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난나 케이스:프로이트가 남긴 멸망의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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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전참가작 새글

Afei
작품등록일 :
2024.06.03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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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0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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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2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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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취리히

DUMMY

취리히의 호숫가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 뒷좌석에 앉아있는 안나 프로이트는 차창 밖의 풍경을 보면서 이런저런 감회에 빠진다. 칼 구스타프 융 박사가 이 세상을 떠나기 3개월 전, 마치 아버지 프로이트가 융을 찾듯이 그녀에게 한 번 자신을 찾아와달라는 편지를 보내왔다. 그때도 지금처럼 시스트라세(Seestrasse)를 달리는 차에 몸을 싣고서 융의 자택인 퀴스나흐트(Küsnacht)로 향했다.

자동차가 퀴스나흐트의 융 저택 앞 도로에 도착하였다. 차에서 내린 안나는 입구에서부터 집 앞까지 가지런히 나 있는 진입로에서 작은 중세의 성처럼 첨탑이 두드러지게 보이는 퀴스나흐트를 물끄러미 바로 보며 이 집에서 처음 융을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이게 얼마 만인가?”

융은 집 정문 앞까지 안나를 마중 나와 서 있었다. 그의 편지를 받았을 때, 안나는 그가 무슨 큰 병이 있어서 마지막으로 자신을 만나고 싶어 하는 줄 알았다. 도리어 너무 정정한 융의 모습에 안나는 당황한 나머지 그의 갑작스러운 포옹에 그를 안아주지도 못했다.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이요.”

융은 만면에 웃음을 가득 채우더니, 안나에게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다는 손짓을 한다. 그의 안내에 따라 들어선 퀴스나흐트의 정원은 그녀의 상상 이상으로 아름다웠다. 진입로를 따라 불특정한 크기로 동글동글하게 다듬어진 정원수는 그녀의 긴장된 맘을 진정시켜주었고, 정원 한쪽 켠에 세워져 있는 화병의 들꽃들은 알프스의 기운을 담고 있는 듯했다.

융은 안나를 퀴스나흐트 한편에 유리창으로 사방이 열려 있는 거실로 곧바로 안내했다. 그 거실에서는 취리히 호수가 바로 내다보였다. 융은 호수를 등진 자리에 앉고, 그 반대편에 전체 호수를 볼 수 있는 자리를 안나에게 양보하였다.

“정말 아름다운 곳이네요. 저도 은퇴하면 이곳으로 올까 봐요.”

“내가 이 옆집이 나면 바로 연락해 주지. 자네가 옆에 살면 나도 심심하지 않고 정말 좋을 것 같네.”

어린 시절부터 보아온 융의 지금 모습은 안나에게 너무 낯설었다. 언제나 무언가에 쫓기는 듯이 조바심 많이 내고, 안절부절못하던 그의 모습은 이제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왜 저를,,,”

안나는 단도직입적으로 융이 자신을 부른 이유를 물었다. 융은 잠시 기다리라는 손짓하고는 노구를 다시 자리에서 일으켜 세운다. 그때, 거실의 문을 열고 한 여성이 들어온다. 그녀는 홍차를 쟁반에 들고서 천천히 거실 탁자로 다가온다. 안나는 자신의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그녀가 차 심부름을 하는 것에 부담이 들어, 자리에 일어나서 그녀의 쟁반을 받으려고 했지만 융은 다시 손짓으로 그녀를 멈추게 하고는 대신 쟁반을 받아서 커실 페이블에 올려놓는다.

“감사합니다.”

안나는 융이 자신의 앞으로 내미는 홍차를 받으면서도 그 쟁반을 들고온 여자에게 쉽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아, 내 제자인 메리 에스더 하딩(Mary Esther Harding)이네. 메리, 이 친구가 바로 안나 프로이트이네.”

안나는 몇 년 전 융이 쓴 논문에서 그녀의 이름을 본 적은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자신과 비슷한 연배의 여성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안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어 그녀에게 악수를 청했다.

