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상자와 거울과 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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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왕국
작품등록일 :
2023.09.12 13:38
최근연재일 :
2024.09.20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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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7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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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쪽

종이에도 피로 글씨는 쓸 수 있다

인생에서 무엇인가를 추구한다는 것, 그리고 그 길들




DUMMY

거대한 문이 서서히 틈을 벌리며 아주 느리고 그만큼 비좁지만

창대하게 열리고 있었다.

그 양쪽으로 조금씩 생기는 가늘고 비좁은 수직의 틈으로

찬란하고 강렬해서 눈이 아플 정도로 환한 빛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새어 들어오는 것처럼 부드럽고 따뜻한 빛들은

어디서 오는 것인지 낯선 느낌이었다.










장차 쓰일 곳이 있을 거야

혹은 장차 쓰일 때가.


마치 지금의 부끄러움처럼 말입니까?


너도 이젠 어른이 되어가는구나?




낯선 두 목소리의 대화는 끝났다.

그리고 목소리만 들려오던 두 남자는 어디론가 사라졌는지

더 이상 목소리들마저도 더 이상은 들리지 않았다.











바늘은 길고 날카로운 은빛으로 팽팽한 긴장들을

침착하고 잔잔한 경고처럼 반사시키고 있었다.

반짝이는 바늘이 점점 다가가는 이마는

반듯하고 아름다운 흰색인 어떤 여자의 이마였다.

그녀는 천진하고 상냥한 애정으로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무방비하게 웃고 있었다.

조용한 미소와 투명한 신뢰는

그녀의 주변에 퍼진 평화라는 시간을 느끼게 했다.

남자는 천천히 그리고 주의 깊게 그 바늘을

그녀의 이마에 집어넣었다.

밀어 넣는 바늘은 점점 더 깊이 깊이

그녀의 이마 속으로 들어가서는 흔적도 없이

그리고 어떤 통증도 없이 마침내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그녀는 조용하고 사랑스럽게 다시

웃었다.

그는 천천히 손을 내리고는 잠시 망설이듯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다시 오른손을 들어올려서 그녀의 왼쪽 팔을

잠시 천천히 어루만졌다.

부드러운 사랑처럼.










저는 불완전한 세상을 욕망의 대상으로 여기고 싶지는 않습니다.


세상은 인위적으로 마음대로 할 수는 없다네.


그러면 이 세상은 자연적으로 진행이 되는 것입니까?


맞혀 보게나.






노인은 천진난만한 얼굴로

부드럽고 정답게 웃고 있었다.











나는 이런 사랑을 원하지 않았어.

젊은이는 중얼거리고 있었다.

고개 숙인 젊은이의 얼굴에서

콧날 옆의 그늘처럼 엷은 회한이 드리워져있었다.












이빨의 갯수와 증오의 숫자가 일치한다면

이 세상에서 내가 겪어야 할 분노는 언제까지일까?



젊은이는 이빨을 하나 들고서

바닥에 던졌다.

성(城)의 복도는 길고 길어서 그 끝이

아득하게 잘 보이지 않았다.

괴괴할 정도로 조용한 한낮의 실내에서

성(城)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없었는지

오가는 사람들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복도에 깔린 아름답고 장려(壯麗)한 우수(憂愁) 속에

잠기듯 들어가있어서 소실되어가는 운명처럼

융단은 마침내는 너무 멀어져서 잘 보이지 않았다.






이빨은 조용히 복도의 바닥 속으로 들어갔다.

물속에 부드럽고 느리게 소리도 없이 잠기는

오후의 반지처럼.

호수 속에 던져지는 반지나

복도 위에 던져지는 이빨이나 모두 다

정답고 희미하게 사라져갔고

둘 다 시야에서 사라지게 된 것처럼

복도는 원래대로 돌아갔다.

어떤 복잡하고도 유구한 오래된 사연들처럼

복도에 깔린 융단은 길고 멀어서

희미한 흔적들처럼 빛들이 어슴푸레 아름다웠다.

