서 전재산 박았습니다, 이거 오르나요? 물어보는 초짜들에게 사람들은 온갖 비웃음과 걱정 어린 욕을 갖다 박지 않는가.


동훈 역시 그 대상이 되었을 법한, 대출되는지도 모르고 풀매수를 땡긴 바보가 된 것이다.


‘될놈될! 될 놈은 된다니까! 예쓰! 대출인지 몰라도 먹으면 된 거 아냐?’


하지만 오히려 그게 복이 돼서 큰돈으로 돌아왔다.


운이 좋았다고밖에 못했다. 동훈이 화살표는 볼 수 있지만 그게 언제 어떻게 오를지는 모르기에 이렇게 빨리 수익을 본 건 전적으로 운이 좋아서였다.


무식하면 어때. 운이 좋았으면 어때. 돈이 얼만데!


하루만에 5천? 대출된 금액을 다 갚는다 해도 1천2백만원 가량 남는 어마어마한 수익이었다.

동훈은 후덜덜한 손의 떨림이 오금까지 내려가는 걸 느꼈다. 한 번에 벌어본 적 없는 수익이었기 때문이다.


“미쳤드아.”


역시 자본주의는 신이고 통찰은 무적이다!


마음껏 환호하고 나니 동훈은 조금씩 진정이 되는 것을 느꼈다.

마음이 가라앉고 흥분을 내려앉히고나니 동훈은 자신이 회사 사무실에 있음을 깨달았다.


회사인 것도 잊고 소리를 질렀다는 사실을 이제야 자각한 동훈은 입을 막고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사무실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점심시간이 아직 남아서 사람들이 돌아오려면 시간이 조금 떠있기 때문이었다.


누가 봤으면 쪽팔릴 뻔했네. 동훈은 한숨을 돌리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누군가는 천이백 가지고 호들갑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동훈은 달에 이백 정도를 버는 사람이었다.

한 달에 이백을 벌던 사람이 하루에 그 여섯 배에 달하는 수익을 올린 셈이니 그 달달함에 이가 썩지 않고 배길 수가 있겠나.


“하루에 천오백이면 내일은 삼천, 그 다음날은 사천오백? 이, 이거 일주일 안에 일억도 문제가 아니겠는데.”


동훈은 혼자 귀신이라도 들린 것처럼 중얼중얼 돈 계산을 했다.

동훈도 알고 있다. 인지하고 있다. 운이 좋아서 번 거지 지속적으로 일수입 천오백을 벌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거.


하지만 사람 마음이 그렇지 않은가.


오늘 천오백 벌었으니 이걸 내일도 벌면 삼천이요, 그 다음은 사천오백이 될지 모른다는 거.


동훈에게 억이란 티비에나 나오는, 게임머니에나 나오는 단위였다. 동훈이 억을 모아본 건 더 벨룸에서나 크로네로 모아본 게 다였다.


현실에서 동훈의 통장에 0이 7개 이상 찍혀본 일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무방했으니 억은 현실적이지 못한 단위였다.


하지만 그게 이제 손 닿을 범위까지 들어오다니. 마냥 꿈만 같은 단위가 아니라니.


천이백이라는 돈은 동훈에게 큰 용기를 주는 돈이었다.


“퇴사다, 퇴사. 난 이제 자유의 몸이야! 나는야 프리 엘프! 자유를 찾아 떠납니다!”


동훈은 다시 차오르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텅 빈 사무실에서 홀로 소리쳤다. 양팔을 크게 치켜들고 마치 탈옥에 성공한 영화 주인공처럼 포효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사직서 써야지.


동훈은 곧장 다시 앉아 컴퓨터를 켜 문서를 열었다. 이젠 업무용 컴퓨터를 만져도 상관없지. 앞으로 계속 업무를 보지 않을 거니까.


‘사직서’


동훈은 뿌듯한 제목으로 문서를 시작했다.


사직서를 채우는 내용은 별다른 게 없었다.

