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만능 수도사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대체역사, 판타지

완결

공장성소
작품등록일 :
2023.11.30 09:20
최근연재일 :
2024.04.07 18:50
연재수 :
76 회
조회수 :
6,299
추천수 :
315
글자수 :
416,508

작성
23.12.05 20:00
조회
344
추천
14
글자
20쪽

전쟁을 늦추는 전령(1)

DUMMY

앞으로 며칠간 충분히 사용할만한 물건들을 은 조각이나, 염색약같은 물건과 교환했다. 이 사람들은 어떻게 만드는지 모르는 물건이라 생각한 것보다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었다.


가볍고 환금성 높은 물품중에 강에 빠졌을 때에 잃지 않은 물건들이 있어 다행이었다. 없었다면 주머니라도 주고 딱딱한 빵하나랑 교환해야 할판이었으니까.


은화 주머니는 어디서 떨어뜨린 듯 했다. 다시 내성문 앞을 지나가니 병사들이 자연스럽게 문을 지나가게 해준다. 들은 것도 있는지 성호까지 그으며 친근하게 인사까지 한다.


“주께서 함께하시길.”


마주 성호를 긋자 미소를 짓는다. 이런 평화가 멀어 보였던 여정 때문일까, 방에 도착하자 긴장했던 마음이 쭉 풀리고, 나도 피곤이 몰려왔다. 오랜만에 항상 입고있던 주머니와 로브를 내려놓고 가벼운 몸으로 침대에 뛰어들었다.


잠에 들었다. 아무런 꿈도 꾸지 않고 따뜻한 어둠에 떠다니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런 평화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방해받았다.


“베드로. 베드로. 일어나보게.”


“로베르? 어떤 일인가.”


눈을 떠보니 촛불이 들어있는 놋쇠등을 들고 있는 로베르가 급하게 말을 한다.


“가신들이 자네를 그위네드 공왕에게 바치는 게 좋다고 결론을 내릴 분위기네. 무조건 전쟁이 날거라는 생각도 하지만,”


새이의 남작 로베르는 몸이 아픈 이의 웃음이라고 보기 힘들정도로 밝은 웃음과 함께 말을 잇는다.


“우리가 심어놓은 첩자가 전서구를 보내왔네. 소식에 따르면 그위네드 공왕은 축성권을 받은 데건위에서 벗어나 애버프로에 다시 성을 짓고 있다고 하네. 반역이고, 봉건 계약의 위반이지. 슈롭샤이어와 체스터셔의 백작께 이를 알리고, 런던에도 이를 알리게.”


놋쇠등에 비친 그의 얼굴은 웃음 짓고 있었다.


“그대가 좋아하는 전쟁이네.”


그 섬뜩한 미소에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읊조린다. 주여, 이 자를 용서해주옵소서. 전쟁의 열기는 사람을 광기에 빠뜨립니다···


“여기, 돈과 내 인장이 찍힌 편지네. 빨리 움직이게. 말들에는 안장을 메어놨어.”


“알겠네.”


빠르게 올리버와 존을 깨우자, 둘은 말없이 나를 따른다. 도망 생활을 이어간 덕분일까, 녀석들은 쓸데없는 질문을 하지 않고 마굿간으로 달렸다.


로베르는 거기까지 우리를 따라오고, 여러가지 보따리를 안장 뒤에 메어주며 말했다.


“베드로, 또 한번 그대가 내 목숨을 구해줄 날을 고대하고 있네.”


또 전쟁에 내가 따라붙을 것으로 생각하는 건가. 그렇게 될지는 의문이지만, 일단은 대답해주는 것이 맞지 않겠나.


“이번에는 자네가 구해주었으니, 내 응당 그리하리다. 고맙네. 로베르 드 세이.”


“전쟁이 다 끝난 다음 부터는 백작님이라 부르게나.”


“벌써부터 이길 생각 뿐인가? 오만하지 않은가. 기도부터 하는게 좋을 거야.”


로베르는 별다른 대답 없이 웃음을 흘리고 나와 올리버가 타고있는 말의 엉덩이를 두드린다. 그제야 올리버는 여유가 생겼는지 질문을 흘린다.


“이 새벽에 도대체 무슨 일인가요? 스승님은 왜 웃고 있는 거죠?”


웃고 있다고? 내가?


