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저 친구 데려와 (수정)
의외로 강윤아는 내게 전보다 부쩍 관심도를 내보였다.
그때마다 퍽 일그러지는 서영도의 얼굴이 볼만하기는 했지만, 막상 강 사장 부부도 있고 강윤아도 옆에 있으니 긴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 기정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고.
아직 난 내게 맞는 샤프트 스펙이 뭔지도 제대로 모르고 있다.
피팅 숍에서 측정을 해보기는 했지만 막상 필드 위 플레이어로서 실전에 나서봐야 뭘 알아도 알지 않겠는가?
18홀 필드 플레이는 오늘이 처음이다.
강윤아가 기껏 추천을 해줬는데 쓰지 않기도 애매해 그녀가 하자는 대로 그라파이트 샤프트를 썼다.
생각치고는 결과가 너무 잘 나와서 눈이 동그래졌다.
“봐요. 원래 서우 씨 같은 경우에는 매번 스윙템포가 다르고 기복도 심하니 정확한 스펙의 샤프트를 써보면서 알아가는 게 효과적이에요.”
“아까 캐디 분과 지금 윤아 씨의 말씀이 맞았군요···.”
전문 캐디분이 강윤아처럼 똑같이 추천을 해주기는 했었다. 다만 박 기장의 말만 듣고 고집을 부리게 된 건 순전히 내 문제였다.
그나저나 강윤아. 내 앞에서는 꽤 순진무구한 모습만 보였던 거 같은데.
이제 보니 골프도 곧 잘 치고. 어떤 부분에서는 나보다 몇 수나 위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골프로 서영도 같은 놈도 이겨버릴 정도이니.
천만다행이게도 오늘의 18홀은 꽤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진짜는 이제부터다.
아귀 전문점과 아메리칸 레스토랑 중 어디로 갈지 가벼운 논의를 했는데, 의외로 레스토랑으로 결정.
레스토랑 문을 밀기도 전에 직원이 열어주며 뷰가 가장 잘 보이는 곳으로 안내받았다.
예상대로 내부에는 우리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3층 전체를 예약해버린 듯했다.
고요한 클래식이 잔잔히 흐르고 실내 장식은 고급스러웠다. 테이블에 놓인 숟가락 외 다른 식기들 하나까지도 레스토랑 로고가 각인돼 품격 있었다.
식사가 진행되며 이제야 대화다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다들 배고플까 해서 내가 오기 전에 미리 주문을 했습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추가해서 더 먹고 싶은 게 있으면 주문들 하시고.”
건너편으로 강필수 사장과 사모님, 강윤아가 앉았고 반대편으로 나와 이성우 기정. 서영도가 마주했다.
시작부터 대화를 주도하는 강 사장의 매너는 곧 품격으로 귀결 지어졌다. 이곳에서 제일 상석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걸 인지한 듯 능숙한 배려가 사람을 편안하게 해준다.
그러나 저 위장한 친절에 속아 넘어가면 안 된다는 걸 여기 모인 모두 모를 수가 없을 것이다. 특히 이 기정과 나는 더 감정의 널을 뛰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그러나 서영도가 그걸 알 리는 만무할 테고.
앉은 지 오래되지 않아 직원이 와인을 테스팅 해줬고, 우리는 화이트 와인을 택했다.
캐비어가 가미된 전채요리가 나온 후로 안심 스테이크와 치즈 향이 진하게 올라오는 랍스터가 든 접시가 놓였다.
식사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안 그래도 에코SL과의 거래가 파기되었다고. 서 사장 입장에서는 꽤 어렵겠어. 활로 뚫기도 여간 쉬운 게 아니었을 텐데.”
“아무래도 그렇죠. 현재 하나 케미칼의 분위기가 좀 저조하기는 합니다.”
대체적으로 대화를 주도해나가는 건 이성우 기정과 강필수 사장이었다.
서영도와 난 마치 주변에 옵션으로 배치된 장식품 같이 있어야 했다.
“인도 조건이 나쁘지만은 않았을 텐데. 베트남 현지 법인과의 마찰이 있었다고?”
이 기정이 말하고서 화이트 와인으로 목을 축이는 강 사장을 향해 내심 곤란한 웃음을 늘어뜨렸다.
“그렇습니다. 자세히 말씀드리기는 어렵지만 아무래도 기존 계약내용에 없던 요구조건을 수용해달라는 변수를 사장님이 부당하게 여긴 듯합니다.”
