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랑과 검정의 경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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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08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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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30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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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쪽

EP - MOON 03

DUMMY


예전에 중앙동에 있는 엄청나게 큰 화분에 있는 사시나무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한적이 있다.


이 나무에 뿌리가 있고, 줄기가 있고, 나뭇잎이 있고, 우리 혈관처럼 양분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기관도 있겠지?


인간이라는 동물을 군집 차원에서 보면 뿌리 역할을 하는 사람도 있고,


지탱을 하는 줄기 역할을 하는 사람도 있겠지.


나뭇잎처럼 광합성 역할을 하는 인간도 있을 테고..


아마도 모든 생물과 동물은 그렇게 서로 얽히고 설키고 영향을 주고 받으며 살아가고 있겠지.







나는 인간인걸까?


나도 인간이라면 나는 그 중에 어떤 역할이지?


나는 그 역할을 누군가에게 부여받는 걸까?


아니면 내가 하고 싶은 역할을 쟁취하기 위해서 어떤 지위를 얻어내야 하는걸까?


만약 나는 인간이라는 나무에 소속된게 아니라면 나무에 기생하는 곤충 같은 건가?


나는 어떤 역할을 하면 살아가야 하지?






보통의 내 또래의 아이들이 자라나면서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들의 입장이 되어보지 못해서.


나의 특수성이 어려서 부터 존재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계속 하게 만들었다.


그것을 잊고 현실에 푹 묻혀서 살고 싶지만 나는 그 질문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역사상 그 어떤 삶을 살아온 철학자보다 더 철학적인 고민을 많이한 사람이 아닐까?


나도 내가 원해서 이런 상황으로 나를 몰고 간것은 아니다.


태어나보니 세상 유일한 하이브리드 생명체 였던 것을 어찌 하겠는가..







어려서 부터 지구 이곳 저곳을 여행했다.


거의 방학마다 갔으니 일년에 두번 이상은 지구에 간것 같다.


한번 가면 일주일에서 이주일 정도 한 도시에 머물렀다.


아빠랑 둘이 갈때도 있었고, 엄마와 형 누나가 같이 할때도 있었다.


그리고 일년에 한두번은 할머니, 할아버지와 고모네 가족들까지 만나서


크리스마스 파티나, 할아버지 생신 파티 같은 것을 했다.


내가 지구로 갈때도 있었고 가족들이 달 기지에 올때도 있었다.







여느 가족들의 생활과 크게 다를건 없었다.


스케일이 좀 큰것 빼고는 말이다.


나는 인간의 것이 아닌 조작된 유전자가 몸안에 섞여 있지만


그 기본은 우리 엄마와 아빠의 DNA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적극적으로 실험에 참여한(비밀 실험이라 사실 엄마 말고 그 역할을 해줄 사람도 없었다) 엄마는


나 뿐만 아니라 지구에 있는 형과 누나도 돌봐야 했기에 주로 지구에 있었다.


아빠는 연구 소장이어서 달 연구소에서 생활하는 시간이 많았고 가족중에는 아빠와 함께 한 시간이 가장 많다.







나는 달 연구소에서 생활하다가 지구에 갈때면 UN에 신청해서 특별 여권을 발행해야 했다.


그때는 인간인지도 판결이 안났으니 어느 나라의 국민도 아니었고 학교에 다니거나 직업을 얻는 것도 쉽지 않았다.


만약 시도 한다면 사립학교에서 등록을 해주 긴 했을것 같다.


할아버지가 설립한 가족재단 산하의 학교들도 다수 있고,


나의 유명세를 학교 홍보에 이용하고 싶은 곳들이 먼저 입학을 권하기도 했다.


하지만 또 나라는 존재 자체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집단들이 와서 데모를 하고 학교를 소란스럽게 만들었을 것이다.


나는 다른 학생들과 학부모들에게 눈총을 받고 이런 저런 문제를 끌고 왔을 것이다.


그런 것들을 생각해서 왠만하면 달 연구소를 벗어나지 않았다.







아빠는 나의 안전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길 여지가 있다면 무조건 극렬 반대였다.


그리고 이곳에도 학교는 있었다.


달 연구소에 와있는 크루들과 연구원들도 가족들과 함께 체류 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그리고 달 연구소의 수업은 자원봉사처럼 연구원들이 선생님으로 많이 참여 했기에


노벨상 수상자 급의 세계적 석학들에게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


저학년때는 기본적인 수업만 들었기에 특별할 것 없었지만


고학년이 되고 듣는 수업에서는 이곳의 수업이 아주 좋았다.


똑같은 것을 설명해도 세계적인 석학들과 달 기지에 올 정도로 열정이 넘치는 연구원들의 강의는 여타 학교의 수업들과는 레벨이 달랐다.


