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랑전(極狼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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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HaL
작품등록일 :
2023.10.09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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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18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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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수면 아래는 은은하며 (1)

DUMMY

콰직!


기어코 덕화루의 값비싼 고급 탁자 하나가 땔감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진량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다 부서진 나뭇조각을 검으로 패고 있었다.


“빌어먹을!”


두 명의 호위무사는 만류는커녕, 부복한 채로 고개조차 들 줄을 몰랐다. 당장 목이 날아갈 판인데 무슨 수로 만류한단 말인가?


콰득!


남은 탁자의 두꺼운 판을 세로로 쪼개던 검이 박혀 빠지질 않았다. 진량은 뒤뚱거리며 안간힘을 써 검을 뽑다가 그만 자루를 미끄러뜨리고 말았다.


챙!


휘청, 꽂힌 검신이 좌우로 크게 흔들렸다. 부복하고 있던 호위의 지척이었다. 호위의 등줄기는 축축하게 젖어 들었지만,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진량은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로 그 앞으로 걸어가 검을 뽑아 들었다.


철컥!


칼집에 검이 꽂히고 나서야 두 호위는 머리를 땅에 댄 채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설총··· 이 영악한 놈!! 제 아비를 닮아 잔머리는···!!”


설총이 들먹였던 감찰어사 황철웅을 생각하면, 천호소의 병력을 움직여 한현보를 멸문시키는 것은 힘들어졌다. 물론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까짓 무가 하나쯤, 반역도당으로 몰아세우는 건 일도 아니니까.


문제는 그다음이다. 감찰어사는 부정을 저지른 관료를 고발해 공적을 세운다. 당연히 천호소 병력을 사적으로 운용한 정천호는 감찰어사에겐 아주 달가운 먹잇감이다. 물론, 그 정도의 비위(非違)로는 삭탈관직은커녕, 근신 처분도 나오지 않겠지.


대신, 진급이 어려워진다. 진량은 광동진가의 적자로서, 가문을 일으켜 세워야 할 의무가 있는 몸이었다. 진량이 고작 정천호로 관직 생활을 마감한다면─ 광동진가의 미래는 어둡다.


“···지휘소에선 아직 연통이 없느냐?!”


정3품인 위지휘사(衛指揮使) 홍위윤의 힘을 빌린다면, 감찰어사 정도는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다. 한현보에 큰 원한이 있는 홍위윤은 반드시 힘을 빌려줄 게다.


“송구합니다, 대인. 지휘사사(指揮使司)에서 연통이 왔더라도, 개봉에서 이곳 정주로 다시 연통을 보내진 못할 것이옵니다.”

“어째서?! 천호소의 전서응(傳書鷹)을 죄 잡아먹기라도 했단 말이냐?!”


호위는 자꾸만 한숨으로 벌어지려는 입술을 억제하며 답했다.


“개봉의 소(所)에선 대인께서 아직 한현보에 계신 줄로 알지 않겠습니까?”

“···아.”


그래, 애초에 쫓겨날 줄 그 누가 알았으랴? 일이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됐다. 하남성 군문 중 최고의 무인인 전조가, 이리 쉽게 패배하고, 팔까지 못 쓰게 될 일이 아니었단 말이다.


“반쪽짜리 무공으로 그런 수준까지 오를 줄이야···.”


심지어, 한설총은 ‘검기(劍氣)’를 발했다. 명백하게 중상(中上) 이상의 절정고수란 뜻이다.


설총의 무위를 떠올리자, 점차 이성이 돌아왔다.


생각해보니 그렇다. 한현보의 무공은 반쪽, 아니 반쪽이라고 하기도 부끄러운 수준이다.


“그런 결함투성이 무공으로 어떻게···?”


진량의 누이인 진주약이 결혼할 남자라며 한주윤을 데려왔던 날, 진량은 실소부터 터뜨렸다. 하남성에서 가장 반편이 같은 무문으로 소문이 난 한현보의 젊은 가주라니. 대체 어느 문파에서 익히면 공력이 흩어지는 심법을 가르친단 말인가?