여기다 욕을 쓴다느니 분풀이를 하는 건 시간 낭비였다. 다시는 이 업계에 발을 들여놓지 않으리라 굳은 각오를 하고 거지 같은 회사에 남기는 마지막 선전포고를 한데도 득될 게 하나도 없었다.

괜히 내용 생각하며 적으려 머리 아프고 손 아프지 좋을 게 없단 뜻이었다. 나중에 소장 날아오지 않으면 다행이지.


그러니 동훈은 평범하게 신변상의 이유로 퇴사함을 담담하게 적어놓을 뿐이었다.


깔끔한 내용과 군더더기 없는 양식은 동훈의 깔끔하고도 군더더기 없는 퇴직을 상징하는 듯했다.

동훈은 자신의 사직서를 만족스럽게 검토했다. 이 정도면 그 누가 와도 동훈의 퇴직을 트집 잡지 못하리라.


동훈이 사직서를 마무리 짓자 점심시간은 끝을 알려왔다. 사람들이 돌아올 시간이었다.


끼이이이


기름칠 안 된 문을 열고 들어오는 첫 복귀자.


단아하고 청초한 분위기를 풍기는 큐메디 제일 미녀 우지연 주임이었다. 동훈에겐 그저 예쁘지만 조금 이상한 회사 동료였지만.


우 주임은 특유의 도도한 걸음걸이로 긴 생머리를 찰랑이며 다가왔다.

투명한 피부와 큰 눈은 그녀의 순수한 미모에 빛을 더했다. 연예인 같은 그녀의 외모는 사실 여기에 왜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녀는 휙휙 둘러보며 무언가를 찾다가 동훈을 발견하고는 자신의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러고 무심한 척 걸어와 동훈에게 말을 걸었다.


“대리님, 커피 드시겠어요?”


우 주임이 양손에 아메리카노를 들고 있었는데 그중 하나를 건넸다.

그녀는 마치 뭔가를 준비하듯 숨을 살짝 고르고 내민 손을 언제든 거둬들일 준비를 했다. 동훈의 거절을 미리 염두에 둔 모양이었다.


저 커피마저 거절하면 좀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게 마지막으로 건네주는 커피 아니겠나.


오늘만큼은 카페인이 심장을 격하게 뛰게 해도 곱버스가 주는 격한 감동을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동훈은 우 주임의 마지막 커피를 받기로 했다.


동훈이 커피를 받아들자 이례적인 상황에 우 주임의 얼굴에 당황이 어렸다. 이내 자신의 커피를 받아줬다는 생각에 얼굴이 약간 붉어지는 우 주임이었다.


“아, 주임님. 커피 감사합니다. 이제 제 커피 사오실 필요 없어요. 퇴사할 거거든요. 그동안 커피 주셔서 감사했어요. 먹은 적은 없지만.”


동훈의 갑작스러운 선언에 우 주임은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잠깐 숨도 안 쉰 것 같은데.


우 주임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고 그녀의 시선이 잠시 동훈이 쓰고 있는 사직서에 닿았다 떨어졌다.


우 주임은 애써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퇴, 퇴사요? 이직하세요? 어디로요? 말씀도 안 하시고, 아니. 헤드헌팅됐다는 말은 못 들은 거 같아서.”


당연했다. 헤드헌팅도, 이직도 아니니까. 그냥 쌩퇴사가 동훈의 목적이었다.


동훈은 우 주임의 떨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내가 그래도 사수 노릇은 나쁘지 않게 했나보구나, 생각했다. 그러니 부사수가 사수 퇴직한다니 저렇게 동요를 보이지.


“이직은 생각 안 해봤는데요. 당연히 헤드헌팅도 아니죠. 흠. 어디로 하게 될지는 모르겠네요. 만약 한다고 해도.”


돈 떨어지게 되면 하려나? 하지만 통찰이 있는 한 돈 떨어지기도 쉽지 않을 듯싶은데.


동훈이 더 이상 통찰이라는 치트키를 쓰지 않고 보통 사람들처럼 정정당당하게 승부한다면 당장 내일이라도 퇴사를 번복하고 복직할지도 몰랐다.