덕분에 나 또한 같이 그 열정에 동요해서 불타는 마음으로 물리학과 화학에 빠져들었다.


일반적인 고등학교 과정이었지만 모르는 것을 물어보러 연구실을 드나 들었고 박사과정 논문을 2개나 쓸 정도로 푹 빠져 있었다.


내가 19세기 영국에 살았더라면 누가 날 부르면 앞에 꼭 ’닥터‘ 레온이라고 불러달라며 닥터를 강조했을 것이다.






그리고 지적인 부분 뿐만 아니라 체력적인 부분에서도 일반적으로 지구에서 살았던 또래와는 많이 다른 부분을 가지고 있다.


내가 있는 [우주인류]연구소는 향후 다행성 체류, 우주여행 등으로 삶의 반경을 넓히게 될 인류를 위해서


지금보다 더 나은 인공적인 진화를 목적으로 설립된 연구소이다.


더 강화된 생명력의 인류를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그말은 즉, 인체를 실험 도구로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윤리적으로 지탄을 받을수 밖에 없는 행위 였고,


대부분의 국가에서 법으로 그것을 금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연구소가 국가의 법적 효력 밖에 있는 달에 지어지게 된 것이다.


인재들을 끌어 들이기에도, 자원을 효율적으로 공급받기 위해서도


달에 연구소를 설립하는 것은 그다지 좋은 방법은 아니다.


우주에서 만 할수 있다거나, 중력에 관련된 실험을 할게 아니라면 말이다.


내가 태어나고 [우주인류]연구소에서는 추가적인 하이브리드 생명체를 만들지는 않았다.


내가 모르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일단 현재 나 이외의 하이브리드 생명체는 없다.


사실 나의 탄생도 완성형의 생명체를 만들 생각은 아니었다고 한다.


배아 단계에서 실험을 반복하며 변수를 통제하고 어떤 결과값을 가져올지 데이터를 쌓는 과정 이었다고 한다.


대부분의 시뮬레이션에서 부정적인 결과값이 나오고 개선하고, 실험하고 결과값을 보고 개선하고 그 과정의 반복이었다고 한다.







그 초창기 연구소에는 완공식 때,


할아버지가 [달이라면 토끼가 있어야 진짜 달이지~ 하하]라며 품에 안고 온 애완용 토끼가 같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원래의 연구소의 보안 프로세스라면 절대로 토끼가 실험구역에 진입할 수 없어야 하는데


어떻게 들어 간 건지 아침에 연구소에서 애완토끼의 사체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우연인지 필연인지 계속 에러와 부정적인 결과값을 내던 배아 실험에서 긍정적인 예측치가 나왔다고 한다.


평소 같았으면 그 단계 이상으로 배아의 세포분열을 진행시키지 않았을테지만,


그 우연히 얻은 기회를 그냥 날려버릴수도 없고


이 결과값을 다시 가져오게 만들기 위한 변수값도 전혀 모르는 상황이라


연구진 들은 어느 누구도 감히 이번 배아를 폐기하자는 말을 못했다고 한다.







그렇게 무럭 무럭 자란 실험실 속의 생명체가 지금의 나다.


연구진들은 예전에 하던 연구보다는 나라는 존재에 대한 연구에 몰입했다.


다들 금이야 옥이야 애지중지하며 인류의 미래 라며 조심히 다뤘다.


연구실 모르모트처럼 생체실험을 한다고 안좋은 환경속에 불쌍하게 지냈던 것은 아니다.


그리고 아빠와 할아버지는 나를 당연히 자기 자식이고 손자라고 천명했다.


그런 상황속에서 나는 부당한 대우를 받을 일은 전혀 없었다.







내가 제채기 한번 해도 여러명이 달려와서 열을 재고 세상 좋은 음식으로 만든 건강식을 먹였다.


물론 귀찮은 것도 많았다. 자주 체혈을 하고 키나 몸무게 체크등을 매일 매일 반복했다.


창피하게 소변 대변도 나만의 전용 화장실을 이용해야 했다.


그것도 다 실험 재료였다.


정말 나의 모든것이 데이터 화 되었다.


그냥 태어나서 부터 그런 환경에 살아와서 그게 특별하게 다른건지도 잘 몰랐다.


학교에서 친구들과 나의 대우가 좀 다르다는 것을 인지한건 한 8살 정도 되어서 였던 것 같다.







학생수가 많지 않아서 내 나이 위로 아래로 3살 정도 차이나는 친구들과 같은 반에서 함께 수업을 들었는데 한 20여명 정도 되었다.


아이들의 부모님이 순환근무를 함에 따라서 전학도 꽤 잦은 편이었다.


계속 뉴페이스가 들어오고 나가고 했다.


나는 신체적으로 다른 아이들을 압도했다.