“···설마 그걸 극복했단 말인가? 그 한주윤의 아들이?”


진량은 심각한 표정으로 턱수염을 쥐었다.


한현보의 무심결은 6성까진 '대단히'란 수식어를 붙여도 좋을 정도로 빠른 성취를 자랑한다. 사이한 마공(魔功)이 아닐까 싶은 수준으로. 그러나 6성의 성취를 이루면 그 후로부터는 애써 모은 진기가 흩어지는 치명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다.


즉, 결단코 완성할 수 없는 무공이란 뜻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한주윤이 진량을 설득하는 데에 성공한 것은 바로 이런 특성 때문이다.


일류고수나 절정고수에 이르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이류고수까진 대단히 빠른 속도로 양성할 수 있는 무공. 군에서 가르치기에 이보다 더 이상적인 무공은 없다. 어떤 의미에선 일정 이상 강해질 수 없다는 단점도 군에선 장점이다.


병졸이 장수보다 강해져 봐야 늘어나는 건 쓸데없는 반항심뿐이지 않은가? 적당히 쓸모 있고, 적당히 쓸모없는 무공. 한주윤의 제안을 들을수록 진량은 확실한 설득력을 느꼈다. 그래서 그에게 하남제현이란 유치한 별호까지 선사하고, 그를 받아들였다.


“그렇지만 한주윤은 무공만큼은 절망적일 정도로 재능이 없었어. 그런데 어찌···.”


만약 한설총이 무심결의 결함을 극복하고 6성 이상의 경지를 개척했다면, 경계해야 마땅하다. 무심결의 문제는 공력이 흩어진다는 점이지, 진기의 수급이 아니기 때문이다.


도리어 6성까지의 성취 속도가 그 이후에도 적용된다면? 아니 애초에 약관도 전인데 절정고수라면, 이미···.


“음···!”


진량은 애꿎은 수염만 꼬았다. 강호의 풍문을 모두 믿는 것은 아니지만, 15년 전 백련교도들이 혈겁을 일으켰을 때 무명이 높은 이들의 신위에 대한 믿기 어려운 이야기가 많았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백련교의 오대호법들과 천검, 천하삼절 등이 펼친 무용담이다.


오대호법들은 한 사람이 한 문파를 무너뜨리는데 하룻밤 이상의 시간을 요하지 않았다 한다. 믿긴 어렵지만, 풍문엔 무공이 아니라 사이한 술법을 사용했단 이야기도 있다.


천검은 검귀와 함께 사흘 동안 3천여 명의 백련교도들과 일전을 펼쳐 그 전부를 베어 넘긴 것으로 유명하다. 천하삼절 중 구보신개 구정삼은 백련교를 토벌하기 위해 나선 관군 기백을 혈혈단신으로 패퇴시킨 일도 있다.


진량의 생각이 깊어질수록 머리만 복잡해졌다. 한설총이 설마 천하삼절과 같은 수준은 아닐 테지만, 진량의 움직일 수 있는 병력도 기백을 넘을 수 없다. 최대한 차출해도 오백. 그 이하로 봐야 한다. 그것도 지휘사사에서 눈을 감아줬을 때의 이야기다.


진량이 골머리 썩고 있을 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식사는 필요치 않다 하였느니라!”

“식사를 가져온 것이 아닙니다. 천호대인의 골칫거리를 해결해 드리러 온 것입니다.”

“···!”


무사가 진량을 쳐다보자 진량은 고개를 저었다.


“필요치 않다 하신다! 네놈이 이곳에 대인께서 계신 줄을 어찌 알았는지는 모르나 그 입, 똑바로 간수치 않으면 그 목이─”

“물론 무사하지 못하겠지요! 하지만 틀림없이 구미가 당기실 만한 이야기일 겁니다.”


문 뒤의 목소리는 겨우 들릴 만큼의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한설총이 한현보에서 쫓겨났다는 소식이라든가.”


진량의 눈이 커졌다. 그 눈을 본 무사가 눈치껏 문을 열었다. 문 뒤에 서 있던 것은 한 사내였는데, 중원에서는 보기 드문 여송연이란 연초를 입에 물고 있었다.


