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민왕의 쌀먹왕자에게 조선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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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고려가 힘을 숨김

DUMMY

24화.



며칠 후 늦은 밤.

모든 대신이 즉시 연경궁에 소집되었다.

그만큼 이날 전해진 소식은 시급했다.


“경들은 모두 나눠준 문서를 숙지했는가?”


오늘따라 눈썹 끝이 상당히 처진 공민왕.

그의 서릿발 같은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은 많지 않았다.


공민왕의 기세에 눌려서가 아니었다.

그들이 손에 쥔 소식의 무거움에 압도당해서였다.


“저, 전하······. 이것이 정녕 사실이······.”


추밀원사 유숙이 몸을 떨었다.

추밀원은 조선으로 치면 비서실인 승정원에 자문 역할까지 더한, 왕과 가장 밀접한 관청.

그곳에서 일하는 대신이 당황해 말을 더듬을 정도였다.


“······.”

“······.”


다른 대신들 사이에서도 침묵이 감돌았다.

적게는 10만, 많게는 20만이라는 적군의 규모에는 그만한 무게가 있었다.


안 그래도 엉망인 나라 꼴을 수습 시작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겨우 몸을 반쯤 일으켰는데 날아오는 강펀치 앞에 어떻게 긴장을 안 할 수 있겠는가.


“전하.”


하지만, 그 와중에 입을 여는 사람들이 있었다.

급히 소환령을 받고 각지에서 밤새 말을 달려 개경에 올라온 장수들이었다.


“말하라.”

“일단······ 기본적인 방위 계획부터라도 수립해야 할 게 아닌지······.”

“천운이 따라 접근하는 적을 이른 시기에 알았으니, 확보한 시간을 최대한 유리하게 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논의는 백지에서 진전되지 않는다.

곧 눈앞에서 피와 살을 튀기며 적을 마주해야 하는 무관들이었기에, 오히려 그들은 냉정을 빠르게 회복한 듯했다.


그렇게 연경궁의 정전에서는 장수들 사이에서 작은 격론이 벌어졌다.

옥좌 위에 앉은 공민왕은 조용히 그들 사이에서 오가는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었다.


“전하······.”


그때, 입을 다물고 있던 추밀원사 유숙이 앞으로 나섰다.


그의 뒤에는 상당한 수의 문신들이 모여 있었다.

장수들이 군략 회의에 들어간 사이, 그들도 따로 뜻을 모은 모양이었다.


“이만큼 막대한 규모의 적이라면······ 그······ 몽진을 고려해야 하지 않을지 사료되옵니다.”


몽진.

임금이 난리를 피해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는 일.

즉, 그들은 공민왕에게 개경을 버리고 안전한 후방으로 도망칠 것을 권하고 있었다.


뭐, 20만이라는 병력이 내려오고 있다는데, 그들의 의견도 일리는 있었다.

몽진이라는 게 하루이틀 준비해서 될 일이 아니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추밀원사 영공(令公=영감)!”


벼락같은 목소리가 실내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호랑이 눈을 부릅뜬 중년의 장수가 호통을 내지른 것이었다.


그는 왕좌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최초 보고자, 서북면병마사 최영이었다.

품계로 치면 하극상이 일어난 셈이었지만, 맹장의 기세에 눌려 유숙은 그걸 지적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싸우지도 않고 개경을 포기한다니!”

“하지만 병마사······! 20만일세! 자그마치 20만이란 말일세!”


요동에 몰려든 적군의 군세가 유숙 같은 문관에게도 용기를 불어넣은 모양이었다.

심약한 사람이라면 오줌을 지릴 법한 꼰꼰한 최영 앞에서, 그는 떨면서도 주장을 이어가고 있었다.


“병마사! 지금 전국의 군사를 긁어모아 봐도 20만은커녕 10만이나 되는가?”

“······.”