“...어떤···”


말발굽 소리에 묻혀서 들리지 않는 질문 뒤로 그 날이 떠오른다. 해이스팅스, 윌리엄 폐하가 잉글랜드의 왕좌를 얻게되는 결정적인 전투가 벌어진 1066년 10월 14일. 내가 연금술을 완성시키기 5년 전의 일이다.

===


해가 떠오르고, 언덕 위에 모인 수만의 농민병들과 그들의 근위병-허스칼이라고 부르는 듯 했다-를 바라보는 윌리엄 폐하의 눈은 열기로 가득했다.


“어떻게 생각하나 베드로 수사?”


어떤 질문일까. 이 전투? 전쟁? 잉글랜드의 왕위?


“전투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우리는 숱한 전투를 넘어온 정예, 거기에 저들은 부족한 궁병과 보급도 완벽합니다.”


“아니, 그런 간단한 게 아니지. 이미 우리가 원할 떄에 전투를 하게 된 저들의 패배는 정해진 것이고, 일전에 자네가 말했던 것 말이네.”


“...장미 십자회의 말씀이십니까.”


윌리엄 폐하는 내가 과거의 속했던 연금술 집단에 대해서 이 중요한 순간에 굳이 물어봤다. 어떤 이유일까?


“그래. 그들 중에 미래를 봤다던 자가 있다고 했지. 어떻게 생각하나? 그들은 진실을 말하는 것 같던가?”


“광인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만드라고라나, 양귀비를 많이 먹은 탓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껄껄 웃은 뒤 왕은 내게 그 어느때보다도 진지하게, 이해가 가지 않는 질문을 했다.


“나 역시도 미래를 보았다고 하면 믿을 텐가?”


이건 시험일까?


“...광기 속에서는 이따금 신이 내려주신 지혜가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당신이 광기 속에서 지혜를 구할만큼 지혜가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혹시라도 기분을 상하게 하지는 않았을까 눈치를 보자니, 폐하는 열기 가득한 눈으로 언덕을 보고만 있었다.


“그렇겠지. 신께서는 내게 그런 광기 속 지혜를 내려주셨지. 하지만 이제는 그 지혜보다도 더 멀리 봐야 할 때에 신은 외면하셨네. 그래도 쉬지 않고 말했지 ■■■■■라고. 혹시나 그 말에서 내려오는 지혜가 있을까 싶었네.

그건 통하지 않았지만 자네를 찾았네. 모두 자네 덕분이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는 이따금 한번씩 말해본다네. ■■■■■. 그런데 처음부터 지금까지 아무런 일도 없지.”


그때의 폐하는 이상한, 잉글랜드어 같기도 하고, 노르만어 같기도하고, 프랑스어 같기도 한 억양으로 말했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라틴어로 서있는 상태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갑작스런 변태적 농담이라도 되는 건가? 뭐 자신이 서있다는 소리인가 싶어 한번 농담을 받아봤다.


“아내 분은 노르망디에 있지 않습니까.”


조금이라도 웃을 법했는데 폐하는 웃음기도 없이 말을 잇는다.


“...? 마틸다 말인가? 그래. 자네가 좋아하는 전투로 들어가지. 일단 한번 간이나 볼까.”


그리고 그는 전령을 시켜 궁병대로 견제 하게끔 했지만, 농민병의 수준이 생각보다 견고한지, 방패벽을 세워 버텼다.


“어떤가?”


이번에야말로 전투에 대해 물어보는 왕에게 답했다.


“기사단으로 세번 정도 공세하면 무너질듯 보입니다. 일단 보병이 근접전을 하게끔 하고, 기사들을 보내죠.”


그 말과 동시에 웃음을 지은 왕은 투구를 고쳐쓰고 그의 근위대와 함께 말에 올라탄다. 대열을 맞춰선 병사들이 나팔소리에 조금씩 진격한다. 정예병들답게 그들은 방패를 들어올리고, 천천히, 단단하게 전진한다.


그에 반해, 본인들의 집을 지킨다는 목적으로 단단하게 방어하고 있는 저들은 전투가 처음인 이들이 태반. 그런 이들이 달려오는 기사의 돌격 앞에서 버텨낼 수 있을까?


3000명의 기사. 그들이 먹는 장비의 값도, 그들이 만드는 폭력도 어마어마하다.