“박사님 논문, 정말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서 정말 영광입니다.”

메리는 감정의 흐름을 전혀 읽을 수 없는 말투로 안나에게 환영의 인사를 건넨다. 융은 인사를 마친 메리에게 자리를 비켜달라는 눈짓을 보낸다.

“그럼 두 분 말씀 나누세요.”

메리는 곧바로 거실을 빠져나간다. 그녀가 거실을 나가고 융과 단둘이 남게 되자, 안나는 이상한 불편감이 느껴졌다. 그것을 느꼈는지, 융은 손을 들어서 차를 마시자는 손짓을 안나에게 보낸다. 둘은 한동안 아무 이야기 없이 차를 마신다. 안나는 융이 자신을 여기까지 부른 이유를 계속 말하지 않아 답답해졌다. 하지만, 융의 등 뒤로 보이는 취리히 호수의 아름다운 풍경이 그녀의 마음을 달래준다.


“안나 박사님?”

차에서 내린 안나를 마중하기 위해 메리가 정문에 나와 있었다. 메리는 첫 만남과는 다르게 얼굴 전체에 미소를 띠면서 안나의 앞으로 다가와 그녀의 두 손을 꼭 감싼다.

“다시 만나 뵙게 되어서 정말 반갑네요.”

안나는 너무나 들떠있는 메리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게 된다. 그러나 안나의 의사와 상관없이 메리는 안나를 포옹하면서 환영의 의사를 확실하게 표현한다.

안나는 실례인 줄 알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살짝 밀면서 그녀의 품에서 벗어난다. 하지만 메리는 그걸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바로 안나가 내린 차 쪽으로 다가가 열린 차 안을 바라본다.

차 안에는 하얀 옷깃에 검은 벨벳 원피스 치마에 붉은 리본을 매고 있는 2-3살 정도로 보이는 어린 여자아이가 앉아있었다. 아이는 메리를 보더니, 그 하얀 얼굴을 붉힐 정도로 밝게 웃어 보였다.

메리는 서슴없이 그 여자아이에게 손을 뻗어서 그녀가 차에서 내리는 것을 도와준다. 여자아이는 메리를 처음 보았지만, 마치 태어났을 때부터 그녀를 알고 있는 것처럼 친숙하게 군다. 그런 아이의 모습에 안나는 불편한 기색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이 아이의 이름은 뭐죠?”

메리도 오늘 처음 그 아이를 만난 게 아니라, 오랫동안 키워온 유모처럼 그녀를 번쩍 들어서 품에 안는다. 안나는 메리의 태도가 몹시 의심쩍었지만, 앞을 생각하면 그녀의 물음에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에레슈키칼이라고 해요.”


그 여자아이를 이리로 데리고 오게“

취리히 호수에 혼을 빼앗긴 안나에게 갑자기 들려온 융의 목소리는 그녀의 평온을 무참히 깨트려 버렸다.

“무슨 말씀이신지?”

“게리가 찾은 그 아이 말일세. 그 아이를 이 세상은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어있네.”

안나는 너무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융을 노려본다.

“어떻게 클로프가이스터 프로젝트를 알고 있는 거예요?”

융은 남은 홍차를 다 들이마시면서 그녀에게 곧바로 대답하지 않는다.

“박사님도 게리와 함께 일한 거예요? 그리고 난릴을 이리로 데리러 오라나요? 그 아이가 어떻게 보호받고 있는지를 알고 말하는 거예요?”

“보호라? 감금이겠지. 그리고 자네도 나도 알아. 그 아이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는 없다는 것을.”

안나는 자리에 앉지 않고, 거실을 돌아다니면서 놀란 가슴을 진정시켜 간다.

“어떻게 난릴의 존재를 알게 된 거에요?”

융은 방안을 서성이는 안나를 눈으로 좇으면서 대답한다.

“게리 그 인간과는 상관이 없네. 자네 아버지의 노트를 읽은 후, 나를 찾아온 이들이 있었지. 그들이 알려주더구먼.”