무능력한 동훈에게 금융 세계란 냉혹한 정글 그 이상일 테니까. 온갖 기관과 외국인, 큰손과 세력에 의해 갈갈이 뜯어 먹히고 뼈만 남아 쫓겨날 것이다.


하지만 동훈에게는 통찰이 사라질 일이 전혀 없지 않은가.


그러니 복직 또한 전혀 없는 일일 것이다.


한편 가만히 굳어버린 우 주임은 속으로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허망함을 느끼고 있었다. 뭐랄까, 둥지를 잃어버린 아기새의 마음을 체험하고 있달까.


지금 우 주임이 하고 싶은 말은 하나뿐이었다.


‘가지 마세요.’


동훈이 들었다면 기겁하며 자신을 큐메디라는 좆소에 묻을 셈이냐고 되물을 속엣말을 우 주임은 도저히 꺼낼 수가 없었다.


우 주임은 극도의 절망감 속에 과거를 회상하기 시작했다.


이민자 2세 우지연 주임은 생애 대부분을 외국에서 살아왔다.

부모님 두 분의 모국어가 한국어인지라 그녀 또한 영어와 한국어를 자연스럽게 익혔고 한국에 대한 동경 또한 마음에 품고 있었다.


그녀는 아주 평범한 삶을 살았다.


평범하게 미들스쿨, 하이스쿨을 거쳐 칼리지에 진학했고 소위 말하는 너드의 삶이 그녀의 전부였다.

그런 밋밋하고도 밍숭맹숭한 삶 속에서 우지연은 마음속에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을 느끼고 있었다.


미국 유수의 대학까지 훌륭하게 졸업한 우 주임은 성인이 되면 달라지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로 학교를 다니고 정해진 길을 따라 살아왔건만 성인에 골인한 그녀를 기다리는 건 달라질 것 없는 일상이었다.

자신의 평범한 삶에 환멸을 느끼고 부모와 상의도 없이 자신의 뿌리를 찾아 한국으로 날아오기에 이르렀다.


집도 절도 없이 무작정 한국으로 들어온 우 주임에게는 어떤 정보도 주어지지 않았다. 어떤 일이 좋은 일이고 어떤 회사가 좋은 회사인지, 한국의 좆소가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 그녀는 까맣게 몰랐던 것이다.


비유하자면 헬조선이라는 지옥에 떨어진 가녀린 우지연 천사는 인재를 잡아먹으려고 아가리를 쩍 벌리고 있는 수많은 좆소 중 큐메디라는 좆소에 머리를 들이민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녀가 큐메디로 흘러든 건 순전히 그녀의 불행이었다.


우지연 주임은 낯선 한국 문화와 처음에는 맞지 않던 한국 음식 때문에 고생하다가 매콤한 좆소의 회사 문화에 막타를 맞은 셈인데 우 주임은 어쩌면 그때 미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가장 많이 했다.


그런 그녀에게 한 줄기 빛이라고 할 만한 존재가 등장했으니.


“우지연 씨? 전 손동훈 대리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손동훈 대리, 처음 입사했을 때부터 상냥한 선배였다. 모르는 것이 산더미처럼 많았어도 짜증 한 번 낸 적 없고 늘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설명해줬다.

하루이틀이면 모를까 입사한 첫해 내내 그랬으니 우 주임은 그의 진정성을 의심할 수 없었다.


그 누가 있어 한결같은 상냥함에 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처음에야 그녀도 몰랐다. 자신이 손동훈 대리에게 점점 스며들고 있다는 사실을.


우 주임은 손동훈 대리에게 감사함을 표현하고 싶어 사 마셔만 봤지 타본 적 없는 커피를 손수 타갔다.


“감사합니다. 대리님, 커피 드시겠어요?”

“아뇨. 괜찮습니다.”