그냥 농민병에게는 놀랍게도 첫번째 돌격에서는 그들이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던지는 투척물에 우리측의 보병중 운없는자들은 거기서 쓰러진다.예비대의 일부에게 명령해서 쓰러진 이들을 옮겨오게끔 했다. 그 중 몇몇은 소독과 지혈을 한다면 살아날 수 있는 이가 있는가 하면, 잘라내지 않으면 살리기 힘든 이들이 많았다. 이미 내게 배운 이발사 다섯명이 내 판단에 맞춰서 이미 만들어둔 약들을 이용해서 사람을 살리기 시작했다.


나는 전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죽음을 앞두고 어떻게든 다른이를 죽이고 죽는 이. 머리를 도끼에 찍히고도 방패를 든채로 서있는 이. 악에 받힌 듯 마구잡이로 도끼를 휘두르는 이. 무기를 던지고 공포에 몸을 내던진 이.


“...베드로님. 이 환자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오. 그렇지. 이미 만들어둔 지혈용 시약을 붓고, 아마포로 붕대를 묶어라. 그리고 대마 연기를 맡게 해라. 이 사람은 틀렸군. 양귀비나 주거라.”


원래 같았으면 죽었을 이들이 천천히 삶을 되찾는 모습에 안도감이 든다. 말을 하다보니 입이 약간 이상하게 비틀려 있다는 것을 의식하게된다.


“뭔가··· 즐거운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웃고 있는 건가? 내가? 이들의 비극을 앞에 두고?


그리고 내 눈에는 한 기사의 어깨에 도끼가 사슬갑옷 위를 내려찍는 모습이 들어온다. 그의 방패는 노란색과 빨간색이 사등분 되어 같은 색깔이 번갈아가며 각 자리를 차지했다. 후방에 남은 말을 달려 그 기사를 구하러 갔었다.


====


전쟁 자체를 좋아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열기 속에는 쌓아온 지식을 사용할 기회가 생긴다. 무릇 학자라면 자신의 생각이 현실에 적용되는 장에서 행복을 느끼는 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거기에 이십년간 내가 얼마나 발전했는지도 궁금하지 않은가?


“전쟁이 날지도 모른다 하는구나. 성서 외에도 약에 대해 배운 것을 잘 되새기거라. 어두운 와중에 내가 웃는지는 어떻게 알더냐? 잘못 본 것이 분명하다.”


최신의 약학을 갈고 닦은 이상 하지만 전쟁 자체를 막는 것이 상책일 것이다. 만약 폐하가 프랑스에서의 전쟁을 빠르게 마무리 짓고 돌아오신다면 포기하지 않을까 싶지만 그건 내가 할 수 없는 일이다.


“아하···.”


올리버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다. 아이에게 자신이 전쟁을 일으켰다는 자책은 무거우리라.


“걱정하지 말거라. 우리가 빠르게 소식을 알린다면 전쟁을 막을 수도 있을 거다. 무엇보다 너의 잘못이 아니다.”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하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중얼거린다. 이번에도 노르만어와 프랑스어 잉글랜드어를 섞어 놓은 것같은 기묘한 말이다. 그리고 나는 올리버에게 말고, 윌리엄 폐하에게서도 같은 말을 들은 적이 있다.


-Wat is hee se-in g?


결국은 잉글랜드 어와 더 가까운 말임을 알았고, 열심히 추론한 결과 내용 또한 알았다. 폐하께서 특히도 많이 하던 말이기에 똑똑히 기억한다.


라틴어 조차도 배우기 전에 올리버는 이것과 비슷한 말을 했다. 이제까지는 그 유사성을 잘 몰랐지만 폐하와 올리버는 비슷한 혼잣말을 하는 습관이 있다. 그래서 나는 폐하만이 했던 질문을 한번 해본다.


“올리버. 내가 미래를 안다고 하면 어떻게 생각하겠나?”


올리버는 뭔가에 찔리기라도 한것처럼,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뒤를 돌아본다.


“미래를요..?”


전부터 몇번이고 고민했었다. 주의 광명이 이 아이를 비춘 것일까? 아니면 악마의 장난이 아이의 영혼을 뒤흔든 것일까. 혼탁한 푸른 눈을 가진 아이의 눈은 어느 쪽인지 비추지 못한다.


===


고아인 아이를 거두는 일은 수도사로서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아이를 심부름꾼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든, 혹은 더러운 욕망을 채우기 위한 용도든 흔하게도 어린 아이를 제자로 들인다. 올리버를 데려온 것도 그렇게나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이 아이를 받게 된 상황은 꽤 특별했다.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20년이 지난 1086년, 가을이었다. 어느 날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덴마크인들의 침공을 방비하기 위해 돌아오신 폐하가 진찰을 바라시기에 런던을 방문했었다. 고대에서부터 번성한 런던의 변두리에 나와 절친한 약재상의 가게에서 쐐기풀 차를 마시면서 말을 꺼냈다.