“게다가 그나마 협공이 가능한 동북면의 정병도 활용 불가능한 상황이 아닌가! 지금 동북면병마사 이성계는 어디에 있나!”


그러고 보니 장수들 사이에는 한 자리가 비어 있었다.

젊은 북부대공 이성계가 며칠 전 급히 동북면으로 떠난 탓이었다.

그 이유는 독로강 만호 박의가 일으킨 반란.

강계에서 일어나 그의 영지까지 번진 반란 때문에, 고려의 떠오르는 신성이 부재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몽진조차 논의하는 일을 막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병마사?”

“······.”


최영도 그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 자리에 있는 장수들 중 이십대 중반의 이성계를 가장 고평가하고 있는 건 바로 최영이었기에.

이성계와 이성계의 사병,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정예병인 가별초의 빈자리를 최영도 크게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40대인 최영은 대신들 중에서 젊은 축에 속했다.

당장 무관 중에서도 짬을 잔뜩 먹은 정세운, 안우, 이방실은 환갑이 넘지 않았던가.

그가 수없이 쳐들어오는 외적을 물리치고 고려의 수호신으로 등극하는 건 조금 뒤의 이야기.

충의만은 가득했지만, 아직 다수의 권신들을 홀로 상대하기엔 힘이 부족했던 것이다.


“하지만 유 원사.”


그때, 다른 묵직한 목소리가 유숙과 최영 사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정세운이었다.

그는 대도 툴루게 시절부터 공민왕을 호종해온 왕의 심복 중 심복.

그리고 유숙과 같은 추밀이자 상장군에 올라 있는 윗세대의 무관.


마지막으로.

2년 전 홍건적의 침입 때 서북면도순찰사를 맡아 총사령관직을 역임한 명장.


“적이 최대 20만에 달한다고 하나, 놈들은 근본적으로 농민 반란군. 정예병 20만이 아니오.”

“그렇지만 대부분이 정예병이 아닌 건 우리 고려군도 마찬가지지 않소!”

“하지만 적어도 놈들보다 군기와 질서는 꽉 잡혀 있소. 2년 전, 기해년에 쳐들어온 놈들은 그저 도적 떼에 불과했으니까.”

“그 도적 떼도 20만이면 능히 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는 법 아니오! 게다가 가장 정예한 동북의 병사마저 없는 상황에!”


하지만 정세운의 개입에도 유숙의 기세는 죽지 않았다.

아마 1:1로 논쟁을 벌였다면 진작 꺾이고도 남았을 것이었다만.

그러나, 뒤에 웅크리고 있는 다른 문신들의 기운이 유숙을 꺾이지 않게 하고 있었다.


“틀린 말은 아니오, 그러나.”


정세운도 그걸 아는 듯, 한 수 접어주는 듯한 모양새였다.

하지만, 그의 발언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우리 고려에는 이성계의 기병, 가별초 외에 유 원사가 잊고 있는 또 다른 정예병이 있지 않소?”

“······? 아.”

“지난번 기해년에 압록강을 넘어온 홍건적을 도륙 내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부대가 어디였소?”


정세운이 말한 건 2년 전, 4만의 홍건적이 쳐들어왔을 때였다.

원 역사대로였다면 서경, 그러니까 평양까지 밀리고 서북면이 초토화되었을 국가적 재앙.

하지만 고려는 청천강 이북에서 홍건적 무리를 격멸하고 국경 너머로 쫓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건 바로······.


“내, 내가 그걸 잊었을 것 같소?”

“그렇다면 지금 오가는 이야기에서 그걸 빼면 안 됐지. 그렇지 않소?”


입술을 비틀며 이죽거린 정세운이 옥좌와 최영 사이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 내가 서 있는 자리에.


“최 병마사.”

“예. 상장군.”


정세운이 짬에 밀려 입을 다물고 있던 최영의 말문을 틔웠다.

2년 전부터 쭉 서북면병마사를 맡고 있는 최영은 당시 정세운 아래에서 종군했었다.