“처음 뵙겠사옵니다. 정천호 대인.”

“···.”


사내는 아주 능숙한 미소를 지으며 우선 입에 물고 있던 여송연을 바닥에 떨구고 발로 짓밟아 불을 껐다. 그리고 아주 과장된 태도로 여송연의 담뱃재가 떨어진 바닥에 머리를 박으며 큰절을 올렸다.


“잠시 시간을 내어주실 수 있으시겠사옵니까?”



* * *



“소인이 근자의 불미스러운 일에 대해 소상히 알고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그것이옵니다.”


천중은 가볍게 손바닥을 비비면서 말했다.


“···.”


진량은 굳은 얼굴로 물끄러미 바닥에 무릎을 꿇은 천중을 내려다보았다. 딱 보아도 내키지 않는 눈빛이지만, 천중은 여유로웠다.


“내 아들과 거래를 했었다, 이 말이렸다?”

“그러하옵니다.”

“그러면 네놈이 일을 망치는 바람에 내 아들이 그리된 것이다? 그렇게 해석해도 되느냐?”

“아이고, 그 어인 말씀이시옵니까. 자고로 병가(兵家)의 상사(常事)라 하지 않사옵니까? 적이 강성하여 목적을 이루지 못한 것을 책망하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지 않겠사옵니까?”

“네놈은 내 수하가 아니다. 네놈이 내 명령을 듣고서 행한 일도 아니다. 한데 네놈이 저지른 일련의 일들이 나에게─ 나의 아들에게 큰 해를 끼쳤다. 이는 어찌 설명할 것이냐?”

“적의 적은 아군이라 하지 않사옵니까? 소인은 그저 천호대인과 맞서려는 적이 같았을 뿐이옵니다. 다른 뜻은 결단코 없었사옵니다. 천호대인의 영식(令息)께서 의뢰하신 일을 받아들인 것 또한, 다른 뜻이 없었사옵니다. 그저, 제 적이 한현보에 있었을 뿐입지요.”


진량은 곱지 않은 눈으로 천중을 바라보았다. 이 자는, 왈패다. 그냥 왈패도 아니고, 버젓이 수비질을 저지른 비적(匪賊)이다. 군문의 토벌대상이다.


“우선,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런 일이 아니었다면, 저같이 미천한 놈이 천호대인을 찾아뵐 기회라는 것이 과연, 가당키나 한 이야기겠사옵니까?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저 같은 놈이 언감생심, 대명군의 정천호 나으리를 영접하는 것은 지나가던 개도 안 믿을 소리란 것은, 소인도 깊이 숙지하고 있는 것이옵니다.”

“···천가방의 천중.”

“예, 대인.”

“나도 이름은 들어본 일이 있다. 저 하낙나루에서 설쳐대는 왈패 놈들이란 얘기 정도는.”

“아이고, 설쳐대다니요. 어찌 감히···.”


진량이 찌릿, 눈총을 주자, 천중은 급히 입을 닫았다. 잠시 그렇게 천중을 노려보던 진량이 다시 말을 이었다.


“네놈이 하낙나루 바로 옆─ 정주의 상가현(上街縣)에 주둔한 백호장, 황호와 붙어먹고 있다는 사실도, 다 알고 있다는 뜻이다.”


내심, 당황할 거라 기대했던 천중은 의외로 크게 놀라지 않았다. 당황한 표정을 지었으나, 당황한 것 같지가 않다. 그랬기에 진량은 외려 놀림을 당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감히, 이 진량을─ 군문의 정천호를 농락해?


“목숨이 아깝지 않은 게로구나?”

“아이고, 어인 말씀이십니까. 소인에게 있어서 세상에서 두 번째로 소중한 것이, 바로 소인의 목숨입니다.”

“···두 번째?”


천중의 수작에 말려 들어가는 기분이었지만, 호기심은 참을 수 없었다. 그리고 정5품, 정천호인 진량이 호기심을 참아야 할 이유 같은 건 없었다.


답을 듣고 난 후에 목을 쳐도 상관없는 일이니까.