안나는 융의 대답에 걸음을 멈추고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소련 스파이랑 엮인 거예요?”

안나의 물음에 융은 어이가 없었는지 큰 웃음을 터트린다.

“자네의 상상력은 정말 놀랍구먼. 소련 스파이라니? 자네도 게리와 같이 하다보니, 많이 닮아진 것 같아.”

안나는 머리를 좌우로 흔들면서 융에게 계속 질문한다.

“소련 스파이가 아니라면, 도대체 그들은 누구에요?”

융은 거기서 잠시 이야기를 끊고서 가만히 안나를 바라본다. 안나는 융의 앞자리에 다시 앉아서 그의 대답을 재촉한다.

“그들은 나와 프로이트가 1909년에 겪었던 그 일에 해답을 찾아줄 수 있는 사람들이었지.”

“해답이요? 그럼 그들도 우리처럼 정신분석학자들인 건 가요?”

융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자신의 서가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면서 역시 안나의 대답에 뜸을 들인다. 안나는 그의 움직임에 따라 몸을 돌리면서 그의 다음 대답을 기다린다.

“자네는 요즘 내가 어떤 연구를 하는지 알고 있나?”

안나는 융이 벌써 예전에 정신분석학 연구를 그만두고 연금술 연구를 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있었다. 이에 몇은 융이 정신분석학 연구에 염증이 생겨서 그렇다고도 하고, 몇은 융의 분석심리학에서 예전부터 보이는 신비주의적인 측면에 대해 정신분석학 차원에 접근하고 있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신분석학에 매진하고 있는 대부분의 이론가들은 융이 그냥 미쳤다고 여겼다.

안나가 막상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자, 융은 서가에서 책 한 권을 꺼내 안나에게 내민다. 그 책은 표지부터가 안나가 읽을 수 없는 글자로 되어있었다.

“이 책은 뭐죠?”

“이 책을 내 친구인 리차드 빌헬름(Richard Wilhelm)가 The Secret of the Golden Flower라는 책으로 번역해 주었지. 그들과의 만남은 이 책으로부터 시작되었다네.”

안나는 융에게서 받은 책을 대충 훑어보고는 그냥 거실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제가 종잡을 수가 없네요. 이 알 수 없는 글자로 쓴 책은 뭐고, 또 이 책 때문에 누군가를 만나게 되었다는 것이요.”

융은 다시 천천히 자기 자리로 돌아와 안나를 부드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이야기를 꺼낸다.

“사실 그날 우리가 겪었던 일은 그들의 존재를 처음으로 우리에게 알리기 위한 신호였다네. 그런데 자네의 아버지는 그 신호를 잘못 이해했던 거야. 물론 전쟁에 휘말리게 된 것도 상황을 악화시킨 것이기는 하지만,,,”

“신호요? 무슨 신호라는 거에요? 그리고 어떻게 그들이 박사님과 아버지 무의식 속을 헤집고 들어올 수 있다는 거죠?”

“바로 난릴이 하는 것처럼?”

안나는 융이 난릴의 능력까지 알고 있다는 사실이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어떻게 난릴의 능력까지,,,”

“난릴의 능력은 절대 길들일 수 없는 것이야. 자네 아버지의 연구는 정말 놀라운 것이기는 하지만, 네 아버지가 살아있어도 그 연구는 결국 미완성으로 끝날 거야.”

안나는 지난 10년이 가까운 시간 동안 난릴의 능력을 제어할 수 있도록 수많은 방법을 써보았다. 하지만 약물로 증폭된 난릴의 능력은 점점 더 강해지기만 할 뿐이었고, 그럴수록 난릴은 정신은 무너져갔고 점점 컨트롤이 어려워졌다.

융의 지적에 대답이 궁색해진 안나에게 융은 명함 한 장을 꺼내어 앞으로 내민다. 그 명함에는 단 한 단어 외에는 어떤 글자도 쓰이지 않았다.

“Marduk(마르두크)?”


“에레슈키칼이요? 너무 어려운 이름이네요. 할머니가 에레라고 불러도 되겠니?”