폐활량이나 수면패턴도 좀 달랐고 달리기나 점프력 같은것은 함께 게임을 할수 없을 정도였다.


10살이 넘었을 때 부터, 나만 따로 수업이 끝난 후에


지구에서 이런 저런 종목의 프로선수들이 와서 몇개월간 운동을 가르쳐주었다.


특별 체육시간이라고 불렀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내 육체적인 한계치를 테스트 하는 과정 이었던 것 같다.


수영도 배우고, 달리기 기록을 측정하고, 농구, 축구 같은것도 프로 선수들이 와서 함께 했다.


그리고 한달 정도 지나면 내가 그들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너무 격차가 벌어져서 더이상 나의 측정치를 끌어올릴 수 없으면 운동 종목이 바뀌었다.







달 연구소에서 어린 시절 학교를 다니고 실험대상이 되면서


지적으로나 체력적으로나 보통의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다는 것은 확실했다.


정말로 인간을 강화하여 우주종에 적합하게 만든다는 목표에 한걸음 다가간 것임을 입증했다.


그리고 나는 아직도 내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모른다.


인권단체에서 나의 삶을 본다면 아무리 내가 자발적으로 테스트에 참여했다고 해도


정상적인 의사 결정을 할수 없는 미성년자의 의견인지라 비도덕적이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윤리라는 잣대도 인간에게 들이댈수 있는 것 아닌가?


난 그때 인간이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수업(?) 과정을 행운이며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축복을 받은 덕분에 사실 왠만한 대학에서도 내가 배울 수 없는 것들을 배웠다.


대학이라는 기관에 들어가는 것은 사실 지구 생활을 하기 위한 명분을 만들고 싶어서다.


그리고 나도 친구를 만들수 있을까? 하는 희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도 학교 생활을 하면서 많은 기회가 있었지만 친구를 만드는 건 쉽지 않았다.


어른이 되면 더 마음을 열기 힘들고 친구를 만들기 힘들다고 하는데..


과연 나는 친구를 만들수 있을까?







장소는 뉴욕으로 정했다.


내가 가본 도시들 중에서 가장 다양성이 충만했다.


가장 미친놈들이 많은 곳, 가장 이상한 놈들이 많은 곳,


그래서 나 같은 별종도 평범의 탈을 쓸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세계 각지에서 모인 이상한 녀석들 중에 달에서 온 이상한 녀석이 섞여 들어가 보려 한다.







이제까지는 지원을 하지도 못했다.


학교 지원을 할때 인적사항에 국적도 적어야 하는데


일단 국적을 취득하기 위해서는 나의 지위에 대한 판결이 먼저 나와야 했다.


나도 인격체로 법적지위를 획득하고 그 다음에 어떤 국가의 영주권 이상의 자격을 취득해야 한다.







우리 [우주인류]연구소 이외에도 달에는 많은 연구기지들이 있다.


그래서 달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꽤 있었다.


달은 특정 국가의 영토가 될수 없어서 대부분 부모의 국가의 국민으로 인정 받았다.


나도 이번 판결이 난 후에 아빠의 국적을 따라서 미국 시민권 취득을 위한 절차를 밟기 시작했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한국인 이었지만 미국으로 이민을 오셨다.


아빠도 태어날때는 한국에서 태어나 어렸을때 할아버지와 함께 이민을 오셨다고 한다.


엄마는 원래 미국에서 태어난 미국인이지만 외할아버지는 한국계, 외할머니는 일본계 교포시다.


나는 3/4 한국인, 1/4 일본인이다.







아.. 토끼랑.. 뭔지 모를 것들이 추가로 들어있으니 정확한 비율은 모르겠다.


하여간 나도 아마 조만간 미국국적자가 될 것 같다.


행정절차가 빠르지 못한 미국이지만 재단에 소속된 변호사 분들이 진행하면 또 순식간에 처리되는 것이 미국이다.






‘아.. 아빠가 반대할 것 같기는 한데.. 뭐라고 설득을 하지?’





그렇다고 평생 여기서 만 살수는 없잖아.


나도 세상으로 나가야 할 때임은 틀림없다.


애당초 나의 고민은 앞으로 무엇을 할까 보다는 아빠를 어떻게 설득할까?에 더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판결이 나오고 나면 이렇게 해야겠다! 하고 정해둔 것은 아니었지만 막연하게 지구에 가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 최우선으로 뉴욕을 꼽고 있었다.


다양성이 많아서 라던가 내가 가고 싶은 학교 가 있다거나 그런건 명분을 위한 핑계에 불과하다.


그냥 처음 뉴욕을 갔을때부터 좋았다.


처음 타임스퀘어에 쭈그리고 앉아서 도넛을 먹을 때, 알수없는 해방감과 자유가 느껴졌다.


원래 내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온 것 같은 느낌.