아무래도 당시 최전선 지휘관의 증언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당시 청천강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홍건적의 주력을 박살 낼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이 무엇이었소?”

“그거야 당연히······.”


꿀꺽.

침을 한 번 삼킨 최영이 내 쪽을 힐끗 바라봤다.


“세자 저하께서 소장에게 편성해 주신 화총병(火銃兵) 일천이었습니다!”


물론 화총병 일천이라 해서 전부 총을 든 병력은 아니었다.

적이 근거리에 접근하면 방패 역할을 해줄 병사들까지 포함한 숫자였던 것이다.


그리고 숫자야 어쨌든, 그들의 활약이 눈부셨던 건 사실이었다.

최영에게서 기다리던 말이 나왔는지, 정세운이 입꼬리를 구겼다.


“그렇지.”

“소장이 지휘하는 정벌군은 안주성에 최종 방어선을 펴고 적의 군세를 요격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저하의 화총병이 합류한 후······!”


힘을 얻었는지, 최영은 다른 고관들 앞에서 당당하게 이야기를 펼치고 있었다.


그 뒤의 이야기는 안 봐도 뻔했다.

최영이 개선장군이 되어 개경에 들어온 날.

세자궁을 찾아와 내 두 손을 잡고 눈을 붉게 물들였던 그에게 수없이 들은 이야기였으니까.


물론, 적의 군세 4만에 비하면 1천의 병력은 작아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회전이 열리고 모루 역할을 하는 대병력끼리 맞붙어 싸우던 사이.

막대한 화력과 폭음으로 전세에 균열을 일으키는 1천은 결코 작은 숫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최영은 내 의도를 정확히 읽고 특공대 일천 명을 정확히 적재적소에 사용했다.

장사성의 난 건으로 중원에 파병되어 화약 무기를 겪어본 적이 있는 그였기에 할 수 있었던 일이기도 했다.

역시 훗날 고려 최후의 수호신으로 불릴 명장다웠다.


그 결과, 홍건적은 원 역사와 달리 청천강을 넘지 못했다.

그 전적이 있기에 지금 20만 대병력에 맞서 싸우자는 의견이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때였다.


“거기까지.”


왕이 움직였다.

용상 위에서 문신과 무신 사이 격한 논의를 지켜보기만 하던 공민왕이.


“내가 보건대 주전파와 몽진파가 나뉜 모양이군. 그렇지 않나?”

“그, 그렇사옵니다.”


유숙과 정세운, 모두가 공민왕이 움직이자 기를 펴지 못했다.


20만 대군이 쳐들어온다는 와중에도 얼굴빛 하나 바뀌지 않은 공민왕이었다.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성격이 지금은 오히려 좋았다.


거기에, 숙청 빔을 하도 쏴대다 보니 측근들이 왕의 손에 꽉 잡혀 있는 건 큰 장점이었달까.

물론, 훗날 그 부작용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어쨌든 지금은 그랬다.


“그런데, 내 눈에는 이렇게 보이더군. 경들은 지금 고려의 현실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어.”

“······!?”

“마치 맹인이 코끼리를 만지듯, 잘못된 상황 파악 아래 결론을 내리고 있단 말이다.”


공민왕의 날카로운 눈이 유숙을 향했다.


“유 원사.”

“예, 전하!”

“몽진파의 의견을 묻지. 병력에서 크게 열세인 것 외에, 또 다른 문제는 없는가?”


왕이 자신의 편을 들어주는 것이라 생각한 것일까.

표정이 밝아진 유숙이 뒤에 선 문신들과 금세 숙덕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의견이 모인 건 잠시 후였다.


“전하.”

“듣고 있다.”

“소신들의 못난 의견으로는······ 20만 적병과의 전투는 장기전으로 뻗칠 가능성이 높사옵니다.”

“근거는?”