안나는 에레슈키칼의 이름을 맘대로 줄여서 부르는 메리의 태도가 맘에 들지 않아 얼굴이 다시 찌푸려졌다. 하지만 메리의 눈에는 에레 밖에는 들어오지 않는지, 품에서 그녀를 내려놓지 않는다.

“메리, 융 박사님이 이야기 하셨던,,,”

“아, 네. 이쪽으로 오시죠.”

메리는 에레를 다시 땅에다 내려놓고서는 그녀의 손을 잡고서 퀴스나흐트의 집 정문으로 안나를 안내한다. 짙은 감색의 정문은 묘하게 융이 생전에 중요하게 다루었던 상징인 만다라를 연상시키는 패턴이 엿보였다.

메리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퀴스나흐트 집 내부는 전에 들렀던 호수가 거실하고도 또 다른 느낌을 안나에게 주었다. 거실은 훤히 개방되어 있지만, 퀴스나흐트 본채 내부는 묘하게 닫혀 있는 것 같다고 안나는 느꼈다. 메리는 여전히 오랜만에 만난 자신의 손녀를 대하듯이 에레의 손을 꼭 잡고서 안나와 함께 복도를 지나 지하로 내려가는 문 앞에 선다.


“마루두크? 도대체 이들은 뭐하는 자들이길래, 미국 정부 제일의 비밀인 클로프가이스터 프로젝트의 비밀을 알고 있는 것이고, 박사님과 제 아버지의 무의식 속으로 신호를 보낼 수 있다는 거죠?”

안나는 세간의 풍문 대로 융의 정신이 이상하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하지만, 난릴에 대한 비밀은 맨하튼 프로젝트에 버금가는 보안으로 비밀로 감춰져 왔다. 그것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마루두크 같은 단체에서 알고 융에게까지 손길을 뻗었을 수 있었을까?

“나도 처음에는 자네처럼 그들을 믿을 수 없었지. 그러나 그들이 제공해 준 연구자료는 너무나 놀라운 것이었어.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자료들은 한 번도 연구 논문이나 책으로 발표되지 않은 것들이었다네.”

안나는 융이 정신분석학 연구를 그만두기 전까지 그가 주창했던 이론들에 대해 많은 실망을 했었다. 융의 분석심리학 이론들은 아버지와 융이 처음 정신분석학 이론을 발표했을 때로 다시 회귀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융의 이론 중에서 다만 한 가지만큼은 이전 프로이트와 같이 융이 연구한 정신분석학 이론과는 완전히 다른 한 가지가 있었다.

“지크와 나는 인간의 정신은 모두 각자가 개별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전제하에 무의식 이론들을 만들어갔지. 그런데 곧바로 가장 원초적인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어.”

“각각이 모두 개별적으로 무의식에서 의식이 발생하는 과정을 겪지만, 성인이 되면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의식의 문제점이죠.”

안나도 융이 이야기하고 있는 그 문제점에 대해서 클라인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인간의 부모도 모두 다르고, 태어난 시기와 장소, 그리고 환경도 모두 다른데 왜 결과적으로 공통적인 의식과 무의식으로 구성된 인간의 마음이 구성되는 것일까?

“지크는 그것이 본능의 작용이라고 본 것이야. 획기적인 아이디어였지. 하지만 나는 그것만으로 이 세상 사람들의 마음이 결정된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어. 아니, 그걸 부정하고 싶었지.”

융은 이야기 하면 할수록 점점 두 눈에서 빛이 나기 시작하였다. 그 모습은 그의 젊은 시절, 밤낮을 잊고서 아버지 프로이트와 논쟁하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자네니까 하는 이야기이지만 인간의 정신이 본능으로 시작된다는 지크의 용기가 정말 부러웠지. 그리고 질투했어. 그것이 자네 아버지 곁을 떠나간 가장 큰 이유였어. 그리고 나도 지크의 곁을 떠나서 그만큼 새롭고 획기적인 이론들을 만들어 내고 싶었어.”

