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빛 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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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전참가작

영온
그림/삽화
영온
작품등록일 :
2024.05.10 12:07
최근연재일 :
2024.09.17 21:30
연재수 :
59 회
조회수 :
1,393
추천수 :
102
글자수 :
329,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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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2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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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33화 - 두려워하는 것

DUMMY

제법 흐릿해진 눈으로 무언가를 말하려던 히로유키가 정화와 눈이 마주쳤다. 원망과 설움, 연민과 간절함, 그리고 자괴감과 죄책감으로 물든 검은 눈동자에 서린 물기를 발견한 히로유키가 입술을 피가 날 듯 깨물었다. 찰나였으나, 드물게 일그러뜨린 얼굴 속에 깊은 한이 맺혀 있었다.


“······ 아니다, 이만 네가 말하려무나······.”


무언가를 말하려 정화가 입을 벙긋하기도 전, 그가 미끄러지듯 탁상에 몸을 뉘였다. 술에 취해 쓰러지듯 엎드린 히로유키를 정화는 말없이 바라보았고, 놀라지도 않았다. 여전히 같은 눈빛으로 그를 응시하였고, 처음 앉았던 자세에도 일절 변화가 없었다.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속이 허무하고 빈 기분은 정말 처음 느껴보는 것이었다. 마치 제 혼을 도둑맞은 기분이었다.


“······ 정녕 제가 하고 싶은 말을 해도 되나요.”


그가 엎드린지 1각은 지났을까. 떨리는 손을 꼭 쥐고 눈을 질끈 감은 채 정화가 물었다. 제아무리 말수가 없어도 묻는 말에는 늘 대답을 했던 이가 말을 않는다. 얼굴을 볼 수 없어 장담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자는 것이리라.


“제아무리 우리 민족을 병탄 (남의 재물이나 다른 나라의 영토를 한데 아울러서 제 것으로 만듦.) 한 금수같은 놈들에게 빌붙어 살기로서니, 한 입으로 두 말 하는 이는 아니리라 믿습니다. 그럼에도 술기운을 빌리고자 하며, 혹여 들었다면 그저 늘 생각하시던대로 멍청한 조선인 계집아이가 정신이 온전치 못하여 하는 개소리 정도로만 받아들이세요. 민족을 배반하고 붙잡는 데 앞장선 자가 이 정도 생각을 못 하리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가능한 매몰찬 말을 하고 싶었으나, 줄줄이 늘어놓는 말이 변명과도 같았다. 이 와중에도 내 살 길은 마련하고 싶은가, 참 염치도 없지. 그렇지 않고서야 내 이리 말할 연유가 없지 않은가.


“······ 저는 당신이 싫습니다. 뼛속 깊이 증오합니다. 조선인의 몸으로 태어나, 조선인에게 해서는 아니 될 일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죽이고 싶고 또 죽이고 싶지만, 아니······ 그래야 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만 용기가 없고, 후에 닥칠 일이 두려워서 그러지 못하고 있습니다.”


‘후에 닥칠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왜놈 장교를 죽여 사형을 당하는 것일까, 배후가 하허인이냐며 고문을 당하는 것일까, 가족들까지 얽혀 피해를 보는 것일까, 실패하여 돌변한 주인의 얼굴을 보는 것일까, 아니면······.


“내가 두려워하는 것이 실패일까요, 그로 인해 내가 겪을 고초일까요, 아니면 상상만으로도 누군가를 죽여본 적이 없어서일까요. 그것도 아니라면······.”


이미 제 자신은 정답을 알고 있었다.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이며, 가장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그럼에도 행여나 다른 답이 나올까 하는 마음에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대로를 전부 내뱉고 있었다.


“······ 당신이 죽는 걸 보기 두려워서일까요······.”


결국 가장 원치 않는 것을 제 입으로 내뱉고야 말았다.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아 애써 외면하였으나 더 이상 제 마음을 부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실감하자, 끓는 듯한 눈물이 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 내가, 당신을 싫어해야 맞는 것이겠지요······.”


이를 악문 채 소리를 죽여 울며 제 속내를 끊어 뱉느라, 정화는 제 앞에서 연유를 알 수 없는 움직임이 있었다는 것조차 자각하지 못하였다. 커다란 두 눈을 눈물이 야속할 정도로 빠르게 메웠고, 흐르지 않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고개를 치켜들었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고 또 아파서 절로 애끓는 소리를 읊었다.


“하, 참······. 우리 오라버니는 왜놈들에게 모든 걸 빼앗겼고, 우리 언니는 더 이상 산 사람으로 살지도 못할 뿐더러 생사조차 알 수 없는데, 나는 아무래도 당신과 다를 바가 없는 민족반역자인가 봅니다······.”