“그건 부당한 게 맞지. 어느 누가 기존 1차 계약 전문으로 나와 있는 내용을 뒤집어? 그거야말로 도의가 없는 놈들이지. 내가 일전에도 그랬지만 서 사장에게는 몇 번이나 에코SL에 대한 투자 철회를 강조했었어. 무르거나 회유를 하거나 말이야.”
“그 지적이 정확하셨을 겁니다.”
“EXW도 투명하지 않을뿐더러 아무리 모든 비용과 위험을 매수인이 부담하는 조건에서의 계약이 선행된다고 하더라도 작업장 인도조건도 형편이 없고. 통관절차와 관세에 대비한 텍스를 갖고 농간질을 부리려던 곳이기도 해서 내가 개인적으로 아주 기피하는 곳이야. 에코SL과 계약을 진행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건 양자밖에 없지. 중박 아니면 쪽박. 코스트 갖고 상도까지 어겨가는 짓을 하는데 어떻게 하겠어. 그런데···.”
강 사장의 눈빛이 마침내 내게로 쏠렸다.
“내가 듣기로, 에코SL과의 협력이 직전에 파기 된 게 다 자네 때문이라지?”
농담하듯 가벼운 말투였고, 어른이 보여주는 자상한 웃음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눈에 이채를 발하는 걸 봐서는 순간 맹수의 눈빛이 연상되었다.
엉뚱하게도 그 순간 내게로 발언권이 넘어왔다.
이성우 기정과 서영도의 시선이 전부 나에게로 박혀온다는 걸 알아챘을 때에 난, 갑자기 내게로 온 기회인지 위기인지 모를 분위기 때문에 내심 놀랐다.
라운딩을 돌 때만 해도 난 철저하게 무리 속에서 고립되어 있던 처지였다.
간혹 나와 실력이 비슷한 사모님과 얘기를 주고받거나 강윤아가 조언을 해준 것 외에 강 사장은 내게 별로 말도 안 걸어주던 사람이다.
그러나 기회가 아닌 맥락 그 자체에 대한 사실 전체를 고려해야 하는 자리였다. 연로했더라도 어디까지나 내 앞에 있는 강 사장은 사자였으니까.
입속에 커다란 이빨을 감추고 있다.
가감 없이, 담담하고 솔직하게 대답하기로 한다.
“아버지에게 한 가지 당부사항을 드렸을 뿐입니다. 에코SL이 원래 베트남 현지기업이었다는 점. 가교회사를 베트남에 세워 교묘하게 위변조를 해왔던 의심 정황. 그리고 국제적 브로커인 도주이마인이 여태 저질러 왔던 일에 대해 조금만 더 주의 깊게 캐내보라는 말씀을 드렸죠. 그게 다입니다.”
“정말 그게 다였군.”
“예?”
“정말 그게 다였다고. 그 점을 파고들 줄 아는 의구심만 지녔더라면 당연히 에코SL과의 계약을 피해갈 수 있었겠지. 그런데 서 사장은 그 점을 간과했다는 거고.”
순간 나를 비롯한 이성우 기정과 서영도의 얼굴까지 움찔했다.
특히 난 스산한 공기를 느낄 수 있었다.
이 말은 곧 강필수 사장이 어느 정도 이와 관련된 진실을 알고 있었다는 말이 아닌가. 에코SL과 하나 케미칼의 불공정거래로 치달을 뻔했던 전말에 대해서 말이다.
의심의 도화선이 완벽하게 선양되기 전, 강 사장의 말이 다시 들려 왔다.
“내가 아까 언급했지. EXW도 형편이 없고 작업장 인도 조건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애초에 코스트를 교묘하게 짜 맞추기 하여 상대 매수인을 속이는데 능한 우재영 사장이 왜 그 욕을 먹고도 이 자리에 올라왔겠나? 결국 의심할 줄 아는 머리를 가져서지. FOB만 해도 그래. 왜 인도 조건이 조건인데?”
강윤아가 샐러드를 맛볼 동안 강필수 사장이 눈짓했다.