여기까지 이야기를 한 융은 또다시 잠깐 말을 멈춘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안나에게 자신을 따라오라는 손짓을 한다. 안나는 융을 따라서 거실을 떠나서 퀴스나흐트 본채로 넘어갔다. 융은 복도를 따라서 지하실로 내려가는 문 앞에 선다.

“하지만 나는 자네 아버지 발끝에도 다다를 수 없었지. 그리고 절망에 빠진 그때, 리차드가 내게 아까 전 그 책을 보여주었어. 그 책의 번역을 맡긴 마루두크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줬지.”

융은 이야기 하면서 지하실의 문을 열었다. 안쪽은 너무 어두워서 안나는 한 치 앞도 볼 수가 없었다. 융은 슬쩍 웃으면서 문 안쪽의 스위치를 켰다. 그러자 꽤나 넓은 회전계단 하나가 안나의 눈으로 들어왔다. 융은 계단으로 내려가라고 안나에게 손짓하고, 자신은 천천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리차드의 소개로 마루두크를 처음 만날 날을 나는 잊을 수가 없네. 그들은 내게 인간들의 정신세계가 이어져 있고, 그것을 맘대로 들락날락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이야기해주었지. 처음에는 그들이 미친 사람들이나 광신도라고 생각했어.”

처음에는 한층 정도 높이의 회전계단이라고 생각했었지만 그것은 안나의 완전한 착각이었다. 걸어도 걸어도 회전계단은 끝나지 않았다. 안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는 노령의 융이 괜찮은지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들이 자신들의 말을 증명하겠다고 건네준 연구자료들은 진짜였어. 하지만 진짜 놀라운 것은 그게 아니었지.”


이번에는 메리가 안나의 앞에 서서 회전계단을 내려갔다. 에레의 손까지 잡고 내려가기에 메리의 걸음이 자꾸 늦어졌다. 하지만 안나는 조용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천천히 회전계단을 내려갔다.

드디어 회전계단을 빠져나오자, 넓은 방 하나가 나왔다. 그 방 가운데에는 한 아이가 누워도 될 만큼 큰 나무 의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방의 4면에는 모두 이집트 상형문자가 그득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바닥에는 사각형과 원형, 그리고 삼각형으로 그려진 엄청나게 큰 문양이 있었고, 천장은 8각형이 몇 개가 엇갈려져 돔 천장을 구성하고 있었다.

거기까지 내려온 메리는 에레를 번쩍 들어서 가운데 있는 큰 나무 의자 위에 앉힌다.

“우리 에레, 정말 착한 아이구나. 이제 이 할머니랑 여기서 행복하게 사는 거다.”

메리는 에레를 꼭 껴안더니, 곧바로 의자 밑에서 금으로 만들어진 족쇄 하나를 꺼내서 그녀의 손목에 채운다. 족쇄에 채워졌지만 아직도 자신의 처지를 모르고 있는 에레슈키칼을 보면서 안나의 마음은 너무나 복잡해진다.

“난릴을 위해서 만든 감옥인데, 그녀의 딸이 이렇게 갇히게 되었네요. 정말 난릴이 죽은 것은 맞죠?”

안나는 에레슈키칼이 족쇄를 만지작거리면서 웃는 모습을 차마 보지 못하겠는지, 고개를 돌리고 대답한다.

“네. 그녀의 시체가 확보되었고, 지금 CIA가 최종 확인을 한 것으로 보고 받았어요.”

“그런데 정말 그녀를 죽이기 위해 핵까지 사용했나요?”

메리는 에리의 뺨을 쓰다듬으면서 안나에게 다시 질문한다.

“이미 당신들이 확인했잖아요. 그래서 그 장소를 열어준 거 아닌가요?”

메리는 안나에게 고개를 돌려 활짝 웃는다.


회전계단을 다 내려온 안나는 넓은 지하 공간 가운데에 아까 전 보았던 메리가 서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다.