이제까지 내가 있었던 모든 장소들은 어디론가 나아가야 할 과정처럼 느껴졌다.


망망대해에 배를 띄우고 있는데 돛을 향해 계속해서 바람이 불어오는 느낌.


누군가가 내 등 뒤에서 계속 바람을 불어대서


어디론가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라고 나를 툭툭 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어디로 가야할지 얼마나 가야 할지는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막연하게 계속 더 열심히 해야해!! 하는 압박감은 느껴지는데 무엇을 해야 할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런 묘한 기분이 나를 재촉하는 바람에 평온한 상태가 아니었다.


계속되는 긴장감과 공허함에 나도 열심히 해야해! 뒤쳐지면 안돼!! 라고 말해보지만


무엇을 열심히 해야 하는지, 누구에게 뒤쳐지면 안되는 것인지도 전혀 알수 없었다.







왜 인지는 모르겠다.


뉴욕에 있는 동안에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항구에 배가 정박한것 처럼 이제 내가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도착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더이상 누가 내 등을 떠미는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았다.


뉴욕이 나를 끌어당기고 있는것인지


내가 뉴욕에 끌려 들어가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자석처럼 찰싹 달라 붙어 있어야 할 곳에 온것 같은 편안함이 느껴졌다.







한번 가면 1주일~2주일 정도 머물렀지만 여러번 갔기 때문에 일회성으로 시기적 특성 때문에 든 느낌은 아니었다.


매번 뉴욕에 갈때마다 편안함을 느꼈고


그래서 휴가지를 아빠나 다른 가족들이 정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대부분 뉴욕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아빠도 달에 갇혀있는 나의 기분전환이 최우선 과제 이기에 그 의견을 충분히 반영해 주셨다.







이런 나의 뉴욕에 대한 사랑 때문에 당연히 지구의 거주는 뉴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영상작업과 회화에 관심이 있어서 아트스쿨을 가고 싶었다.


예술 전문학교 보다는 종합대학을 가고 싶었다.


다른 학과의 다양한 수업들을 들어보고 싶기도 했고,


친구들을 만든다면 꼭 예술관련 분야 보다는 다양한 이야기를 나눌 친구들을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가 사랑하는 맨하튼에서 그런 조건을 최적으로 맞출 수 있는곳은 NYU이다.


NYU의 아트스쿨에 지원하기 위한 여러 단계들에 대해서 조사해 보았다.


나는 시험 준비와 자기소개서 등을 준비했다.


학부 수업을 들은 적은 없지만 이미 박사과정의 논문을 출판한 경력이 있어서 대학원으로 진학도 가능할것 같았다.


그러면 시험등의 준비 몇가지는 생략할수도 있었다.


이런 조건들을 상의하기 위해서 입학처에 메일을 보냈다.







입학처의 담당자는 처음에는 정말 내가 지원하려는 것이 맞는지 몇번이나 확인했다.


나름 유명인인지라 장난을 치거나 사기꾼은 아닐지 몇차례나 검증을 했다.


그리고 없는 규정을 만들어서라도 입학을 책임질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아직 국적 문제가 진행중이라고 했지만 그것 역시 학교에서 알아서 처리 할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혹시 다른 학교에 중복으로 지원은 하는건지도 물어봤다.


동문인 명단에 유명인이 포함되는 것은 학교 운영에 큰 도움이 된다고 했다.


그렇게 일단 뒤로 일을 저질렀다.







내일 아빠랑 같이 하는 정기 바이탈 체크 시간이 있다.


어렸을 때부터 매주 금요일이면 기본적인 신체검사를 했다.


그후에 아빠와 둘이 혹은 이런저런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했다.


얼마전에 판결이 난 후에 내가 사람들과 많이 얽히는 것을 부담스러워 한다는 것을 알고


이번 검사때는 아빠와 단둘이 식사를 하기로 했다.







그때 아빠에게 지구에 가고 싶다고 말할 생각이다.


NYU에 간다고 말 할 생각이다.


이 나이때의 정상적인 아이들은 허락을 구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좀 파파보이로 자란 건가.. 계속 아빠의 허락을 걱정하고 있다.







오히려 법원에서 판결이 나오는 날 보다도 더 긴장이 된다.


혹시나 안된다고 하실까봐.. 이제까지 아빠의 과잉보호를 생각하면 그럴 것 같다는 걱정이 들 수 밖에 없다.


만약 반대하시면 난 어떻게 해야 하지.. 그래도 강경돌파를 선택해야 하나?


태어나 처음으로 반항이라는 것도 해볼 타이밍 인 건가?


아니면 한 6개월 정도는 더 눈치를 보고 차근차근 준비해서 다음 학기 입학을 노려야 할까?


생각이 많아진다. 점점 머리가 복잡해 지는 하루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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