“토마스. 그 소식을 들었는가? 덴마크의 침략자 크누드를 주께서 데려갔다는 군.”


덮수룩한 눈썹아래로 눈을 치뜬 약재상 토마스는 얼마 전에 외상에 쓰일 붕대를 잔뜩 만든 걸 후회라도 하는 표정을 짓다가 말한다.


“그런가. 그러면 전쟁에 대한 소문도 곧 가라앉겠구려. 붕대는 뭐 엮어서 책으로라도 써보던가 하지. 고맙네.”


그리고 바깥에서 소란이 인다.


“노르망디의 주교, 켄트의 백작이시고 우리의 위대하신 폐하의 형제이신 베이유의 오도께서 오셨다!”


선전꾼이 반가운 이름을 부르기에 한번 밖으로 나가보니, 귀족의 행차가 그렇듯이 많은 이들을 거느리고 있는데, 그 중에 눈에 띄는 사람이 있었다. 여러 휘황찬란한 옷을 입은 이들이 있으니 만큼 다른 이들에게는 눈에 띄지 않았겠지만 나에게는 어린 아이를 안고 있는 여자가 모든 것을 포기한 얼굴을 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만날 일이 있으면, 런던의 궁전에서 같이 보지 않겠는가?


그리고 아니나다를까 폐하의 알현실에 그녀가 있었다.


“베드로? 정말 오랜만이군. 마지막에 지어준 약 덕분에 아픈 곳은 전혀 없네. 하지만 확인해야 할 것이 있는지라 불렀네.


이 자는 내 딸의 시녀네. 수도서원을 한 아델리자의 시녀지. 그 아이가 말하길, 내 앞에 있는 이 아이는 이 시녀의 아이라고 하던데 확인을 부탁하네. 이 시녀가 근 시일에 출산을 했었는지 확인할 방법이 있나?”


출산을 한 여자는 엉덩이를 이루는 뼈가 비틀려 그 아이를 출산한다. 원래 아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달라진 몸을 알 수 있겠지만 나는 그녀를 모른다···. 그보다 쉬운 방법이 있다. 딱히 아무도 모르는 일은 아니겠지만, 아무에게나 물어볼 수 없는 민감한 일이니 나에게 물어본 것 아니겠는가?


“아이가 생기면서 배를 이루는 피부가 늘어나면서 생긴 자국이 있을 겁니다. 그렇게 잘 보이지 않게 나타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잘 살핀다면 금방 알 수 있을 겁니다. 아니면 쉽게 젖이 나오는지를 확인해보는 방법이 있겠지요.”


왕이 매만지는 수염 사이로 나이에 맞지 않게도 매끈한 얼굴이 보인다. 약이 효과를 본듯 싶다. 그런데 어색한 침묵이 길게 이어지고 나를 바라본다.


“직접 진찰할 생각은 없나?”


“저는 수사로 살아왔고, 이 시녀 역시 불경을 저질렀을지도 모르나, 누군가의 소중한 딸일 것인데. 제가 어찌 남자된 몸으로 볼 수 있겠습니까? 실제로 아이를 낳았다고 하면 그 아이의 아비 될 누군가와 결혼할 자를 직접 볼 수 있겠습니까? ”


이에 시녀가 울음을 터뜨리면서 말한다.


“정말로 제 아이가 맞습니다. 저 때문에 아델리자 아가씨께서 그런 말을 듣는 것이 너무도 마음이 아픕니다··· 이 아이가 문제라면 어디 마음 좋은 수도원에 맡겨버리겠습니다. 하지만 부디 이 아이의 아비를 찾는 일은 멈춰 주십시오···.”


진찰을 해달라는 말은 없는 것을 보아 거짓말을 하는 것도 같다. 아기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눈을 밝게 뜨고 두리번 두리번거린다. 나랑 눈이 마주친 아이가 꺄르르 웃는다. 지금 이 아이를 어딘가에 넘겨주겠다는 말인가?


“그러한가. 어차피 볼일 없으면 죽어도 상관 없는가?”


진심일까? 아니면 솔로몬이 한것처럼 정말 저 여자의 아이인지를 확인 하려는 건가?