동훈의 단호한 거절에 우 주임은 하마터면 딸꾹질이 날 뻔했다. 그래서 그걸 감추기 위해 커피 두 잔을 원샷해버렸는데,


“커피를 좋아하시나 봐요.”

“네, 히끅. 네.”


천연덕스럽게 마무리했다고 생각했다.


우 주임은 돌아가서 다시 생각해봐도 커피 두 잔을 원샷해버린 건 미친 짓이었다. 빠르게 뒤를 돌아 화장실로 들어가 제 머리를 때려가며 자책했다.


‘대리님이 티는 안 내셨지만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어? 커피 두 잔을 원샷해버리는 미친년이라 생각하겠지! 미친년, 미친년. 미쳤지, 내가. 거기서 왜 커피 두 잔을 마셔버린 거야? 혓바닥도 다 덴 거 같아.’


그때 우 주임은 찬물을 드링킹하며 생각했다.


‘아냐. 계속 2잔을 마셔버리면 원래 그런 애인 줄 알 거야. 아까도 커피 좋아하냐고 물으셨잖아. 평범하게 커피 2잔 마시는 애가 되면 되는 거야. 계속 마시자. 원래 그런 애인 줄 아시게.’


그렇게 우 주임의 커피 두 잔 원샷 기행은 시작된 것이다.

울며 겨자 먹기로, 매일 같이 입안을 데며 홀로 챌린지를 한 것이다. 그게 더 이상하게 보이는 걸 모르고.


짧은 순간 모든 회상을 마친 우 주임은 자신의 마음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에게는 이상하게 보이고 싶지 않고, 감사함을 다 표현하고 싶고, 매일 같이 커피를 타다 주고 싶은 자신의 마음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다시 돌아보니 그것이 확실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다시 깨달으면 뭐하나. 상대는 퇴사한다는데.


우 주임은 혼이 빠져버린 표정으로 자신의 커피까지 동훈의 책상에 놓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우 주임님, 주임님! 커피 두고 가셨어요! 어허, 젊은데 가는 귀가 먹었나? 이걸 못 듣고 그냥 가네. 내가 퇴사한다는 게 그렇게 충격인가? 하긴. 일하는 사람 한 명이 빠지는 건데 새로 사람 구하고 그 사람이 제 몫 하기 전까지는 남은 사람이 더 고생이겠구나.”


작은 오해는 우 주임이 보이는 반응을 연이어 오해하게 만들었다.

사실 눈치 좋은 동훈이 우 주임의 작은 연정을 눈치채지 못한 건 그러지 않은 것에 가까웠다. 무의식이 차단하는 것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내연애 잔혹사가 오죽 많았어야지. 동훈은 애초부터 사내연애 같은 걸 염두에도 두지 않았다.

해본 사람들이 모두 말리는 건 이유가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동훈은 집단지성을 굳게 믿었다.


아무튼 오해를 한 동훈은 우 주임에게 조금 미안해졌다. 그래도 퇴사를 미룰 수는 없었다.


동훈은 사직서를 프린트해 곱게 접어 봉투에 넣은 뒤 자신의 서랍에 넣어뒀다. 오늘 내버려야지.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동훈은 점심시간을 마무리했다.


점심시간이 이미 다 지나고 한 30분쯤 지난 뒤 느지막이 들어오는 박 부장.

그 옆으로 그를 따르는 부하직원 둘을 달고 있었는데 다 같이 박 부장을 믿고 땡땡이를 친 모양이었다.


“쯥쯥, 아, 잘 먹었다. 송 대리, 잘 먹었어. 다음엔 내가 살게. 내가 산데도 극구 송 대리가 대접하겠다니 이번만 먹은 거야.”


부하직원에게 밥을 얻어먹는 상사가 있다? 박 부장은 저게 일상이었다. 매번 얻어먹고 나중에 자기가 사겠다며 공수표만 날려댄다.


그 옆에 유 과장이라는 박 부장 딸랑이가 열심히 아부했다.

유 과장은 박 부장보다 나이가 많았는데 애가 둘이라고 그랬나? 하여간 가장이 그랬다. 먹여살려야 할 처자식, 먹고 살아야 할 돈 앞에 자존심이 어딨겠나.