믿고 싶지 않았으나, 부정할 수 없었다. 제 현실이 그러했다. 부정할 수도 없이 한 사내를 마음 깊이 품었고, 그 사내는 조선 팔도는 물론 일본에서조차 모르는 이가 없는 친일파였다. 본인 입으로는 아니라 하였으나, 관영을 조사한다 하였으니 필경 해를 끼쳤겠지. 관영도 아니라 하였으나, 워낙 의지하기를 싫어하는 이였으니 온전히 믿을 수도 없을 것이다. 조선인들의 모든 것을 앗아간 이들의 가장 앞에 서서 내 가족을 짓밟기를 앞장선 이를 연모하다니, 멍청한 것일까 아니면 인면수심인 것일까. 소리없이 아우성치는 제 몸이 한없이 아래로 가라앉았고, 타는 듯 뜨거운 눈물이 탁자 아래 카펫을 적셨다.


“······ 당신만큼 못된 이가 또 있을까요······.”


애끓는 소리가 점차 옅어지더니만 이내 잦아들었다. 그 동안 카펫의 색은 어두워지기를 넘어 조금만 밟아도 발을 적실 듯 젖어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제가 느끼기에도 꽤나 긴 시간이 흘렀다. 앞에서 무언가 움직이나 싶은 순간이 두어 번 있었으나, 그저 기우에 불과할 것이다. 제 앞에 있는 것이 사람이든 귀신이든 지금 이 현실보다 두려울 것이 있을까. 물에 젖은 솜마냥 무거운 몸을 일으키자, 문득 제 앞에 누군가가 있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래, 나는 이 자 때문에 이리도 괴로워하였다. 내 모든 것을 앗아간 이 자를 나는······.

어찌 해야 할까, 지금이 기회일까. 내가 도망치든, 아니면 이 자를 죽이든. 그러나 사람을 어떻게 죽이는지를 알지 못했고, 그럴 만한 용기도 없었다. 무엇보다 당장은 살아야 했다. 이 자를 죽인다면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을 테니 우선은 할 일을 하자. 죽이든 살리든, 일단 내가 살아야 할 수 있는 일이다. 가슴이 타는 듯 하였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 현실, 무엇보다 지금 당장 이 자를 그저 이 자리에 둘 수 없다는 것조차 사무치게 원통하여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도련님, 일어나셔요······. 여기서 주무시면 어찌합니까.”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닫힌 눈꺼풀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 독약같은 것을 그리도 마셨으니 멀쩡할 것이라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어찌 이리도 제 피를 말리는 것인지, 다시 한 번 눈물이 났다. 결국 절대 하고 싶지 않은 것까지 하게 만드는구나.

정화가 한숨을 내쉬더니만, 이내 탁상 위에 엎어진 히로유키를 들쳐업었다. 키는 6척을 훨씬 넘는데다 몸을 전혀 가누지 못하는 이가 등을 짓누르는 힘에 가냘픈 다리가 위태로이 휘청거렸다. 후들거리는 신음을 애써 삼키며, 정화가 히로유키를 내던지듯이 침대에 걸쳐 놓았다. 그러나 제 몸이 히로유키의 긴 팔에 감겨있던 것을 미처 신경쓰지 못한지라 그만 제 몸도 함께 침대로 던져지고 말았다. 중심을 잃고 쓰러진 정화가 낑낑거리며 일어나려 했으나, 히로유키의 긴 팔이 그를 족쇄처럼 감싸 포박해버렸다. 마냥 뿌리치기에는 잠에서 깰까 두려웠고, 또 제 마음이 허락하지 않았다. 몸을 짓누르는 팔을 밀어내려 애를 써 보았으나, 이미 기운이 빠질 대로 빠진 상태라 아무리 용을 써도 소용이 없었다.


“내게 어찌 이렇게까지 가혹하게 구는 거요······.”


결국 더 힘을 쓰기를 포기한 정화가 탄식하듯 내뱉었다. 딱 1각만, 정확히 1각만 이러고 있다 보면 힘을 더 쓸 수 있겠지. 그러다 허공을 올려다 보려 지친 시선을 들자, 이전까지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 불현듯 눈길을 사로잡았다. 얼굴, 이 자의 얼굴이다. 한 번도 제대로 바라본 적 없는 얼굴. 벌써 아득해져가는 기억이지만 약 1년 전 즈음 제게 이 자가 그리도 잘생겼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던 이가 있었다. 그 말을 들은 날로부터 지금까지 단 한순간도 떠올리지 못하였으나, 이제야 그 말이 조금은 실감이 났다. 사람의 피부가 이리도 맑을 수 있을까. 잡티 하나 없이 흰 피부는 맑다 못해 투명한 강물과도 같아, 마치 제 얼굴이 비쳐보일 듯 하였다. 어릴 적부터 살결이 곱다 소리를 꽤 들었던 저이지만, 이 자 앞에서는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꼴이라. 살기 위해 밤낮 할 것 없이 논밭에서 시간을 보내느라 푸석푸석해졌던 고향 다른 이들의 얼굴이 떠오르자, 눈 밑이 벌렁였다. 제 마음을 어찌 알았는지, 곱게 감은 눈꺼풀 사이로 물기가 배어나왔다. 가느다란 물줄기가 티끌 하나 없는 얼굴에 길을 내더니, 이불에 방울졌다. 도통 이해할 수가 없다. 울어야 하는 이는 나일텐데, 이 자는 대관절 무슨 연유로 눈물을 흘리는가. 꿈속에서라도 속죄를 하는 것일까.