폐하의 얼굴을 먼저 바라본다. 설명을 요구하는 몸짓을 슬쩍 해봤지만 변함이 없다. 계승권 다툼이 생길 수도 있는 모든 일을 하고 싶지 않은 것인가?


다시 눈을 돌려 시녀를 보니 시녀의 얼굴은 이미 하얗게 질려있던 모습에서 완전히 핏기가 가시고 기절하기 직전인 것처럼 보인다. 아이를 안고 있는 채로 쓰러지면 아이도, 시녀도 다칠까 싶어 다가가 잡아주면서 말했다.


“아이를 볼일이 없다고 하니, 후에 계승권 문제 역시 없게끔 제가 아이를 맡겠습니다. 그렇다면 누구의 아이이건, 상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 왕을 보니 알겠다. 소식을 들은 이후부터 진작 이 아이를 맡길 생각이었나.


오도 주교께 아이를 데려오게 한것 역시도 사생아인지 누구인지 모를 아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않을 법하면서도 큰 행렬과 함께 누구를 데려와도 의심을 안 받을 사람을 생각한 것이겠고.


“폐하. 저에게는 그냥 부탁해도 되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내가 서운하다는 듯이 말하자. 정복왕이라 불리는 왕께서는 그 위명과는 어울리지 않게 짖궃게 웃으면서 말을 넘긴다.


“하하. 그대가 얼마나 세속에 찌들었는지 보려했네만. 그렇지는 않은 듯 싶어 다행이네. 그대는 이제 아이를 두고 나가보게나.이 수도사가 당신의 딸은 아름답게 길러줄 터이니.”


“아. 나가기 전에, 이 아이에 이름은 어떻게 되는가?”


“올리버입니다. 딸아이의 이름은 올리버에요.”


올리브 나무라. 남자아이의 이름 같지 않은가? 그냥 남자아이라고 하고 수도원에 데리고 들어올까?


왕궁에 갔다가 수녀에게 의미심장하게 여자아이를 맡기는 것보다는 좀 더 책임감 있지 않겠는가. 사람은 이름을 따라간다고, 10년정도 잘 먹이고 가르치면 좋은 조수가 될 것 아닌가. 좋은 생각이다 싶어 고개를 끄덕인다.


부모의 사랑이 주의 사랑과 같은 부분이 있다고 하니 어찌 이런 기회를 마다하겠는가?


그래도 유모를 구하고 아이가 자라면 예법을 가르칠 사람을 구해야 할 것을 생각하니 머리가 아프다.


알현실에 어울리지 않는 구유에 놓인 아이가 나를 보고 또 웃는다.


“그래서, 실험은 어찌 되었는가? 또 혹시 모르니 진찰을 부탁하네. 오늘은 원래 특별한 날아니.”


“그렇습니까? 제가 아는 바로는 오늘이 웨섹스의 유명한 성인이신 울필다님의 축일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노르망디에서 나고 자라신 폐하께서 울필다님의 기일을 특별히 여기신다니.


잉글랜드 전체의 왕으로 완전히 자리 잡으신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습니다. 힘든 고난 와중에도 다른이를 도운 마음을 가지셨던 성인의 마음을···”


“그런게 아니라, 원래 내가 죽었을 날이네.”


광인이나 할법한 소리를, 또 다시 나의 왕께서는 총기가 형형한 눈으로 하신다.


“나의 영주님, 나의 주군. 저는 본디 주 예수 그리스도 외의 그 누구도 주로 받들 수 없는 몸이었기에, 성직을 포기했습니다.”


바라건대, 광기로 저를 흔들리게 하지 마시옵소서라고 말하려는 내 말이 끊기고 왕이 말한다.


“그래. 이제는 나를 믿을 때가 되지 않았나? 나는 노르망디에서 찬탈자들에게 쫓기던 날부터 내가 잉글랜드의 왕이 될 것을 알고 있었고, 400년 후 동로마의 멸망을 알고 있고, 서쪽 바다 너머를 알고 있다.

나는 왕이 아닌 이들의 나라가 세워질 것을 안다. 기계장치가 하늘을 넘어 달에 닿는 것을 안다. 그래서 알고 있지. 원래의 나는 오늘을 끝으로 죽었을 것이고 너는 연금술을 완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를 믿어라. 나는 천년 후에서 왔고. 인간조차도 인간의 실험실에서 만드는 불경의 시대에서 온. 인간이니.”