“첫째로 중요한 것은··· 역시 야망(野望)입지요. 사내로 태어나 청운의 푸른 꿈을 품지 않고 살아가는 이가 어디 있겠습니까?”

“···시시한 대답이로군.”


관심을 줘서 손해 봤다. 진량은 그리 생각했다.


“소인이 품은 푸른 꿈은, 저 북경(北京)을 향하고 있습지요.”


천중의 다음 말이 나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허.”


진량은 기가 찬 숨을 뱉었다. 감히, 왈패 놈이 천자의 땅을 입에 담는단 말인가?


“네놈이 어찌 감히 지엄하신 황상 폐하의 도읍을 함부로 뇌까리느냐?! 이놈이 정녕 미친 것이 아니냐? 이 자리에서 단칼에 그 목을 베어주랴!”

“소인, 주제를 알고, 분수를 알고, 선이란 것이 뭔지 아는 놈이옵니다. 이미 말씀드리지 않았사옵니까? 소인이 감히 언감생심, 정천호 대인의 존안을 뵈옵는 것이, 가당치 않은 일이라는 것을 소인이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말씀드리지 않았사옵니까?”

“한데 어찌 감히? 네놈이 정녕 나를 능멸할 작정이냐?”

“소인의 힘과 능력으론, 분명히 불가능한 꿈이옵지요. 하면, 가능한 분의 줄을 잘 타면 되는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순간, 진량은 입이 콱, 틀어막히는 걸 느꼈다. 줄이라니? 설마하니, 이놈은 엄 대인의 줄이라도 잡은 것인가? 감히 왈패 나부랭이에게 가능할 리가 없는 일이지만, 아예 없을 일도 아니긴 하다. 엄 대인은 뇌물을 거절하지 않으시니까.


···단지 그분의 눈에 들 정도의 뇌물을 바치는 게 특히 어려울 따름이지.


“···모시는 분이 누구냐.”


진량은 머리 쓰는 것을 포기했다.


“혹시,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사옵니다.”


꿀꺽, 괜히 긴장감에 목이 탄다. 이깟 놈이 입에 담을 뒷배가 대단할 리 없다고 머리로는 생각하지만, 괜히 가슴이 탄다. 도대체, 무슨 이름이 나오려고···!


“엄 대인께서 아주 귀히 여기시는 지혜 주머니가 하나 있다는 이야기···.”

“잠, 잠깐!”


크게 소리쳐 천중의 말을 끊어버린 진량은 잠시 숨을 골랐다. 가슴이 뛰기가 마치 여인네의 속곳을 처음 벗기던 날의 그것과 같다.


“···너희 둘, 모두 나가 있거라.”

“대인?!”


무사 둘은 기함했으나, 진량은 목소리를 낮게 깔아 말했다.


“당장, 나가거라. 그리고 이 방에 쥐새끼 한 마리 얼씬 못하게 해라. 알겠느냐? 쥐새끼 한 마리도 용인해선 아니 된다. 당장!”

“···며, 명을 받듭니다.”


허둥대며 두 호위가 방을 나서자, 진량은 잠시 심호흡했다.


“···.”


무사들의 기척이 충분히 멀어지고, 그만큼 황망하던 진량의 정신도 어느 정도 수습이 되었다.


“···우거(愚倨) 선생을 말하는 건가?”


어리석고 거만한 선생. 이런 이름을 쓰는 자가 있다면, 그야말로 어리석은 이가 틀림없다. 스스로 어리석고 거만한 자라 칭하는 건 겸손이 아니라 자학이다.


그러나─ 이 나라의 권력의 암부, 그 깊은 그늘 속에 숨겨진 그 이름을 모르는 자는 적어도 권력을 모르는 자다. 권력에 관심이 있는 자라면, 그 이름을 모를 수가 없다. 아니, 몰라서는 안 된다.


엄숭은 관직에 오른 지 고작 3년 만에 낙향했다. 그가 모시던 남경어사 장흠이 환관 유근과의 정쟁에서 패해 옥사(獄死)했기 때문이다. 이후 엄숭은 부모상을 이유로 정덕(正德) 3년에서 11년까지, 무려 8년이나 산골짜기에 틀어박혀 36살 늦은 나이까지 야인으로 숨어지냈다.