오후의 한적한 성채(城砦)는

실내에도 이상하게 소슬하고 처연한 빛들이 있었다.

그러나 흐르는 듯한 빛들이 아닌 마치 물처럼 고인 빛들이었다.



나는 왜 태어난 걸까요?

남자는 그러나 어떤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나를 계속 사랑할 건가요?

사랑? 글쎄... 내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

여자는 남자 앞에서 마음껏 크게 웃었다.

하지만 남자는 웃을 수 없었다.

왠지 그녀의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이봐요, 나는 곧 국왕 전하에게 시집을 가요. 아시겠어요?

그럼 잘 됐잖아?

그럴지도 모르죠. 그러나 그 뒤에는 끝이에요.

누가 국왕 전하가 될 남자의 여인을

함부로 옷을 벗기고

침실에서 둘이서 쾌락의 시간을 보내며

같이 지낼 수 있죠?

남자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날 데리고 도망을 가요.

날 훔쳐서 멀리 가지고 가서는 나와 같이 죽어요.

당신은 그럴 용기조차도 없죠?

남자는 한참을 말없이 있다가 간신히 대답했다.

대답이라기보다는 고백처럼 들렸다.

난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했어.

그게 당신의 한계에요. 언제나 말만 할 수 있고 대담한 행동은 할 수 없는.

나보고 어쩌라는 말이야?

난 당신을 증오해요. 정말 증오한다구요.

그 말을 하고 그녀는 두 손으로 덥썩, 그러나

유혹하듯 나긋나긋하게

그의 두 얼굴을 정답게 붙잡고 마치

감싸듯이 어루만지면서

그에게 입맞춤을 해주었다.

침착하지만 이상하게 느린 그 입맞춤은

온건하고 느린 속도와는 상관없이

기이하게 격정적인 깊은 감정의 표시처럼 느껴졌다.

그녀가 두 눈을 가늘게 빛내면서

웃는 듯 희롱하는 듯 비웃으며

그를 들여다보고 있자

그는 이상하게 마음이 괴로워졌다.

최대한 담담하게 마음을 평정심의 상태로

지니고 있자고 결심을 했었지만.

그 후로 몇 년이 더 흐르고 그는

성대가 상당히 파괴가 되었다.

성대를 비롯하여 온몸에 걸친

육체적인 고생도 고생이었지만

성대가 몹쓸 정도로 망가진 것과는 상관 없이

그의 마음도 무척이나 고달프고 괴로웠다.

상시적으로 그는 외로움도 슬픔도 아닌

이상한 회색을 닮은 감정에 시달렸다.

어쩌면 그 감정의 호수 속에 침몰하는 듯도 싶었다.

호수가 가까이 있어서 늘 빠져드는 것처럼.

자신도 잘 모르는 자신의 모습들을

호수의 수면에 비친

한낮의 빛이 내린 그림자들 속에서

발견하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호수는 언제나 빛들로 일렁거렸고

바람들이 불어올 때마다

그는 호수처럼 빛과 그림자의 무수한 균열 속에서

자꾸 그리고 쓸데없이 과거로 돌아가고는 했었다.




그는 절벽 위에서 불어오는 위태로운 바람들을

줄기줄기 갈라져서 오는 대로 맞고 있었다.

바람들은 푸른 듯 날카롭고 서늘했고

찬 바람 속에서 운명의 예감처럼 이상하게 몸이 떨려왔다.

여인은 잠시 담담하게 그를 보고 웃고 있었다.

치아가 너무 하얗고 깨끗하다고 그는 아주 잠깐, 생각했다.

그와 그녀는 쓸데없는 자질구레한 이야기들을 했다.

그는 그녀와 나란히 서서 앞을 바라보고 여러 가지

그리고 사소한 이야기들을 했다.

주도하는 그는 어떤 별다른 감정도 없이 편안했다.

그가 천천히 왼손으로 그녀의 등을 어루만졌다.

그녀는 그를 돌아보며 따스하고 천천히 미소지었다.