“기해년의 사례를 볼 때, 적은 군기 없는 농민군에 가깝사옵니다. 때문에 개인의 약탈을 선호하여 진격 속도가 느리며······.”


병사 개인의 약탈 외에도 군의 보급까지 현지 약탈에 크게 의존하여, 속전속결에 응해주지 않을 것이란 이야기였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홍건적은 대륙에서도, 고려에서도 그렇게 움직였다.


“하지만 우리 고려의 방비 상황은 어떻사옵니까?”

“······.”

“전국에서 모은 병력을 단기간 운용할 역량은 충분하오나, 적이 시간을 제 편으로 삼아 느리게 움직인다면 큰 장애물이 생길 것이옵니다!”

“그 말은, 우리 군이 장기간 작전에 투입될 때 문제가 생길 것이란 이야기군.”


공민왕이 짚어준 핵심에, 유숙이 눈을 반짝 빛냈다.


“바로 그렇사옵니다, 전하!”

“그러한가?”

“지난 몇십 년간 요역을 투입하기 어려워, 서북의 최중요 거점, 서경성의 성벽부터 불안한 상황이옵니다. 그리고······!”

“······.”

“군량도 문제이옵니다! 고려 전역을 떠돌아다니는 유민은 셀 수 없고, 줄어든 세입은 채워진 적이 없었사옵니다! 방어전이 길어지면 병사들을 먹일 쌀부터 걱정되는 상황이 아니겠사옵니까!”


방어전의 제1원칙.

방어하는 측의 이점을 최대한 살려, 시간을 끌어 적을 지치게 한 후 싸운다.


하지만 고려는 그게 어려워 보이는 상황이었다.

길고 긴 원 강점기와 권문세족의 횡포, 선대 왕들의 무능함 때문에 기초체력부터 박살 난 상태였으니까.


물론 공민왕이 즉위한 지도 이제 10년.

그사이 어느 정도 국력이 수습된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왕은 신이 아니었다.

아무리 명군이라도 고작 10년의 시간으로 고려를 정상으로 돌려놓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하. 하하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실소가 연경궁의 정전, 천성전(天成殿)을 울렸다.

유숙에게 처참한 고려의 상황을 전해 듣던 공민왕이 웃음을 터뜨린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 웃음을?

정상인이라면 보이기 어려운 모습에, 신하 대부분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추밀원사가 파악한 우리 고려의 상황은 그러한가?”

“그렇사옵니다, 전하! 그러니 몽진까지 각오하고 남도의 병력과 군량을 전부 끌어모아 반격하실 준비를 하는 게 타당하옵······!”


유숙의 논리는 옳았다.

실제로 원 역사에서도 이 시기의 고려는 홍건적에게 개경을 함락당하니까.

아마 그때 공민왕과 노국공주를 모시고 안동으로 몽진한 사람이 그였으리라.


하지만.

그건 원 역사에서고.


“세자.”


입가를 구긴 공민왕이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왕의 눈썹이 논의 시작 전보다 위로 올라간 것이 보였다.


“추밀원사의 말로는 홍건의 무리를 막기에 서경성의 방어벽이 낡았고, 우리 군이 오래 싸울 군량이 부족하다는구나.”

“저 또한 들었습니다.”

“네 생각은 어떠하냐. 우리 고려의 상황이 그만큼 절망적이더냐?”


저, 저 성미 고약한 양반 같으니.

의견을 따르는 척 끝까지 들어주고는 마지막에 엿 먹이는 저 안 좋은 성격, 또 나왔다.


뭐, 다른 사람 눈에는 신하 의견 끝까지 들어주는 관용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나는 안다.

저 인간, 그럴 사람 아니다.

저러니까 원 역사에서 신하 갖고 놀고 숙청 빔 난사하다 반란도 맞고 그러지.


하지만 공민왕의 이런 인성 터진 모습이 마음에 안 들더라도.