가슴이 시리도록 미운 사람, 그러나 어쩐지 이 자의 젖어든 눈가로 손이 향한다. 미워해야 하는 이가 분명하다. 지금까지 이 자의 손을 거쳐간 조선인들이 어찌 되었는가. 가만히 보고만 있는 것조차도 매국일 것인즉, 내가 지금 품는 이 마음이 저 짐승같은 놈들과 다를 것이 무어란 말인가.

살포시 뻗은 손 끝이 젖어든다. 흐르는 뜨거운 것을 천천히 닦아내어주자, 한층 더 젖어든 짙고 긴 속눈썹이 반짝거린다. 잔인할 정도로 찬란하면서도 증오하는, 아니 증오해야’만’ 하는 사람. 그런 이의 어스름한 전등불을 머금은 검은 머리는 놀라울 정도로 단정하고, 얼굴을 그리는 가늘지만 선명한 능선은 할 말을 잃을 정도로 아름답다. 짙은 눈썹 한 올 한 올조차 섬세한데다, 콧대는 분명 이따금씩 이 곳 저택에 찾아오는 백인들보다 높으리라. 분명 1년을 넘게 곁에서 모셨기로서니, 매번 고개를 숙이고 눈길을 피하느라 얼굴을 제대로 바라보는 것도 처음이요, 특히 이런 모습은 정말이지 처음이다. 이 자가 원래 이렇게 생겼던가. 아주 잠시 동안 머릿속을 헤집던 번뇌가 날아갔다. 쪽진 머리와 치마저고리만 입혀 놓으면 잠시 동안 여인으로 오해받지는 않을까, 이런 실없는 생각에 입가가 그의 감은 눈처럼 안온한 선을 그렸다. 이마 끝부터 얼굴의 모든 곳을 찬찬히 뜯어보며 시선을 내리던 중, 한 순간도 갈라진 적 없는 듯한 고운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당장이라도 뛰어들고 싶을 정도로 한없이 맑고 고운 붉은 호수, 그 옆에는 작지만 날카롭게 찢긴 흉이 자리하고 있었다. 어디 하나 곱지 않은 구석이 없던 얼굴에, 그의 자의와는 상관없이 생겨난 자상이었다.


“이런 얼굴에 흉터를 남기고 싶은가······.”


문득, 제 앞주머니에 많은 것을 넣고 다니던 기억이 되살아났고, 앞에서 자고 있는 이가 깨지 않도록 손만 천천히 움직여 약을 꺼내었다. 어찌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산골에서 사느라 어지간해서는 다쳐도 모를 정도로 무던한 자신을 위해 넣어두었을 리는 없었고, 두려움과 증오를 한데 묶은 이 자를 위해 있었을 리는 더더욱 만무하였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 좀 전 뜨거운 것을 닦아내었던 그 손 끝에는 꽤나 차갑고 미끌한 것이 묻어 있었다.

갈라진 입술 끝에 가늘디 가는 검지가 닿았다. 행여 떨리는 마음이 손 끝으로 전달되어 잠이라도 깨울라, 천천히 굼질거리며 상처를 어루만졌다. 움찔조차 하지 않았으며, 숨소리도 고요했다. 환부에 닿은 연고가 아프지 않을 리 없거늘, 술이라는 것이 그리도 깊은 잠에 들게 하는 것인가. 아니면 이런 일조차도 이 자에게는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던 걸까.


“······ 차라리 나쁘게 굴기라도 할 것이지, 그럼 이럴 일도 없을 텐데······.”


무거워진 마음은 응어리진 울분을 두 눈으로 뱉어내었다. 울컥울컥 쏟아지는 뜨거운 한을 닦아 줄 이가 없다는 것이 또 다른 한이 되어 얼굴 끝에 맺혀 떨어졌다. 내게는 마음이 두 개인 것일까, 그렇지 않고서야······.

한에 맺힌 마음이 희뿌옇게 변하였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그렇게 세상이 점차 희미해져갔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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