웃는 그녀를 돌아보며 그러나 그는 따라서 웃지 않았다.

그가 왼손으로 그녀를 밀어버렸다.

까마득하게 높고 날카로운 높이의 절벽 위에서

그녀는 한참을 떨어졌다.

결국엔 파도가 9개의 혀로 고독한 밤과

뜨거운 분노의 한낮을 왕래하며

차가운 이성을 버리지 못하고

부드러운 물의 심연에 묶여서

자신의 슬픔만을 말하던 바다로

그녀는 떨어졌다.

어쩌면 그곳은 바다가 아닐지도 몰랐다.

바다로 나가는 길목이든 바다든 그로서는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어딘가 모호하고 막연해졌고

이제는 너무 혼란스러워졌다.




복도를 지나가던 사람 한 명이

발을 헛디딘 것처럼 복도의 중간 어디에서

갑자기 밑으로 푹, 꺼져 들어가듯이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몸이 늪에 빠진 것처럼 점점 더

빨려 들어가는 그는

기묘하고 괴상한 투명한 불길에 휩싸여서

타오르는 것 같기도 하고

사라지는 것 같기도 하면서

점점 더 복도 어딘가 밑에 있을

지하세계 어딘가로

끌려가듯이 사라지고 있었다.

화려하고 호화로운 옷을 위아래

전신에 걸쳐서 입은

어떤 남자가 점점 더 땅속으로 잠기듯이

사라지고 있었다.

문피아 푸른 성.jpg




보물상자를 가지세요! 자신만의 보물상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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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나무에 새겨진 글귀 24.07.16 4 0 11쪽
78 왜 나는 내가 아니고 나라고 하는 이상한 사람인가 24.07.15 2 0 12쪽
77 내가 아는 세상 24.07.10 8 0 11쪽
76 세상의 끝에서 다시 돌아온다고 하더라도 24.07.10 4 0 14쪽
75 운명을 결정하는 자 24.07.09 4 0 13쪽
74 신비한 나무: 기적의 갑옷 24.07.08 8 0 12쪽
73 기한이 정해지지 않은 시험 24.07.07 6 0 12쪽
72 불의 보석 24.07.04 5 0 11쪽
71 얼음의 보석 24.07.03 8 0 14쪽
70 용의 보석 24.07.02 9 0 13쪽
69 이 낙엽들도 언젠가는 타오르는 불길로 24.07.01 3 0 12쪽
68 다시 돌아온 이 계절에도, 그러나 24.06.27 6 0 12쪽
67 너와 나의 건널 수 없는 강물 24.06.26 4 0 12쪽
66 참을 수 없는 아픔보다 더 괴로운 건 24.06.25 3 0 12쪽
65 시간의 물살을 거슬러 다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24.06.24 4 0 12쪽
64 잠든 손의 반지 24.06.20 1 0 11쪽
63 타오르는 얼음처럼 24.06.19 4 0 12쪽
62 시간과 공간의 밖에서 24.06.19 5 0 12쪽
61 너도 나도 다 사람이지만 24.06.18 7 0 12쪽
» 종이에도 피로 글씨는 쓸 수 있다 24.06.17 7 0 8쪽
59 산과 호수의 잠든 밤 24.06.16 7 0 11쪽
58 내게도 이 들판은 너무 좁다 24.06.13 5 0 16쪽
57 거미줄에 매달린 곤충의 유해(遺骸) 24.06.12 4 0 12쪽
56 잘된 것은 잘된 것일 뿐 24.06.11 4 0 12쪽
55 어디선가 그랬었던 것처럼 24.06.10 1 0 11쪽
54 문신의 비밀 24.06.05 4 0 12쪽
53 처음부터 정해진 운명인 것처럼 24.06.03 8 0 12쪽
52 인생에서 마침내 사라지는 사람들 24.06.03 8 0 12쪽
51 어쩌면 만났었을지도 모르는 24.05.30 2 0 12쪽
50 왜라고 묻지 말지어다 24.05.29 3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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