믿어야 하는가? 나는 몇년 전에 그 지식을 전하는 자리에서 한 남자에게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폐하. 저는 작센에서 사백년 후의 미래에서 왔다고 하는 자에게서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을 들었습니다. 그가 예언이라고 지껄인 말을 저는 아직도 기억합니다. 마지막 전투에서, 그들의 숭고함이 이교도들 앞에서 어떻게 무너졌는지. 그러니 부디 답하소서 당신은···”


-꺄하!


아이의 웃음에 내 질문은 끊기고. 잠시 아이를 바라보던 왕께서 곧장 답하신다.


“이슬람의 오토만 제국의 메흐메드 2세가 긴 공성을 하던 중, 1453년에 동로마 제국의 군대가 반격을 위해 돌격한 기사단이 돌아오면서 닫지 않은 작은 문에서 무너졌지.”


벌써 23년 전, 작센에서의 자신을 크리스티안 로젠크로이츠라고 칭하던 남자의 광증은 사실이었다.


“...그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시간을 거스르는 기적이 이리도 흔하게 보일 줄은 몰랐습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고는 생각도 안 하였으니···”


그 말에 폐하가 웃으면서 말한다.


“그래. 주께서 나와 함께하시니.”


알현실의 창문으로 구름 낀 하늘이 다시 빛을 내기라도 했는지 그의 뒤에서 빛이 비춘다. 마치 신께서 그의 말에 화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온 알현실이 밝게 빛난다. 폐하는 갑작스런 빛에 당황이라도 한듯 두리번거리고 갑작스러운 빛에 아기는 꾸물거리다가 묘한 표정을 짓는다.


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던 아이는 무표정으로 팔을 움직이려하지만 강보에 싸진 아이는 아무런 움직이지 못하고 이내 포기하고 한숨을 쉰다.


알현실 가운데에 있던 아이에게 빛이 가서인가 그것을 유심히 보던 폐하가 함께 한숨을 쉬고 말한다.


“어린 것이 자기 팔자도 아는 모양이네. 잘 길러 주게나.”


마땅히 그리하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하는 찰나 오래된 기억이 떠오르고 의문에 물어봤다.

"그래서, 미래에서 온 건 그렇다치고 ■■■■■. 그러니까 스테이터스(status:라틴어로 서있다는 뜻), 서있다고는 왜 계속 말한 겁니까?"


그 말에 폐하는 한참을 웃기만하고 대답하지 않으셨다.


작가의말

아무래도 본 역사랑 다른 부분들을 설명해주는 중요한 부분이다 보니 분량 조절에 실패했네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status 는 라틴어로 서있다는 뜻입니다. 16세기에 서있는 자리, 그러니까 상태를 말하는 뜻으로 변했죠.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2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중세 만능 수도사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2 식을 올리다(2) +2 23.12.17 56 3 12쪽
21 식을 올리다(1) 23.12.16 76 3 12쪽
20 웨일스 병합전쟁(4) +2 23.12.16 62 3 11쪽
19 웨일스 병합전쟁(3) 23.12.15 55 3 12쪽
18 웨일스 병합전쟁(2) 23.12.15 52 3 12쪽
17 웨일스 병합전쟁(1) +1 23.12.15 65 2 13쪽
16 런던의 연금술사(7) 23.12.14 76 4 12쪽
15 런던의 연금술사(6) 23.12.14 70 2 13쪽
14 런던의 연금술사(5) 23.12.13 91 3 12쪽
13 런던의 연금술사(4) 23.12.12 76 4 13쪽
12 런던의 연금술사(3) 23.12.11 88 4 13쪽
11 런던의 연금술사(2) 23.12.10 99 4 14쪽
10 런던의 연금술사(1) +1 23.12.09 130 4 13쪽
9 수도사와 수도사의 문답 23.12.08 126 4 18쪽
8 전쟁을 늦추는 전령(4) 23.12.07 136 5 15쪽
7 전쟁을 늦추는 전령(3) 23.12.06 147 5 12쪽
6 전쟁을 늦추는 전령(2) 23.12.06 223 7 17쪽
» 전쟁을 늦추는 전령(1) +2 23.12.05 345 14 20쪽
4 웨일스(4) +1 23.12.05 380 14 11쪽
3 웨일스(3) +2 23.12.04 454 17 14쪽
2 웨일스(2) +2 23.12.04 693 18 15쪽
1 웨일스(1) +4 23.12.03 1,239 30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