“저희가 부장님께 받는 배려며 은혜가 얼만데요. 계속 사드려도 모자라죠. 저희 회사의 기둥 아니겠습니까, 큐메디의 기둥! 부장님 없으시면 회사가 돌아가겠습니까?”


그런 말이 있지 않나, 구라를 치려면 혼이 담긴 구라를 쳐야 한다고.


유 과장은 양손에 엄지를 치켜들며 쌍따봉까지 날리면서 박 부장을 찬양했다.


박 부장은 그런 아부가 못내 좋았는지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기지 못하고 헤벌쭉하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하하하! 우리 과장님. 말씀도 참. 제가 회사에 바치는 정력, 열정, 애정을 과장님의 반만이라도 사장님께서 아셨으면 좋겠습니다. 어휴, 이번에 사장님이 또 불러다가 잔소리를 그렇게 하시더라니까, 잔소리를.”


박 부장은 출신이 스트릿 출신이라 그런지 위아래 구분 없이 은근슬쩍 말 놓는 걸 좋아했다.


“사장님도 조카 잘되라고 말씀하시는 거 아니겠습니까. 다 사장님이 부장님을 아끼시니 하는 말씀 아니겠습니까.”


유 과장 또한 가끔씩 이렇게 훅 들어오는 반말은 적응이 안 되는지 약간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박 부장의 말을 포장했다.

박 부장은 은근히 사장과의 가족관계를 과시하는 한편 괜한 말을 꺼냈다는 듯 유 과장의 어깨를 툭툭 쳤다.


“씁, 회사에서 가족이 어딨나. 사석에서는 삼촌이지만 회사에선 미운 사장님이지. 회사에서 그러면 안 돼요.”


박 부장에게 유 과장이란 그런 존재였다.

언제든 툭툭 칠 수 있는 사람. 옆에서 아부하는 게 당연한 사람. 사장과의 친분 과시는 자기가 먼저 했으면서 그에 호응하자 그걸로 꼽을 주는 건 유 과장을 만만하게 보기 때문이었다.


박 부장이 유 과장의 뺨을 대뜸 내리친다고 해도 동훈은 그리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 그런다고 해도 유 과장은 웃는 낯으로 맞겠지.


‘어찌 보면 대단해. 유 과장님을 보면 가장의 애환이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웃는데도 우는 것 같은 얼굴이 뭔지 알게 해주는 얼굴이라니까.’


퇴사각을 잡은 동훈은 한발 멀리 떨어져 제삼자의 기분으로 그 둘을 바라봤다.


박 부장이 일하자며 자신의 추종자들을 해산시키고 점점 시선을 동훈 쪽으로 옮기는 것을 확인했다. 동훈은 괜히 눈이 마주칠 새라 얼른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그게 피한다고 피해지나.


박 부장에게 손동훈은? 매번 아쉬운 소리 쏟아내도 되는 사람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동훈을 보자 금세 울상을 지으며 핸드폰을 두들기는 박 부장이었다.


“하, 씨. 손 대리. 승용 또 지랄이네. 저번에 우리 손 대리가 승용 케어했잖아, 그치? 이번에 한 번만 더 다녀와 줘야 할 것 같아.”


그래도 고객한테 지랄이 뭐냐, 지랄이. 승용 내과가 아무리 진상이래도 그 정도면 순한 편이다. 욕설도 없고 때리려는 시늉도 없으니까.

그냥 떼쓰는 정도니 진상에도 급을 나누자면 전설급은 절대 안 된다는 거지. 중간 정도 가는 희귀 등급 정도라고 할 수 있겠다.


진짜 심한 진상은 오히려 박 부장에게 가지 않으니 승용 정도에 학을 떼는 거지.


이제 박 부장의 성화도 끝이다.


동훈은 사직서 내버릴 판에 박 부장의 말도 안 되는 요구를 거절하려 했지만 생각을 바꿨다.