지금은 왕의 장단에 맞춰주는 게 옳았다.


기가 막히게 지금 천성전 안 모두의 주의가 내게로 쏠리고 있지 않은가.

마치······ 왕이 의도한 것처럼.


“아니요. 소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곳곳에서 숨을 크게 삼키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제 내 말을 가볍게 넘기는 사람은 아마 고려에 한 명도 없을 터였다.

내가 그동안 고려와 대도에서 하고 다닌 비범한 짓거리 탓이었다.

뭐, 현대 기준으로는 그리 대단한 짓을 하고 다닌 것도 아니건만.


“하지만 전하, 추밀원사 유숙을 비롯한 문신들이 잘못된 판단을 내린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런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거늘.”


이 양반아.

지금까지 내가 빌드업 한 것들, 전부 꽁꽁 숨기게 해 놓고 그게 할 소리냐?


공민왕이 정보 격차를 이용해 신하들을 갖고 노는 걸 보며, 나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제가 옛 성인들에게 배우길, 다른 이가 잘못 익힌 것이 있다면 고쳐 배우게 하는 게 군자라고 들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정몽주가 진한 미소를 짓는 걸 보며, 나는 입가를 구겼다.


여기 낄 품계도 안 되는 주제에 내 보좌관으로 들어온 거면서.

그렇게 뿌듯한 표정 대놓고 짓지 말란 말이다.


“그렇다면 세자, 너는 어떻게 할 생각이지?”

“전하께서 이들 사이에서 대표자를 몇 뽑아주십시오.”

“무얼 위해서?”

“그야······.”


살짝 공민왕의 유도에 놀아난 느낌이었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이번 홍건적 방어전에 내 의견을 충분히 반영시키려면, 현실 운운하는 문신들의 어깨를 콱 눌러줄 필요가 있었으니까.


어쨌든 올려 주신 토스, 스파이크로 잘 받아먹겠습니다.


“이들에게 ‘진짜’ 고려의 상황을 보여주려 합니다. 논의는 그 뒤에 이어져야 하겠죠.”



**



뒤이어 논의 자리에서는 즉석으로 문신과 무신 대표의 선발이 이루어졌다.

조용히 논의를 지켜보던 공민왕이 미리 마음속에서 후보자를 골라 놓았지 싶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무박 2일의 강행군.

대표자들은 세자를 따라 목적지를 향해 쉼 없이 말을 달려야 했다.


목적지는 경기 일대, 세자가 관리하는 왕실의 사유지.

그리고, 세자가 본격적으로 움직인 직후부터 점찍어 놓았던 재령강 일대의 황무지.

백성들 사이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며 이미 알음알음 소문이 벌어지던 곳들이었다.

특히 후자의 경우는 마른하늘에 천둥이 친다는 소문으로 유명했다.

그리고······.


“세, 세상에······.”


대표자들은 그곳에서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들을 목도하고 말았다.


“추밀원사 유숙, 이제 생각이 좀 바뀔 것 같소?”

“세, 세자 저하······. 어떻게······?”


문신들을 대표해 몽진을 주장하던 유숙.

그도 세자가 보여준 광경 앞에서 말을 잇지 못했다.


왕실의 사유지마다 커다란 곡창이 없는 곳이 없었다.

그리고 그 곡창에는 빈 곳 하나 없이 빼곡하게 쌀가마가 들어차 있었던 것이다.


‘설마······. 그럼 왕실에서 경기, 서해도의 유민들을 지속적으로 거둘 수 있었던 이유가······.’


유숙이 듣기로는 왕실과 봉은사가 협력해 유민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줄만 알았는데.


유민(流民)이란 본디 떠돌며 식량을 구걸해 축낼 줄이나 아는 버러지들.

그러나 그런 버러지들이 왕실의 사유지에서는 훌륭한 농부가 되어 창고를 채우고 있었다.


하지만 놀라운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으악!”