“수출화물을 매수인이 지정한 선적항에 적재한다는 거까지는 좋아. 그런데 화물만 반입하면 끝날 일을, 받는 사람이 선적비용부터 도착지까지의 모든 비용을 해결할 일로도 마무리 될 결과물을 갖고 매번 질질 끌다가 다른 인도 조건을 또 내세우잖아. 계약이라는 게 원래 그래. ‘내가 당신이 원하는 선적항에 수출화물을 적재해줄 테니 그럼 그쪽이 모든 제반비용을 해결해주면 끝날 일이니 순차적으로 계약을 맺자.’ 그런데 우재영 사장은 어떤가? 그 비용의 퍼센티지를 강요하기로 작정한 순간부터 인도 조건을 화물 코스트에 맞춰 총량을 대입하고, 거기다 이익에 대비해 수급 타산을 하잖나.”
“그 부분을 몇 번이나 조심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노력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야. 우재영 사장의 계약서는 다른 MOU 같은 각서 체결 분량보다도 거의 두 배가 되니까. 그 말이 그 말이고 또 저 말이 이 말이야. 이래서 난 우재영 사장하고 담판 지을 때가 오면 항상 말을 해. 그냥 표준계약서 끌고 와서 기재하는 내용대로만 계약하자고. 그래서 우재영 사장이 싫다고 하면? 안 하면 되는 거야. 그 인간이 머리를 쓴다고 해서 뭘 어쩔 건데? 우재영이가 먼저 서 사장에게 접근했다지?”
“예.”
잠시 와인 스템을 내려놓은 강 사장이 목에 힘을 주었다.
“그렇다는 말은 또 뭐야. ‘결국 너한테 가져갈 만 한 게 좀 있을 거 같은데. 네가 원하는 건 내가 가져올 테니 넌 내가 주는 것만 받아먹어.’ 그런데 우재영이는 줄 듯 하면서 주질 않아. 그 새끼가 원래 그런 놈이라고. 결국 내가 자네들에게 한 말의 요약을 전부 서 사장에게 해줬다는 말이지. 그런데 서 사장이 또 뭘 어째? 궁한데 뭐라도 잡아야지. 그 잡을 게 하필 우재영이네? 서 사장이 내 대학 후배일 적에도 박식한 건 맞았네. 그런데 순간의 야욕을 못 참아. 그것만 참을 줄 알았더라도 부산에 있는 우리 공장. 그거 전부 서 사장이 갖고 있었을 거네.”
역시 강필수 사장다웠다.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그냥 원리 원칙에만 입각하여 나선다. 그게 강 사장의 지론이었다.
원리원칙.
그게 참 말이 쉽지 막상 내게 어떤 달콤한 유혹이 들이닥친다면 지키기에 참 어려운 말이다.
강필수 사장은 그런 간단한 이론을 여태 굳어져 있는 신념처럼 지키고 와 지금의 오연테크를 만들고 세를 키웠다.
아버지는, 아니다.
그리고 그렇게 흔들린 대가는 아버지에게 불합리하게 적용되었다.
“그런데 어떤 면에서는 참 대단하군. 서우라고 했나?”
“아, 예.”
“하나 케미칼에서 과장 달고 있다고.”
“그렇습니다.”
강필수 사장이 다시 나를 거론하며 씩 웃었다.
“오늘 꽤 재미있었네. 자네 아버지에게 한 말은 더더욱. 앞으로 라운딩 때 종종 보자고. 이 기정.”
“예.”
“앞으로 못해도 한 달에 한 번은 꼭 저 친구 데려와. 골프도 좀 더 가르쳐 놓고. 재미있겠어.”
“아, 옙.”
귀에 닿은 강 사장의 목소리가 아찔하게 울렸다.
맞은 편에서 눈길이 얽혔다. 입가는 휘어지고 있지만 막상 그 위로는 따로 노는, 차분하면서도 아릿할 만큼이나 서늘한 강 사장의 직관적인 눈빛은 그래서 더 생생하게 실감이 났다.
회귀 전에는 미처 받아보지도 못했던, 호기심이 고양된 시선처리였다.
둥둥. 심장이 달음박질 쳤다.
무의식적으로 눈길이 강윤아에게로 쏠렸다. 서영도가 아닌, 강윤아에게로.
왜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그 순간 희한하게도 그녀의 망막이 내 앞 거울처럼 느껴져 왔다.
그저 ‘살아내고’ 있다는 걸 넘어 내 자신을 ‘살려내고’있다는 것. 강윤아라는 거울 앞에 내가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있었다.
마침 눈을 내리깐 채 스테이크를 입에 넣으며, 강윤아가 툭 말을 흘렸다.
“그래요. 가르치는 맛도 있고. 시간 날 때 같이 골프 쳐요.”
- 작가의말
고맙습니다!
오늘도 고생하셨습니다.
좋은 밤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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