“이 공간은 융 박사님이 저희의 계획을 들으시고, 만드신 공간입니다. 아마 전 세계에서 길가메시(Gilgamesh)를 막을 수 있는 곳은 이곳 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메리는 아까 전 홍차를 나르던 그 여성과는 완전히 달라 보였다. 안나는 어떻게 된 영문인지, 융을 돌아보았다.

“다시 소개하지, 내 제자이면서 마루두크의 장로인 사르파니투(Sarpanitu)이네.”


“안나 박사님이 세계를 구하셨네요. 그런데 이 아이의 쌍둥이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요?”

메리는 다시 에리를 쳐다보면서 안나에게 질문을 던진다.

“제가 마지막 본 것은 게리 벨이 그 아이를 데리고 있는 것이어요. 그 이후로는 제가 클로프가이스터 프로젝트에서 제외되어서 그 이후의 향방은 모르겠네요.”

“안타깝네요, 그 아이까지 여기 데려왔으면 정말로 지구 멸망의 위험을 완전하게 막을 수 있었을 텐데요. 아, 그 게리가 데리고 있는 아이의 이름은 뭐죠?”

“이난나요?”

“이 아이들 이름을 모두 수메르 신들의 이름에서 따왔나 보네요.”

메리는 이제 에리에게서 손을 떼고 안나 쪽으로 다가와 말을 건다.

“그 아이도 이름이 입에 쉽게 붙지 않네요. 앞으로 그 아이를 다시 만날 때까지 나나라고 불러야겠어요.”

나나라는 이름에 안나의 얼굴이 확 구겨진다.

“어머, 박사님의 애칭도 나나이지 않나요? 혹시 기분 나쁘신 것은 아니겠지요?”

안나는 메리의 등뒤에서 아직도 여기서 평생 갇혀 있어야 하는 것도 모르고 아직도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는 에레슈키칼의 얼굴을 얼핏 훔쳐보았다.

“앞으로 박사님이 하실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제 저희를 위해서 길가메시가 어떻게 인간의 의식을 파고 들어갈 수 있는지를 에레를 통해서 밝혀 주셔야 합니다. 믿습니다, 박사님.”

말을 마친 메리가 안나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한다. 안나는 다시 한번 에레슈키칼을 쳐다보고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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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난나 케이스:프로이트가 남긴 멸망의 유산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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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발경 NEW 4시간 전 0 0 15쪽
37 흡혈 24.09.13 2 0 13쪽
36 이대도강 24.09.06 5 0 13쪽
35 천년협객 24.08.30 4 0 20쪽
34 사투 24.08.23 5 0 15쪽
33 접촉 24.08.16 5 0 15쪽
32 재회 24.08.09 6 0 14쪽
31 탈출 24.08.02 8 0 12쪽
30 1971년, 런던 24.07.26 8 0 14쪽
29 한청검 24.07.19 7 0 15쪽
» 1969년, 취리히 24.07.12 7 0 20쪽
27 원수 24.07.05 8 0 10쪽
26 1967년, 데스밸리 24.06.28 10 0 14쪽
25 시험 24.06.21 8 0 16쪽
24 1965년, 네바다. 24.06.16 13 0 11쪽
23 반괘권 24.06.15 10 0 13쪽
22 1953년, 예일대 24.06.14 8 0 12쪽
21 복마전 24.06.14 7 0 9쪽
20 1941년, 클라인 24.06.13 11 0 16쪽
19 Gold Code 24.06.13 12 0 12쪽
18 1939년, 유혼 24.06.12 10 0 12쪽
17 통성명 24.06.12 11 0 10쪽
16 1909년, 영혼의 두드림 24.06.11 11 0 14쪽
15 탈출 24.06.11 9 0 11쪽
14 죽음의 행진 24.06.10 11 0 15쪽
13 비명 24.06.09 11 0 12쪽
12 격돌 24.06.08 14 0 13쪽
11 첫 만남 24.06.07 12 0 15쪽
10 맥도날드 24.06.07 10 0 19쪽
9 피지 않은 벚나무 24.06.06 11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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