그랬던 엄숭을 권력의 정점으로 올려놓은 이가, 바로 우거 선생이다.


우거 선생을 만나면, 관직이 달라진다. 인생이 달라진다. 권세가의 길에 오를 수 있다!


“···정말로, 자네가 그분을 알고 있는가? 그분을 실제로 만나 뵌 적이 있나?”


천중은 입꼬리를 씩, 말아 올렸다. 이 순간, 진량과 천중의 입장은 정반대로 뒤집혔다.


“우거 선생은 결코 하늘을 올려다보지 않는 분이십니다.”

“!!!”


진량은 전율했다. 의미는 모르지만, 이 문장은 들어본 일이 있다. 우거 선생에 관한 은밀한 소문이다. 그 말인즉, 적어도 천중이 우거 선생을 알고 있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뜻이다.


“정··· 정말이군. 정말로···.”

“하여, 대인. 대인께선 아직도 한현보의 일을 대인의 큰일로 여기시렵니까?”


한현보의 이름이 나오자, 잠시 아득한 푸른 꿈 어딘가를 헤매던 진량의 정신이 퍼뜩, 현실로 되돌아왔다.


“···한현보는 내 일일세. 우리 가문의 일이며, 내 아들의 일이지. 내가 이를 어찌 가벼이 여길 수 있단 말인가?”

“대인께선 큰 사람에겐 큰일을 맡기고, 작은 사람에겐 작은 일을 맡기는 것이, 바로 된 이치라는 이야기를 들으신 바 없으십니까?”


일견, 비아냥대는 듯한 천중의 말에, 진량은 안색을 굳혔다.


“설마 내 그것을 알지 못해 하는 말이겠는가? 다만 사내로서 사사로이 맺은 은원을 어찌 다른 손에 맡긴단 말인가?”


천중은 가볍게 손바닥을 비볐다.


“우물물은 강물을 침범하지 않는다(井水不犯河水) 하지 않습니까. 강호의 일을 강호에 맡기는 것이 어떠실는지요?”

“···뭐라?”

“한현보에선 공식적으로 한설총을 내쫓았으니 어디 길바닥에서 독살당하든, 칼을 맞아 뒈지든 보복하거나 유감을 표할 명분이 없게 되지 않겠습니까? 도리어 이 점을 이용하면 어떨까 하는 것입니다.”


진량은 그제야 천중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마치 톱날처럼 이리 삐뚤, 저리 삐뚤 속눈썹이 거칠게 튀어나와 눈자위를 갉아먹은 것 같은 눈이다. 서글서글한 표정 탓에 자세히 보지 못했는데 실로 음험하기 짝이 없는 눈이었다. 진량은 눈을 가늘게 떴다.


“···자세히 말해 보게.”

“후후, 물론입죠.”


천중은 다시 가볍게 손바닥을 비볐다. 그리고 바로 말을 이었다.


“한설총이 죽게 되면, 아무리 연을 끊고 파문을 선언했다 하지만 한현보의 눈은 자연스럽게 그 죽음에 쏠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음지에서라도 보복하려 들겠지요. 하면, 이후의 일은 자연스럽게 음지의 일이 되고 맙니다.”

“음지···?”

“그렇지요. 강호를 왜 강호라 부르며, 무가들의 세계를 왜 무림이라 부르겠습니까? 수면 아래는 은은하며, 우거진 숲은 침침하지요(江湖隱隱, 茂林沈沈).”

천중은 입술을 비틀어 올리며 끈적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기에 강호무림(江湖茂林)인 것입니다.”

“으음···!”


이번에야말로 진량의 얼굴에서 불쾌함이 상당히 가셨다. 진량은 진지한 얼굴로 천중의 말을 곱씹기 시작했다.


“아, 대인. 혹시 연초는 태우십니까?”


진량이 고개를 끄덕이자 천중은 품에서 가죽으로 된 손바닥만 한 주머니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이게 여송이란 섬에서 들여온 여송연이란 겁니다. 어이쿠, 이미 잘 아실 텐데 괜히 아는 척했군요. 이게 또 곰방대나 장죽으로 태우는 것과는 또 새로운 맛이 좀 있습니다. 어찌, 한 대 태워보시겠습니까?”