“예, 알겠습니다. 지금 다녀오면 되죠?”


동훈의 흔쾌한 동의에 놀란 건 박 부장이었다. 그 큰 덩치로 흠칫 놀라는 꼴은 조금 우스꽝스러웠다.


“어, 어. 다녀와. 웬일이야? 안 되는데요, 일 바쁜데요, 같이 군소리 안 하고 빠릿빠릿하게 알겠다고 그러고. 이러니 얼마나 좋아? 괜히 내가 듣기 싫은 소리 더하고 그러지 않아도 되잖아.”


그 바쁜 일 이제 안 할 거니까 안 바쁘지.


동훈은 그저 말없이 빙긋 웃었다. 퇴사를 마음먹으면 사람이 인자해진다는 것을 동훈은 이제야 깨달았다.


“고마워, 손 대리. 내가 손 대리 믿는 거 알지? 내가 나중에 술 한잔 살게.”


퍽이나. 돈 아까워서 부하직원한테 밥 얻어먹는 인간이?

물론 동훈은 박 부장이 사준데도 마시기 싫었다. 그 자리가 얼마나 불편하겠어. 게다가 관둘 직장인데.


또 날려대는 박 부장의 공수표를 흘려넘기며 동훈은 일을 대충 마무리했다.


‘사직서 내고 외근으로 마무리하자. 내 마지막 회사 생활.’


자이가르닉 효과라는 게 있다.

끝내지 못한 일이 있다면 그게 자꾸 기억에 남아 손가락 옆에 일어나 까실까실하게 계속 거슬리는 거스러미처럼 신경 쓰이게 만든다는 심리 용어였다.


동훈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큐메디라는 회사의 일은 다 끝내버리고 싶었다. 이제 일생에서 큐메디와 얽히지 않고 싶은 마음?


“승용, 마지막으로 가보자. 한번 손댄 거 마무리해버려야 마음이 편하지.”


자리에 부재한 인사과장의 책상 위에 사직서를 올려두고 동훈은 외근을 나왔다.


일을 마무리해버리고 싶은 마음도 컸지만 지긋지긋한 회사에서 벗어나 밖으로 나올 수 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었다.


이번에는 지하철이냐 택시냐를 고민하지 않았다.


“당연히 택시지. 돈 벌어서 뭐하겠어. 퇴사 결심한 오늘도 택시 안 타면 평생 택시 안 타겠다는 거랑 뭐가 달라.”


동훈은 기쁘게 택시를 잡고 승용 내과로 향했다.


***


승용 내과, 낡은 빌딩이 이제는 정겨울 지경.

동훈은 씩씩하게 계단을 올라 승용 내과로 들어갔다. 전에 없이 반갑게 귀찮아하는 간호사에게도 인사를 건네고 유 원장이 기다리는 원장실에 노크했다.


“들어와!”


유승용 원장,


그의 주름조차 깐깐한 얼굴을 보니 떠오르는 게 있었다.


어떤 생각도, 고민도 아니었다.


바로 그의 더 벨룸 캐릭터였다.


[난걍죽임ㅋㅋ] lv.45


‘저, 유승용 원장님? 이 막피 유저셨어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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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게임과 현실 22.09.27 934 14 14쪽
12 Show me the money! +1 22.09.27 1,032 17 18쪽
11 LEVEL UP! 22.09.26 1,101 18 16쪽
10 또다른 플레이어? +1 22.09.25 1,172 17 14쪽
9 다엘촌으로 22.09.24 1,238 18 19쪽
8 마녀 구하기 +2 22.09.23 1,275 18 12쪽
7 퀘스트, 할 수 있으니까 22.09.22 1,336 22 17쪽
6 좆소 기업에 어서 오세요 22.09.21 1,389 26 19쪽
5 인생역전의 기회 22.09.20 1,437 23 14쪽
4 로그아웃? 국룰? +1 22.09.19 1,558 25 17쪽
3 꿈꾸는 더 벨룸 22.09.18 1,702 26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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