“아이고······!!”


세자가 왜 이런 곳으로 데려가나 고개를 갸웃거려야 했던 재령강 인근의 황무지.

그곳에서는 생전 처음 보는 거대한 쇳덩이가 폭음을 쏟아내 문신들을 혼비백산하게 했다.


“어떻소? 이놈들을 이제 서경성 성벽 위에 올릴 생각이오만.”

“저하, 그 말씀은······.”


시간이 흐르고 겨우 진정된 문신들을 향해, 세자가 의기양양하게 물었다.


‘저것 또한 저하께서 만드신 물건이란 말인가······?’


황무지에 세워져 쾨쾨한 냄새를 흘리는 의미불명의 시설들.

그곳의 총책임자라는 최무선이라는 자가 세자를 보고 마치 절의 불상을 대하듯 하는 걸 보면 확실했다.


게다가 어린 나이에 이만큼 말을 탔는데도 지친 구석 하나 없는 세자를 보며, 유숙은 생각했다.

자랑스레 가슴을 내민 와중에 한쪽 입가를 교활하게 비틀고 만 세자의 표정.

그것은 확실히 유숙이 오랫동안 봐온 누군가를 닮아 있었다.


“이 정도면, 성벽에 의지해 20만 대군을 상대할 수 있지 않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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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33화. 포기하지 마라, 내가 널 포기하기 전까지 +17 24.09.05 5,028 195 19쪽
32 32화. 명군과 명장의 자질 +15 24.09.04 5,087 184 16쪽
31 31화. 넌 못 지나간다 +13 24.09.03 5,088 173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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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29화. 귀여운 세자의 서경 사수 쇼 +8 24.09.01 5,232 162 17쪽
28 28화. 폭풍전야 +11 24.08.31 5,245 162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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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26화. 여진해병 이지란과 기합찬 야만전사들 +15 24.08.29 5,397 170 14쪽
25 25화. 용의 피를 타고난 아이 +14 24.08.28 5,424 185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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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22화. 카사르테무르 +17 24.08.25 5,369 201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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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20화. 동심결(同心結) +18 24.08.23 5,461 195 13쪽
19 19화. 고려세자삼합과 황좌의 게임 +19 24.08.22 5,574 199 15쪽
18 18화. 천기누설 +18 24.08.21 5,572 205 13쪽
17 17화. K-상추쌈과 삼겹살 +13 24.08.20 5,764 188 14쪽
16 16화. 700년 전의 한류(韓流) +15 24.08.19 5,874 188 18쪽
15 15화. 큰 그림 그리기 +16 24.08.18 5,848 191 14쪽
14 14화. 화력고려의 태동 +15 24.08.17 6,001 206 15쪽
13 13화. 하, 총 마렵다 +14 24.08.16 5,974 200 13쪽
12 12화. 염전 인부 대식이 +15 24.08.15 6,040 232 14쪽
11 11화. (딸깍) +18 24.08.14 6,186 218 16쪽
10 10화. SSS급 유망주의 삶은 고달프다 +15 24.08.13 6,394 211 13쪽
9 9화. 수확물 두 배 이벤트 +17 24.08.12 6,629 221 18쪽
8 8화. 사기템 +17 24.08.11 6,625 242 12쪽
7 7화. 기적의 볍씨 +14 24.08.10 6,728 231 14쪽
6 6화. 연철의 연금술사 +13 24.08.09 6,834 226 17쪽
5 5화. 은이 필요해요. 아주 많이 +12 24.08.08 7,154 232 14쪽
4 4화. 동북 촌놈과 재능충 +16 24.08.07 7,796 238 17쪽
3 3화. 명마 고르기 +22 24.08.06 8,139 257 15쪽
2 2화.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혼혈왕자 +17 24.08.05 8,727 256 13쪽
1 1화. 고려에서도 쌀먹이 가능할까요 +36 24.08.05 9,685 255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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