하필이면 여송(呂宋)에서 들여온 여송연이라니. 아들인 진여송의 이름과 쓰는 글자는 다르지만, 발음은 비슷하다. 진량은 기묘한 인연을 느끼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줘보게.”


진량이 허락하자 천중은 얼른 주머니를 열어 여송연을 한 개비를 건넸다. 그리고 화섭자(火攝子)를 꺼내어 불을 붙였다. 뿌연 연기가 삽시간에 방의 천장을 뒤덮었다.


“송구하지만 괜찮으시다면 저도 한 대···.”


헤헤, 웃는 모양새에 진량은 귀찮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천중은 여송연을 입에 문 채로 고개만 낮추어 능숙하게 불을 붙였다.


“햐, 이게 말입니다. 한 번 맛을 들이고 나니까 없으면 도저히 못 살 것 같더군요.”

“···맛이 괜찮군그래.”

“그렇지요?”


천중은 톱니 같은 눈을 구부려 특유의 서글서글한 얼굴로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런 표정을 하고 있으니 또 다른 사람 같다.


‘속에 구렁이를 족히 기백 마리 키우는 자로군···.’


진량의 눈이 천중의 이모저모를 뜯기 시작했다. 왈패로 거칠게 살아왔던 흔적인 듯 이모저모에 상처가 많았다. 그러나 얼굴과 목만큼은 생채기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즉, 언제나 목숨이 위태로워질 만한 일은 벌이지 않는 신중한 자란 뜻이다.


‘어쨌든, 지금만큼은 쓸모가 있는 자다. 그래, 지금은···.’


진량은 폐부 깊숙이 연기를 들이마셨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댓추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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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화. 수면 아래는 은은하며 (1) +3 23.10.18 1,076 17 18쪽
25 7화. 쟁선(爭先) (3) +2 23.10.18 1,051 19 17쪽
24 7화. 쟁선(爭先) (2) +2 23.10.18 1,058 14 15쪽
23 7화. 쟁선(爭先) (1) +2 23.10.18 1,115 12 17쪽
22 6화. 천검의 핏줄 (3) +3 23.10.18 1,096 18 17쪽
21 6화. 천검의 핏줄 (2) +3 23.10.18 1,069 17 14쪽
20 6화. 천검의 핏줄 (1) +3 23.10.17 1,164 14 15쪽
19 5화. 연화신산(蓮花神算) (4) +4 23.10.17 1,130 14 15쪽
18 5화. 연화신산(蓮花神算) (3) +4 23.10.17 1,144 15 14쪽
17 5화. 연화신산(蓮花神算) (2) +2 23.10.17 1,180 15 15쪽
16 5화. 연화신산(蓮花神算) (1) +2 23.10.17 1,255 16 14쪽
15 4화. 혈연 (3) +2 23.10.17 1,246 18 15쪽
14 4화. 혈연 (2) +2 23.10.17 1,252 19 15쪽
13 4화. 혈연 (1) +2 23.10.17 1,314 19 15쪽
12 3화. 들개도, 늑대도 (3) +2 23.10.17 1,312 18 15쪽
11 3화. 들개도, 늑대도 (2) +2 23.10.17 1,401 19 14쪽
10 3화. 들개도, 늑대도 (1) +3 23.10.16 1,498 21 14쪽
9 2화. 출기동문(出其東門) (3) +2 23.10.16 1,544 24 13쪽
8 2화. 출기동문(出其東門) (2) +2 23.10.16 1,654 25 13쪽
7 2화. 출기동문(出其東門) (1) +2 23.10.16 1,930 26 15쪽
6 1화. 미친개 (5) +2 23.10.16 1,941 33 15쪽
5 1화. 미친개 (4) +3 23.10.16 1,952 3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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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화. 미친개 (2) +1 23.10.16 2,637 36 14쪽
2 1화. 미친개 (1) +2 23.10.16 3,822 46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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